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님께옵서 65세 이상 노인 분들에게 드리겠다고 약속하셨던 기초노령연금 20만 원이 물 건너 가버렸다고 아쉬워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으신 듯합니다. 어르신들을 많이 만나며 지내는 저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제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신뢰의 붕괴’입니다. 약속을 개떡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긴다면 ‘신뢰’라는 것이 무너지고, 그야말로 이 사회는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놈의 말을 믿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하고 결국은 불신의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왕조시대의 제왕보다도 더 끗발이 좋은 대통령이 약속을 팽개치면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아무렇지 않게 따라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줄지어 답습하다가 마지막에는 기층 서민이나 어린아이들까지 ‘그게 정상인가 보다.’ 하고 스스럼없이 따라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제가 몇 년 전, 그러니까 2007년 3월 9일,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왜냐면]이라는 방에 실린 것입니다. 이 글이 다 실린 것은 아니고, 너무 길다고 줄여달라고 부탁해서 줄인 글이 실렸습니다만, 네티즌들께서 원래 원고가 더 좋다고 하셔서 이 원래 원고를 유통시켰습니다. 약간의 세월이 지나 지금의 상황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더욱 필요한 내용이지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읽으시는 분들께서 잘 살펴보시고 마땅치 않은 글이라거나 잘못된 점이 있다고 판단되신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 마이크로 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와 협동조합, 은행
서예가/작가/『(만화)협동조합』의 저자 임영모
“한 그릇의 물만 있으면 살아날 수가 있는데도, 큰 강물을 끌어다만 살려주겠다고 하십니까?” 수레바퀴 자국에서 죽어가고 있던 붕어가 한 말이다. 장자(莊子)라는 책에 나온다. 한 그릇의 물과 같은 약간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수레바퀴 자국의 붕어 같은 신세가 된 저소득 근로자, 영세사업자들이 강물이 들어오는 호시절을 기다리지 못해 속병이 들고,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등진다. 태평성대인양 누리고 사는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못살겠다, 죽겠다’고 한다.
“사람 죽이기를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를 잘못해서 죽이는 것이 다름이 있습니까?”라는 맹자(孟子)의 질문에 양나라 혜왕(惠王)이 대답하기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의 명령 한 마디면 간단하게 목이 날아가던 시대였는데도 이런 위험천만한 질문을 하면서 압력을 넣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되고 많은 사람들의 살림이 거덜 나며 생목숨 끊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데 내 탓이라며 걷어 부치고 나서는 사람 하나 없다. 국민소득 60달러 시대에도 아들 딸 많이 낳고 잘만 살았는데 3만 달러 시대에 살면서 뭐가 그리 어렵다고 호들갑을 떠느냐, 매년 몇 % 이상의 경제성장이 계속되는데 무슨 생난리냐고 윽박질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돈은 몸의 혈액과도 같다. 혈액은 심장에서 나와 대동맥, 세동맥, 모세혈관을 거쳐 다시 세정맥, 대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돌아가면서 필요한 영양분과 물, 산소 등을 온 몸에 공급한다. 이런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특정 부위에 뭉치게 되면 몸은 서서히 병들고 죽어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우리 경제의 모습은 돈이 모세혈관과 같은 기층 서민들에게 잘 흘러가지 않고, 세동맥에서도 구경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그 폐해가 인정되어 규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대형 할인마트까지 난립하여 지역경기 활성을 가로막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돈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어느 일부에만 몰려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서서히 병들며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돈이 모자라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돈이 남아돌아 걱정이다. 그것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문제의 해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 답은 바로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 곧 ‘무담보 소액대출’에 있다. UN이 2005년을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로 선포했어도 못 들은 채만 하던 정부, 정치계, 언론, 학자들이 쉽게 수긍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방글라데시의 유누스와 그라민은행이 빈민들에게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을 전개하여 빈곤퇴치에 앞장 선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니까, 서울평화상까지 주며 떠들썩했던 것을 보면 가능성이 엿보이기는 한다.
몇몇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 단체들의 활동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새 발의 피다. 그럼 누가 나서야 할 것인가? 첫째, 새마을금고를 포함한 협동조합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협동조합은 일반 은행과 달리, 농민ㆍ노동자ㆍ도시 서민과 중소상공업자가 상부상조하자고 만든 비영리 단체다. 그 기원도 산업혁명 이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거대 자본가로부터 스스로 경제력을 지키고 높이자는 데 있었다. 약간의 부자를 빼고는 국민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현 상황에서 협동조합이 본래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당위다. 그런데, 지금 이 단체들의 자금이 남아돌아 운용에 애를 먹고 있다. 오죽이나 돈 쓸 곳이 없으면 프로야구팀을 인수하겠다는 발상까지 일었겠는가. 단위조합들은 그들대로, 떼먹힐까 봐 서민들에게 대출해주기 어렵고, 중앙조직에서는 남는 돈 보내라고 하지만 수신이자보다 이자를 더 적게 주겠다는 것인지라 원통해서 못 보내고, 펀드 등을 기웃거리다 잘못 걸리면 부실조합으로 떨어지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액의 우량 담보대출에 눈독을 들이지만 제1금융권과 대출이율 차이로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한두 곳 조합의 힘만으로는 안 될 터이고, 우리나라의 모든 협동조합이 함께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을 펼친다면 본래의 책무에 충실하면서 스스로의 고충을 덜어내고, 수많은 서민들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제1금융권과 여타의 금융조직들도 다 같이 나서야만 한다. 협동조합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협동조합에서 힘겹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 줘봐야 거대 제1금융권이나 부유층으로 빨려들고 말 것이다. 그건 중소기업 대출이 늘어나고 가계소득이 불어났는데도 살기가 더욱 어렵다는 아우성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외국 자본에 잠식당한 제1금융이라 해서 국내 경기의 활성화가 나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 같이 나서야 하고, 나서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혈액 같은 돈이 밑바닥으로 흐르고 대통령도 언급한 민생이 살아난다. 정부가 거들어야 한다. 정부가 제도적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 시장에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한다면 정부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이것이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언성을 높이고, 좌파적 주장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수출 많이 하는 대기업을 육성하고, 경쟁력을 갖춘 유망사업만을 지원해주며, 대기업의 핵심 인물이 설령 못된 짓을 했더라도 국가 경제를 위해 그 죄를 사면해주고, 국가의 책무이기도 한 자본을 보호해 주는데 주력해야지, 생산성이 낮은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루는 영세사업자들을 지원해야 하느냐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혈관 같은 기층 서민들과 영세사업자들이 병들고 나자빠지면 대동맥 같은 대기업과 부유층이라 해서 온전할 수 있겠는가? 혈액 같은 돈이 돌아야 소비가 늘어 자영업, 중소기업, 대기업 모두 다 함께 살아나고 고용과 소득이 늘어 말단 근로자들까지 기를 펴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면, 몇 곱의 연체이자를 물어야 하는 채무연체자나 개인회생, 파산 등의 신청자가 줄어들 것이며, 아울러 금융권이 BIS(국제결제은행)기준 때문에 안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요즘 금융권에서 인간의 등급을 매기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CSS(개인신용평가시스템)제도를 들이대면서, 가슴 치는 서민들을 살인적인 고이율의 대부금융이나 사채시장으로 내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라민은행의 무담보 소액대출 회수율은 99%에 이른다고 한다. 무조건 대출만 해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드대란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라민은행처럼 철저한 분석과 지도를 통해 서민과 영세사업자들의 소득과 사업 활성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 국민이 머리가 멍청한가, 게으르기를 한가, 능력이 없는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수한 두뇌와 근면성,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그 정도의 일을 해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정부로부터 정치권, 언론 등 모두가 금융권과 함께 나서야 한다. 그래서 신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최선의 길은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