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부채는 크게 태극선(太極扇)과 합죽선(合竹扇)으로 나누어진다. 부채의 재료가 대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고,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는 도구가 부채에서 선풍기로, 다시 에어컨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어오면서도 태극선과 합죽선의 전통적 가치는 꾸준히 인정받는다. 비록 그 둘이 더위를 식히는 기능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고 말이다.
올림픽 때가 되면 태극선을 흔들며 입장하는 우리 대표팀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전통가락을 하는 이들의 소품 중에 부채가 있다. 그것은 실제 노래와 악과는 무관한 듯 보이지만, 가락의 연결 과정에서 노래하는 이가 폈다 접었다 하면서 마치 악기의 일부처럼 쓰인다. 여기서의 부채는 합죽선인데, 원래의 기능이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연연히 이어오는 몇 안 되는 사례라 하겠다.
대나무를 붙여 만든 부채라는 말 그대로의 합죽선은 전주 지방 전래의 특산품이며 조선시대에는 진상품(進上品)의 하나로 그 명성이 놓았다. 합죽선 제조를 위해 전주감영은 선자방(扇子膀)이라는 부속기관을 따로 두었다. 단오절에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부채도 바로 이 합죽선이었던 바, 이름하여 단오선(端午扇)이라 하였다.
합죽선은 현재 전통상품의 하나로 명맥을 이어온다. 비록 그것이 부채이긴 하지만 과거 진상품이나 단오선 이라는 점에서 전래로 부채의 본래 기능은 상층 양반계급에 한정되었다. 굳이 그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합죽선은 지금도 고급 문화상품의 가치를 지닌다. 과거 상층사회의 하절기 피서용품인 합죽선은 오늘날 전통예술미가 깃든 전통공예품으로 만들어지고 판매된다. 전통물품에 관심이 있는 호사가뿐 아니라 품격 있는 선물로써도 환영받아 서울, 부산, 광주, 목포 등지의 화랑 가에서 주문을 받고 있다. 다만 합죽선의 원래 기능 중 그 면모를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앞서 말한 노래하는 이들의 도구로 쓰여지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합죽선의 외양이 우아한 여체의 아름다운 자태를 띠고 있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이기동 선생의 말에 따르면 합죽선은 고려시대 한 대사에서 유래한다. 출가한 후에도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한 수양이 덜 된 대사가 외로운 수행 중의 노리개 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합죽선을 접어 둔 모양이 여자의 육체와 흡사한 것은 대사가 기녀를 염두에 두고 손으로 가지고 놀 것을 생각한 것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손잡이 부분은 머리이며 양쪽으로 연결된 고리는 비녀를 뜻하고, 그 다음은 가슴 부분이며 아래로 둥그스레 흰 부분은 치마를 의미한다. 그리고 합죽선에 인두로 새겨 넣는 무늬는 박쥐, 국화와 쪽매화가 있다. 박쥐무늬가 뜻하는 것은 박쥐의 활동이 밤이듯이 남녀가 눈이 맞으면 밤에 만난다는 것이고, 국화는 서리 올 때 피어 눈을 맞으며 지는 꽃으로 여자의 절개를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쪽매화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기동씨가 소장한 약 250여 년 전의 합죽선에 쪽매화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역사를 지닌 셈이다.
합죽선의 선자장(扇子匠)으로 지정된 이기동(李基東. 65) 선생과 나태용(羅泰龍. 62) 선생은 부채 만들기에 평생을 보내신 분들이다. 비록 늦게나마(1993년) 이들의 전통문화 전승의 공로가 인정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제 때늦은(?) 영예를 가지고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지만, 환갑을 넘긴 두 선생의 면면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전통의 공예기술을 지켜온 모습이 역력하다.
이기동 선생은 대물림한 장인은 아니지만 약관의 나이에 합죽선과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부채와 함께 한 인생을 살고 잇다. 전남 장성군 부기면 백암리에 고향을 둔 이 선생은 젊어서 증산교에 심취하였던 것이 합죽선 장인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19살이 되던 해 증산교 스승인 백정기씨로부터 후에 합죽선의 스승이 된 배규남씨를 소개받아 그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오늘에 이른다. 처음에는 그것이 평생의 직업인지 망설여져 서너 차례 들락거리며 방황의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은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20여 년간 그야말로 '근근히 먹고살던 시절'이었다. 다행한 것은 1971년 전북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아 전북 관광민예품의 하나로 합죽선이 정해지고, 나아가 전국 단위의 전승공예전에 출품, 수상하여 합죽선과 같은 전통 공예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선생의 천직은 새로운 기운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경연대회가 전통공예에 종사하는 이들의 생계문제에 숨통을 틔운 것이다. 1991년에는 명장(名將)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실 공히 전통장인의 자격을 인정받았다. 그의 작업장은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있는 '전주공예품협업화 단지'안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그이 장남 이신입(李信立. 36)씨가 선생의 대를 물려받고 있으며, 그의 사위인 한경치(韓京致. 42)씨도 그에게 배워 지금은 독립함으로써 집안 모두가 합죽선 전승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대사회 전통문화의 전승과정은 우리에게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전통문화의 단지 외형적, 미적 가치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막연한 감상이나 자부심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관심이 요구된다 하겠다. 보존가치가 있는 전통문화는 그것이 유형문화재든 무형문화재든 지정의 문제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한 단계 높은 차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전통장인의 맥락에서 본다면, 특히 그것이 생계와 직결된 직접 종사자의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생활양식이 변하면 그에 따른 문화변동은 필연적이고, 즉 전통적 생활 맥락에 맞게 기능 하던 과거의 문화요소는 이 과정에서 소멸되거나 변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이상 오늘날 생활맥락에서 살아 있는 문화요소가 아니고, 따라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부여하는 한, 전통 업에 생계를 건 종사자들, 즉 전통장인의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모두의 문제로 이제 보호받아야 할 입장이란 점이다. 이 문화변동의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소산에 생명을 불어넣게 하는 책무가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소임으로서 그 당위성이 여기에서 찾아진다. 비록 현대적으로 확인된 오늘의 문화가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 할 지라도 그 원류는 전통문화에서 찾아지고, 이 점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화정체성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합죽선 선자장 나태용 선생(전북무형문화재10호)은 삼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전통장인이다. 그의 집이자 작업장이 소재한 전주시 우아동 석소마을은 본래 그의 고향으로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 석소마을이었다. 7남매 중 5형제가 모두 아버지(나학천. 작고)에게 부채 만드는 일을 배웠고, 해방 후 국민학교를 중퇴한 그도 13살 때부터 아버지와 형들 밑에서 이 일을 배우게 되었다.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형들은 전부 살대 만드는 일을 하니 막둥이는 도배를 하라'고 하셔서 선친의 친구이며 부채 도배 전문가이셨던 남궁선 선생(작고, 당시 전주시 인후동 모래내 거주)께 도배기술을 20세까지 배웠고, 그후 결혼과 함께 독립하여 도배 일을 전업 적으로 하게 되었다. 현재는 그의 아들 나길동(26)씨가 후계자가 되어 선대의 업을 4대째 이어간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 선생은 부채 만드는 과정의 한지 붙이는 일에 전문장인으로 지정되게 된다. 부채살 만드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굳이 도배작업에 한정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우리나라의 인간문화재 지정의 규정에 준 한다. 국가나 도 단위 지방자치단체에서 정하는 무형문화재가 특정한 전통문화 분야에 한 명의 장인을 지정하는 것은 그 전문성을 보다 높이 평가하자는 원칙에서 정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전통문화에 여러 명의 장인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은 그 분야의 전통문화계승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위험을 안게 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사실은 해당 개인에게 부수적 혜택이나 효과가 따른다. 전승 지원금은 무시하더라도 예컨대 그의 제품이나 작품의 문화재적 가치 인정으로 말미암아 가격경쟁력이 확보된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주어진 명예가 그 분야에서 일인자적 권위를 공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야의 다른 종사자들과 거리를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해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 되지 못했다는 잡음이 일게 된다 '줄(백)이나 금전관계 또는 중간매개자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개개인의 불만들이 전통문화 전승의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는 잠재한다. 보다 큰 차원에서 볼 때, 전통문화 전승의 특수화는 가능할지언정 그 자체가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처럼 도제수업과정 후에 장인의 자격을 갖는 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한 분야 다수 장인을 공인하는 제도 마련은 특정한 전통문화 분야의 육성을 위해 시급한 과제로 볼 수 있다
합죽선의 주재료인 대나무는 전남 구례지방에서 조달된다. 현재는 죽상(竹商)을 통해 대나무를 공급받지만 과거에는 만드는 사람이 현지에 가서 직접 대를 잘라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변죽'이라 불리는 부채의 양끝에 쓰는 대나무는 그 마디가 촘촘하고 대의 두께가 굵은 재료를 사용한다. 이러한 종류의 대나무는 경남 진주나 거제도 지방에서 구할 수 있고, 이 재료는 현재까지도 직접 가서 구해온다.
부채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대나무는 다음과 같은 정련 작업을 거친다. 대나무는 마디를 기준으로 적당한 길이로 잘라 진을 빼기 위하여 양잿물에 삶은 후 열흘 정도 햇볕을 쪼여 바래게 한다. 그 다음 사나흘 동안 물에 담궜다가 다시 물에 삶아낸다. 그래야 대나무의 초록빛이 없어지고 뽀오얀 빛을 띤 고운 색이 나타난다. 이것을 다시 산 속에서 흐르는 물에 대엿새 동안 담구어 불린다.
합죽선은 부채살의 수에 따라 5살 간격으로 10살 부채에서 50살 부채까지 종류가 다양하지만 30살, 35살, 40살 부채의 제작이 주가 된다. 예전의 부채 만드는 일은 작업의 과정에 따라 전문성을 가진 골선방, 낙죽방, 광방, 사북방, 도배방, 그림방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정련된 대나무를 가지고 부채를 만드는 작업의 전문적 분업과정은 다음과 같다.
골선방
⸡ 정련 공정을 거친 대나무는 겉대작업을 하는데 대의 속을 칼로 도려내면 부채살이 되는 겉대가 된다. 불린
대나무를 '방목'이라 불리는 나무 도마에 올려놓고 여러 종류의 칼로써 대 속을 깎아낸다. 이 작업을 부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만큼 작업의 정교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40살 짜리 부채의 경우 양쪽 끝의 마디가 촘촘하고 두께가 두터운 두 변죽을 제외하고 38개의 살대를 76개의 겉대로 만든다. 즉 두 개의 겉대를 붙여 하나의 살대를 만드는데, 하나를 장살(또는 장시) 다른 하나를 도막살(내시)이라 한다. 도막살은 장살의 반정도의 길이만큼 잘라서 붙인다. 도막살 쪽은 후에 한지를 붙이는 곳으로 장살 겉대의 속을 파낸 부분은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대를 붙이는 재료는 현재 아교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재료는 민어 부레나 민어 뼈를 삶아 만든 풀을 썼다고 한다. 풀칠한 살대 서른 여덟 개는 함께 묶어 하루 동안 방안에서 말린다.
⸣ 변죽용 대의 손잡이 부분은 손잡이 길이만큼 대를 깎아내고 '수취목' 이라는 참나무 깎은 것을 붙인다. 이는 참나무를 시궁창에 담궈 묵힌 것으로 그 색이 검다. 그리고 이 수취목에 원래는 소다리 뼈 깎은 것을 붙였으나, 요즘은 플라스틱 제품을 쓴다.
낙죽방
⸤ 변죽과 살대에 인두로 무늬를 새기는데 이를 '낙죽'이라 칭한다. 무늬의 대상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박쥐, 매화, 국화가 된다.
광방
⸥ 낙죽 작업을 마친 살대를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먼저 곱지 않은 부분을 칼로 깎아내고 거친 부분은 끌과 '뻬빠(샌드 페이퍼)'로 닦아서 반질반질하게 광을 낸다.
사북방
⸦ 부채의 고리를 '사북'이라 하고 고리를 박음으로써 부채의 형태는 완성되지만 합죽선의 완성은 한지에 그림을 그려야 이뤄진다. 살대의 고리박을 지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데 몇 개의 살대를 한꺼번에 모아 송곳을 대고 활로 비벼서 작업을 한다.
도배방
⸧ 도배는 살대에 한지를 붙이는 작업으로, 합죽선에 붙이는 한지는 한지제조업체에 특별 주문한다. 전래로는 '송광지'가 유명했고, 과거 진상품의 경우 '선자지'라 하여 고급한지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현재는 단순히 한지만 붙이는 부채가 대다수지만, 과거에는 기름을 먹인 한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경우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은 당연하다. 전주가 전래로 한지제조에 유명세가 있었다는 것은 합죽선의 발달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방
⸨ 형태가 갖춰진 부채의 한지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환 친다'고 한다. 화가의 비속어로 '환쟁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과 같은 우리의 전래어법이다. 하지만 호랑이나 사슴과 같은 동물의 그림과 무궁화 꽃과 같은 그림은 정밀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도배작업을 마친 한지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먼저 그림이나 글씨를 한지에 완성해서 도배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도배와 환치는 것이 순서가 바뀜은 당연하다.
위와 같은 분업적 과정은 조선시대 선자방에서 행해지던 것이고 현재는 이러한 분업적 생산이 가능할 만큼 수요도 없다. 이 점은 우리 전통공예 산업의 생산 현대화, 즉 자동화 또는 분업화에 의한 공장생산의 논의가 한차가 있음을 보여주는 현실이라 하겠다. 물론 합죽선이 일상용품이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어찌 보면 사치품과 같은 물건이기에 대량 생산에 대한 한계이기도 하다.
합죽선은 현재 전주에서 몇몇 가족 단위의 수공업체에서 만들어진다. 전주에서 합죽선 제작에 전업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은 전북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기동 선생과 나태용 선생을 포함하여 20명이 못된다. 한편 이들은 전통부채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서 이 지방의 다른 전통상품 생산 종사자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전북지방의 다른 전통상품업과 공동으로 조합을 결성하여 상호협조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공동판매점도 개관하였다. 이름하여 '협업화 죽세조합'으로 여기에 부채의 장인은 합죽선뿐 아니라 태극선 전문가가 참여하고, 왕골제품인 완초 장인 그리고 목기를 제작하는 목공이 참여한다. 내적으로는 그들 생업유지의 자구책의 방편이 되고, 외적으로는 관심이 점차 사라지는 전통문화의 전승에 그 실제 종사자들의 애틋한 정열을 엿볼 수 있다.
사라지는 전통문화에 대한 흠모와 애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지극한 이 시대에 과거의 어느 것 하나가 소중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막연한 향수와는 달리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생계의 수단으로조차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의 전통문화 보전 대책이 안고 있는 이중성이다.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부르짖는 소리는 우렁차지만 그것의 실현 가능성 논의는 뒷전에 밀려 있다. 여기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 실제 사이의 괴리를 읽을 수 있다. 선언적 의미보다 실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그야말로 전통문화가 더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에 대한 보답이 될 뿐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에 우리가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진정으로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주 '협업화 죽세조합'이 시도하는 새로운 사업계획은 더욱 돋보인다.
이들이 요즈음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사업은 전주 덕진 공원에 '선자청' 을 건립하자는 계획이다. 전북 지방 전통상품의 중심지로 삼아 전통상품의 전승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의도이다. 선자청의 장소로 물망에 오른 전주 덕진 공원은 과거 덕진지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시민 휴식공간으로 공원이 들어서고 덕진지는 보트 장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에는 이곳 연꽃이 유명했으며 단오 때는 부녀자들이 이곳에 와서 머리를 감는 풍속이 70년대 초까지도 이어져 왔었다.
조선시대 전주감영의 선자방(仙子膀) 이름을 딴 선자청(扇子廳) 설립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죽세조합의 관심으로만 여길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이들의 건의는 그곳을 전북 지방의 전통 특산물 전시장 겸 작업장으로 하여 관광자원화 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전통문화의 보존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전통 음식도 맛보게 하고 전통상품의 제작과정도 보여주어 명실공히 문화관광의명소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특이나 강조되는 문화관광의 측면에서 볼 때, 선자청과 같은 전통문화 전수를 담당할 문화시설의 건립에 대한 안은 이곳 전주 지방에 한정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서구화와 산업화로 모든 생활양상이 전국 어디나 동일화된 상황에서 각 지역의 특색있는 전통상품과 전통음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고 직접 음미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바로 이런 곳이 될 수 있다. 최소한 광역시나 도 단위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러한 형태의 '전통문화 전수관'을 마련하는 것은 전통의 전수와 함께 문화관광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는 이중의 효과가 기대된다 하겠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놓은 각지의 문화유산을 단순한 볼거리로만 찾아다니는 현재의 문화관광을 조상들의 삶의 현장을 체험으로 익히며 전통문화의 진수로 만끽할 수 있는, 진일보한 문화관광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는 바로 선자청과 같은 곳이 담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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