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4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청주]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는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11, 1 - 10
† 복음 : 루카 10, 21 - 24
★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는 그날,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곳은
정의와 신의가 살아 있는 평화의 왕국이다(제1독서).
★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맡은 사명을 다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는 분이 고관절 수술로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신부님, 이제야 저는 철이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많은 연세에 철이라니요?”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러자 “병원에서 철을 넣어 수술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철이 든
거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편한 몸을 투덜대지 않고 세월의
흐름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는 그를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철없는 사람을 두고 ‘철부지’라고 합니다. ‘철’이란
‘계절’을 뜻하기도 하는데, 계절의 변화를 모르면 철을 모르는
법입니다. 철부지란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린아이라서 철부지가 아닙니다. 일상을 살면서
우리 삶의 곳곳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작용하게 하시어 좋은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사실의 놀라움을 일상 안에서 발견하게 합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철든 사람입니까?
-매일 미사 -
◈ [청주]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는/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루카 10,21-24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는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기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상상을 다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자신을 조금씩 덜어 내는 일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루카 10,21-24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기술 한 가지 확실하게 익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보내고 싶은 바램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에 아이들 집 하나 마련해서 머리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만 따로 골라 함께 살며 밥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밭을 일구고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추억을 쌓아주는
일이 제 꿈입니다.
살면 살수록 단순한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 삶인가를 실감합니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의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매일 땀흘려 일하다보면 하루해가 짧은 소박한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너무 머리 쓰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한적한 자연 속의
삶이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삶 같지만 사실 본래 인간 본연의
삶이었고,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잠시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잠시의 여유라도 있으면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할머니들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일이 스케줄을
확인하시는 세상입니다. 바쁜 사람이 잘 사는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한적함, 단순함, 소박함, 겸손함, 천진함,
동심, 비움, 버림, 떠남과도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너무도 어색한 단어, 별세계에서나 사용되는 단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눈만 떴다하면 머리를 회전시키고, 밥만 먹었다하면 복잡한
문명의 바다로 우리의 온몸을 던져버리니 철저하게도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체험할 여유가 참으로 부족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단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보다 여유 있고, 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여백에, 우리
삶의 주변 어디든 자리잡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인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가난한 사람은 소유의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성낼 필요도 없게 됩니다. 결국 가난함으로
인해 자유를 느끼고 가난함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의
손길을 보다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버리면 버리는 만큼 진리와 자유에로 결국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닦는 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남들처럼 살아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삶을 사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적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고난 능력과 재능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래서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일찍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것은 기적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한계 짓는 것들을 뛰어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이유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적이라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철저한 노력이 있어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적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결정할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에 저와
친한 친구 한 명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입니다.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않고 또 성적도 좋은 대학에 가기에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은 졸업 후 곧바로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걱정을 했습니다. 당연히 ‘대학 진학 → 회사 취직 → 결혼 →
자녀 양육’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첫 시작을
과감하게 포기를 했으니까요.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이 친구는 지금 매우 잘 살고 있습니다.
곧바로 취업해서 열심히 일해서 일찍 돈을 모았고, 지금 현재
자신만의 안정된 사업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문회에 나가 큰
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또한 일찍 결혼해서 벌써 대학을 다니는
딸을 두고 있으면서 나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남들처럼 살아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남의 것이 아닌, 나만의 기적을 만들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치고 감격에 겨워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십니다. 이는 찬미의 기도로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서만 발견되는 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기뻐하셨을까요? 이 기도는 제자들이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며 돌아 왔을 때, 성령 안에서 기뻐하면서
올렸던 것입니다. 즉,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통하여 악의
세력이 꺾인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기도인 것이지요.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제자들입니다. 어부, 세리, 혁명당원……. 그러나 예수님의
교육과 제자들의 노력으로 그 부족한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우리 역시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지금의 모습에서 더 나아진 모습,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의 열정과 노력으로 주님 뜻에 맞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큰 기적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우리 모습에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이 좁아진 세상에서, 더는 이방인으로 살 수 없다
(아들라이 E.스티븐슨).
어느 성당 고해소에서.. 예수님 맞이 할 준비 하셔야지요?
죽기 전에 후회하는 다섯 가지
수년간 오스트레일리아 말기환자 병동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살폈던
간호사 브로니 웨어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옮겨 봅니다.
첫째, 내 뜻대로 살 걸: 남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추는 삶을 사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사는 진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용기 없음을 후회했다.
둘째, 일 좀 덜 할 걸: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었다. 쳇바퀴 돌 듯
직장에 파묻혀 사는 동안 자식의 어린 시절, 부인과의 따뜻한
가정생활을 놓친 것을 후회했다.
셋째, 화 좀 덜 낼 걸: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살았던 것을 후회했다. 분노의 감정을 너무
숨기고 살아서 병으로 이어졌다는 생각도 컸다.
넷째, 친구들 챙길 걸: ‘오랜 친구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 그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다니.’ 하는 후회가 있었다.
다섯째, 도전하며 살 걸: 내 행복을 위해 좀 더 도전해보지 못한
것도 후회했다. 현실에 안주하느라 좀 더 모험적이고, 좀 더 변화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브로니 웨어는 마지막에 “인생은 선택. 그리고 이 인생은 당신의
것. 의식적이고 현명하며 솔직하게 당신의 인생을 선택하라.
행복을 선택하라.”고 썼습니다.
나의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춘천] 행복한 사람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행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찌할까요?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어느 누가 그것을 해결할까요?
몸은 멀쩡한데, 눈이 좀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눈이 나빠 불편하시겠습니다.” 그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아니요,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아도 되어 좋습니다.”
반면 그는 귀가 좋아 잘 듣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또 물었습니다.
“당신은 귀가 좋아 잘 들으니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슬프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니 괴롭습니다.”
오늘은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과 시선 그리고 그분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 과연 우리도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뵈옴으로,
주님 말씀으로 진정 행복한지….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어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우스갯소리 한 방 날리십니다.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 엄기선 신부(춘천교구 운천천주교회) -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루카 10, 21-24)
2012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 10,21-24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루카 10, 21-24)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어 사물의 가치와 계절의 변화,
하늘의 질서,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모시게 하신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사랑의 아빠 하느님!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셨듯이 저희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쁨 충만하게 살기를 원하나이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청량 음료수 같아서 이내 또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 즐거움 뒤에는 언제나 허전함을 느낄 뿐이옵니다.
사랑의 하느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철부지가 되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성령의 지혜로 충만하여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하게 하여주시고,
지금 이 세상의 때가 어느 때인지 주님께서 성인들을 통해서
전해주시는 그 시기를 알게 하여주소서.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라고 말씀하신 주님, 저희도 주님께서 세상에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세상에서 성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게
하여주소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르쳐주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주소서.
세상의 지식으로 슬기롭다 생각하여 자신의 아집에 빠져들게
되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손수 하시는 일도
보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여러 성인들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도
듣지 못합니다.
양심은 무디게 되고, 하느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어
세상의 논리로 하느님을 판단하게 되고, 성서의 기록된 주님의
때를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구약성서가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했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분명하게 또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의 탄생과 행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처럼 저희도 그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게 하여주소서. 저희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늘 깨어 있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도회] 감사와 행복
중국 북경은 연평균 강우량이 겨우 50∼150밀리미터가 고작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소낙비 한줄기 구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은 웬 비가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아 밤 11시 출발예정이었던
비행기는 다음날 새벽 4시로, 또다시 6시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정말 비행기가 뜰까 걱정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북경 사람들은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라고 인사를 나눈다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비는 간신히 그쳤다. 개찰구를 통과해 기내에 앉으니 ‘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의 흥분은 아니었으나 그저 앉아 있다는
게 정말 감사했다. 늦은 밤, 무사히 터키 이스탄불에 비행기가
착륙하여 서서히 멈출 때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 후 우리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마다 박수를 쳤다.
그 흔한 비행기의 이륙과 착륙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행복이다. 기다릴 때의 보고픈 마음과 만났을 때의 기쁨 때문이다.
만일 오시는 그분이 두렵고 싫다면 왜 기다리겠는가? 피할 것이다.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기 위해서는 올 한 해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
일들을 찾아보고 깨닫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그분이 오시는 날을 진심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믿음의
시각으로 되돌아보자. 지난 1년 동안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신 흔적이
어디 한 조각도 없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나는 행복한 수녀로 살고 싶다. 아마 하느님도 내
생각과 같을 것이다. 행복의 정도는 감사의 정도와 비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감사를 연습한다. 차 한 잔을
함께 마실 때도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행복을 위하여!’ 하면서
건배를 청한다. 어제는 저녁을 준비하다가 그만 칼질이 어긋나 왼쪽
검지손톱이 달아났다. 그 순간 속이 상하기 전에 얼른 ‘아, 다행이다.
귀퉁이만 나갔잖아. 감사합니다.’라고 나에게 입력시켰다. 충치
때문에 치과를 다니고 있다. 한 달 정도를 한쪽으로만 음식을 씹다
보니 잇몸이 헐고 쥐가 난 것처럼 감각이 둔하다. 그러나 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린다. 훌륭한 의사 선생님을 만난 것도 참 복이라고.
마음의 표현인 감사도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이 반복으로
이어져 습관으로 몸에 익숙해지면 나는 지금보다 더 감사하면서
행복한 수녀로 살아가리라 믿는다.
- 김인숙 수녀(살레시오 수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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