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들과 어떤 사람이 명사인지를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신문에 자주 나와야 명사다, 아줌마 팬이 많아야 명사다, 목욕탕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야 명사다'라며 한참 시끌벅적하다 한 지인이 말했다. "명사는 죽은 후에 결정납니다."
그 말은 즉, 장례식장에 아무도 모르게 나타나서 꽃만 놓고 조용히 사라지는 여인이 많을수록 명사란 얘기. 우리는 무릎을 탁 치며 그 말이 정답이라고 결론냈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물론 우스갯 소리다. 하지만 장례식에 몰래 나타난 애인의 숫자가 명사의 기준이라면 요즘은 너도나도 명사 축에 낄 것 같다. 그만큼 몰래한 사랑이 부쩍 늘었다.
구명시식은 시대를 담는다. 과거에는 불륜 상대자의 구명시식을 올려달라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있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배우자가 아닌 애인 영가를 천도하는 경우가 잦아져 이제는 자연스런 풍경이 됐다. 그들이 구명시식을 하는 이유는 '장례식에 가지 못해서'다. Y씨의 경우도 그랬다.
깨끗한 마스크에 차분한 인상의 Y씨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부터 터뜨렸다. 속앓이가 심했던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사람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구명시식 밖에 없어요." 그녀의 '그'는 의류수입업자로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남자답고 호탕한 성격에 돈 씀씀이도 화끈한 그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유부남인줄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이 시작됐다. 그가 수입하기로 했던 물품에 문제가 생겨, 입고 기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부도에 직면했고 이 일로 Y씨와 말다툼을 벌인 뒤 사이가 멀어졌는데 얼마 후 그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왔다. 자살 장소는 Y씨 집에서 가까운 한 모텔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Y씨는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정말로 자살한 걸까요? 저는 믿을 수 없어요." 구명시식에 나타난 영가는 Y씨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줬다.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던 지난날을 미안해하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해결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므로 더 이상은 밝힐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녀 외에도 내연의 여자가 많았던 남자의 바람기가 죽음을 재촉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점. Y씨가 장례식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자 영가는 '다음 생에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며 훗날을 기약했다.
한 경찰 관계자의 얘기론 도둑질도 생활 따라 바뀌고 시대 따라 변한다고 한다. 불륜도 그렇다. 과거에는 주로 편지나 미행으로 발각됐지만 현재는 주로 이메일이나 핸드폰으로 들통 난다고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찾아내는 사람이나 치열한 첨단 정보전을 벌이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가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부터가 문제인지 모른다. 인터넷의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통해 타인의 일상을 훔쳐보다 보니 무의식중에 남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하게 됐고 조금이라도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더욱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니 말이다. 불륜 역시 남보다 행복해지려는 잘못된 욕구에서 파생된 정보화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 아닐까.
나는 그들을 위해 '몰래한 사랑'을 들려줬다. 내가 뉴저지에서 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로 당시 작사가가 다른 사람으로 발표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흥겨운 노래에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살아났지만, 문득 두 사람이 불륜이 아닌 부부의 인연으로 만났다면 어떤 사랑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사랑은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결혼은 성스럽다. 금지된 사랑은 얼핏 자유의 쾌감을 주는 것 같지만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의 작은 행복이야말로 진짜 행복임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