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로 신의 뜻을 의미하는 오푸스 데이는 전세계 10억 카톨릭 신자들의 다종다양한 조직에 극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극우비밀결사체로 정확한 실체는 설립된지 7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짙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유럽언론들의 집요한 추적에 따르면 현재 전체 회원수는 발생지인 스페인의 2만여명을 비롯해 이탈리아 6천명 포루투칼 2500명등 전 세계적으로 8만여명에 달하는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독일,프랑스,영국,스웨덴,덴마크등 유럽주요국가들을 비롯해 동구권 및 아시아의 카톨릭 국가에도 빠짐없이 비밀회원들을 확보해놓고 있다.
더우기 이들 회원 대다수는 고위성직자,외교관,대학교수,의사,언론인,법조인 등 그 나라의 상류층 구성원들이어서 오푸스 데이는 이들을 이용해 어둠 속에서 각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 회원의 3대 의무는 절대 복종,절대 비밀,절대 금욕이다.
중세 지하조직의 파시스트적 절대 율법을 맹종하고 있는 이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가하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나 바티칸고위층과의 막역한 친분을 이용해 바티칸과 전 세계카톨릭 내에서 절대적 위치를 확보해 놓고 있다.
유럽언론들은 이들을 교황의 비밀군대,성 마피아,카톨릭의 어둠의 세력이라고 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
문제의 오푸스 데이는 1928년 스페인 시골교구에서 과도한 공명심때문에 축출된 호세 에스크리바신부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들어가 빈민가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비밀결사를 만들면서 탄생했다.
그후 스페인 전역으로 비밀리에 지하세포를 확장해 나가던중 1936년 민주주의 진영과 파시스트진영간에 전면적인 스페인 내전 이 발생하자 파시스트들을 이끌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진영에 재빨리 가담했다.
그는 스페인내전 발발후 근거지를 프랑코 사령부가 있던 부르고스로 옮기는 동시에 추종자들을 동원해 당시 유럽의 민주주의 진영이 적극 지원했던 스페인 인민전선 타도에 앞장서서 혁혁한 공훈을 세움으로서 프랑코의 절대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1939년 인민전선이 진압되자 당연히 에스크리바의 세상이 활짝 열렸다.그는 1929년 바티칸의 존립을 인정받은뒤 무솔리니를 적극 지원하던 로마 카톨릭 교황청과 연대해 성스러운 카톨릭의 이름으로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댓가로 오푸스 데이회원들을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으로 권력 심층부에 대거 진출시켰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내각의 주요장관직이 모조리 오푸스 데이 회원들에게 장악되다시피했다.
오푸스 데이가 권력을 잡자 당연히 기업들과 출세지향적 지식인들은 주변에 벌떼같이 몰려 들었고 이 과정에서 오푸스 데이는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양손에 움켜쥐게 되었다.
권력과 부를 함께 장악한 오푸스 데이는 이것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대표적 작업이 대학 설립이다.
오푸스 데이는 프랑코 총독의 전폭적 지원아래 1952년 스페인 팜플로나에 나바레 대학을 설립햇다.3천여 그루의 고목들이 즐비한 115헥타르의 방대한 초원위에 세워진 이 대학은 오푸스 데이 전위부대 양산의 터전이 되었다.이 곳에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학비가 전액 무료인데다가 매달 풍족한 생활비가 지원되었고,졸업 후 에는 자신이 원하는 병원이나 관공서,기업에 대부분 취직이 가능했다.
이 대학은 지금도 1100명의 교수가 18000여명의 학생을 맡아 오푸스 데이 이념을 집요하게 주입하고 있으며 교내 곳곳에 서립자인 에스크리바 신부의 사진이 걸려있다.
오푸스 데이는 스페인 안에서의 교세 확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바티칸이었고 바티칸을 통한 전 세계 카톨릭 지배였다.
그러나 1963년 즉위한 교황 바오로 6세는 상당히 진보적이어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그러나 오푸스 데이는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바티칸 추기경들을 하나둘 포섭해 나갔고 마침내 기회는 왔다.
바오로 6세가 1978년 사망한것이다.
이때부터 오푸스 데이는 보수적 인물을 교황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그 결과 마침내 당시 폴란드 크라크스의 대주교로서 우익성향이 대단히 강한 요한 바오로 2세를 교황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에 선출되자 오푸스 데이는 마음놓고 세력을 전 세계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중남미등 제 3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한 전투적 해방신학이 출현하자 스스로를 보수우익의 방패라고 저처하며 앞장서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수행하므로써 바티칸 및 전세계 카톨릭 보수 진영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그후 오푸스 데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대단한 요한 바오로 2세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1980년대말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 공작에도 깊이 관여했고 1990년대대 들어서는 여세를 모아 이 지역에 세포조직을 급속히 심어나가고 있다.
1992년 5월 바티칸 광장앞에 30만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는 카톨릭 내의 양심 세력의 격렬한 반대를 묵살하고 지난 1975년 사망한 오푸스 데이 창시자 에스크리바신부에게 성인 다음가는 품계인 복자시호를 내렸다.
오푸스 데이의 오랜 지원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들에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최고의 면죄부를 선사한 것이다.
에스크리바의 뒤를 이어 1975년이래 지금가지 오푸스 데이 수장직을 맡고 있는 알바로 델 포르틸로 추기경은 이 기념식장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교황의 두 손을 꼭 감싸쥐었다.
어쩌면 그는 속으로 이제 전 세계 카톨릭 장악이라는 최종 목표달성은 단지 시간문제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