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리(金鷄里.경북 영주시 풍기읍)에는 유난히 이북출신이 많다.
대부분 구한 말이나 일제시대,혹은 해방 후에 내려와 이곳에서 「삶의 터」를 일군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문외한이 보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금계리는 살기 좋은 10군데의 승지(勝地)마을을 적어놓은 『정감록(鄭鑑錄)』에서 항상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정감록』은 이본(異本)이 60여종이나 될 정도로 다양하지만 한결같이 풍기금계리만큼은 제일의 승지로 친다.
이남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의 고통을 많이 겪었고 차별대우를 받았던 이북사람들이 『정감록』이 일러주는 살기 좋은 곳으로 금계리를 찾은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계리는 언뜻봐도 명당이다.마을 뒤편으로 국망봉.비로봉.연화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장엄한 소백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은 시원하게 툭 트였다.
여기에 영주지방의 후덕한인심이 스며들어 있어 『정감록』의 예언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평남 안주군 출신의 강신배(58)씨는 『55년전 아버지를 따라 금계리에 와서 정착했다』며 『「정감록」 때문』이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실제로 금계리 사람들은 잘 산다.무엇보다 「신초(神草)」혹은 「지정(地精)」이라고 불리는 인삼 덕분이다.마을 사람들 모두가 크고 작은 인삼밭을 지니고 있다.금계리를 들어서면 따가운 햇빛을 막기 위해 인삼밭에 설치해 놓은 인삼포가 마을 전체를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금계리는 풍기인삼이 처음으로 재배된 곳으로도 유명하다.1542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은 가난한 농민들이 인삼을 집안에서 재배해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계리에소백산에서 채취한 삼씨를 뿌렸다.그때까지 인삼은 집에서 키운 것(家蔘)이 아니라 자연산이 주종을 이뤘다.
금계리의 인삼재배가 성공하면서 재배지는 점차 풍기 전체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풍기는 금산.개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삼재배지가 됐다.
물론 토질과 기후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풍기지방의 토질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다.또 낮과 밤의 기온차가 높은 소백산 기슭에 있어 인삼재배에는 이상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인삼밭 4천평을 가지고 있는 황진섭(50)씨는 『질에 있어서도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랑했다.유명한 개성인삼은 한번 달이면 물컹하게 풀려버리지만 이곳 인삼은 재탕.삼탕을 해도 풀리지 않는다.또 같은 분량을 달여도 풍기인삼은 다른 인삼에 비해 훨씬 농도가 진하다고 한다.
풍기인삼은 10일정도 햇볕에 말리는 동안 인삼의 곧은 뿌리를 실로 묶어 반쯤 구부러지게 하는데 이 반곡삼(半曲蔘)이 풍기인삼의 트레이드마크로 최상품으로 평가받는다.
금계리 사람들에게 인삼은 정말 고마운 존재다.한때 풍기인삼 한봉(3백)이 쌀 세 가마니 값과 맞먹은 적도 있었다.그 돈으로 금계리 사람들은 생활을 하고 돈을 모았으며 자식들을 공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