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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대합실을 빠져나와 개찰구를 통과해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플랫폼이다. 그곳에는 언제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수많은 승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열차를 기다린다. 필자도 그들과 섞여 서성이고 있지만 바로 그곳에는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매점 하나가 있다. 바로 ‘Story way’다. 영문자로 돼 있는 이 현판은 마음껏 멋을 낸 자형(字型)과 붉은색 디자인을 뽐내며 플랫폼에 잠시 머무는 승객들을 유혹한다.
전에는 ‘홍익회’라는 이름의 매점이 지금은 스토리웨이가 되어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그곳에는 과자·커피·어묵 등 각종 인스턴트 식품이 진열돼 있다. 필자는 오늘도 그곳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지금 필자는 홍익회에서 따끈한 우동을 팔던 그 시절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가슴을 에는 듯 파고드는 것은 스토리웨이라는 이니셜화한 영문자다. ‘파발마’나 ‘버들아씨 가게’, ‘보부상’ 등의 상호로 대치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지금 ‘금강칼럼’이란 이름으로 쓰고 있는 필자의 짧은 글 속에도 외래어 투성이니 할 말은 없다.
세상 이치가 다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줄기를 타고 흘러가게 돼 있고 문화 현상도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수천 년을 한자문화권에서 살아온 탓에 본래의 우리말은 거의 사라지고 한자어로 대체된 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로 인해 건설·패션 분야에는 아직도 일본어 잔재가 남아있다지만 지금은 점점 영어 등 다른 외래어의 홍수 속으로 흡수돼 가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교육계나 학계, 아니 국가 차원에서도 ‘국어사랑 나라사랑’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모국어에 민족혼을 담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화에 떠밀려서인지 그 누구도 우리의 곱고 아름다운 말을 살려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우리글·우리말에 대해선 마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꽉 다물고 있다. 영어 아니면 대안이 없다는 식이다.
거리에 나서거나 백화점에 들르면 국적 불명의 외래어 현판, 상호가 즐비하다. 알 수 없는 외국말로 된 상호를 끌어들여야 뭔가 있는 것 같고, 수준이 높은 브랜드인 것처럼 포장되기 때문에 매출이 신장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화적인 사대주의다. 언어뿐 아니라 아주 많은 내것을 다 내던지고 미국풍, 프랑스풍, 이태리풍이 자리잡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뿐 아니라 종교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동안 시대가 변하면서 불교가 판을 치고, 유교가 흥하더니, 지금은 개신교나 천주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종교적 신앙이 생활화돼 선한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따뜻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종교화돼 남의 나라 종교에 미쳐버린 세상이 됐다. 종교적 이기주의에 빠져 집단화하고, 남을 배척하고, 교회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구원파라는 이름의 종교 현상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 것은 점점 사라지고, 자기정체성을 버린 채로 남의 것에 춤추는 허깨비 세상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도, 종교도, 학문도 남의 것이 판치는 세태를 바라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누구는 외래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게 우리의 강점이며 그 유연성으로 휘어질듯 부러질듯하면서도 지금까지 지탱해왔고, 지금은 단군 이래 최대의 부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맞는 것인지 검증해보진 않았지만 오늘 따라 스토리웨이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맛이 쓰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정을 막 시작하려는 필자의 마음을 그나마 청정하게 해주려는지 시월의 하늘은 그저 높푸르기만 하다.
첫댓글 청송님, 감사 또 감사합니다.
시사성을 던지다고 쓴 글이나 보잘 것 없는 칼럼입니다.
더욱 사랑해주십시요.
카페지기님의 칼럼 잘 읽었습니다.
저는 자주 올려주시는 칼럼을 읽는데 많은 시사점을 느낍니다.
칼럼을 잘 쓰셔서 마음에 들구요.
제글을 읽는 모든 분과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