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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Ⅰ
법보선원장 덕일 스님의 출가이야기 (2부)
켈리포니아 법보선원장
덕일스님 박사 논문
[불교교단 형성 전의 가르침 의족경]
미주현대불교 7월호와 8월호를 통해 남가주 법보선원의 선원장 덕일 스님과의 인터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첫 번째 회에서는 덕일 스님의 출가 이야기와 학승으로서 정진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이어서 두번째 회에서는
최근에 통과된 박사 논문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인터뷰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글 제니 김 (본지 취재 기자)
인터뷰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논문 요약’을 소개합니다.
불교 고층(高層) 경전 알타빠다Arthapada 에 나타난 교단화 되기 이전의 불교 전통들:
중국어 번역본 의족경(義足經)과 빨리어본 앗타까왁까 Atthakavagga의 비교 연구 및 완전 주석 번역 > 이 학위 논문은 빨리어 경전 앗타까왁까(Atthakavagga)와 3 세기 후반에중국어로 번역된 의족경(義足經, T198)을 비교 분석하여 불교가 교단이 만들어지기 전 아주 긴 형성기가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나타난 게송들은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것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교 교단이형성되기 전에 전래되었던 게송들과 불교 교단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온 게송들입니다. 이 논문은 교단 형성 이전의 게송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초기 작가들이 아직 뚜렷한 불교도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초기 교단화 과정에서 나온 게송들사이에는 모순된 다양한 종교적 가르침들이 논쟁 없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가알고 있는 체계화된 초기 불교의 가르침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논지를 펴기 위해서, 저는 이 경전에서 사용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표현하는 호칭들을 연구합니다. 또한, 이 경전과, 이 경전의 빨리어 논서들, 다른 게송으로 된 빨리어 경전들, 그리고 4부 니까야 등을 비교하며, 이 들에서 수집한 호칭에 관한 통계학적 데이터를 적극 활용합니다. 이 데이터에 따르면, 이 경전은 고대 인도의 다른 종교 전통에서 사용되는 호칭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가 불교 논서와4부 니까야에 포함된 다른 종류의 경전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교 전통 고유의 호칭들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증거들은 알타빠다(Arthapada)가 불교 초기에 유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논문은 이 시기를 ‘교단화되기 이전 상태의 다양한 불
교 전통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논지와 병행하여, 이 논문은 중국어 번역본 의족경과 그와 상응하는 빨리어 앗타까왁까의 게송들을 영어로 세심하게 번역하고 주석을 상세하게 달았습니다. 이 논문이 불교학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 주석 완역본입니다. 피. 비. 바빳(P. V. Bapat)이 1951년에 의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이래, 경전의 난해함과 그의 오역으로 인해 이후에 의족경에 대한 연구가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빳의 의족경 번역은 당시 학문적으로 주목받던 앗타까왁까를 더욱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바빳은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어휘나 글쓰기 관습에서 나오는 풍부한 뉘앙스를 알지 못해서, 자주 빨리어 경전의 뜻에 맞추어의족경을 너무 무리하게 해석했습니다. 알타빠다에 나오는 호칭들을 데이터에 기반하여 연구함으로써, 이 논문은 초기 인도 종교 전통들, 즉 자이나
교, 브라만교, 사명외도(Ajivaka)교 등에 대한 학문적연구를 더욱 활성화시킬 잠재력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초기 불교’ 이전에 불교가 긴 형성기를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통들도 자신의 종교 전통에 대한 자의식이 부족한 상태의 긴 형성기를 거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추가적으로, 이 논문은 더 넓은 종교 역사 분야, 특히 한 종교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분야의 연구를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논문은 불교학을 넘어서 한 종교가 형성되어 교단화되는 과정에 대한 인문학적인 이해를 깊고 넓게 만들 것입니다.
기 자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는 2009년 스리랑카 유학을 시작
하신 후, 2024년 UCLA에 계시는 현재까지 지난 15년간의 긴 학문적 여정의 결실일 것입니다. 내용 면에서는 272,000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650여 페이지에 걸쳐 펼쳐내셨고, <의족경>에 담긴 수수께끼 같은 302개의 한역 게송들과 210개의 팔리어 게송들을 꼼꼼하게 주석하며 유려한 영문으로 번역하신 놀라운 작업이었습니다. (덕일 스님은 이 논문을 먼저 학술 연구용으로, 그 후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영문과 한국어로 출판할 계획이다.)
기 자 먼저 <의족경義足經, T198>을 고대 인도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지겸(支謙)은 어떤 분이며, 번역 당시 어떤 시대적 상황이었는지 설명 부탁 드립니다.
덕일스님 지겸(支謙)은 월지국(月支國) 이민자의 3세로, 중국에서 태어나 3 세기 경 중국의 불교 역경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월지국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신장 위구르의 서쪽지역에서 번성하던 유목 민족으로 실크로드 무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불교를 중국에 전파했습니다. 지겸 이전의 세대는 주로 서역 출신 이민자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서역에서 고승들을 모셔와서 법문을 하고 불교경전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역경에서는 중국화 되지 않은 실험적인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이전 세대와는 달리, 지겸은 충분히 중국화된 월지족 후손으로 서역 말들 뿐 아니라 한문에도 조예가 깊어서 불교의 중국화에 가장 적합한 분이었고, 이런 면에서 중국 역경사에 흐름을 바꾼 인물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처음에 이전 역경가인 지루가참의 문하에서 중국어 윤문을 주로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위, 촉, 오가 치열하게 경쟁하던 삼국 시대에, 오(吳)나라로 건너가 자신만의 번역도 많이 하였습니다.
지겸을 보면서, 저는 한국불교가 미국에 정착해 가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초기 이민 세대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불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에서 고승들을 모셔와 법문을 듣고, 관련 경전을 번역하며 스님들의 글을 출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나 3세 한인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미국화된 표현으로 더 유려하고 풍부하게 번역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대 변화를 거쳐 한국불교의 미국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 자 지겸이 번역한 의족경은 어떤 경전이며, 이 경의 핵심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덕일스님 의족경은 초기 아함부에, 혹은 신수대장경에 의하면 본연부에 분류된 경전으로서, 대승권 경전들처럼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지는 못했지만, 이와 대응되는 빨리어 경전의 중요성을 설명함으로써 그 가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빨리어 앗타까왁까(Atthakavagga)에 나오는 210 개의 게송이 거의 모두 의족경 302 개의 게송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빨리어 니까야 중에는 아주 이색적인 경전이 있는데, 이는 숫따니빠따의 네번째 품에 해당하는 앗타까왁까(Atthakavagga)입니다. 이 빨리어 경전은 베다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어휘와 어법들이 즐비하고, 이 경의 주석서인 마하닛데사(Mahaniddesa)조차 빨리어 경전류에 포함된다는 점, 그리고 율장과 경장 곳곳에 앗타까왁까를 외우는 중요성과 공덕을 부처님께서 역설하시는 장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여러 면에서 불교에서 가장 고층(古層) 경전이자 초기 교단 내에서 수지독송되던 경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앗타까왁까는 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체계화된 불교 가르침과는 결이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떠한 견해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은 표면적으로 니까야/아함경에서 강조하는 팔정도의 ‘바른 견해’마저 부정하는 듯하게 보여, 19세기 말부터 학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불멸 후 수백 년이 지난 때 나타난 용수보살과 중관학파들의 원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앗타까왁까에는 체계화된 불교의 가르침—예를 들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세존’, ‘여래’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고, 대신 ‘바라문’, ‘성자’, 혹은 ‘지혜로운 이’ 등의 호칭으로 이상적인 인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경전들이 교리가 체계화되지 않고 불교도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았던 불교의 초기 형성기의 한 단면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경은 견해에 대한 집착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얕보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논쟁의 무익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욕망 없이, 집착 없이 사는 자유로움을 노래하며, 거대한 관념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격언류의 실용적인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앗타까왁까의 한역본인 ‘의족경’은 중국에서는 그렇게 유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족경 한역 이후에 지금까지 이 경전이 재번역되거나 이에 대한 주석서, 이본, 필사본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후에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는 금강경을 위시한 많은 대승 경전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이죠. 하지만, 이 경전은 빨리어 앗타까왁까의 한역본으로서 불교가 정형화되기 이전의 불교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텍스트로 볼 수 있습니다.
기 자 스님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의족경’을 만나게 되셨나요? 이 경전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야겠
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덕일스님 저는 출가 후 13년이 지난 2009년, 부처님의 원음을 찾기 위해 스리랑카로 유학을 떠나 고대 인도어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의족경'을 만나게 되었죠. 처음에는 빨리어 '앗타까왁까'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경전이 니까야 경전에 나오는 정형화된 가르침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이 경전에 대응하는 한역본인 ‘의족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951년에 인도의 학자 바빳(Bapat)에 의해 시도된 영문 번역이 오역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 학자인 바빳은 어려운 한문 게송을 깊게 분석하지 못했으며, 많은 경우 그냥 빨리어 ‘앗타까왁까’에서 대응하는 게송들에 맞추어서 거의 창작하듯이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번역 이후에도 ‘의족경’은 불교학에서 거의 연구 되지 않고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의족경’을 완전히 새롭게 주석하고 번역하는 것이 불교학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긴 여정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빨리어 ‘앗타까왁까’는 학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은 경전으로, 제 이전에도 많은 유명한 학자들이 이 빨리어 경전을 연구하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전과 ‘의족경’을 비교 연구하기 위해서는 선학들의 깊이 있는 연구를 모두 소화해 내고 제 나름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준비 과정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제시한 논지도 매우 도전적이었지만,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 작업은 ‘의족경’과 ‘앗타까왁까’의 완전한 주석 번역이었습니다. 저는 제 논문과 번역으로 후학들이 불교 형성기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유용한 플랫폼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완역 작업 중에, 바빳이 왜 오역을 했는지, 그리고 지겸이 의도한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저는 한역 불경과 중국 고전에서 해당 용례를 찾아 하나하나 고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작업은 긴 시간을 요구했고, 결국 박사 과정을 9년 만에 마무리하면서 총 650여 페이지, 272,000자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춘추, 사기, 한비자 등 중국 고전들을 연구하며 그 용례들을 찾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저는 그동안 다른 학자들이 다루지 못했던 저만의 전문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기 자 말씀하신 대로, 책으로 출판된 논문이 매우 두껍고 방대하며, 상세한 주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님께서 논문을 통해 밝히고자 하셨던 주요 논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덕일스님 제 논문에서는 니까야 혹은 아함경으로 알려진 초기 불교 경전들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지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불교도로서의 정체성도 서서히 형성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로, ‘의족경’과 ‘앗타까왁까’의 게송들에서 ‘부처님(Buddha)’, ‘여래(Tathagata)’, ‘세존(Bhagavant)’과 같은 전통적 불교 호칭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대신, 이들 경전에서는 ‘브라흐마나 ’(Brahmana, 바라문 ), ‘성자’(Muni), ‘현자’(Dhira)와 같은 용어들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이 경전들을 작성한 사람들이 불교도라는 자의식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높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마하닛데사’, ‘빠라맛타조띠까’(Paramatthajotika)와 같은 앗타까왁까의 주석서들, 그리고 법구경, 장로게, 장로니게 등의 게송류의 빨리 경전들, 그리고 4부 니까야 등의 산문 위주의 빨리어 경전들과의 비교 분석을 수행했습니다. 제 논문에서는 호칭의 데이터 분석을 통해 초기 불교에서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상세히 논의합니다.
기 자 스님께서 말씀하신 초기 불교 이전에 존재했던 긴 불교 형성기에 대한 논지는 매우 흥미롭습
니다. 이러한 논지가 현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화두를 던질 수 있을까요?
덕일스님 좋은 질문입니다. 저는 스님으로서 이 논문을 쓰면서 불교 공부와 신행 활동에도 ‘역사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앗타까왁까’와 ‘의족경’에 나타난 호칭들을 연구하면서 불교의 긴 형성기를 다루었고, 이 과정이 율장이나 스리랑카 연대기에 기록된 ‘1차 결집’ 이야기에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6개월이 지난 뒤 가섭 존자의 주도로 1차 결집이 이루어졌으며,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여 전달함으로써 경장(아함경/니까야)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결집된 내용은 변함없이 2500년 동안 전승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연구한 경전들은 불교의 긴 형성기를 증명하며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줍니다. 불교 전통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많은 가르침과 전통들이 먼저 존재했으며, 후대에 정치적, 경제적 후원을 받는 종교 집단들이 다른 종교집단과의 경쟁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며 전해 내려오던 가르침들을 재구성하고 체계화하여 기억하고 전승해 나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일반적인 종교의 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은 우리가 특정한 전통들, 예를 들면, 빨리어 전통, 대승의 여러 전통들, 후대의 당송 시대 중국에서 발전한 선종, 또는 정토 신앙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전통들 중 하나를 절대화하고 국집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빨리어 전통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불자들 사이에는 빨리어 경전이 한참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한문 경전에 익숙한 불자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문과는 달리, 인도어는 조사와 시제가 발달하여 말이 명확해서, 빨리어로 된 부처님의 가르침은 관념적이거나 애매모호한 경우가 적습니다. 그래서 빨리어 경전의 번역은 한국불교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빨리어가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언어고 빨리어 경전만이 부처님의 육성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는 견해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빨리어는 인도 중서부의 언어로, 부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갠지즈 강 하류의 언어인 알다-마가디어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제 논문은 어느 한 전통을 절대시하지 않고, 인문학적 입장에서 현대인에게 어떤 유용함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그들의 장점을 선택하게 하여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요컨대, 역사적인 안목은 불교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다양한 시대와 문화 속에서 발전한 불교의 여러 형태를 이해하고, 한 문화나 전통에 고착되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불교를 실용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불교가 긴 세월 동안 다양한 문화와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해하면,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불교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변화된 환경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어떤 것들을 적응시켜야 할지를 아는 것이 불교의 미래를 열어갈 열쇠입니다. 21세기 들어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점점 탈종교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전통 불교는 많은 도전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 불교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고 있고, 젊은 층의 유입도 감소하면서 사찰의 신행 활동 인구가 노령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 불교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불교를 역사적인 안목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현대에 불교가 다시 활력을 얻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단순한 믿음에 기반한 종교 생활은 점차 위축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더 합리적인 접근을 요구하며, 종교인들도 이에 맞춰 종교관을 더 합리적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역사적인 맥락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까야/ 아함경의 가르침은 브라만교가 번성하던 당시 인도의 배경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브라만교 사제들은 신들을 찬미하는 베다 게송들을 외우며, 신자들에게 물질적 복을 기도했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기보다는 불필요한 욕망을 버리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을 권했습니다. 이 원칙은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유용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다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건강과 행복을 해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이들에게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소 놓쳤던 작은 행복을 찾아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불교의 연기법을 숙명론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 우리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메세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이 가진 비슷한 패턴으로 고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여 이러한 패턴을 발견하고, 원인을 찾아 제거함으로써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기 자 끝으로 길었던 박사과정을 뚝심 있게 마치신 소감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덕일스님 제가 이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목표점만 바라보고 마음만 앞섰더라면 9년 동안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제가 어려움 없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제가 이 일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한문 게송들 속에 지겸의 숨겨진 의도를 발견할 때마다 저는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희열을 느끼곤 했습니다. 가끔씩 ‘내가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나?’ 하며, 서구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불교 소재를 찾아 빠르게 박사 학위를 받고 싶었던 유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15년 전에 발원한 ‘부처님의 원음’을 찾는 길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지금 저에게 의미 있고 지금 시대에 잠재력이 큰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 자 덕일 스님이 오랫동안 연구한 결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논문도 조만간 책으로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덕일 스님과의 인터뷰를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날짜: 2024. 5. 15/17.
장소: OC 법보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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