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형상의 산수경석입니다. 깊이 나무 바닥을 팠다가 우드필러로 다시 메꾸어 좌대에 올렸습니다. 날카로운 능선, 깊은 골짜기, 급낙하하는 절벽경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없는 풍경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것을 다 삼킵니다. 그리고 감탄을 토해내지요. 그러나 때로 얄팍한 사람의 가슴은 아름다은 경치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다가도 때로는 확 바뀌어 민낯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고함을 내지르기도 하지요. 오늘이 그랬습니다.
병원에서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어떤 날은 참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땐 그것이 분노인 줄도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차분히 당사자를 불러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던 걸까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나 역시 그 본능에 충실하게 반응한 것일까요.
내 모습이 낯설었습니다. 돌아보면 젊었을 때는 오히려 분노를 삼키는 편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고, 부당한 시련을 겪어도 속으로 삭이며 참기만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정말 옳았을까요. 그렇게 가두어 둔 감정들이 결국 나를 향해 칼끝을 돌린 것만 같거든요.
정신의학에서는 분노를 억누르면 내면화되어 우울증이나 신체화 장애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나는 이유 없이 피곤했고, 불면증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린 적이 많았습니다. 온갖 검사를 하고 여러군데 통증크리닉도 다녔습니다. 무병이니 빙의되었느니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쌓여온 분노와 울화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감정을 드러낸 것은 건강한 반응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막상 화를 내고 난 후 나는 후회스럽고, 자책감이 몰려왔거든요.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원시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분노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감정입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를 방어하고 대처하기 위해 솟구치는 것입니다. 원시 시대에는 포식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분노가 필수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런 원초적인 감정의 표출은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고 관계를 해치는 요인이 됩니다. 인간의 뇌는 점점 더 고도화된 자기 통제 기능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전두엽은 우리가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을 조절하도록 도와주며, 상황을 논리적으로 판단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순간 전두엽의 기능을 무시하고, 편도체에 지배된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닐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 조절이 예전보다 어려워졌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젊을 때는 분노를 삼키고 잘 느끼지도 않는 나였는데, 이제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참을성이 부족해졌습니다. 나는 혹시 나이들어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만해져서 상대방을 깔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상대를 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여기고, 함부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요. 화를 낼 때의 감정을 찬찬히 되짚어보니, 내 안에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던 우월감이 보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위치를 쌓아온 지금, 나는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착각 속에서 감정을 쉽게 표출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상대방이 나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을까요. 내가 그를 얕보았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였던 것 같거든요.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감정을 참지 말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고들 합니다. 억눌린 감정이 신체적, 정신적 문제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단순한 감정 해소를 넘어서, 분노의 표출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익명성을 이용해 거리낌 없이 감정을 표출하고, 사소한 일에도 논쟁이 벌어집니다. SNS나 대면 관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분노를 표현하고, 이는 때로는 폭력적인 언어나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적 흐름 속에서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분노의 표출을 정당화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것일까요. 아니면 필요할 때는 표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동양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습니다. 유교에서는 군자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야 하며, 특히 화를 다스리는 것이 인격 수양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감정이 덧없는 것이며, 분노 또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현재에 만족하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도가에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인정하고, 이를 억지로 막기보다 부드럽게 흘려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감정을 극단적으로 억누르는 것도, 무조건 표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분노를 무조건 억누르거나, 반대로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상황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조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원초적인 분노의 표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가 치밀 때, 한 걸음 물러서며 이렇게 실천하려 합니다.
분노가 솟구칠 때, 즉각 반응하기 전에 심호흡하며 “지금 내가 화났구나”라고 인지합니다. 멈춤의 기술이죠. 이 감정이 정말 상대의 잘못인지, 아니면 내 안의 편견이나 우월감에서 비롯된 건지 돌아봅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선에서 차분히 의견을 전달합니다. “내가 기대했던 부분은…”처럼 ‘나’를 주어로 한 말투를 선택하죠. 감정이 과잉반응으로 이어질 땐 의도적으로 템포를 조절하여 대화 시점을 미룹니다.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까요?”
분노는 나쁜 감정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나는 내 감정의 주인으로서,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랜 세월을 거쳐 인간이 발전시켜 온 자기 통제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