소현세자의 죽음, 북학(北學) 대신 북벌(北伐)로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1637년 삼전도 굴욕의 항복의 상징으로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이제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세자가 9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세자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뛰어 넘어 북학의 싹이 그대로 잘렸다는 점에서 조선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소현세자, 그 의문의 죽음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국가의 공식 기록인 실록의 기록에서조차 의문투성이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많다.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날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
: 고운 빛깔의 빨간 흙)을 발라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모집하여 땅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 …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이 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6월 27일)
위의 기록에서는 소현세자가 청의 심양에 있을 당시 청나라 사람들과 무역을 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과 귀국 후 곧바로 죽은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세자의 죽음과 인조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 인조는 세자의 장례도 서둘러 마쳤고, 가장 중요한 후계 문제에 있어서도 특별한 결정을 내린다.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인조는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조차도 왕위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물려준 것만 보아도 인조의 조처는 파격적임이 분명하다. 소현세자는 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소현세자가 보낸 심양에서의 9년간의 생활에서 그 단서가 찾아진다.
심양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었던 세자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과 이어진 1637년 1월 삼전도에서의 굴욕은 이후 조선후기 정국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먼저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심양에 끌려가고 남녀노소를 포함한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청으로 잡혀갔다. 이제까지 오랑캐라고 인식하였던 청나라에 최고의 치욕을 당했다는 데서 자존심은 여지없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히 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즉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 소현세자가 있었다. 차기 대권주자인 왕세자가 이처럼 전향적인 생각을 하였던 것은 무척이나 주목된다.
부왕 인조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직접 목격했던 소현세자는 초기에는 반청 감정을 강하게 표시하였다. 그러나 심양 생활을 통하여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에 큰 자극을 받았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신생대국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던 청나라의 군사적인 측면과 함께 문화대국으로 성장해가는 잠재력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샬과 같은 선교사를 통하여 천주교뿐만 아니라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아담샬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도 서구 과학문명이 필요함을 절감하였으며, 서구 문명 수용에 개방적인 청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소현세자는 아담샬을 통해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지면서 조선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화포와 천리경 등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의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는 이제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했다. 1645년 9년 만의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을 때 세자의 귀국을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성한 세자는 이제 인조의 아들이 아니라 차기 국왕 후보였고 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내세우는 숭명반청(崇明反淸)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관료들 대부분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고,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현세자 가족의 비극적 종말과 북학의 좌절
소현세자가 죽은 후 왕의 자리는 아들이 아닌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어갔다. 인조와 소현세자가 갈등의 골은 인조가 소현세자 가족들마저 불신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야사의 기록에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 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이들 부자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소현세자는 청의 문물 수용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이러한 부분을 적극 실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심양에 갔던 부인 강씨는 이곳에서 많은 재물을 모으는 등 나름대로 새 시대에 눈뜬 세자빈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귀국 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현실에 부닥치자 세자빈 강씨는 인조에게 저항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의 침실로 달려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통곡하는가 하면, 맏며느리로서 국왕에게 올리는 조석 문안도 한때 중지해 버렸다. 분노한 인조는 강씨를 유폐시켰고 궁중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갈등의 끝은 세자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에 독이 든 사실이 발견되었다. 강빈은 결국 인조의 독살을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고 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명도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는 등 소현세자 일가는 그야말로 참혹한 화를 당했다.
심양에서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했던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 그리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역사.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갖는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사상적으로 북벌과 북학의 갈림길에 선 시기였다. 그 갈림길에서 북학 의지가 컸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 바로 그 북학(北學)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 소위 ‘북학파’들이 조선사상계의 중심에 다시 등장하기까지에는 100여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