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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영정을 쓰다 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 최영숙
25일 김종필 前 국무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 장례식이 열린 서울 현대아산병원과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 있는 선영(김해김씨 가족묘원)에 다녀왔다.
▲ 빈소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다 ⓒ 최영숙
김종필 前 국무총리 부인 박영옥 여사는 21일 오후 8시 43분 향년 86세로 한남동 순천향대학 병원에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군인 김 前 총리(89)와 딸 예리(64)씨, 아들 진(54)씨가 있다.
발인제는 오전 6시 30분 현대아산병원에서 있었다. 200여명의 유가족과 지인들이 참석했다.
▲ 현대아산병원에서 발인제를 드리다 ⓒ 최영숙
발인제가 끝나고 영구차와 대절버스 3 대의 운구행렬이 노제(路祭)를 지내기 위해 자택으로 향했다.
▲ 고 박영옥 여사 위폐와 사진으로 마지막으로 자택을 돌아보다. 남편이 바라보다. ⓒ 최영숙
박형규(86)대한민국헌정회 고문이 노제 축문을 읽었다.
“서기 2015년 을미 2월 25일 임신 아들 진은 삼가 훌륭하신 어머님 국무총리부인 고령박씨 영전에 아뢰나이다.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로 세월은 머물지 않고 덧없이 흘러 어느덧 발인하오니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아프옵나이다. 유택으로 가시는 길목에서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찾아 생전을 회고하시오니 단장의 비애를 느끼옵나이다. 이제는 이 세상과는 영원히 결별이시오니 애착을 털어버리시옵소서, 이에 슬픔을 삼키며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올리옵고 노제를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흠향하시옵소서.”
유가족들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김종필 전 총재는 집안을 돌고 나오는 부인의 위폐와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 정객의 모습이 아닌 64년을 동고동락한 아내를 떠나보내는 이제는 늙고 병든 남편은 야속하게 먼저 떠난 사진 속의 아내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64세의 딸이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반교리에 있는 선영(김해김씨 가족묘원)에 모인 마을 어른들 ⓒ 최영숙
노제를 지내고 동승했던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운구를 따르는 행렬이 대절버스 3대로도 모자라 가족들조차 뿔뿔이 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승용차로 안장식이 치러지는 부여 반교리로 갔다. 부여 반교리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논을 밀어 주차장을 만들어 놓고 선영으로 가는 길에는 박영옥 여사의 명복을 비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선영에 도착하니 마을 주민들이 따뜻한 차와 점심을 내놓았다. 어린 날 마을에서 보았던 장사를 지내던 날 모습들을 보는 듯했다.
마을 분들에게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故 박영옥 여사는 어떤 분이셨는지 물었다.
▲ 반교마을 담장길로 아름다운 반교리 마을 모습 ⓒ 최영숙
반교리에 사는 오갑신(72) 씨는 “어르신이 출마하고 그러시면 우리들이 많이 도와드렸다. 선거 운동할 때 음식하고 설거지 등 모든 일은 많이 도와드렸다. 여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뭉클했다. 명복을 빈다.”고 했다.
반교리 이장의 아내 전명자(48) 씨는 “장지에서 대접한 음식들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오고 마을 주민들은 봉사로 음식접대를 했다.”고 했다.
▲ 김종관(76) 씨 ⓒ 최영숙
김종관(76) 씨는 “집안 분이다. 군인시절부터 기억난다. 국회의원 할 때 마을 주민들이 투표할 때 모두 찍어줬다. 깔끔한 분이여서 정치만 열심히 했지. 그 양반 동네, 집안은 돌볼지 않았다.” 고 회고했다.
부여에서 온 김철우(75) 씨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 지역분이고 그분 사모님이 타계하셨다니까 한번 보고 싶어 뵈러왔다. 아쉬운 점이 많다. 그 분이 나이도 잡수셨지만 할 일도 많고 이렇게 인간은 이렇게 늙어지면 모든 것이 약해지고 그런 가해서 서글픈 생각이 많이 들었다."
▲ 오는 손님들에게 차 대접을 하는 마을 주민들 ⓒ 최영숙
이경자(55) 씨는 “보령이 고향이다. 사모님은 복지시설에서 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손잡아주고 고맙다고 인사하시고 그랬다.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고 왔다. 우리에게는 자랑이다.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가는데 고생하고 가셨구나. 싶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을 너무 좋게 해서 좋았다. 여자는 남편에게 사랑받은 것이 최고인데 모든 분들에게 대접받고 떠나셨다. 두 분의 정이 깊어서 총재님이 마음 깊이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졌다.”며 남겨진 분을 걱정했다.
▲ 반교리 마을 ⓒ 최영숙
박정현(53) 씨는 "집이 옆 동네 만수리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국무총리였다. 그때 기억이 74년 초등학교 5학년 때인데 한 번 성묘하러 왔다. 그러면 비포장 길을 먼지 폴폴 날리며 관용차가 50대 정도가 25km를 꼬리를 지어 오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보면서 친구들과 우리도 자라서 저 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크면 그렇게 성공하고 싶었다. 보기 드물게 정치사에 서예, 그림, 시, 음악을 직접 하는 분이다. 마지막 남은 선비 같은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산업화, 근대화도 했고 과도 있지만 공이 많다.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진보, 보수를 넘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군인이라 장군묘역으로 가도 되는데 고향으로 오신 것은 외산면에서 보면 고맙다.“고 했다.
▲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사람들 ⓒ 최영숙
김종필 전 총재와 함께 서예전을 했던 서예가 유원준(85) 씨는 “옛날에는 근조(謹弔)를 쓸 때 요즘처럼 조상할 조(弔)로 통일되게 쓰지 않고 남자는 활궁(弓)을 쓰고 여자는 수건 건(巾)을 써서 초상집에 가면 남자상인지 여자상인지 글 만 봐도 아는데 이제는 조상할 조(弔)로만 쓴다. 글씨 한자에도 의미가 있다. 이 내용을 지적하면 요즘은 인쇄되고 보편화되어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 소리를 한다는 자체가 깊은 내용을 모르는 것이다.“고 했다.
▲ 반교마을 돌담길 ⓒ 최영숙
마을 분들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반교마을 돌담길과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집이 있다며 꼭 들러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마을로 들어섰다.
▲ 장지로 오는 마을 분들 ⓒ 최영숙
어른 두 분이 안장식 준비를 하는 묘역 쪽으로 오고 있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등록문화재인 아름다운 돌담길들이 이어졌다.
▲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편안히 쉬는 작은집 이라는 뜻의 휴휴당 ⓒ 최영숙
마을 끝자락에는 편안히 쉬는 작은집이라는 뜻의 휴휴당이라고 이름 지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집이 있었다. 집 앞의 작은 개울과 어우러진 아름답고 작은 집이었다.
마을은 고 박영옥 여사의 장지에 모두 갔는지 텅 비어 있었다. 외지인이 마을을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짖지 않았다. 고요했다. 정겨운 마을 곁에 묘역이 있어서 망자들도 편안한 휴식을 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안장식 ⓒ 최영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火葬)을 마친 뒤 장례 행렬들은 오후 2시 30분 경 반교리 선영(김해김씨 가족묘원)에 도착했다. 묘역에는 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 눈물을 흘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 최영숙
산신제를 지내고 안장식을 했다. 아내를 먼저 보내는 전 김종필 국무총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내와의 작별 시간을 아주 오래도록 가졌다. 남편의 깊은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 조화들 ⓒ 최영숙
무덤에 모시고 마지막으로 지내는 반혼제 축문을 읽었다.
"서기2015년 을미 2월 25일 임신 아들 진은 삼가 훌륭하신 어머님 국무총리부인 고령박씨 영전에 아뢰나이다. 어머님의 육신은 무덤 속으로 들어 가셨사오나 혼령께서는 집안으로 돌아가시옵소서. 신주는 아지 조성하지 못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높으신 혼령께서는 혼백상자를 아직 그대로 모시오니 예대로 그에 의지하시옵소서."
오후 3시 20분 경 모든 일정이 끝났다. 점심도 거르고 온 유가족들과 손님들은 늦은 점심을 들었다.
▲ 발인제를 드리다 ⓒ 최영숙
김종필 전 국무총리 부인 고 박영옥 여사의 장례식을 기록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64년을 함께 살았던 부인을 떠나보내는 남편의 말없음에도 그 깊은 정을 느끼게 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슬픔과 시름에 잠긴 남편에게 깊은 존중을 받고 떠나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방송이나 신문에서 접한 각 당이 초당적으로 조의를 표하는 것을 보면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한 64년 동안 이분들이 이뤄놓은 시간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초등학교 어린 꼬마에게 나도 저렇게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심어줬던 젊은 날의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막상 마을과 집안에는 깔끔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인의 모습, 지역의 인물이기에 멀리에서 찾는 고향인심을 볼 수 있었다.
▲ 반혼제에서 아내에게 잔을 올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격식에 맞게 차려진 반혼제 상차림 ⓒ 최영숙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통 양반가의 장례의식을 보는 것 같은 예절이었다.
박형규(86) 대한민국헌정회 고문이 발인제 축문- 노제 축문- 산신제 축문- 반혼제 축문을 읽었다. 또한 상 위에 음식을 놓는 순서에서 상주와 유가족들의 자리까지 알려주었다. 기록을 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다.
▲ 고 박영옥 여사의 영정과 위폐 ⓒ 최영숙
고 박영옥 여사는 남편의 애끓는 사모와 자녀들의 깊은 슬픔, 마을 분들의 존경을 받고 이승을 떠났다.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망자에게 영원한 영면을 기원했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그 열정에 탄복합니다.
정말 최영숙샘 열정 대단하십니다. 사진 잘 찍는 것은 기본이구요. 역사의 현장에 찾아가시는 열정,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그 발걸음이 존경스럽습니다. ^^ 멋져요 ♥
저 역시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가는 저 길, 제대로 살다 가야 할텐데 싶습니다. 인간답게, 사람답게...
장례식을 가면 망자가 살았던 세월이 언뜻 보입니다. 망자가 이 생에서 머물던 삶의 제일 끝자락을 보는 것이기 때문일 듯합니다. 망자를 못 떠나보내고 사진을 쓰다듬고 망연자실 울던 늙은 남편의 모습이 오래도록 남습니다. 그 세월을 미루어 보는 듯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좀 더 너그럽게 살아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