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째 (5월 1일)
12시가 넘어 잠에 들었음에도 아침 4시 40분에 일어났다. 많이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논문을 비롯한 여러 글들을 읽고, 아내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많이 남아 식당에 10분 전에 도착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지 음식이 적었다. 그래도 조금 느긋하게 기다려서 베이컨 등을 맛있게 먹었다. 아침 8시 호텔을 출발해 먼저 간 곳은 요양백탑. 요양박물관 개장까지 시간이 있기 때문에, 먼저 이곳부터 보러 간 것이다. 호텔과 백탑, 박물관, 식당이 모두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요양에서 시간낭비는 거의 없었다. 요양백탑은 높이 71.2m의 거대한 탑이다. 요양 백탑 아래에서 일행 앞에서 조선 후기 청나라를 방문한 사신들이 요양백탑을 보고 느꼈던 감상을 말해주고, 왜 이렇게 백탑을 거대하게 느꼈는지를 조선에서 거대 건축물이 사라진 역사와 함께 설명해주었다.
백탑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요동성터는 해자만 보고 간단히 설명만하고서 지나갔다. 2년 전 답사에서 괜히 해자를 따라 답사를 하다가 시간만 낭비하고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던 경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시간을 내서 요동성 옛터를 두루 살펴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해도 유적을 찾을 확률이 극히 낮기는 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요양박물관에 들렸다. 역사 도시답게 요양박물관에는 볼 것이 많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요양지역에서 출토된 고분벽화들이다. 1시간 남짓 박물관을 둘러보고, 어제 저녁에 들렸던 코리아구이(可立亞燒烤)에서 다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요양시 옆에 위치한 등탑시 백암성으로 향했다. 요동성 옆을 흐르는 태자하 상류에 위치한 백암성은 현존하는 고구려 성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도 유명하다. 1시 경부터 3시 반까지 2시간 반 동안 비교적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백암성 답사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봄철에 답사하는 것이 여름보다 좋다. 풀이 덜 자라서 답사하는데 방해가 덜 된다. 백암성은 10번 정도 답사를 했음에도, 여전히 내게는 매력적인 성이다. 답사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성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벽이 좀 더 무너져 내렸음을 볼 수 있었지만, 반대로 중국인들의 발굴로 인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성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백암성 성벽을 따라 전체를 답사했다. 건안성에 비한다면 많이 작지만, 그래도 백암성은 둘레가 약 2,300m에 달한다. 돌궐, 수나라, 당나라군대를 막아내던 백암성은 고구려가 원군을 보내 구원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방어성이었다. 백암성은 멀리서도 성 내부가 보이는 단점이 있는 성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남문 주변은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점장대에서는 먼 곳에 적의 움직임도 다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백암성 점장대에 올라 요동벌판을 바라보면서 바람을 맞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이곳에서 적들의 공격을 바라본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순간 고구려인이 되어 보았다.
점장대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태자하를 따라 남문쪽으로 내려왔다. 남문 주변이 아직도 발굴이 안 되어서, 길이 막혔다. 하지만 도리어 이것이 기회였다. 성 내부를 걸으면서 중국인들이 발굴할 때 판 트렌치를 통해 고구려 시대 층위(層位)를 볼 수 있었다. 50~100㎝ 아래에 있는 고구려 시대 층위에는 돌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직접 파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아직 백암성 발굴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백암성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알지 못해 궁금증이 커진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본 것은 있다. 남문 주변 절벽 위에 성벽에서 치가 많이 발견되었고, 또한 수구가 발견되었다. 치와 수구는 중국인들이 복원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있었다. 특히 수구는 이번 백암성 답사 과정에서 본 가장 의미 있는 발견이었다. 전 한밭대 교수이신 심정보 교수님이 열심히 수구 사진을 찍는 모습을 내 사진기로 찍었다. 학문적 열정이 여전하신 교수님의 모습을 미래의 내 모습에서도 볼 수 있기를 소망했다.
내게 많은 사연이 있는 백암성은 뒤로 하고, 4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환인으로 향했다. 중간에 납잡목(南杂木)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심양이든, 요양이든 환인으로 향하려면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휴게소는 이곳뿐이다. 이곳에서 사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콜라 한 병. 희한하게 중국의 식료품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은 것 같다. 20년 전에도 콜라 한 병이 3~5원 사이였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환인에 도착하니 7시 반이 넘었다. 밤하늘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고구려 답사를 왔을 때 보았던 은하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빛나는 별들을 마음껏 보지 못하다니 아쉬웠다.
환인에서 먹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비류수 강변에 위치한 호텔에 투숙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통화하고, 사진을 정리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심정보 교수님 일행은 먼저 나와서 술을 드시고 계셨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유정렬 교수님을 비롯해, 이성훈님 등과 함께 꼬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신 유정렬 교수님을 호텔방에 모신 후, 나는 다시 이문수-조길현님의 방에서 고구려 이야기를 나누었다. 열정이 가득한 이문수님은 내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많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하지만,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좋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12시. 내일을 위해 잠자리로 향했다.
첫댓글 몇년전에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 쪽으로 추가로 치를 2개 더 발견하고, 기존 치 하단부를 조사하여 생토층까지 1m 이상 성벽이 더 높았음이 확인됐는데...이번에 복원이 됐는지, 아니면 그냥 덮어놨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암성이 왜 백암성인지 잘 알 수 있었는데(생토층을 보면 성이 위치한 산 전체가 하얀 돌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