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9장 15-26절
설교제목 : 뒤돌아보는 자의 최후
통곡의 소리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완연한 가을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평온한 일상과는 다르게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근거지를 둔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1600군데의 거점을 향하여 대규모 공습을 하였습니다. 500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헤즈볼라에서도 이스라엘 텔아비브을 향하여 미사일을 공격하였고, 대공미사일로 요격하면서 전면전의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보복은 또다른 보복을 불러오고 끝없이 원한의 악순환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으로 피난을 가는 이들의 인터뷰에서 폭격을 당하고 터전을 잃고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꺼지지 않는 이 전쟁의 불씨가 속히 사그러들어 다시 재건의 시간이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생사를 건 외부적 전쟁도 있지만, 인생은 끊임없는 정신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삶은 계속되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생존을 위한 필수적 국면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 같은 인생 속에서 개체의 인격의 성숙도에 따라 그 삶의 모습과 가치가 달라집니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박사는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이라는 책에서 전쟁이 끝난 후 청계천에 살던 피난민들의 고단한 삶의 일화를 들려줍니다. 그는 어느 날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습니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에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습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합니다.
“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정진홍 박사는 그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먹감나무가 제 몸에 난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빚어내듯 삶이 제아무리 곤고하다 해도 여낙낙한 태도를 잃지 않고, 세상이 가한 상처를 속으로 삭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김기석,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9월 6일자]
고단하고 곤고한 삶에서도, 세상이 가한 상처에도 아름다움 무늬로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우리네 삶이기를, 또한 이 세계에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타자를 위한 기도
아브라함은 낯선 방문객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극진히 환대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이 산출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려고 하는 순간, 소돔성을 바라보면서 한가지 다가올 사건을 예고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여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 알아보겠다(창 18:20-21).”
이 말씀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번성하여 이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예고를 듣고 다시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성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그 성을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아브라함은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그 성을 구해주시길 간청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쉰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이 아니라 45명이면, 30명이면, 20명이면, 10명이면, 계속적으로 의인의 수를 줄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성들을 용서해 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혹시나 의인이 10명은 없으면 하는 의구심과 의인 10명 쯤은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간청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함과 생명에 대한 존중, 공정함이 묻어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의 안녕과 복을 위한 것도 있지만, 역사의 지평 위에서 열린 시선으로 간구해야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안녕과 평화가 곧 나의 평화와 안녕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연대의식과 생명애에 입각한 기도는 오늘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자기살기 바쁘고 성취하고 더 많은 소유를 축적하고 확장해야하는 시대에 타자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효용가치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 지구가 복잡하게 얽힌 이 시대에 나만 살자고 덤벼 들면, 모두가 망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연대의식과 생명애를 가진 이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나를 넘어서 타자를 위해, 생명있는 것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죄로 물든 소돔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 10명이 있다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서 롯을 만나게 됩니다. 롯 또한 낯선 두 방문자를 극진히 모시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공궤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그의 집에 몰려와서 낯선 그 방문객들을 자신들의 손에 넘기라고 하면서, 그들과 상관하겠다고 말합니다. 19장 5절에서 상관하겠다는 말은 ‘알아보겠다’는 표현인데, 이는 성적 관계를 표현하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 소돔의 남성들은 이런 낯선 방문자와 관계를 원했는지에 대해선 대체로 그 소돔성이 남색이 만연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소돔성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다른 구도로 보면 이 소돔의 남성들이 새로운 낯선 남성상과의 관계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에게 고갈된 남성적 힘에 대한 부정적 작용임과 동시에 그들은 어떤 신성한 결합을 갈망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망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실현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정신적 갈망을 낮은 수준에서 실현하게 되면 각종 중독과 도착적 경향들이 수반될 수 있고, 비도덕적인 혼란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협 속에서 롯은 자신의 딸들을 내놓을테니 손님들을 해를 가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천사들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탈출하면서 롯의 모든 일가를 데리고 성 밖으로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곧 이 성이 유황과 불로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태가 궁극적으로 벌어지기 전에는 유예기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예기간을 넘어서면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심판의 불을 내리십니다. 이는 우리의 정신에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무의식에서 어떤 경고가 계속되는데도, 자아의식이 이를 무시하고 깨닫지 못하고 유예기간을 넘기면 일차적으로 자아의식을 내버려두고(방관), 이어서 무의식은 파괴적인 힘으로 자아의식을 압도하며 집어 삼켜버립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맹목적 욕망과 충동에 사로잡히고, 낮은 수준에서 영적 갈망을 실현하려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병리적 현상입니다. 오늘 개인과 집단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고장과 시대현상을 분별하여 돌아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뒤돌아보지 마라
천사들은 롯에게 당부합니다. 먼저는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서 여기를 떠나라’입니다. 곧 닥칠 심판의 불 앞에서 꾸물대고 머뭇거리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의 자리, 악한 자리, 불의한 자리, 우리의 영혼을 좀 먹는 자리는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현듯, 닥치는 심판의 불이 우리를 파멸하게 합니다. 기존의 삶의 체계에 익숙한 관성 때문에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면, 인생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 20대 내담자들을 만나면, 자신의 잘못된 삶의 패턴을 고수하며 부적절한 삶의 자리에서 서둘러 떠나지 못하며 심리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을 바른 곳에 두지 않는 자는 갑작스럽게 인생의 철저한 심판대 앞에서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꾸물대지 않고 서둘러 떠나야할 곳이 있다면 그곳을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은 두 번째 당부합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저 산으로 피하시오(19:17)”
그런데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아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민담이나 신화와 같습니다. 이는 원형적 특성으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며, 시대를 관통하여 적용가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떠나라 한 곳을 향하여 미련을 두고, 또는 지나친 호기심의 뒤를 돌아봅니다. 그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화석화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과거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되면 삶은 경직되어 신경증적 특성에 묶여 버려 생명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신경증입니다. 여러분, 신경증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 묶여 있고, 화석화되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엄연한 경고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꾸 옛 기억이나 옛 삶의 어떤 것에 대한 원망과 불평, 내 삶의 현재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고자 할 때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며 소금기둥의 될 위험 속에 처해 있음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약간의 시선을 두고 살 때만이 생명력과 삶의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뒤돌아보는 자의 최후는 돌처럼 굳어버린 삶, 어떤 생명력과 가능성도 담지되지 않은 화석화된 삶임을 기억하며 현재에 뿌리박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