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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의 토착화적 노력 |
■ 이끎말
복음 선포! 이것을 올바르게 비그리스도인에게 전하려면 우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가장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성경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사명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말로 저술된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올바르게 번역하려면 난점이 따른다. 각 나라의 시대상황에 맞게, 그 나라의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성경이 비록 성령의 감도를 받아 저술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계시진리가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의 번역작업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의 토착화 작업은 모든 나라마다 아직까지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올바르게 성경 번역을 하려면 우리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역적, 시대적, 대중적, 실천적인 언어의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우리나라 성경 번역 역사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새 번역 성경에 대해 가톨릭교회의 성경번역의 토착화적 노력을 설명한 다음, 성경 번역의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Ⅰ. 한국의 성경 번역사
1. 한국 천주교회의 우리말 성경 번역사
1) 성경과의 첫 만남(1784-1881)
나라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성장한 한국교회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씩 전파되었다. 위험 속에서도 공동체 예배, 곧 전례를 거행한 것이다. 전례에 필요한 책으로는 중국을 통하여 들여온 성경 본문을 담은 한문본인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이 유일하였다. 성경직해는 예수회의 디아즈(Emmanuel Diaz, 1574- 1659) 신부가 1636년에 펴낸 14권의 책으로, 각 주일 및 대축일의 복음·해당 본문에 대한 주해·‘잠’(箴)이라는 항목의 묵상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번역 대본은 라틴어 성서였다. 성경광익은 예수회의 마이야(J.-F.-M.-A. de Moyriac de Mailla, 1669-1748) 신부가 1740년에 펴낸 한문본 ‘주일 복음 해설서’인데, 해당 축일과 주일의 복음에 이어 행할 바를 밝힌 의행지덕(宜行之德)과 기도 지향을 표현한 당무지구(當務之求)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조선에 들어온 한문본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은 1790년경 역관 출신인 최창현(요한, 1754-1801년)으로부터 셩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이라는 제목으로 합쳐지게 된다. 셩경직해광익은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의 필요한 부분만 번역·재구성된 성경 본문을 담은 책이다. 성경 본문과 주해·잠·의행지덕·당무지구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책에 수록된 성경 구절은 총 1,138절로 4복음서의 30.68%에 해당한다.
셩경직해광익은 이후 100년 가까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1882년 로스역 ‘예수셩교 누가복음 전서’가 만주 땅에서 인쇄되기까지 한국 땅에서 성경 말씀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한글 서적으로는 셩경직해광익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말로 옮겨진 첫 성경 본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2) 본격적인 성경 번역 시기(1882-1911)
한미수교(1882)와 제물포 조약(1882)이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교회 안에서의 성경 번역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필사 되 오던 셩경직해광익을 1892년에서 1897년 사이에 활판본으로 9권을 펴냈다. 또한 1906년에 한글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손성재(야고보, 1877-1927) 신부가 마태오 복음서를, 한기근(바오로, 1868-1939) 신부가 마르코·루카·요한 복음서를 역주하고 뮈텔(G.-C.-M. Mutel, 1854-1933) 주교가 감준한 4복음서 번역본인 사사셩경(四史聖經)을 1910년에 발간하였다. 번역 대본은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역본으로 추정되며, 각 장 끈에는 성경 주해가 ‘풀님’이란 이름으로 붙어있다. 우리말로 된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한글 4복음서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3) 번역과 개정 작업(1912-1945)
사사셩경이후 한기근 신부는 1922년 4월 30일에 종도행전(사도행전)을 번역하여 사사셩경과 합쳐 사사성경 합부 종도 행전(四史聖經合附宗徒行傳)을 출간하였다. 1939년의 재판 때에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에 따라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행하였다.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 즉 서간들과 묵시록은 원산교구 덕원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슐라이허(Arnulf Schleicher, 1906-1952) 신부(독일)에 의해 번역되어 ‘신약성서 서간·묵시편’이라는 제목으로 1941년에 간행되었다. 이 성경은 불가타 역본을 참조하여 그리스 원문 성경을 번역했다는 사실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 천주교회는 1941년에야 비로소 우리말로 번역된 완전한 신약성경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밖에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체 성서인 쇼년셩셔(少年聖書, 피클레르 신부 지음)를 1925년에는 국한문 번역본으로 1933년 재판에서는 순한글본으로 출간하였다. 또한 “1940년에는 베네딕토회 소속 에그너(P.R.Egner) 신부가 그림과 신·구약성경 일부를 담은 ‘어린이의 성서’를 간행하였으며 1941년에는 같은 수도회 소속 신부인 차일라이스(V.Zeileis)와 퀴겔겐(K.Kügelgen)이 합본 복음서(Koreanische Enangelien - Harmonie)를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4) 한국어 성서와 공동 번역 성서(1945-1977)
선종완 신부는 1948년에 ‘신약성서 상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성경을 간행하였는데, 이 성경은 사사셩경과 종도행전에 입문과 주해를 덧붙인 것으로서 ‘복음성서’라는 이름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성경은 사사셩경과 종도행전의 번역 본문은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맞춤법 표기를 고치고 성경 이름의 한문식 표기를 그리스원어 표기로 바꾼 것이 특징이다.
한편 신약성경 밖에 없던 한국가톨릭교회 성서번역사에서 획기적인 업적이 이루어지는데, 선종완 신부의 구약성경 번역이 그것이다. 한국천주교회사상 최초로 구약성경을 번역했다는 점과 원문이 히브리어 성서(키텔의 히브리어 성서 제1판)를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이는 선종완 신부가 “현대 성서학적 방법론의 연구와 성서 연구의 정규 과정을 마친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1955년부터 히브리어 원문에서 구약성경을 옮기기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창세기’를 비롯 구약 16권과 제2경전 ‘바룩서’를 발간하였다. 여기서 ‘바룩’은 공동 번역보다 앞서 번역된 한국 최초의 제2경전(외경) 번역본이다. 이 성경은 입문과 주를 단 주해 성서로서 구약성경 번역본은 본문 번역에서 원문에 가까운 직역을 원칙으로 하면서 우리말 단어 선택에 심열을 기울인 성경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또 다른 구약성경 번역은 최민순 신부의 ‘시편’과 ‘아가’이다. 이 역본은 라틴어 불가타 역본을 중심으로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역본들을 참고한 것으로서 아름다운 문체와 노래하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된 점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 직역보다는 의역이 많이 사용되었다. 시편은 1968년에, 아가는 1977년에 시편과 합쳐져 ‘신편과 아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밖에 베네딕토회 소속이었던 최창성 신부가 독일어 ‘엑케르 성서’를 옮긴 간추린 성서 ‘구세사’(초판 1963, 개정판 1970)를 펴냈다.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평신도인 김창수가 일본어 성서와 녹스판 영어 성서(1949)를 번역 대본으로 삼고 불가타 성서로 교열하여 쉬운 말로 옮긴 ‘신약성서 복음편’·‘신약성서 서간편’(1968)·‘창세기·출애굽기’(1972)를 펴냈고, 백민관 신부가 네 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합본 복음서’(1972) 등도 간행되었다.
이렇게 성경번역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성경번역에 있어서 놀랄만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가톨릭 교회가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바로 1968년에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세계 성서 공회 연합회’(UBS)가 ‘성서 공동 번역의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이러한 결의는 한국에서도 그 해에 ‘신구교 성서 번역 공동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측 번역 위원들은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1971년에 세계 최초로 ‘공동 번역 신약성서’를, 1977년에는 신약성서 개정판과 구약성서를 합본한 ‘공동 번역 성서’라는 열매를 맺게 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한국인 성서학자들이 원어를 우리말로 옮겼는데 기존 번역본이 직역 중심의 문어체였다면 ‘공동 번역 성서’는 현대의 우리말인 구어체, 의역 중심의 번역본이라는 점이 다르다.
5) 200주년 신약성서와 새 성경(1974-2005)
1974년 천주교의 성서학자들이 모여 ‘공동 번역 성서’와는 다른, 원문에 충실하고 해제 및 주석을 붙인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를 기획하게 되었다. 천주교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번역본이며, ‘공동 번역 성경’보다 더 최신의 원문을 번역 대본으로 사용하였다는 점과 직역 중심의 번역 원칙을 따르고 자세한 해제와 역주를 곁들인 전형적인 천주교 주해 성서라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에서 옮긴 ‘200주년 성경’은 ‘호세아·마카’(1877)를 비롯하여 11권의 소예언서를 출간한 다음 중단 되었다.
가장 최근에 천주교 성서학자들에 의해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된 우리말 성경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 편찬한 ‘성경’이다. 한국 주교회의는 1988년에 성경전서를 원문에서 새로 번역하는 사업의 추진을 결의하고 임승필 신부를 번역 전임자로 임명하여 1992년 ‘시편’을 필두로 하여 2002년 12월에 ‘요한 묵시록’을 발행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이를 2005년 합본하여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새 셩경은 그 진행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2. 한국 개신교의 우리말 성경 번역사
1) 개역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1961년 이전)
1790년대에 최창현이 셩경직해광익을 출간한 이후 1910년 사사셩경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천주교회에서 번역된 성경은 전무하다시피 한다. 1892년에서 1897에 ‘셩경직해광익’을 ‘성경직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이를 대량보급하기 위하여 활판본으로 9권을 펴낸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성경번역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연합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인 로스는 동료 맥킨타이어와 함께 이웅찬·백홍준·서상윤·이성하 등 의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만주 심양(선양) 문광서원에서 1882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를, 1887년에 한국 최초의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젼셔’를 발간하였다.
로스가 만주에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던 시기에 신사유람단원이었던 이수정은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제안을 받아 1884년에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漢韓新約全書)를 만들었고, 이어서 ‘신약마가젼 복음셔 언’라는제목으로 마르코 복음을 발행하였다. 이것이 한국인이 옮긴 최초의 성경 낱권이다. 1885년에 입국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고 온 성경이 바로 이수정 역의 ‘신약마가젼 복음셔 언’였다. 그러나 로스 역 성경과 이수정 역 성경은 짧은 기간에 급히 번역한 개인 역본이라 언어상으로, 또 신학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올바르게 번역이 된 성경의 필요성을 인식한 선교사들은 1887년에 ‘성서 번역자회’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마태 복음’(1892)이다. 이를 시작으로 국내에서 처음 번역된 신약성경 낱권들이 1900년에 ‘신약 젼셔’로 합쳐졌고, 이를 수정한 1906판이 공인본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가 주축이 되어 구약성경 번역에 노력하여 1910년에 구약성경도 완료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1911년 구약과 신약을 합친 ‘성경젼셔’가 발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신·구약 성경이다.
한편 개신교에서 나온 ‘셩경 젼셔’는 중국의 고전 한문체 용어가 많은데다가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번역된 까닭에 구약 번역에 있어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새로 개역할 필요성을 느낀 개신교에서는 1912년에 구약 ‘개역자회’가 조직되어 새로운 번역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 결과 1936년에 ‘구약개역’이, 1938년에 ‘신약젼셔 개역’이 완성되어 같은 해에 ‘조선 성서 공회’의 이름으로 ‘성경 개역’이 첫 출판하게 된다. 이 성경은 원어 성경을 중심으로 옮기되 흠정역 영어 성경 등을 참조한 직역 성경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성경을 처음 펴낼 때 시도하였던 구어체는 장로교의 반대로 거부되어 1931년에 고어체로 복귀되었으며, 조선어학회가 건의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도 적용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1946년에 ‘조선 성서 공회’는 ‘대한 성서 공회’라는 이름으로 재결성되어 1949년부터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48)에 맞춰 ‘성경 개역’을 교정하기에 이른다. 1952년판·1956년판(일부 번역문 수정)에 이어 1961년에 결정판인 ‘성경 전서 개역 한글판’을 펴냈다. 이것이 현재까지 개신교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공인 성경이다.
2) 개역 성경이 나온 이후(1961년 이후)
‘개역 성경’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초에 ‘개역성경’의 잘못된 번역과 우리말의 변천에 따른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인식한 한국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은 다시 신약성경을 새롭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에는 ‘신약전서 새 번역’을 출판한다. 이 새로운 번역은 성경 본문을 현대어로 직역한 것인데, 개역의 오역을 바로 잡은 한국 학자들만의 힘으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이다. 낱말 해설, 구약 인용, 사본고증 등의 부록을 실었다. 그러나 개신교계 내의 새 번역에 대한 반대와 천주교와의 공동 번역 성서의 집필 때문에 구약성경의 새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편 1977년에 출판된 ‘공동 번역 성서’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성서학자들이 합심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성경은 개신교 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개신교는 여전히 자신의 교단 내에서 번역한 성경을 사용하였다. 개신교 내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공동 번역 성서’의 용어에서 나오는 차이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신교는 자체적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풀어 옮긴 현대어 성서’(정용섭 역, 1978)·‘표준 신약 전서’(한국 표준 성서 협회 역, 1983)·‘현대인의 성경’(1985)·‘현대어 성경(1991) 등이 새 성경으로 간행·보급 된 것이 그 예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 성서 공회에서도 새로운 현대어 공인 역본을 기획하여 9년 3개월 만에(1993년) ’성경 전서 표준 새 번역‘을 간행하였다. 이 성경은 한국 개신교 각 교단의 신학자 16명과 문장위원 8명, 감수위원 5명, 목회자와 신학자로 구성된 자문위원 980명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번역 성경이다. 이와 아울러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61)의 개정판을 1998년에 간행하였다.
3. 성경 번역의 의미
1) 복음의 전파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본질적인 요소이자 사명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알려주고 있다. 성경 번역의 첫 번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다시 말해 선교를 위해 우리말로 된 성경 번역은 필수인 것이다.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2)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하느님
성경의 원어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적혀 있어 보통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다. 만약 성경을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전파하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이 알려주고 있는 하느님을 이질적으로 느낄 것이다. 성경 번역은 다른 언어로 인하여 파생될 이질적인 느낌을 일차적으로 제거해준다. 다른 세계의 그리스도, 다른 나라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하느님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육화되어 사람이 되셨듯이,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말씀 또한 육화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3) 지금, 바로 여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고, 어휘와 언어 습관이 큰 폭으로 달라지는 오늘이다. 과거에 통용되었던 말이 오늘날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늘 새롭게 번역 되어야 한다. 성경 번역의 의미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보고 느끼기 위함인 것이다.
Ⅱ. 새 성경의 당위성과 특성
1. 새 성경 번역의 토착화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사항
1) 새 성경 번역의 필요성
(1) 물음과 답변
Q : 공동 번역 성서도 있고,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도 있는데, 왜 자꾸 새로운 번역본을 내어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가?
Q : 번역본이 여러 가지 나온다는 것은, 기존 번역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철석같이 믿고 살아온 성서 말씀이 권위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Q : 잘못 번역된 곳들이 있다면, 그런 곳은 고쳐 개정판을 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부족한 점이 좀 있더라도 하나의 번역본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A : 잘못된 번역은 늦게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A :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서를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 (DV 22)
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성서에 계시된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더 깊이 더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번역본’이 있는 것이 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성서 독자의 계층이 다양하고, 그들의 이해 능력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번역문을 통해 성서 본문이 지니고 있는 심오한 의미가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다양한 성서 번역은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번역본들이 비록 표현은 다양하지만 원문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정확한 번역’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무책임한 번역들이 난립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2) 「공동 번역 성서」의 공헌과 한계
첫째, 「공동 번역 성서」의 공헌이다.
- 「공동 번역 성서」가 있기 전에 한국 가톨릭 교회는 신․구약성서 전체(=성경전서)를 담고 있는 우리말 성서를 갖고 있지 못한 처지였다. 물론 신약성서의 번역은 되어 있었지만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선종완 신부가 번역한 책들이 일부 있었을 뿐이다.
- 「공동 번역 성서」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우리말은 개신교 신자들에 비하여 성서를 잘 모르고 있던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서’를 친숙한 것이 되게 하였다.
- 「공동 번역 성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생활 전체에서 ‘성서’가 중심적인 자리를 찾도록 노력하고 있던 한국 가톨릭 교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 「공동 번역 성서」는 때마침, 공의회 이후 불어 닥친 교회 쇄신의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결성된 각종 신심 단체와 사도직 단체들이 활성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 「공동 번역 성서」는 각종 성서 사도직 단체와 성서 잡지 및 성서 관련 출판물들이 생겨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둘째, 「공동 번역 성서」의 한계이다.
「공동 번역 성서」가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가톨릭 교회 공인 번역본’으로 계속 사용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 「공동 번역 성서」는 듣거나 읽는 신자들이 빨리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의미 일치 번역(=의역)’에 치중한 나머지, 성서 원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너무 축소하거나 원문의 뜻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번역을 한 곳들이 많다.
- 각종 성서 사도직 단체를 통하여 신자들이 성서를 많이 공부하면 할수록 성서를 ‘더 깊이 그리고 더 정확하게’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 생겨나, 성서 원문에 좀 더 가까운 번역을 요청하게 되었다. 공동 번역의 번역으로는 만족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 (교회 일치를 적극 권장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바티칸의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평의회’가 개신교의 세계성서공회연합회와 신․구교 합동으로 성서를 번역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한국 가톨릭 교회도 1968년 대한성서공회와 신․구교 합동으로 성서를 번역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공동 번역 성서」가 1977년에 출판되었다. 그런데 「공동 번역 성서」는 출간되면서부터 즉시 거의 모든 개신교 교단의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교회 일치 번역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 가톨릭 교회 안에서「공동 번역 성서」는 ‘교회 공용 성서’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명칭만 ‘교회 일치용 성서’라는 의미에서 ‘공동 번역’이지, 이 번역본은 실질적으로 개신교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만 사용되는 성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는 「공동 번역 성서」를 ‘가톨릭용’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용해야 했고, 저작권도 ‘대한성서공회’에 있다.
(3) 「공동 번역 성서」의 공헌과 한계를 통한 새 성경 번역본들의 등장
첫째,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이다.
-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의 특징은 성서를 깊이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학문적으로 성서를 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참조할 정도로 한국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독보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의 종류에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가 있다.
종 류 |
출간 순서 |
본문의 내용이 같다. |
본문 내용이 일치하지 않다. |
번역 |
낱 권 |
1 |
● |
● |
직역 |
보급판 |
2 |
- |
● |
직역 |
개정 보급판 (1998년) |
3 |
- |
● |
의역 |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
4 |
● |
- |
직역 |
둘째, 「새 번역 성서」이다.
주교회의는 199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구약성서를, 199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신약성서를 새로 번역하기로 하였다. 성서위원회 총무 임승필 신부를 중심으로 한 번역구성원은 성서 본문에 충실한 교회 공용 번역본의 완성을 그 목표로 삼았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26차례의 히브리말․그리스말 본문 대조 독회와 34차례의 신구약 우리말 독회를 거쳐, 18권의 구약성서 새 번역과 10권의 신약성서 새 번역의 낱권 출간을 모두 완료하였다.
그런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는 낱권 형태의 ‘새 번역 구약성서’의 번역을 거의 마칠 즈음에(1999년 구약 완역) 크게 고심하게 되었다. 교회 공용 성서를 지향하는 「새 번역 성서」의 신약성서 쪽 본문으로 어떤 것을 택하느냐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새롭게 번역하느냐 아니면 이미 있던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개정 보급판)을 사용하느냐는 문제였다. 결국 많은 논의를 거쳤다.
(1996년)
제1안 |
200주년 신약성서 보급판을 수정한다. |
제2안 |
성서위원회 중심으로 신약성서를 다시 번역한다. |
제3안 |
신약성서 본문은 분도출판사가 주관해서 수정한다. 입문과 각주는 성서위원회 전담자가 구약성서 새 번역 낱권 식으로 정리한다. |
(1998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
제1안 |
성서위원회의 「구약성서 새 번역」과 분도출판사의 「200주년 신약성서 보급판(수정판)」을 합치는 것이다. |
제2안 |
성서위원회를 중심으로 새로 번역하는 것이다. |
주교회의 총회(1998년 10월 12-15일)는 “성서위원회의 구약성서 새 번역본과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를 합본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200주년 신약성서의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성서 번역 전체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위하여 성서위원회에게 신약성서를 새로 번역하도록” 결정하였다.
셋째, 새 번역 「성경」이다.
년 도 |
과 정 |
1987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공동번역 성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주교회의에 건의하였다. |
1998 |
성서위원회의 위원장인 강우일 주교와 성서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성서 번역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
1989 |
주교회의는 성서위원회 번역 총무로 임승필 신부를, 그리스어 전임자로 정태현 신부를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
1992 ~ 2002 |
임승필 신부가 번역한 「시편」이 발간되었다. 번역의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구약의 히브리어와 우리말 사이의 다른 점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번역자들은 가장 고민하였다. 1. 각 번역위원이 맡은 부분을 개별적으로 번역하면 그 번역본을 번역위원들이 함께 읽고 검토한다. 2. 우리말 위원들이 읽으면 검토한 뒤 성경의 각 권을 단행본을 출간한다. 그 후 2002년까지 18권의 구약 성서와 10권의 신약성서를 각각 출간하였다. 10년 동안 성경의 낱권을 발행한 것은 신자와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이다. |
년 도 |
과 정 |
2003 |
2003년 3월 임승필 신부가 선종하였다. 새 번역의 ‘합본위원회’가 구성되고, 7월에는 ‘실무반’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어 전문가들을 통해 통독 작업을 병행하였다. |
2004 |
가톨릭의 전 계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공청회를 열었다. |
2005 |
2005년 10월 10일 새 번역 「성경」이 탄생하였다. |
2) 「새 번역 성서」의 특성
(1) 「새 번역 성서」의 목표(=대원칙)
- “원문에 충실한 한국 가톨릭 교회 공용 번역본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 교회 공용 성서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현대 우리말 어법과 예법에 맞는 번역을 지향한다.
(2) 「새 번역 성서」의 장점과 한계점
(장점)
- 「새 번역 성서」는 성서 전체의 번역에 있어서 ‘통일성(=일관성)’이 있다.
- 「새 번역 성서」는 성서 원문에 충실하면서 우리말 어법과 예법에 맞는 성서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 「새 번역 성서」는 원문에 충실하면서 우리말 어법에 맞는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의 많은 전문가(성서학자, 국어학자, 국문학자, 작가)가 대거 참여하였다.
(한계점)
- 성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되게 하려는 노력이 결코 약해진 것은 아니지만, 구약성서를 번역할 때와 비교해 보면, 신약성서를 번역할 때에는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기준이 비교적 느슨하게 적용되었다.
- 구약성서를 번역할 때와는 달리 신약성서를 번역할 때에는 우리말 어법에 맞으면서도 부드러운 우리말이 되게 하려고, ‘의미 일치(=의역)’의 번역이 많이 허용되었다.
※ 임승필 신부의 번역 메모 몇 가지를 통해서 본 「새 번역 성서」의 특성이다.
임승필 신부의 번역 메모(특히 신약성서 번역의 메모)를 보면 그가 얼마나 섬세하게 단어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가며 번역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중 두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이 명칭은 다른 구절(요한 19,26; 20,2; 21,7.20)에도 나오는데 주의를 요한다. 예컨대 영어에서는 그냥 ‘loved'라고만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말의 시제는 이보다 복잡하여 예수님의 생전과 사후, 그리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에 따라 달라야 한다.
성서구절 |
성서 종류 | ||||
|
공동 |
200 |
표준 |
새 번역 성서 | |
요한 13,23 |
예수님 생전 |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
사랑하시던 |
사랑하시는 |
사랑하시는 |
요한 19,26 |
사랑하시는 |
사랑하시던 |
사랑하는 |
사랑하시는 | |
요한 20,2 |
예수님 사후로서 본격적 발현 장면이 아님 |
사랑하시던 |
사랑하시던 |
사랑하시는 |
사랑하신 |
요한 21,7 |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
사랑하시던 |
사랑하시는 |
사랑하신 | |
요한 21,20 |
부활 후 발현 때의 일 |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
사랑하시던 |
사랑하시는 |
사랑하시는 |
우선, ‘~던’을 많이 쓰는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요한 복음서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일이 과거에 완료되지 않고 중단되었다는 미완의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이다(「표준국어대사전」). 이는 13,1의 내용에 대치된다. 그리고 예컨대 <200>처럼 19,26을 “예수께서 어머니와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시고”로 옮기면, 예수님께서 이 제자를 과거에 사랑하시다 만 것이 된다. 이러한 오해는 또는 오역은 부활하신 뒤의 장면이 21,2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예수님의 사후이기는 하지만 이 발현 장면에서 주어는 계속 “예수님”이시다. 문법적으로 여기에서는 생전과 사후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당연히 생전처럼 “사랑하시는”으로 옮겨야 한다.
둘째, 사도 23,24에 나오는 “준비하여라.”
성경종류 |
성경 구절(사도 23,24) |
공 동 |
“그리고 말도 준비하여 바울로를 태우고 펠릭스 총독에게 호송하여라." 하고 명령하면서 |
200주년 |
“그리고 짐승들도 마련하여 바울로를 태우고 펠릭스 총독에게 안전하게 데려가시오." |
표 준 |
“또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로 무사히 호송할 수 있도록, 그를 태울 짐승도 마련하여라.” |
새 번역 |
천인대장은 백인대장 두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밤은 아홉 시에 카이사리아로 출발할 수 있도록 군사 이백 명에다 기병 칠십 명과 경무장병 이백 명을 준비시켜라.” |
<200>과 <표준>에서는 “마련하다”를 쓰고 있는데, 23절의 그리스 말 동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말에서도 다른 동사를 쓰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마련하다”는 보통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구하여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예컨대 ‘음식을 준비하다’와 ‘음식을 마련하다’는 엄연히 다르다. 여기에서는 “짐승들”도 해당 부대에 이미 있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여기서 임승필 신부의 메모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번역을 하며 다음과 같이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새 번역 성서 번역위원회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순서 |
내 용 |
1 |
원어가 갖고 있는 사전적 의미 |
2 |
그 어휘가 성서에서 ‘관용어’로 굳어진 의미 |
3 |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 번역어로 사용하려는 어휘가 우리말의 일반 언중 가운데에서 사용되는 의미(국어사전적 의미) |
4 |
(한국의 일반 언중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지난 세월 동안 한국 교회(개신교, 가톨릭) 안에서 오랫동안 널리 사용되어 교회 내에서 ‘관용어적’으로 굳어진 의미 |
(3) 「새 번역 성서」의 번역의 원칙과 과정
(번역 세부 원칙들 5/22)
번호 |
세 부 내 용 |
2 |
좋은 우리말을 찾아 쓰고, 되도록 줄임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줄임말을 채택한다. 또한 ‘때, 무렵’ 등의 시간을 나타내는 낱말의 경우, 바로 뒤에 쉼표를 찍으면 조사를 생략한다. |
3 |
맞춤법, 띄어쓰기, 구두점 등은 일반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를 따르며, 표제어 등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삼는다. |
13 |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수’에는 ‘-님’을 붙여 쓴다. |
14 |
외국말 고유명사와 외래어 표기의 원칙은 따로 정한다. 다만, 주교회의에서 확정한 용어와 공동 번역 등 현대 성서 번역에서 널리 쓰이는 관용은 존중한다. |
18 |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아도나이’, ‘야훼’라고 하실 때에 ‘주님’으로 옮기고, 높임말은 쓰지 않는다. |
(번역에 참여자들)
분 류 |
참가자 수(명) |
분 류 |
참가자 수(명) |
성서위원회 위원장 |
3 |
합본 위원 |
5 |
번역 전담자 |
2 |
합본 실무반 |
4 |
번역 위원 |
16 |
통독 위촉 |
2 |
우리말 위원 |
13 |
• |
• |
3) 새 「성경」의 쟁점
(1) 하느님의 이름(=왜 ‘야훼’를 ‘주님’으로 바꾸었느냐?)
새로 발행될 「성경」의 번역문이 공동 번역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야훼”를 “주, 주님,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야훼”를 옮긴 “주, 주님, 하느님”은 굵은 글씨로 적었다. 주교회의 성서위원회는 1990년 2월 19일 회의에서 번역의 원칙과 절차를 논의하고, “YHWH는 ‘주님’을 번역한다.”고 결정하였다. 다만 예외로,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는 장면(탈출 3,15; 6,2-3)과 ‘야훼’라는 이름과 합쳐진 이름들, 곧 “야훼 이레”(창세 22,14), “야훼 니시”(탈출 17,15), “야훼 삼마”(에제 48,35) 등은 그대로 음역하였다.
(음역하자는 의견: 반대)
첫째, 성서를 번역하면서 YHWH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결정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고려되는 가능성은 ‘음역’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
YHWH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번역에서도 역시 고유명사로 취급해야 한다. |
2 |
일반적으로 고유명사들을 번역해서는 안 된다. |
3 |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YHWH의 명백한 의미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
4 |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본디 지녔던 어원적 의미보다는 그것의 함축적 의미가 훨씬 중요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5 |
YHWH가 음역되지 않으면, 다른 많은 이름들에 쓰인 어근 YH와의 연관성이 상실된다. |
6 |
탈출 6,3은 YHWH라는 실제라는 실제적인 이름을 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
둘째, 2004년 열린 새 번역 성서 공청회에서 광주가톨릭대학교 김혜윤 수녀의 주장이다.
번역위원회는, ‘야훼’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필요했던 자리가 구약성서에서, 다신론적 신관에서 유일신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이었고, 유일신관이 보편화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정황에서 굳이 ‘야훼’라는 고유명사가 명기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야훼는 ‘주님’으로 번역함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계시 전달’의 차원에서 본 성서 번역의 본래적 기능은, 본문이 언급하는 내용을 최대한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옮겨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 따라, 고유명사는 일반적으로 ‘음역’되고 있고, 따라서 히브리 본문의 ‘야훼’ 표기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정상적 질서이다.
현재 우리 신자들의 사정에 맞는 표현을 선별하려는 노력은,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 이루어진 이후, 그 다음 단계에서 고려되어야 할 미덕이지, 인간 측의 상태와 현상들이 우선적으로 본문에 ‘주입’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순서가 바뀔 때, 본문은 그 본래적 독자성을 잃고 윤색되거나 손상될 위험에 놓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일신 개념이 아직 조직적으로 체화되지 않은 비신자들에게도 성서가 개방되어 있음을 주지한다면, 유일신관이 보편화되고 무장된 정황을 견해 전반에 전제하였던 번역위원회의 논지는 비교적 설득력을 잃는다고 본다.
번역위원회의 결정처럼, 히브리어 ‘야훼’를 ‘주님’이라고 일괄적으로 옮겼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본다.
경우 |
문 제 점 |
1 |
‘야훼’와 사전적 의미로서 ‘주인’, ‘주님’을 뜻하는 ‘아돈’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 야훼를 주님으로 번역한다면 ‘주님’이라는 의미가 ‘중첩’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시편 8,2이 경우, ‘야훼’는 ‘아도네누’와 합성되어 있는데, 야훼를 ‘주님’으로 옮긴다면, ‘아도네누’가 의미하는 ‘우리의 주님’과 결합되면서, ‘주님’이 반복되는 번역, 곧 “주님 우리의 주님”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새 번역은 이를 “주 저희의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러한 번역은 중복이 주는 어색함을 드러내고, 심지어는 ‘주님’을 강조하려고 같은 말을 반복한 듯한, 본래의 히브리 구문과는 전혀 다른 구문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또한 서로 구별되는 두 단어를 선별하여 조합해 둔, 성서 편저자의 ‘꼼꼼하고 세심한’ 의도를 일절 무시하는 ‘무심한’ 번역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 |
2 |
구약성서에서 수십 번에 걸쳐 등장하는 친숙한 표현이 “야훼 엘로힘”도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관용적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임을 명시한다. 그리하여 공동 번역은 이 표현을 “야훼 하느님”이라고 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야훼를 무조건적으로 ‘주님’이라고 번역한다면 “주님 하느님”이라는 불편한 번역이 나오게 되고, 하느님의 이름을 마치 ‘주님’으로 제시하는 듯한 엉뚱한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
결론 |
·개인적으로 평자는 YHWH를 무조건적으로 ‘주(님)’으로 옮긴다거나, 반대로 무조건 ‘음역’한다는 다소 ‘폐쇄적’이고 ‘일괄적’인 규제는 배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YHWH를 ‘(나의) 주님’(=아도나이)라고 읽어온 히브리적 전통과 ‘야훼’를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서양의 여러 번역 본문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앞에서 제시된 문제점들을 외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 해법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준거는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문맥’만이 야훼를 음역해야 할지, 주님이라고 번역해야 할지 최종적으로 결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자는, 일반적으로 YHWH를 ‘음역’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되, ‘문맥적 상황’에서 그것이 부적절할 경우,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유연한 원칙을 제안하고 싶다. |
(주님으로 옮겨야 하는 의견: 찬성)
고 임승필 신부가 정리한 번역위원회의 논거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가 6,000번 이상 나온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이 이름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가 항상 난제로 대두된다. 물론 있는 그대로 ‘야훼’로 음역하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은 번역상의 과제만이 아니다. 성서를 봉독하고 듣는 이들의 신학 그리고 신심과 영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이 문제는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서가 형성되던 바로 그 시대에도 ‘야훼’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였음을 구약성서 자체 안에서 보게 된다. 이렇게 이 문제는 구약성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명쾌한 해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최선의 유일한 해답은 없고 차선의 여러 방안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어떠한 방안을 채택하더라도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더 나은 해결책을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안은 무엇인가? 곧 음역하는 방안과 ‘주님’으로 번역하는 방안 중에서 택일하여야 한다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으리라 본다.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대부분의 경우 ‘주님’으로 번역하고, 이름 자체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몇몇 경우에만 ‘야훼’로 음역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원칙적으로 ‘주님’으로 번역하고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야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으로 번역하는 경우, 이 예외를 두느냐, 두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접근 방식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주님’으로 번역하는 가능성 역시 최선책이 아니라 차선책으로서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 모자란 점을 예외 사항으로 보충한다는 근본적인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 예외를 인정하는 방안, 곧 ‘주님’으로 옮기되 중요한 몇몇 경우에는 ‘야훼’로 음역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예외의 경우는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거나, 이 이름이 고유명사의 일부를 이루는 때이다.
이 방안을 선택하게 한 데에는 세계성서공회 연합의 연구 모임이 밝힌 여러 가지 논거들 외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경우 |
내 용 |
1 |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게 된 동기는 당신의 신원을 분명하게 밝히셔야 했던 필요성에 있었다. 이집트로 가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오라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을 때, 모세는 이렇게 아뢴다. “제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탈출 3,13). 당시는 민족이나 종족마다, 심지어 가문마다 자기들만의 신 또는 하느님을 모시던 때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들 또는 하느님들 삶에서 당신이 ‘야훼’라는 ‘하느님’임을 밝히셔야만 했던 것이다 (탈출 3,15). 다신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던 때에는 ‘야훼’가 말 그대로 이름의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론이 적어도 이스라엘에서는 당연시되던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는 ‘야훼’가 더 이상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단순히 한 분이신 하느님의 칭호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만의 고유한 이름으로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 하느님’이라 했을 때에는 사정을 전혀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사전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분이 자기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하느님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인상을 받기가 쉽다. 더군다나 도양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계속 ‘서양 종교’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야훼 하느님’은 으레 ‘서양인들의 하느님’으로 여겨지기가 쉽다. 여기에서 조금 발전하여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야훼 하느님’으로 불리시는 분과 이 땅에서 알려져 오신 하느님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경우 성직자와 수도자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에서 개인적인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리라 여긴다. 일반적으로 ‘야훼 하느님’은 그저 ‘주님’이며 ‘하느님’인 것이다. |
2 |
우리나라에서는 예의상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물론 인간에게 다가 오셔서 당신의 이름까지 알려주신 하느님, 인간과 더욱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러한 면만을 강조할 때, 인간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분,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감추어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일그러트릴 위험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두려움’ 또는 ‘경외심’임을 구약성서는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의 다른 면을 망각하고 그분 사랑의 면만을 ‘인간식’으로 강조할 때, 우리는 그분을 편할 대로, 더 나아가서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은 존재, 결국 인간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우상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도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
경우 |
내 용 | |||
3 |
우리는 언어 관습상 많은 경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책이나 칭호만 부른다. 같은 직책이나 칭호를 가진 여러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 직책이나 칭호를 가진 사람이 한 명뿐이데도 그 앞에 이름을 덧붙여 부르게 되면, 오히려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때로는 실례가 되기도 한다. | |||
4 |
(다른 주요 번역본들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 |||
A |
․ 「공동 번역 성서」 |
야훼 | ||
․ La Bible de Jeusalem | ||||
B |
․ 그리스어 번역 성서(LXX) |
Kyrios |
주님 | |
․ 대중 라티말 번역 성서(Vulgata) ․ 교황청의 표준 성서 (Nova Vulgata Bibliorum Sacrorum) |
Dominus | |||
․ 미국 가톨릭 교회의 공용 번역본 (The New American Bible) |
the LORD | |||
․ 독일어 번역본(M.Luther 번역본) |
Herr | |||
․ 프랑스어판 공동 번역(TOB) |
Le SEIGNEUR | |||
이처럼 2,000년이 훨씬 넘은 성서 번역의 역사에서 압도적으로 다수의 번역본이 YHWH를 음역하지 않고, ‘주님’이라는 뜻의 낱말로 번역하고 있다. 다만 ‘주님’으로 옮기면서 예외를 두는 것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몇몇 구절들에서만큼은 ‘야훼’로 음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 ||||
5 |
새로 발행될 성경은 공식 전례에서도 쓰일 공용 성경이므로, 가톨릭의 전례 전통에 따라야 한다. 교회는 이천 년 동안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으로 옮겨 불러왔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령 「성서의 보고」는 모든 전례에서 새로운 대중 라틴말 성서 (Nova Vulgata)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노바 불가타 성서는 오랜 전통에 따라 YHWH를 “주님”으로 옮겼다. | |||
결론 |
하느님의 이름인 YHWH를 우리말로 옮길 때, 어느 고유명사처럼 음역하는 것이 우선이요 가장 논리적인 방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YHWH라는 글자를 옮길 것인지, 아니면 성서를 우리에게 전승해 준 유다인들의 발음을 옮길 것인지, 또 애초의 소리를 옮길 것인지, 아니면 구약성서의 본문들이 경전으로 확정될 당시의 소리를 옮길 것인지, 또 이 이름의 원뜻은 무엇이며 원발음은 어떠했는지 등등 음역과 관련된 문제들이 간단하지 않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할 때, 특정한 몇 번의 예외와 함께 ‘주님’으로 옮김이 비록 최선의 방도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차선책들 가운데 가장 낫다고 여겨진다. |
※ 반대 의견과 찬성 의견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이다(김영남 신부의 의견).
새 번역 성서 번역위원회의 결정대로, 교회 공용(=전례용 포함)으로 사용될 「새 번역 성서」를 위해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네 글자 YHWE를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이라는 번역은 유다인들의 오랜 전통을 존중할 뿐 아니라,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우리말의 예법에도 맞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이라고 번역하도라도 ‘주님’이라는 이름 뒤에는 본디 ‘야훼’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과 ‘야훼’라는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자 하느님’, ‘자애하신 하느님’, ‘고통 중에 있던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공용 성서」에서는 ‘야훼’ 대신 ‘주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성서를 비교적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야훼’ 또는 ‘야훼님’ 이라는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성서가 있는 것도 필요하다.
※ 한국 가톨릭 성서 번역본에 나오는 ‘야훼’와 ‘주님’의 빈도수(단위 : 절)
용어 |
성서 종류 | ||||
공동번역 성서 |
200주년 신약성서 |
새 성경 | |||
구약성서 |
신약성서 |
구약성경 |
신약성경 | ||
야훼 |
5689 |
0 |
0 |
10 |
0 |
주님 |
694 |
412 |
483 |
5727 |
492 |
(2) 고유명사의 음역 문제
고유명사(인명, 지명, 서명)의 음역 문제는 끝까지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교회 내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표기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점에 대해서 ‘새 번역 공청회’에서 강대인 선생이 「성서 고유명사의 음역과 외래어 표기」라는 주제 발표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살펴보겠다.
- 단수 2인칭 대명사 ‘당신’을 ‘주님’(하느님)께 적용하는 문제 -
우리말로 성서 번역을 하면서 참으로 난감하게 다가오는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다. 우리말 성서 번역본 여러 곳을 보아도, 이 문제가 매끄럽게 정리되어 있는 번역본은 아직 없다. 「새 번역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 번역 성서 번역위언들도 우리말 어법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이나 ‘주님’께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이 원칙을(특히 시편과 같은 곳에서) 일관성 있게 지켜 나갈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문제 대하여 새 번역 성서 번역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말이나,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은 우리말에서 최고의 높임말을 써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난관이 있는데 바로 ‘단수 2인칭 대명사’이다. 3인칭의 ‘그분-당신’에 상응하는 2인칭의 대명사가 우리말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편에서는 하느님을 직접 부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하여 2인칭 대명사를 매우 자주 쓰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 곧 ‘나와 너’라는 구원의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의 뜻에 그 근거와 당위성 이 있다. 이렇게 중요한 관심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말의 관습에 맞지 않더라도, 부득이하게 인칭 대명사를 가능한 한 원문에 있는 그대로 옮길 수밖에 없다. 이 번역에서는 문제가 되는 공대 2인칭으로서 ‘당신’ 을 쓴다. 이 2인칭 대명사는 우리말에서(3인칭 존칭 대명사로서의 쓰임 외에) 두 가지 용도로 쓰인다.
첫째로, ‘-하오’ 할 자리에서 상대방을 지칭할 때와 둘째로, 부부 사이에 애정을 나타낼 때이다. 이 번역에서 ‘당신’을 사용함은 이 두 번째 용도에 근거한다. 사실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부부 관계’로 표현된다. 그래서 ‘당신’의 첫째 용법을 생각할 때는 아직도 문제가 없지 않으나, 하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당신’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쓰기로 한다. 이는 이미 몇몇 번역본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낯이 익었다는 이점도 지니고 있다. 물론 하느님께 대하여 3인칭으로 말할 때에도 ‘당신’을 쓰게 되지만,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3. 평가
성서 번역에는 크게 보아 두 단계가 있다.
1단계 |
원천 언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또는 아람어를 수용 언어인 우리말로 옮기는 단계이다. |
2단계 |
우리말 어법에 맞게 표현하는 단계이다. |
첫 단계에서의 관건은 ‘정확성’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정확한 번역’의 기준이다. 왜냐하면, 번역 원칙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정확성’의 정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형식 일치의 번역(=직역) 원칙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보면 내용 일치의 번역(=의역)은 ‘부정확한 번역’이라고 평가받기 쉽다. 반면에 내용 일치의 번역(=의역)의 번역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형식 일치의 번역(=직역)의 우리말은 아직 제대로 표현된 ‘우리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정확한’ 번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 번역 성서」의 번역 원칙은 어떤 것을 선택했는가?
형식 일치의 번역(=직역) 원칙을 선택하였는가? 아니면 내용 일치의 번역(=의역) 원칙을 선택하였는가? 양자택일적으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구약성서를 번역할 때에는 형식 일치의 경향이 비교적 강하였다면, 신약성서를 번역할 때에는 내용 일치의 경향이 구약성서를 번역할 때보다 더 강하였기 때문이다. 새 번역 성서는 ‘원문에 충실하며’, ‘교회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번역본, 그러기에 ‘우리말 어법과 예법에 잘 맞는 번역본’이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혹시 두 (세) 마리 토끼를 쫓는 격이 되지 않았을까 우려된다. 교회 공용으로 사용하려면 형식 일치의 번역만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전례에 참석한 일반 신자들은 성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총평을 해보면 이렇다.
하나, 「새 번역 성서」, 「성경」의 가치는 한국 가톨릭만의 고유한 성서 번역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둘, 지금까지의 자료와 인력을 기반으로 더 높은 수준의 인력과 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실정에 맞는 더 나은 성서 번역본이 요청된다.
셋, 성서와 우리말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이 요청된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선종완 신부는 우리나라 강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 특히 다른 고대어와 비교하면서
한국말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공동 번역을 하실 때에 한자를 고집하는
학자들을 나무라고, ‘한글의 우수성’을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Ⅲ. 성경 번역의 실례들
1. 본문분석(시편 110)
1) 본문 구조
절 |
주 제 |
신 탁 들 |
1ㄱ |
표제 |
|
1ㄴ-3 |
야훼의 말씀 |
V1ㄷ 2ㄴ 3ㄴ(?) |
4 |
사제직의 보증 |
V4ㄷ |
5-6 |
야훼에 의한 왕권의 보호 |
|
7 |
왕적(王的) 행위 |
|
2) 시편 110의 이해를 제문제(諸問題)
(1) 시편의 목적과 용도에 대한 이해
(2) 시편 안에서의 대화 구조의 해석의 난해성
(3) 2격 인칭대명사의 해석의 문제
(4) 본문비평(Textkritik)에 의한 해석의 다양성
(5) 신탁들(Orakel)에 관한 이해
2. 시편 110,1의 성경 번역 비교
1) 외국어 번역 대조
MT |
LXX |
RSV |
EIN |
TOB |
rAmðz>miñ dwI©d"l. ynI©doal;( hw""hy> ~auÛn> |
tw/| Dauid yalmo,j |
A Psalm of David. |
[Ein Psalm Davids.] |
De David. Psaume. |
ynI+ymiyli( bveî |
ei=pen o` ku,rioj tw/| kuri,w| mou |
The LORD says to my lord: |
So spricht der Herr zu meinem Herrn: |
Oracle du SEIGNEUR à mon seigneur: |
^yb,ªy>ao÷ tyviîa'-d[; `^yl,(g>r:l. ~doåh] |
ka,qou evk dexiw/n mou e[wj a'n qw/ tou.j evcqrou,j sou u`popo,dion tw/n podw/n sou |
"Sit at my right hand, till I make your enemies your footstool." |
Setze dich mir zur Rechten, und ich lege dir deine Feinde als Schemel unter die Füße. |
«Siège àma droite, que je fasse de tes ennemis l'escabeau de tes pieds!» |
2) 신약성경에서의 인용구
(1) 마태 22,43
ei=pen ku,rioj tw/| kuri,w| mou\
ka,qou evk dexiw/n mou( e[wj a'n qw/ tou.j evcqrou,j sou u`poka,tw tw/n podw/n souÈ
(2) 마르 12,36
ei=pen ku,rioj tw/| kuri,w| mou\
ka,qou evk dexiw/n mou( e[wj a'n qw/ tou.j evcqrou,j sou u`poka,tw tw/n podw/n souÅ
(3) 루카 20,42-43
ei=pen ku,rioj tw/| kuri,w| mou\
ka,qou evk dexiw/n mou( e[wj a'n qw/ tou.j evcqrou,j sou u`popo,dion tw/n podw/n souÅ
3) 우리말 번역 대조
공동번역 |
최민순 신부님 역 |
새 번역 성경 |
직 역 |
토착화적 관점에서 바라본 번역 |
[다윗의노래] |
|
[다윗. 시편] |
[다윗을 위한 /다윗에 의한] |
|
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
하느님이 내 주께 이르시기를 |
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 |
야훼의 말씀, 나의 주님을 위한. |
야훼의 말씀, 나의 임금을 위한. |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
“내가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기까지 |
“내 오른쪽에 앉아라, |
“앉으라, 내 오른손 쪽 편에, |
“자리하거라, 내 오른 편에, |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때” |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을 위한 발판에 놓을 때까지.” |
내가 그대의 원수들을, 네 발을 위한 옥좌의 발판에 놓을 때까지.” |
※ 참고 문헌
•강대인, 「사목」(1월호): 성서 번역 결정에 관한 기록,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 , 「사목」(2월호): 번역의 원칙과 과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김영남, 「사목연구」:(논단) 한국 가톨릭 교회 (새 번역 성서) 그 특성과 몇 가지 쟁점, 서울: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4.
•성서와 함께 편집부, 「성서와 함께」(12월호): 새 번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서울: 성서와 함께 2005.
•오동춘, 경향잡지: 우리말 성서는 어떻게 번역되어 왔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년 11월.
•이성우, 인간연구: 한국인의 주체 의식과 성서 번역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 한국 천주교회의 우리말 성서 번역사를 중심으로, 서울;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3년 1월.
•이우식, 경향잡지: 성서 번역, 어디까지 왔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년 7월.
•임승필 역, (신약성서 새 번역1)「마태오 복음서」,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 , (새 번역 성서1, 개정판)「시편」,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조 광, 경향잡지: 복음서 번역을 위한 노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년 10월.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저, 한국가톨릭대사전 7권,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년.
•BibleWoks 6.
•http://www.catholic.or.kr/(성경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