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모 대학의 총장이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그가 사는 지방의 도시 번화가 옆에는 조그마한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까만 안경을 끼고 손에 작은 컵 하나를 들고 서서 구걸하는 시각 장애인 한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총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호주머니에서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어 컵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발자욱을 지나왔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 봤더니 그 구걸하던 사람이 검은 안경을 위로 치켜들고는 동전을 꺼내어서 얼마짜리인지 확인을 하더랍니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총장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돈을 들여다보고 있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시각장애인이 아닙니다." "그럼 왜 구걸을 하고 있는거요?" "예, 원래 여기에 서서 구걸하던 사람은 제 친구인데 잠깐 없는 동안에 제가 대신 서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당신의 친구는 어디를 갔소?"라고 총장님이 묻자 "저 앞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보러 갔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떤 잡지에 기록된 글에 15세의 소년이 사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아주 잘 쳐서 일본의 콩쿠르에서 입상한 소식이었습니다. 기자가 그 소년을 취재하면서 이것 저것을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어떤 소리입니까?" 그 소년은 조금 생각하더니 "부부싸움하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장애로 인한 고통도 엄청난데 2중 3중의 고통을 겪을 때는 정말 괴로울 것입니다. 특히 한국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는 나라입니다. 한국에 "밀알학교"라는 장애인 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를 지을 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변에 사는 정상인들 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동네에 장애학교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얼마 전에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엄마가 죽였습니다. 이유는 돌보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로 하여금 범죄케 했습니다. 마치 장애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 받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아멘.
특히 동양은 유교와 불교가 심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조상을 잘못 모셔서..." "부모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장애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잘못입니까? 자기입니까? 부모의 잘못입니까? 당시에는 이러한 장애는 자신의 죄이든지, 부모의 죄로 인하여 되어진 일이라고 흔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때로는 놀리기도 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나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무슨 사고를 만나면, 교회를 잘 안 나와서 그렇게 되었다든지,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든지 하는 말들을 쉽게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만사 형통(?)해야 합니다. 조금만 잘못되면 믿음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잘못해서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욥을 보십시오. 그의 죄로 인하여 고난이 찾아왔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심한 안질(또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는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극적인 감옥 탈출사건이 겹쳐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좋아서, 또는 기도를 많이 해서 감옥에서 풀렸고, 야고보는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많이 안 해서 순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흑백논리로 살아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잘되는 것, 성공하는 것 만이 축복으로 압니다. 때로는 우리가 주 안에서 망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실패해도 주 안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벧전4:12-13『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그뿐 아니라 벧전3: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씀 하셨습니다.아멘.
불행도, 행복도 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육이 논리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신앙은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는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소경을 고치시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고치시기도 하셨고(마가10장) 안수하셔서 고치시기도 하셨고(마 9장) 침을 뱉어서 고치시기도 하셨고(막8장), 요한복음에는 침과 진흙으로 고치셨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고치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침에 무슨 효능이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하셨는데 순종했더니 나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경험으로 또는 내가 겪은 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독단을 버려야 합니다. 얼마든지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에 침을 뱉어서 진흙에 이겨 그것을 눈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이라는 의미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실로암'입니다. 할렐루야!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온갖 조롱과 비웃음을 들었던 그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나았습니다.
표적으로, 이적으로 신앙을 체험하려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체험을 원한다는 것은 불신 사상이 농후합니다. 예수는 순종을 원합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낳는다는 믿음에 순종하였기에 나았습니다. 주님의 요구에 합리성과 논리성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비합리적인 요구에 순종한 사람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고침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합리적인 일을 시키면 그래도 할 수 있는데 창피하게 진흙을 눈에 발라서 뒤뚱대며 실로암으로 가라고 합니다. "병원에 가야지 왜 예수께 가야하냐?" 그러나 병원에 안가고 침을 바르고 실로암(예수)에 갔는데 눈이 열렸습니다. 이럴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