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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브르 미술관
30만 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의 전당’ 루브르 미술관.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입구는 안뜰에 세워져 있는 유리로 된 피라미드. 매우 넓은 홀로 되어 있는 지하에는 안내소, 서점, 카페, 레스토랑, 극장 등이 있다.
미술관의 전시실은 쉴리 Sully관, 드농Denon관, 리슐리외Richelieu관 등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피라미드에서 각 구역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다. 루브르의 소장 작품은 고대 오리엔트·고대 이집트·고대 그리스·로마, 조각, 회화, 데생, 미술공예의 일곱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새로운 모습의 루브르 미술관 Musèe du Louvre
파리 재개발계획 ‘그랑 프로제’의 일환으로서 새롭게 변한 루브르 입구는 ‘나폴레옹 정원’의 유리 피라미드로 중국계 미국인인 페이가 설계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반대하는 이도 많았으나 지금은 파리의 새로운 명소로서 손꼽히고 있다. 1993년 카루젤 광장에 지하 쇼핑가가 생겼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피라미드도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피라미드의 지하는 넓은 홀로 되어 있으며 가운데 홀을 두고 주위에는 안내소, 서점, 카페, 레스토랑, 오디트리암 등이 있다.
피라미드 안에 있는 안내소에서는 안내도를 무료로 준다. 루브르는 슈리, 드농, 리쉬류의 이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섹션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리쉬류는 원래 루브르 궁내에 있던 프랑스 재무부가 베르시 지구로 이전하면서 개장공사가 진행되어 루브르 창립 200주년에 맞추어 1993년11월, 새로운 모습으로 공개되었다.
대담한 내부 장식과 독특한 전시방법으로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세 개의 섹션은 번호가 붙은 정방형으로 좁게 구획 지어져 있는데 각 코너를 표시하고 있다. 또 세 가지의 색으로 층을 표시하는데 청색은 1층, 적색은 2층, 황색은 3층이다.
루브르의 소장품은 고대 오리엔트,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 회화, 데생, 미술 공예품 등 7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루브르의 역사
루브르 궁전의 기원은 12세기에 세워졌던 센 강 주변의 성채이다. 그 후 16세기에 프랑소와 1세가 궁전을 건설하기로 결정해 그 다음 대의 국왕들에 의해 증축, 개축되었다. 루이 14세 때에는 궁전으로서 외면을 당하고 예술가들이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미술관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로 특히 나폴레옹이 점령 했던 이탈리아, 이집트 등에서 가져온 전리품이 많다. 일찍이 당시 그리스인의 문화재상과 가수로 유명한 메리나 메르크리가 신문에 런던에 대영 박물관과 루브르 미술관은 이제 소장품을 주인에게 돌려주기를 바라는 글을 실었지만 뜻은 이루지 못한 채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여행 7일차
어제 아침에 호텔 식당에서 몇 가지 음식도 없었고 더구나 접시가 없어서 식사에 불편을 겪었는데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투숙한 관계로 식생활 습관이 비슷하여 먹기 편한 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좀 더 일찍 식당 개장과 함께 서둘러서 원하는 음식을 넉넉히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이라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든든히 먹어야 관광할 때 허기나 갈증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밖의 시민들은 두툼해 보이는 옷을 많이 입었다. 아침과 낮의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딱히 어떤 옷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는 듯하다. 긴 옷을 준비했다가 더우면 벗어서 걸치는 형태이고 우리 일행들도 그런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잠바를 꼭 걸쳤다. 모든 짐을 챙겨서 프런트에 ‘체크’하고 바로 버스에 올랐다. ‘루브르’박물관에 가기 위해서다. 개장시간이 있고 개장 전에 열을 서서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가면서 파리에서의 여행을 총정리 하듯 말하면서 ‘루브르’를 소개했다.
■ 루브르와 오르세-미술의 역사
●고대 오리엔트
기원전 4000년 무렵부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생한 예술작품을 총칭한다. 초기의 추상무늬가 아름다운 도기, <함무라비 법전비> 등 설형문자의 점토판, 아름다운 아라베스크의 <이슈타르 여신상> 강렬한 표현력으로 지금도 달려들 듯한 <다간 신전의 라이온>, 앗시리아 제국의 강력함을 재현하고 있는 조각 등이 많은데 풍부한 표현력과 중후한 질감이 특징적이다.
●고대 이집트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집트 왕조 3천년의 역사와 함께 번영했던 미술이다. 조각상이나 벽화 등에서 보이는 양식은 3,000년 간 거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인물들은 한결같이 정면을 향해 있으며, 항상 조용한 표정을 띠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미술’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미술’은 무엇보다 사후를 쾌적하게 보내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아멘호테프 4세와 왕비 네페르티티>, <서기 좌상> 등의 작품이 있다.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인들에 있어서 ‘나체’는 신성하고 엄숙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 드는 것이어서 육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끝없이 신에 가까워지는 것이기도 했다.
기원전 7세기의 아르카이크 시기에는 아직 이집트의 영향도 있어서 ‘정면성의 법칙’에 얽매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아르카이크 스마일(태고의 미소)을 머금고 있는 듯한 표현이 엿보인다. <바로스 섬의 아폴론>, <랑팡의 기사> 등이 있다.
기원전 5세기의 클래식 시기에 접어들면 그리스 조각은 최고의 성숙기를 맞이하게 되나, 그 시대의 오리지널은 전란으로 거의 소실돼 버린 상태이다. 지금은 다만, 로마 시대의 모방 작품을 통해 당시를 짐작해 볼 따름이다. <볼케제의 아레스>, <웨누스 게네트 리쿠스> 등이 있으나 두 작품 모두 모작이다.
이어서 헬레니즘 시기로 이어지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은 <밀로의 비너스>이다. 이외에도 루브르를 찾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반겨주는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역시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으로 그리스 미술 최고의 ‘미의 결정’이다.
●고대 로마
기원전 753년의 로마 건국에서부터 5세기 서로마 멸망 때까지 로마인은 그리스의 문화(특히, 조각)를 계승, 모방하면서 독자적인 표현을 구축해 왔다. 특히 건축에 있어서 그리스에서는 직육면체였던 신전 양식을 원통형으로 변형시킨 것이 로마인이다. 남프랑스 님의 퐁뒤 가르는 1세기 초에 건설되었는데 다리 위로 물이 흐르는 실용적인 구조물이다. 3단으로 된 아치의 연속은 힘이 느껴지는 가운데 아름답다. 특히 대리석을 소재로 한<드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제단>이나 <아라 파키스>의 부조는 뛰어난 사실적 표현에 준거한 기록이며 생생한 인물이 매력적이다.
현존하는 회하는 적지만 2세기에 밀랍으로 묘사해 놓은 <여성의 초상>이나 <엘 파이윰의 초상화>의 박진감은 실로 경탄할 만하다. <파리스의 심판> 등의 모자이크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르네상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까지 이어진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 재생시대의 양식으로 이 시대의 원근법의 발달은 회하에 깊이와 넓이를 부여했다. 조화, 통일, 안정감, 자연스러움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대표작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라파엘로의 <성모 상>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폴랑드르 회화
15세기 유화의 기법을 발견하여 미술로 발달시킨 것은 바로 이 플랑드르였다. 유화기법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 세부 표현, 사실성, 화면의 윤택함 등이 폴랑드르 회화의 특징이다. 반 아이크의 <니콜라 로랭의 성모자>(루브르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 맛사이스의 <고리대금업자와 그 아내>등이 있다.
●네덜란드 회화
1581년 독립을 선언한 상업과 프로테스탄트의 나라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들어와 회하의 한 시대를 구축했다. 거기에는 궁정이나 교회에 구속되는 일 없이 상인이나 농민들의 생활상 그대로를 자연스럽고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회하 최대의 천재로 <엠마오의 순례>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페르메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등의 작품이 있다.
●바로크
17세기 유럽 미술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바로크 Baroque는 ‘비뚤어진’, ‘허풍떨다’, ‘과장하다’ 라는 의미의 말이다. 다이내믹한 동선을 이용한, 넉넉하고 생생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의 24매 연작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로코코
18세기 프랑스 궁정을 중심으로 번성했는데 귀족들이 주역이 되었던 만큼 밝고 발랄하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와토의 <시태섬의 순례>, 부셰의 <목욕 후에 쉬는 디아나> 등의 작품이 있다.
●신고전주의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예술사조로 그리스-로마의 고전양식을 규범으로 하여 분명한 선과 감정을 담은 색으로 다듬은 형식 속에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해 놓고 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앵그르<샘>등의 작품이 있다.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에 대항해서 일어났던 예술운동으로 인간의 주관, 감정의 움직임을 중시하여 개개인의 자유로운 창조를 강조했다. 제리코의 <메듀즈호의 뗏목>,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사르다 나팔의 죽음> 등의 작품이 있다.
●사실주의
19세기의 이상화, 형식화(신고전주의)도 아닌, 감정, 주관을 중시하는(낭만주의) 것도 아닌,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내려고 한 예술사조이다. 대표작은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오르낭의 매장> 등의 작품이 있다.
●인상파
1860년대 프랑스에서 살롱(관청에서 주최하는 전람회)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빛과 공기를 묘사하여, 그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는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음악가로서는 드뷔시가 여기에 포함된다. 마네의 <올렝피아>(1863), 모네의 <루앙대성당>(연작,1984), 루누아르의 <무랑 드 라 갸렛트>(1876), 드가의 <목욕하는 여인>(1886) 외에도 시슬레, 피사로 등의 작품이 있다.
●점묘파
인상파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추진한 기법이다. 대상의 색을 예리하게 원색으로 분해하여 잔 점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로써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원색으로 대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주창자 쇠라의 요절로 널리 성행하지는 못했다. 조르주 쇠라의 <폴 앙 벳산의 항구>(1888), 폴 시냑 등의 작품이 있다. 색의 분해라고 하는 조형이론은 고흐, 표현주의, 미래파 등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후기 인상파
고흐, 세잔, 고갱 등으로 대표되는 미술양식. 인상파풍의 색깔 사용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세잔은 확실한 공간과 명확한 형태를 구축하였으며, 고흐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고갱은 윤곽선과 단순한 색채로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세잔의 <수욕도>(1894), 고갱의 <백마>(1898),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1890)등의 작품이 있다.
카루젤 개선문은 1850년 제작되었으며 3세기 로마풍이며 루이 14세가 퍼레이드 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콩코드광장, 유리 피리밋, ‘루브르’는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혁명이후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박물관 소장품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나폴레옹에 의한 약탈문화라고도 하는데, 관점에 따라서 저개발국의 문화 유출사례를 들면서 문화수준이 안되고 지킬 수준이 안 된다면 선진국에서 잘 관리 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타당성을 갖는다고 했다. 덕분에 ‘로제타석’의 해석을 주도했고 이집트고고학의 시발이었으며,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이라는 긍정적 결과가 났다고 해석하였다. 뛸리르 공원, 13세기에 만들어진 오벨리스크, 황금유리 피라미드 등등 문화에서 과거-현재-미래는 파리에서 하나로 통하고 concept에 의해 이루어진 문화라는 것이다. ‘루브르’ 입장료는 7€~10€이며 세계최대 박물관입니다. 1년간 약 600만 명이 관광하고 베르사유는 1년간 300만 명이 관람하는데 보통 1~3시간을 줄을 서서 들어갑니다. 우리일행의 파리 3일중 1일차는 파업으로, 2일차는 휴관으로, 이제 3일차에서 비로소 관광을 하게 되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약2000여명이 종사하며 많은 예산이 소요되고 있는데 입장료와 예약료, 현지 가이드의 비용으로는 운영비의 30% 밖에 충당 못하고 있고, 나머지 70%를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만종’의 작품이 있는 ‘오르세’ 박물관에는 1500€가 지원됩니다. ‘루브르’에서 관심 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프랑스를 구경하고서 한마디로 특징을 말한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합니다.
우리는 ‘루브르’박물관 광장 앞에서 내려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려 도로를 건너,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니 일부일행들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입하러 간 사이에 건물내부의 광장에서 사진을 찍기로 하면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줄을 서라하여 모두 함께 줄을 서서 입구에 이르니 흑인 통제요원이 표가 없다면서 통과를 거부했다. 그때까지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입 못했다고 했다. 별수 없이 한쪽으로 비켜서 있어야했고 30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가이드가 표를 구입하여 왔는데, 다시 처음부터 줄을 서라고 한다. 그러한 ‘팀’들이 몇 있어서 우리가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우리의 원래 ‘가이드’가 말해도 막무가내다. 확실히 그 사람들은 머리가 나쁜가 보다. 까탈스럽고 머리가 안 돌아가는 흑인이 다른 곳에 통제하러 가는 사이에 우리 일행은 잽싸게 줄을 이루어서 통과해 버렸다. 우리는 ‘의지의 한국인’이 아닌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에 내려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문화적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이집트의 ‘로제타석’은 익히 배우고 들어서 그렇다 치고, 수많은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부조들과 석상,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했던 조각품들을 보면서 현실감 있는 사실주의적 표현에 감탄했다. 거대한 미술품과 전시실의 규모에 제압되었고, 우리 부부는 부지런히 일행과 뭉쳐서 다녔다. 축소된 중세의 ‘루브르’와 요새 유적을 지나서 ‘함무라비 법전’, ‘밀로의 비너스’ 등의 작품을 보았고, 2층에 오르며 ‘모나리자’로 줄달음 쳤다. 각 전시실마다 인파로 붐볐으며, ‘모나리자’전시실에 들어서기 전에 ‘가이드’는 설명을 하였다. 3m 지점이 최적 감상거리라는데 ‘통제선’이 설치되어있고 사람들이 가로막아서 거리와 관계없이 다가가서 보았다. ‘캔버스’크기의 작품이었으며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배경 설명, 그리고 어느 각도에서나 ‘모나리자’의 눈빛이 마주칠 수 있다는 점으로 현대 화법으로도 어렵다는 것이다. 분비기도 하고 시간도 어느 정도 되어서 일행은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 앞으로 가서 어제 ‘베르사유’에서 대관식 작품과 차이를 설명했다. 화가 ‘다비드’가 황제의 공주를 서로 좋아하여 대관식 그림을 그리고 나서 보니 공주시선이 2층 ‘다비드’를 향했던 것과, 화가라는 신분적 차이를 못 마땅히 여긴 나폴레옹이 다비드를 추방시켰고, 이에 공주를 사랑했던 ‘다비드’가 다시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복기’하면서 공주의 드레스를 분홍색으로 그렸는데, 화가가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전혀 보지 않고 한군데도 틀림없이 그릴 수 있다는데 경이함과 그의 사랑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모나 리자는 여왕과 같은 평온함으로 미소 짓고 있다. 정복, 잔인함에 대한 그녀의 본능, 그녀의 혈족이 남긴 모든 유산, 유혹하고 현혹하려는 의지, 허위로 치장된 사랑스러움, 나쁜 의도를 감추고 있는 친절-이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명랑한 베일 뒤로 사라지며 그녀가 미소의 시선 속으로 침잠한다. 선하고 악하게, 잔혹하며 자비롭게, 사랑스럽고 심술궂게 그녀는 미소 짓는다. <안젤로 콘티, 모나리자에 대하여, 1910년>
원래 몬나 리자 델 조콘다(몬나=Monna는 마담=Madam)로 불렸던 리자는 1479년 태어났고, 1496년에 명망 높은 포목상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와 결혼했다. 그녀는 피렌체에서 살았는데, 그녀가 스물네 살 때쯤 되었을 때, 자기보다 두 배가량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눈에 띄게 되었다. 당대 최고 천재이자 백과사전처럼 박식한 인물인 레오나르도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자연과학자, 기계공학자로서 모든 분야에서 미술사학의 창시자인 조르조 바사리(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 감탄할 만한 신적인 재능”의 업적을 남겼다. 레오나르도는 3년 동안이나 ‘리자부인’의 그림에 매달렸고, 모델의 따분함을 달래고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고 한다(레오나르도는 초상화에 나타나는 우울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악사와 광대 등을 불렀는데 이런 노력으로 모나 리자의 미소가 있었다고 한다.).
■ 돈이 세상을 지배하다.
● 근대 초기의 상거래와 주화
작은 ‘무통도르 금화 한 닢’이 ‘12파리 환’으로 가치 절상되자, 빵과 포도주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환전상들은 적절한 환시세를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가치가 없는 돈더미를 쌓아두고 있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친 욕설을 퍼부으면서 주화를 환전상 가게 너머 강 속으로 내던졌다.-1427년 파리시민의 일기 중에서
퀸텐메시스 환전상과 아내, 1514
네덜란드 메너리즘의 대표적인 화가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의 1538년의 작품으로서 메너리즘이 가지고 있는 회화적인 특성(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을 살짝 위반하는)이 잘 표현되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상거래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파라오의 나라에서는 다른 문화권과의 사이에 물물교환을 일차적 목표로 하는 교류가 이루어졌다. 지불수단은 농산물, 모피, 도구 등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희귀한 새의 알록달록한 깃털이나 값비싼 조개껍질, 혹은 보석 등이 지불되었다. 페르시아 인들이 비로소 화폐주조를 생각해 냈고 이로써 화폐경제가 교환경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화의 황금기는 수입무역이 유행하던 중세 후기부터였다. 갑자기 이탈리아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중국에서 비단을 싣고 오거나 인도에서 향료를 싣고 오는 대상을 향해 지중해를 지나 노를 저어 나갔다. 베네치아나 제노바, 피사로 돌아온 항해자들은 자신들이 사온 귀한 물건들을 되 팔았다. 독일에서는 거대한 상점들이 생겨났고, 북해와 발트해에서는 일종의 상인협동조합인 한자동맹(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세력이었다. Hansa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형태로 국제시장이 형성되었다. 플랑드르의 화가 쿠엔틴 마시스는 안트웨르펜의 한 환전상을 관찰했다. 안트웨르펜은 당시 네델란드의 중심항구였고 따라서 최상급 경제 중심지였다. 환전상은 그에 걸맞은 명망을 누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색하고 탐욕적이며 고리대금업자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환전상의 부인은 기도서 앞에서 생각에 잠긴 듯하다. 그녀는 내심 남편과 자신이 돈과 부에 의해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는지 모르겠다.
■ 짐이 곧 국가니라!
● 루이 14세가 이빨을 뽑은 까닭은?
왕은 통치자이자 지상에서의 신의 형상이고, 그의 위엄은 신적인 존엄의 반영이다. 국가 전체와 백성의 뜻이 그 속에 담겨있다. 왕에게 봉사하는 자만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다.
<대관식의 제왕 성장을 한 프랑스의 루이 14세>
1701/02, 캔버스에 유채, 277*194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루이 14세 초상>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프랑수와 부셰>
그는 사람들에게 경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려 했는데, 사실은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태양왕이자 절대주의의 상징인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힘 있고, 화려한 독재적 황제로 그려지길 희망했다. 그는 부러움을 살 만한 체격을 지녔고, 잠자리에서도 경탄할 만한 정력을 과시했다. 그가 후세에 남긴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그 어떤 여자도 그로부터 안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정치에서도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네덜란드 습격, 스트라스부르 약탈, 독일 지역 점령. 하이델베르크와 만하임을 잿더미로 만든 일 등-그의 이런 행동들은 당시의 사람들만 격분시켰던 것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후세의 평가자들로부터도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행동은 무자비함, 잔인함, 위법성, 비열함에 대한 원형으로 여겨졌다. 루이 14세는 이를 드러내면서 웃기를 좋아했지만 말년에는 단 한 개의 치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릇된 위생 관념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물로 씻기보다 향수를 선호하던 그 시절에 사람들은 치아가 위험한 감염의 진원지라고 믿었다. 치아가 질병을 유발시킨다며 왕의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주치의들은 그에게 건강할 때 치아를 빼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불행하게도 루이 14세는 이를 승낙했고, 그후 의료 사고가 연이어 생겼다.
위풍당당하던 통치자의 용모는 불쌍한 인간의 모습으로 왜소해졌다. 마취 없이 진행된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첫 국부 수술이 끝나자마자 농양이 생겼다.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의사들은 나머지 모든 치아를 뽑아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이때 구개골의 일부가 함께 부숴졌다. 그 때문에 입천장에 생긴 구멍은 “살균 목적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로 소독되었다. 왕은 그런 고문 아닌 고문을 용감하게 넘겼으나 그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치아가 없는 루이 14세는 음식물을 그냥 넘기다 보니 식사가 매우 힘들어졌다. 또 입천장에 있는 구멍으로 인해 입 안과 코가 서로 통했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실 때 포도주의 절반가량이 코로 내뿜어졌다.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루이 14세는 권력자로서의 공식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죽을 때까지 아주 예의 바르고 상냥하며 평정을 잃지 않았고, 어떤 누구에게도 굴욕감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 마치 순풍에 돛 단 듯했다
● 권력을 향해 가는 코르시카의 악마
군인들이여, 제군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나는 그대들을 지구에서 가장 비옥한 평야로 인도하겠다. 부유한 지역과 대도시들이 그대들 손 안에 들어올 것이다. 거기서 그대들은 명예, 영광, 그리고 부귀를 얻을 것이다.
<아르콜 다리에 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6년 11월 17일> 루브르 박물관, 파리
나폴레옹이 쓴 불어 철자들은 괴발개발이었고, 그의 강한 코르시카 억양은 촌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나폴리옹’처럼 들리게 발음했기 때문에 동급생들은 그를 경멸하듯 ‘라-파이유-오-네(짚으로 만든 코)’라고 불렀다. 그의 성적은 중간 정도였으며, 독일어 교사는 그를 지진아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코르네유, 몽테뉴, 몽테스키외, 플루타르크, 타키투스 등 어려운 내용의 책을 미친 듯이 읽어댔다. 그는 잊어버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고, 예견력이 있던 한 교사는 그를 두고 “화산이 불을 지피고 있는 화강암”이라 칭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이 아직 작은 불 위에서 끓고 있는 중 이었다.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폐쇄적이고 어두운 성격의 감수성이 강한 소년이었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사관 후보 생도로 입학한 그는 1년 반 뒤에 소위로 임관되었다. 포병연대 장교로 옮겨간 그는 프랑스 혁명 이념에 호의적으로 동조했고, 프랑스 정부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에 열렬한 코르시카인으로서 가담했다. 1793년 그와 코르시카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자, 그의 집안은 모두 프랑스 본토로 도망쳐야 했다. 나폴레옹은 다시 군대에 입대했고,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대대 및 포병대 지휘관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후 잠깐 동안 구금되었으나, 이것도 그의 출세를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다.
놀라운 지도력을 지닌 천재적 전술가이자 교양 있는 인물로 높이 평가되었던 나폴레옹은 26세의 나이에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고참 장군들은 광분해서, 빗질도 하지 않은 긴 머리에 왜소한 체격의 신출내기를 자신들의 코앞에 들이밀었다고 날뛰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뚝심이 있었다. 그는 북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교전을 노련한 응수로 차례대로 성공시켰다. 그는 “신출귀몰하게 전투에서 전투로, 승리를 거듭해” 나아가는“새로운 알렉산드로스”라고 칭송되었다.
화가 앙투안 장 그로는 이 시기의 한 장면을 형상화했다. 베로나에서 남동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인 아르콜에서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1796년 11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 나폴레옹은 여기서, 만투바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던 지원군을 무찔렀다. 프랑스는 그를 “전장의 행운아”라 칭송했고,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란은 열광에 차서 이렇게 환호했다. “시인은 생명의 포도주와 영웅의 정신이 보관되어 있는 신성한 그릇이다. 그러나 이 청년의 정신, 그 빠른 정신은, 그 그릇이 그것을 감싸려고 할 때, 그것을 폭파시키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폴레옹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계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아르콜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시 프랑스 최고의 정부 관청인 집정부의 사신이 찾아왔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예언적 말을 했다. “제가 이곳에서 한 일은 아직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겨우 출세의 출발점에 서 있을 뿐입니다. 단지 집정부를 강화시키기 위해 제가 이탈리아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얻은 줄 아십니까?” 나폴레옹은 자신의 운명을 일컬어 “마치 순풍에 돛 단 듯했다”고 말했다.
■어느 여름날의 열기 속에서
조르주 쇠라 (프랑스, 1859~1891)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1883/84년, 캔버스에 유채, 201*301.5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 센 강에서의 오후
무자비하고 지루하며 무겁게 여름이 펼쳐져 있다.
마치 빈둥거리는 왕이 죽음의 형벌을 선포하듯-밀집되어 모이기도 하고 아가리를 벌리기도 하는 백색으로 작열하는 하늘에서. 사람은 작품을 떠나 자유롭게 휴식을 취한다.
유리처럼 견고한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끼어들지 못한다. 말벌들이 욍욍거리며 주위를 날아다닌다. 공기가 반짝거린다. 더위는 짓누른다. 그리고 부동의 상태 속에서 정적이 타오른다. 물속의 소년만이 무슨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일까? 아니면 강 중간에 있는 친구에게 소리쳐 무언가를 알리는 것일까? 1859년 파리에서 태어난 화가 조르주 쇠라의 그림 속 계절은 거의 전부 여름이다. 그가 맨 처음 그린 유화들에서부터 그랬다. 거기에선 여자와 남자들이 이삭을 줍고, 포장공들이 국도에서 일하거나, 농부들이 전답을 낫으로 베고 있다. 시인 귀스타브칸이 파리의 클리시가에 있는 비좁은 쇠라의 아틀리에를 방문했을 때도 여름이었다. 이때 쇠라는 막 그림 한 점을 완성한 참이었고, 그 그림에 바친 “열성과, 그 사이 견디어 낸 무더위 때문에 그는 바싹 여위어 있었다.”
외톨이로 은둔 생활을 하고, 매우 진지한 성격에, 말수가 적었던 쇠라는 물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여름 폭서기의 삼복더위를 물가에서 보내길 좋아했다. 그는 센강 중앙의 섬 그랑드자트도 알고 있었다. 당시 아직 나무가 있던 이 섬은 파리 시민들이 즐겨 찾는 소풍 장소였다. 쇠라는 부모님 댁에서 하는 저녁식사에 정확하게 나타나기 위해, 항상 격식 있는 옷차림에 실크 햇을 쓰고 정확한 발걸음으로 그가 살던 집에서 마젠타가까지 걸어가곤 했는데, 이 때문에 동료 화가인 에드가 드가는 그를 조롱하듯 ‘공중인’이라 불렀다. 그런 그가 회화의 여름철 소재를 찾던 중 그랑드자트 섬보다 더 멀리까지, 즉 파리 북서쪽의 아니에르-쉬르-센까지 나갔다. 이곳은 오늘날 약7만 2,000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현대 공업 지대이다. 벌써 그 당시에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있는 공장들이 이 도시의 실루엣을 결정했다. 쇠라는 그것을 그림<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에 그려넣었다.
아마 그 당시에도 센 강에서의 수영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잠수부가 1미터 깊이에서 눈앞의 손을 못 알아볼 정도로 부유 물질과 유해 물질로 가득 찬,“파리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탕녀”인 센 강은 18세기 말경에 이미 오염이 심각한 상태였다. 1790년 2월 14일 시행된 이른바 센 강의 악취 측정에서 왕실 의료 상담원 봉세르프가 “코를 찌르는 듯한 매캐한 알칼리성의 악취에 코를 싸쥐었는데, 이 악취가 그이 기도 기능을 손상시켜 목과 혀가 심하게 부어올랐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대도시 파리의 폐수는 센 강으로 흘러들기 전에 많은 양이 정화되고 있다. 때문에 머지않아 쇠라가 살던 때보다 더 걱정 없이 아니에르에서 수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커지고 있다.
사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터키탕>
■모두들 자연의 상태에 있었다, 완전히 나체로
● 목욕탕에서의 즐거움
여성 전용탕에서 목욕하는 이들은 2백 명 남짓 되었다. 첫째 줄의 소파는 베개와 비싼 카펫으로 덮여 있었다. 귀부인들은 거기에 앉았고, 여자 노예들이 그들의 머리를 빗겼는데, 모두들 자연의 상태에 있었다. 완전히 나체로...나는 그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만약 여탕에 들어오려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메리 워틀리 몬터규 부인이 엘리자베스 리치에게 보내는 편지.
소피아의 여탕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에 대해 쓰고 있다. 1717년 4월 1일.
고대 그리스에도 목욕탕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규모 대중탕으로 발전한 것은 로마의 업적이었다. 대형 물받이 욕조뿐 아니라 벽과 바닥까지 데워지는 공중목욕탕은 로마 문명의 정점이었다. 훌륭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공중목욕탕은 위생과 체력 단련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회적 집합소이기도 했다. 고위 정치인들은 목욕 슬리퍼를 신고 함께 한증 요양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로마의 멸망과 함께 이러한 목욕 문화는 유럽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간소한 규모의 오락거리가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중세 뉘른베르크에서는 화려한 공중목욕탕 대신 13개의 공중 ‘욕실’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뜨거운 물이 든 목제 물통이 구비되어 있고, 또한 종종 한증탕이 갖춰져 있기도 했다. 그 당시 이발사는 신체 위생 외에- 김이 나는 육체들 가운데서- 의학적 시술도 담당했는데, 치아뽑기, 방혈법(防血法), 피부에서 피 뽑기, 심지어 간단한 수술 등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공중 ‘욕실’들이 교회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거부감을 유발시켰던 것은 ‘욕실’에서 벌어지는 유흥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의 왕 벤첼4세는 민감함 피부 탓도 있었지만 미끈하게 빠진 목욕 도우미들의 시중을 받을 요량으로 프라하의 목욕탕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고대 말기의 목욕 문화가 살아남았는데, 그 이유는 ‘함맘(hammam)'이라 불리는 공공 목욕탕을 방문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에서는 의무였기 때문이다. 여류작가 메리 워틀리 몬터규 부인의 서간문을 읽고 자극을 받은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그런 목욕탕 건물 내의 여성 전용탕을 그렸다. 이 시점까지 이미 상당히 존경받는 거장이었던 83세의 노장 화가는 <터키탕>이란 그림으로 자신의 전 작품을 요약했다. 수많은 데생 이후 이 그림의 첫 번째 버전을 그린 앵그르는 그것을 1859년 12월 나폴레옹 왕자에게 증정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 그림은 앵그르에게 되돌아왔다. 왕자비가 그림 속 나체 여인들을 보고 경악했다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그런데 같은 그림을 약간 변형시킨 두 번째 버전으로 <터키탕>을 내놓자 관중들은 열광했다. 사람들은 존경심에 가득 차서 “동양적 교태의 랑데부”, “육체의 축제”, “관능의 정물화”등의 찬사로, 구성과 형태에 있어 피카소와 다른 후기 미술가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그 그림을 평가했다. 이 에로티시즘의 걸작품 이후 앵그르는 더 이상 ’냉혹한 신고전주의자‘가 아니라 선구적 ’혁명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붓과 팔레트를 들고 봉기에 가담하다
●1830년의 혁명
아, 파리의 위대한 1주간! 거기서 불어오기 시작한 자유에의 용기는 물론 도처에서 침실 등불을 넘어뜨렸고, 그리하여 몇몇 왕좌의 붉은 커튼이 화염에 휩싸이고, 금빛 왕관이 활활 타오르는 취침용 모자 밑에서 달아올랐다. 그러나 옛 추적자들은 금방 소화용(消火用) 양동이를 끌어오고, 이젠 더 주의 깊게 염탐하고 다닌다.
하인리히 하이네,≪영국단장(斷章)≫, 1830년 11월.
빅토르 위고는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를 쓰기 위한 자료 조사 중이었던 그는 나흘 전 딸을 출산한 아내를 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18권으로 이루어진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써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될 젊은 알렉상드르 뒤마는 파리 현장에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 쌍발식 엽총을 어깨에 메고, 수천 명에 달하는 대학생, 상인, 노동자, 배우들과 함께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치려 했던 것이다. 파리는 다시 프랑스 혁명 때와 비슷한 광경이 되었다. 권총과 곤봉, 무기와 칼을 든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왕의 군대에 맞섰다. 폐지되었다고 믿었던 압제의 구체제(무챠두 rѐgime.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왕정-옮긴이)가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번져가고 있었다. 1814년에 이전의 부르봉 왕가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혁명 당시 처형 되었던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망명자로부터 소환되어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를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온건하고 신중한 태도로 자유 정치를 추구했는데, 그것은 현대적 자유 개념과 구제도 원칙들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삼형제 중 막내인 샤를 10세가 랑스에서 중세의 화려한 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개방적 동시대인들로부터 보수적이고 경솔하다는 평을 받았던 그는 혁명 전의 구체제로 복귀하고자 했다. 샤를 10세는 귀족들에게 옛날 칭호와 특권을 되돌려주고, 혁명 중 잃은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에게 10억 프랑을 수여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1830년 7월 25일 샤를 10세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대다수의 시민들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등 독재적 행위를 단행하자, 민중의 분노는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1830년 7월 28일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장소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샤를 10세의 용병들이 좁은 골목길에 총을 쏘며 길을 내는 동안, 반란 가담자들은 창문에서 가구와 빨래통, 기왓장과 연장통 등을 내던졌고, 용병들 다리 사이에 우마차 가득 실은 멜론을 쏟아 부었다. 3일 동안 시가전은 광란에 가까웠고, 이때 풍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는 얼굴 한가운데에 칼로 베인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승리는 시민들의 것이었다.
1830년 8월 3일 샤를 10세는 퇴위했고 도망치듯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민중 봉기를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붓과 팔레트를 집어 들었다. 그는 1830년 10월 형인 샤를 앙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함께 싸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조국을 위해 적어도 그림이라도 그리려 해요.” 혁명화(革命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1830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래서 ‘루부르’의 대관식 그림의 공주들은 모두 같은 흰색 드레스이고 ‘베르사유’의 대관식 그림은 ‘다비드’가 추방되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그림의 작품성도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경탄스럽지만 그런 배경 얘기는 더욱 흥미롭고 생명력을 주어서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것 같았다. 작품은 당시 대관식의 사실적 표현에 그치지만 ‘다비드’의 사랑이 덧붙여진 대관식 작품은 그보다 갑절로 귀하고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되었다.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버스 차창을 지나는 풍경을 보듯이 그 귀하고 사연 많은 작품들의 말들을 외면한 채 바삐 전시실들을 빠져나갔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 간간히 눈에 익숙한 작품이 있었으나 그뿐 백화점 쇼핑도 그렇게 안할 것이라는 속으로의 푸념을 삼키면서 박물관 관람을 마쳤다. 조금은 허망했으나 일정과 시간의 제약은 단지 우리가 파리의 ‘루브르’를 다녀갔다는 것과 증명하는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30만점이 넘는다고 하니 그 이상은 사실 욕심일지도 모른다. 밖에 나와서 우리는 잠시 시간을 가졌고 런던으로 가기 위해 점심식사도 해야 하고 유로스타가 정차하는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 디종 Dijon
디종은 달팽이 (에스카르고)와 부르고뉴 와인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중세, 이 마을이 부르고뉴 공국으로 번영하고 있던 무렵 궁전에서 자주 열렸던 대연회에는 멋진 요리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당시 테이블에 달팽이가 올라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4세기 부르고뉴 대공 필립은 디종의 명물 머스터드 소스를 하룻밤 향연에 32ℓ나 썼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호사스럽던 시대의 흔적은 디종의 구시가 건물이나 부르고뉴 대공에 의해 보호된 예술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아비뇽 Avignon
중세의 어느 한 때 교황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교황의 바빌론 포로 시대’라 부르는 시절로 당시에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불과한 아비뇽이 교황청의 역할을 했다.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이 바로 그 잔재다. 교회라기보다는 성채이고 또한 교황의 궁전이었다. 견고한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교황청은 여전히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다.
언덕 위에 있는 교황청에서 론 강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강 중간쯤에서 끊어진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가 바로 유명한 생 베네제다. 신의 계시를 받은 베네제라고 하는 목자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가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현금을 모아 그의 일생을 바쳐 지은 다리다.
론 강의 범람으로 다리의 대부분이 유실되었지만 다리 중간쯤에 그를 기리는 작은 예배당은 그대로 남아 있다. 교황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초라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론 강의 수호자로서 그를 숭배했던 민중 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권위를 상징하는 교황청과 소박한 베네제 다리가 공존하는 아비뇽은 교회가 가진 두 가지 모습을 보여 주는 곳이다. 광장부터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어느 쪽으로 가든 교황청 앞 광장과 연결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것이 높이가 50m에, 두께는 4m나 되는 교황청 Palais des Papes의 거대한 벽이다. 견고한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교황청은 전체 면적은 1만 5,000㎡로 상당히 넓다. 베네딕투스 12세가 만든 북쪽 부분은 구궁전, 클레망스 6세가 세운 부분은 신궁전이라고 한다. 궁전이라고 해서 상당히 화려할 것 같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넓기만 할 뿐 안은 텅 비어 있다. 프랑스 혁명 때 석상 같은 것이 모두 파괴되거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 오툉 Autun
여성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마리아형과 이브형으로 모두 성서에 나오는 인물인데, 성격은 전혀 다르다. 순결하고 고결한 영원한 처녀이면서 모성의 상징인 성모 마리아와, 유혹적이고 자유분방한 이브. 그러나 이브가 처음부터 위험한 여성이었던 것은 아니다. 금단의 열매를 따먹기 전까지는 그녀도 죄를 모르는 여인이었다. 오툉에 있는 롤랭 미술관에 있는 부조는 이브가 처음으로 죄를 알아 버린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부조는 12세기에 만든 것으로 원래 오튕 대성당 북쪽 문을 장식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성당 정면에는 그녀가 범한 죄가 초래한 최후의 심판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프랑스 롤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각 '지상낙원의 이브'. 프랑스 작가 오툉이 만든 것으로 중세시대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가이드’는 파리 관광을 마치면서 이곳에서의 인상을 정리해 주었다. 루브르의 미술작품, 에펠탑의 야경과 근처 조경, 몽마르뜨 언덕과 화가, 카페, 성당 세느강의 유람선과 야경, 베르사유 궁전, 라데팡스는 신도시로서 사람이 아닌 모든 수단은 지하로 다닌다는 계획 신도시, 퐁 미셸의 먹자골목에서 프랑스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저녁식사. 년 말 X-MAS때의 샹제리제 거리, 노틀담 성당에서의 미사참여를 파리 관광의 묘미라고 했다. ‘가이드’는 유로스타 좌석이 우리 부부는 77,78번이라고 했다. 유능하고 차분했던 현지 ‘가이드’도 명함을 건네주면서 작별을 했고 우리는 기차역에서 간단히 출입국 수속을 거쳤다 그것은 국경을 넘기 때문이었다. 수속이 끝나고 시간이 있어서 그곳 역에서 부대 간부들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샀다. 파리 ‘에펠탑’이 부조된 금장된 것으로 가치 있어 보였다. 유로스타는 영국과의 해협을 지하로 통과하는데 중간에 섬이 있어서 그때는 밖으로 나오지만 그 외에도 바다 속 지하를 지난다. ‘가이드’는 수중을 기차가 지나므로 잠을 자면은 수중의 아름다운 광경을 못 본다면서 잠자지 말라 하는데 농담이다. 몇 명은 무슨 말인가 하는데 기차는 물속을 가지 않고 지하터널을 가기 때문이다. 제법 웃자는 소리도 많이 늘었다.
프랑스 와인
∎지방별 와인
• Bordeaux 보르도
세계가 인정하는 프랑스 최고의 적포도주 산지다. 그 가운데서도 St.Emilion, Haut-Médoc, Pomerol 등의 지역이 유명하다. 대중식당에는 메뉴에 그저 Bordeaux라고만 쓰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식당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일 수도 있다. 백포도주로는 Sauterne의 것이 고급의 달콤한 와인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최고급의 와인 ‘샤토 디켐’의 산지이기도 하다. 이들 단맛의 포도주는 디저트를 먹을 대에 마시면 딱 좋다. 고전적인 파트너로 소테른을 푸아 그라와 곁들이기도 한다.
보르도 부르고뉴 보졸레
• Bourgogne 부르고뉴
보르도의 부드러운 맛에 비해 강한 맛이 나는 적포도주가 특색으로 Romanée-Conti, Clos-de-Vougeot, Satenay, Beaune, Chambertin 등이 유명한 산지다. Chablis, Meursault, Montrachet는 신맛이 나는 고급 백포도주로 유명하다. 조개 등 어패류 요리에 잘 어울린다.
• Beaujolis 보졸레
보르도나 부르고뉴에 비해 적당한 가격으로 마실 수 있다. 상큼하고 뒷맛이 가벼워 요즘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다. 약간 차게 해서 마시면 더욱 좋다.
• Côtes de Provence 코트 드 프로방스
이 지방의 포도주 가운데 고급품은 적지만 적포도주나 로제와인이 제조되고 있다. 식당에서도 비교적 싼 값에 제공되고 있다.
• Côtes du Rhone 코트 뒤 론
암적색의 알콜 도수가 높은 포도주가 생산되고 있다. 이포도주도 비교적 값이 싼 편이다.
<배경음악같은 와인 카스텔 코트 뒤 론> 그림
프랑스 와인 즐기기
와인의 등급
• AOC (Appellation d'Origine Controlée원산지통제 명칭 와인)
특별히 지정된 구역에서 나온 특정 종류의 포도로 만들어지고 양조 과정까지 엄격하게 관리되는 것으로, 숙성된 고급와인이다. 보르도의 경우 미정 부뙤이으 오 샤또(Mise en bouteille au chateau)'라고 쓰여 있으면 다른 밭의 포도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포도주로, 최고급에 속한다.
• VDQS (뱅 델리미트 드 꺌리떼 쒸페리와르 Vins Délimités de Qualite Superieur)
AOC에 준한 기준으로 관리되는 상등품 와인이다. AOC가 유명 산지의 와인인 데 비해 VDQS는 그와 같은 수준의 한정된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에 주어지는 등급이다.
• 뱅 드 타블 Vins de table(테이블 와인)
원산지와 원산국이 다른 와인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 보르도의 백포도주
백포도주로는 소테른 Sauterne이라는 것이 달콤한 맛의 고급 와인으로 유명하다. 최고급 와인인 ‘샤토 디켐 Château d'Yquem'의 산지이기도 하다. 이런 달콤한 와인은 단맛의 후식을 먹을 때 마시면 어울린다. 고전적인 조합으로서 푸아그라를 먹으며 소테른을 마시는 경우도 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은 보조레 누보 해금의 날. 프랑스 전역에서 새로운 술의 해금을 축하한다. 알지스 와인은 병의 모양이 가늘고 긴 것이 특징이다.
와인 레벨 보는 법
AOC 와인의 라벨
①빈티지(수확연도)
②마르고 지구(마르고 지방산이라는 것. 고급 와인인 ‘사토 마르고’와 혼동하지 말 것)
③AOC (원산지 통제 명칭)의 등급 표시. Margaux가 원산지Origin이다.
④자가 농장을 소유한 양조업자가 제조 이외에 ‘Grand Crus Classé(그랑 크뤼 클라쎄)’로 쓰여 있으면 아주 좋은 와인이다.
보르도 와인 라벨
1. 수출용에 표시
2. A.O.C.: "Bordeaux" 라는 넓은 지역 보다 "Pauillac"라는 좁은 지역 명칭일수록 고급이다.
3. 수확연도
4. 샤또명칭: 단순히 지명이나 상호를 표기한 것보다 고급
5. "Cru Classe"와 동일한 표기로서 1855년도 분류에서 공인된 "GrandCru Classe"급 와인
6. 샤또 소유자의 명칭과 주소
7. "Mis en bouteille au chateau"라고 되어있으면 샤또에서 병입한 것이나, 이 경우는 negociant이 병입한 것.
부르고뉴 와인 라벨
1. 생산자 : 부르고뉴의 경우는 주로 negociant이 와인을 만든다. OliverLeflaive Freres는 부르고뉴에서 유명한 생산자임
2. Negociant이 선택하여 병입한 것. 직접 포도를 재배하고 만들어서 병입할경우는 "Mis en bouteille au Domaine"이라는표기를 쓴다.
3. 단순히 좋은 와인이란 뜻으로 공식적인 등급은 아님.
4. Fremiets는 Volnay지역의 1등급 포도밭의 명칭으로 Premier Cru 급에는 반드시 상표에 지명(Volnay)과 함께 표시함.
5. A.O.C. : Cote de Beaune의 Volnay 지역의 1등급 포도밭에 붙이는 A.O.C.
6. 용량
7. 수확연도
와인 선택 방법
대중적인 레스토랑에서는 카라프 Carafe 또는 피셰 Pichet로 불리는 피처에 들어 있는 하우스 와인(Cuvée du patron 또는 Vin de maison)을 주문하면 충분하다. 작은 것이면 demi(375cc), quart(185cc)로 주문하는 것이 좋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두꺼운 와인 목록을 준비해 놓고 있으며, 와인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는 와인의 수가 무려 수백 종에 이른다. 자신이 있으면 요리에 맞춰 일일이 선택하면 된다.
자신이 없으면 소뮬리에(와인담당자)에게 자신의 취향을 알려주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편이 좋다.
생선요리에는 백포도주, 고기에는 적포도주, 디저트로는 달콤한 백포도주를 주문하는 식으로 코스에 따라 와인을 선택해서 마실 수 있지만 인원이 적을 때는 어렵다. 그럴 때는 예산에 맞추어 샴페인으로 주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안주로는 햄과 테린이 안성맞춤
프랑스 와인 선물
프랑스에서 맛있는 와인을 만나면 그 향과 맛을 우리나라에 가져오고 싶어질 것이다. 비싼 것은 가격이 제한이 없을 정도 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보르도 와인의 4대 샤토(샤토 라투르 Château Latour, 샤토 라피트-로 쉴드 Château Lafite- Rothschild, 샤토 마르고 Château Margaux)정도는 1병에 10만 원 정도부터 살 수 있다. 품질을 생각한다면 매우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샴페인 양조장
샴페인의 산지로 유명한 에페르네에서는 대기업 메이커의 공장을 견학할 수 있지만 시골에 있는 조그만 양조장을 방문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샴페인 제조는 시간과 과정이 복잡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몇 년간의 숙성을 거쳐 침전시킨 뒤 영하 30°C에서 단번에 얼려 침전물을 제거하고 리큐르를 첨가하고, 이 모든 과정이 대단히 번거롭다.
복잡한 샴페인 제조 공정
부르고뉴 와인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라고 하면 곧 와인을 연상한다.
그리고 ‘부르고뉴는 와인의 왕, 보르도는 여왕’ 이라고 하여 보르도보다도 약간 쓴 맛이 나는 부르고뉴를 오히려 더 애호하고 있다. 샹볼르․마콩․보졸레 등 여러 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샤브리 지구
백포도주의 대표 격으로 그랑 크뤼 Grand Cru(특급)라고 등급이 매겨져 있는 것이 최고다. 어패류와 잘 어울린다.
•마코네 지구
마콩 Mâcon 주변의 밭에서 만든 와인으로 적⋅백포도주 모두 가볍게 마시기에 편하다. 맛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프이 퓨이세 Puilly Fuissé․tod 베랑 St-Veran 등을 맛본다.
•코트 드 본
코르통 Corton은 꼭 맛본다. 적포도주라면 알록스 코르통 Aloxe cortin, 백포도주라면 코르통 샤를르마뉴 Corton Charlemagne가 좋으며 모두 섬세한 맛이 있다.
백포도주 몽라셰 Montrachet도 맛이 독특하다.
•코트 드 뉴이
로마네 콩티 Romanée-Conti․클로 드 부죠 Clos-de-Vougeot․나폴레옹이 매우 사랑했던 샹베르탕 Chamvertin을 생산하는 곳이다. 그 대부분이 적포도주며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맛이 깊어진다.
위에 적은 와인은 어떤 것이나 고급이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테이블 와인이라도 대부분 상당히 맛이 있다.
보졸레도 누보뿐만 아니라 몰랭아 뱅 Moulin à Vent․ 모르공 Morgon 등 어느 정도 장기 숙성을 거친 것도 있으므로 감칠맛이 난다.
‘부르고뉴 와인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민감한 와인이 수송 도중에 맛이 변할 것을 우려해 양심적인 생산자들은 해외수출을 기피하고 있다.
• 코트 도르 Côte d'Or(황금의 언덕)라고 불리는,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진 구릉지대에 있는 보누는 온화한 기후와 자연의 혜택을 듬뿍 받은 마을이다.
보누(부르고뉴)를 유명하게 한 것은 15세기에 만들어진 병원인 오텔 드 외와 명산품인 붉은 포도주다(로마네 콩티). 오텔 드외(Hotel Dieu)도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어 그 수익금으로 환자들을 무상으로 돌봐준다고 한다. 보누에서 만들어진 포도주는 매년 11월 셋째 주 일요일에 경매에 들어간다(영광의 3일간). 세계의 포도주 업자들이 보누로 모여드는 것도 이시기다.
부르고뉴 식도락
부르고뉴를 방문할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이 지방에는 풍요로운 풍토에서 자란 훌륭한 와인과 다수의 명물요리가 있기 때문이다.
위장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억울할 정도로 여러 가지 요리가 있다. 여기에 부르고뉴 와인을 합치면 피곤함도 고민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권할 만한 요리는 많지만 초행인 사람이라면 우선 전채로 에스카르고 Escargot가 있는데 요리의 마늘과 버터 향이 식욕을 돋운다. 차가운 전채라면 네모진 햄을 파슬리. 마늘과 함께 젤리 상태로 굳힌 장봉 페르시에 Jambon Persillé를 권한다. 그러나 그 전에 식전 한잔으로 카시스의 리퀴르를 백포도주에 섞어놓은 키르 Kir를 주문한다.
좀 색다른 것을 먹어 보고 싶은 사람은 와프 앙 뫼레트 oeuf en Meurette를 먹는다. 요리는 달걀노른자를 와인 속에서 살짝 익힌 말하자면 부르고뉴풍 포치드 에그 poched egg, 주 요리는 생선보다 고기를, 와인으로 끓인 2대 명물요리는 코코 뱅 Coqau Vin(닭고기)과 뵈프 부르기뇽 겨자 Boeuf Bour-guignon(소고기)가 있다. 또 디종의 명물인 겨자를 사용한 토끼 요리 Lapin á la Moutarde도 맛있으며 붉은 고기보다 내장 쪽을 선호 하는 사람에게는 소의 위를 끓인 Tripes Marsannay가 있다.
탕류는 상당히 부담되므로 전채요리와 주요리만으로도 배가 부르겠지만 위장에 치즈 한 조각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디저트로 그 지방에서 난 에푸아세 Epoisses를 맛본다.
■ 샤르트르
샤르트르(프랑스어: Chartres)는 프랑스 외르에루아르주의 주도이다. 센 강의 지류인 외르 강에 접하고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으로 유명하다.
외르에루아르주(프랑스어: Eure-et-Loir)는 프랑스의 주로, 주도는 샤르트르이며 면적은 5,880km2, 인구는 421,114명(2007년 기준), 인구밀도는 71.6명/km2이다. 주 이름은 외르 강과 루아르 강에서 유래되었다.
샤르트르 비옥한 곡창지대인 보스 평야의 한족 보리밭 속에 자리 잡은 조용한 도시다. 프랑스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샤르트르대성당은 중세시대부터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 모은 곳으로, ‘샤르트르의 블루(푸르름)’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을 감상 할 수 있다. 프랑스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많이 있지만 샤르트르 대성당만큼 섬세하고 조화로운 것은 없다.
노트르담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샤르트르 대성당)의 2개의 첨탑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역 앞의 완만한 경사길 av. J. de Beauce을 지나 샤틀레 광장 pl. Châtelet까지 가면 대성당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높이 솟아 있는 첨탑 덕에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다. 대성당 옆으로 나 있는 길로 가면 근․현대 회화를 중심으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이 있고 미술관 뒤로는 와르 강 Eure이 흐른다. 이 일대는 샤르트르의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와르 강에 높인 다리에서 바라보는 대성당의 모습도 무척 아름답다.
노트르담 대성당
성당 정면에 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2개의 첨탑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왼쪽의 고딕 양식의 탑은 구종루 Clocher Neuf,오른족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은 구종루 Clocher Vieux라고 한다. 1194년의 대화재를 면할 신종루의 하부는 구종루보다 낡았다. 성당 내의 왼쪽복도를 통해 탑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정면의 입구는 3곳이 있는데, 그중 서쪽 문은 ‘제왕의 입구’라고 불리며 기둥에는 사람의 몸을 약간 늘려 놓은 듯한 인상(人像)이 조각되어 있다. 성당 안은 방문하는 시간에 다라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데, 가장 아름다운 때는 맑게 갠 날의 석양 무렵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스며드는 엷은 빛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파란색의 세계를 연출한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인상적이지만 특히 정면 입구로 들어가 왼쪽에 있는 ‘엣세의 가계수’와 남쪽 통로에 있는 ‘아름다운 그림 글라스의 성모’는 더욱더 아름다운 푸른색을 띤다. 가능하면 하루 종일 시간을 들여 빛과 함께 변화하는 세계를 본다.
비에이유 샤리테(구 자선원)
마르세유 출신의 건축가 피에르 퓌제가 지은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17세기 당시에는 이민 구제를 위해 지어진 시설이었지만 현재는 몇 개의 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문화센터로 바뀌어 있다.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중해 고고학 박물관 Musée d'Archeologie Méditerranéenne으로, 고대 이집트 조각은 루브르 미술관보다도 더 많이 수집되어 있다고 한다. 비에이유 샤리테가 있는 파니에 지구 Le Panier는 마르세유의 서민 동네 풍정을 맛볼 수 있는 구시가지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바실리크 성당
옛 항구의 리브 뇌브 부두 quai de Rive Neuve에서 남쪽으로 언덕길을 20분 정도 올라간 곳에 있는 로마 비잔틴 양식의 교회. 안에는 항해를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는 배의 모형이 가득하다. 벽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에 대항하던 연합군의 총탄 흔적도 남아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보주 산에서 캐낸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 졌다는 대성당. 12~15세기에 지어진 고딕 교회라고 하면 정면에 두 개의 탑을 세워 균형미를 보여주는 각지의 대성당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노트르담 대성당은 전혀 다르다. 한 개의 첨탑만이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어 있다. 142m의 첨탑은 가로막힌 것이 없어 한층 더 높아 보인다. 이탑에 올라가면 보주 산 일대와 검푸른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12:30이 되면 성당 안의 대형 시계l'Horio Astronomique 앞에는 예수와 제자들의 모습을 한 인형이 나타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 생리스
이 작은 도시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그마한 언덕의 꼭대기에 높이 솟아 있는 탑은 12세기에 만들어진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정면의 문은 ‘성모 승천’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으로 몰리듯이 언덕을 뒤덮고 있는 시가지는 중세를 재현해 놓은 듯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성당까지는 600m정도 떨어져 있다. 역앞의 광장에서 나오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av. du Général de Lattre로 가면 성당으로 이르게 된다.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에 홀수 해의 9월 마지막 주말에 ‘Rendez-vous de Septembre'라는 음악제가 열리므로 이시기가 맞추어 방문하면 좋다.
노트르담 대성당
13세기 초에 착공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다. 3단으로 구성된 단정한 정면에는 좌우대칭으로 2개의 탑이 서 있으며 석양빛을 받으면 성당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건물 밖의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도 훌륭하다. 특히 정면 중앙 문 오른쪽 벽에 있는 4개의 입상(수태고지, 성모 방문)은 고딕 최고 절정기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외에 역시 정면에 있는 ‘미소 짓는 천사’, ‘마리아의 시종’, ‘성 요셉’등도 수작으로 꼽힌다.
건물의 평면설계도는 잘 계산된, 완벽에 가까운 좌우대칭이다. 한쪽에 군기를 등에 지고 있는 잔 다르크의 입상 Statue de Jeanne d'Arc이 있다. 그녀는 오를레앙 해방 후, 샤를7세를 독려하여 랭스로 보내 대관식을 치르게 했다. 물론 그녀도 입회했다. 다음해에 그녀는 콩피에뉴에서 체포되어 루앙으로 압송된 뒤 1431년에 19세의 나이로 화형당하고 말았다.
■ 루앙
북프랑스를 대표하는 도시, 프랑스 제3의 상업 항구 도시 등의 지식을 갖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이 도시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놀라게 될 것이다. 11세기에 지어진 대성당이 있으며 15세기에 잔 다르크가 처형된 곳이기도 한 이 도시는 오랜 역사와 많은 성당을 지니고 있어 고도의 멋이 가득하다. 주민들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루앙이다. ‘놀기에는 파리, 살기에는 루앙’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루앙의 중심 역은 R. D.(오른쪽 강변)역이다. 역을 나오면 쭉 뻗어 있는 대로가 잔 다르크 거리 rue Jeanne d'Arc로, 시가지의 중심은 역에서 센 강까지 이어지는 이 길의 양쪽에 펼쳐져있다. 역을 나와 10분 정도 걸어가면 왼쪽에 금빛 찬란한 대시계를 걸어놓은 아치가 보인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시계는 14세기에, 문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계에는 바늘이 하나밖에 없다. 아치를 빠져나가 양쪽에 음식점과 부티크가 즐비한 대시계 거리를 지나면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이 있다.
고딕 양식으로 된 두개의 교회를 볼 수 있는데, 동쪽에는 생마클루 교회 Eglise St-Maclou, 그 북쪽에 있는 것은 생 투앙 교회 Eglise St-Ouen다. 이 두 교회 사이에는 노르망디 특유의 오래된 목조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잔 다르크가 숨을 거둔 곳
15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한창일 때 불현듯 나타났던 구국의 소녀 잔 다르크. 패색이 짙었던 프랑스를 기적적인 승리로 이끌었지만 마녀로 여겨져 단죄되었다. 1431년 5월 30일, 불과 19세의 잔 다르크는 이곳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처형장이었던 구시장 광장 Plece du Vieux-Marché에는 잔 다르크 교회가 세워져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빛의 이동에 따라 건물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것을 그린 모네의 유명한 연작에서 모델이 된 대성당이다. 1063년에 창건된 것이지만 몇 세기에 걸쳐 수리가 거듭되었다. 특히 15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19세기에 완성된 높이 152cm의 첨탑이 볼만하다. 낮에는 웅대하고 밤에는 섬세하며 어느 쪽에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정면 왼쪽의 rue St-Romain에 있는 작은 문에서 보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출처: 유럽여행 프랑스편, 이미지: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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