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창선도 이순신 왕후박나무
-거북선 첫 출전을 지켜본 나무
남해군은 한반도 남쪽 바다 가운데쯤에 남해도와 창선도로 이루어진 섬 고을이다. 큰 섬 남해도가 마치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이라면 작은 섬 창선도는 아이의 눈앞에 달처럼 둥실 떠 있다. 섬에서 볼 때 왼쪽의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의 노량해협은 정유재란 마지막 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며 눈을 감으신 곳이기도 하다.
유배길의 선비에게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가 마치 이슬방울 같았다는 이곳 이슬다리 노량의 좁은 해협에 남해대교가 놓여 하동과 연륙이 되고, 남해도와 창선도는 창선교로 이어졌다. 창선도에서는 창선대교, 녹도대교, 초암대교, 삼천포대교가 이어져 사천시 삼천포항이다. 이 삼천포는 고려 성종 때 조세미 수송의 통양창이고 개성에서 뱃길로 3천리여서 얻은 이름이다.
여기 남해는 장보고의 맑은 바다인 청해, 능창의 누르는 바다인 압해, 이순신의 나아가는 바다인 진해이며 특히 이순신의 바다이다. 그렇게 ‘청해·압해·진해’의 같은 뜻을 품은 남해는, 풍성했기에 유달리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고 통쾌한 징벌도 가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 남해의 섬, 남해도는 또 조선시대에 유배를 온 지성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고을이다.
이곳 남해도 눈앞의 섬 창선도 단항 마을에 5백 살이 넘는 왕후박나무가 있다. 이 마을 뒷산인 연태산이 삼천포를 향해 길게 누워 있는 게, 마치 학의 모습이다. 또 학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단 듯하고, 마을 위치가 목 부분쯤이어서 붉은 단자인 단목인데 단항은 한자음이다.
이곳 단항의 왕후박나무에 얽힌 이야기이다. 어느 날 이 마을의 노부부가 앞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배 안에서 이상한 씨앗 하나를 얻었다. 이상히 여기고 뜰에 심었는데, 싹이 터서 무럭무럭 자랐으니 지금의 왕후박나무이다.
또 이 왕후박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도 부른다. 이곳 창선도 단항 마을 앞바다에서 왜와 전투를 치를 때다. 이순신은 무성한 대나무 숲의 대나무를 베어 작은 배에 가득 싣고 불을 질렀다. 불이 붙은 대나무는 마디가 터지면서 마치 대포를 쏘는 듯 요란한 소리를 냈고, 왜군은 그 이어지는 그 포성에 놀라 줄행랑을 놓았다. 그렇게 왜를 쫓아버린 이순신의 수군은 이 왕후박나무에서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왕후박나무는 용왕이 보내준 나무이며 이순신의 승전을 도운 신령스런 나무이다. 하긴 바로 창선도 눈앞의 바다가 사천해전의 현장이고 노량해협의 들머리이니 그럴 만도 하다.
1592년 5월 29일 새벽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판옥선 23척을 이끌고 좌수영을 나왔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3척이 노량에서 합세했다. 이때 왜선 한 척이 나타나자 대포를 쏘아 불살라버렸다. 이어서 사천만 깊숙이 용현면 선진리항의 왜선을 발견했다. 산기슭에 기다랗게 진을 친 왜병도 4백여 명이었다. 이순신의 이 두 번째 출전에 거북선도 처음 전투에 참여했다. 이순신은 밀물을 기다려 거북선을 앞세워 돌격작전을 펼쳤다. 이때의 난중일기이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이 아니었다. 사부(射夫)와 격군 가운데도 탄환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날이 저물자 조선함대는 사천만 들머리 모자랑포에서 하루를 쉬었다. 여기 사천시 해상케이블카가 놓인 각산의 북쪽 기슭 모자랑포는 삼천포항의 옛 이름이고, 남쪽 기슭 대방진굴항은 거북선이 정박했던 곳이다. 그리고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이때를 지켜본 역사의 나무이다.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남해 창선도 이순신 왕후박나무 – 호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