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제언 · ‘박 대통령 8 · 15 경축사외교’ |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8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과거사엔 분명한 선 긋고 미래에 대한 전향적 언급 필요”
“집권 반년이 지나도록 한 · 일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 만큼 경축사에는 전술적으로라도 유화 제스처를 넣어야 한다.”
지난해 8월 초. 박근혜 대통령의 첫 광복절 경축사를 준비하던 청와대 팀에 외교부의 ‘재팬 스쿨’ 관리들과 학계 전문가들은 이런 제언을 쏟아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일축했다. 경축사에서 “(일본이) 과거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상대방의 아픔을 배려하는 자세가 없으면 미래로 가는 신뢰를 쌓기 어렵다” 며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책임 있고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에 대한 언급은 4600자가량의 경축사 가운데 15%가 넘는 700자에 달했다.
8월 15일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쟁취한 날인 동시에 48년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고 주권국가로 탄생한 날이다. 또 이날을 계기로 남북이 분단된 점에서 통일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에 따라 역대 대통령들의 광복절 경축사는 자신의 국정 어젠다와 남북 관계에 대한 비전을 우선 언급한 뒤 대일 관계를 덧붙이는 형태가 많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녹색성장’,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 건국’이 취임 첫해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 메시지였다.
이에 비해 박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 국정 어젠다를 특별히 제시하지 않은 채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경축사에 많이 언급된 키워드 순위에서 ‘일본’은 ‘평화’ ‘역사’ 등과 함께 수위에 올랐다. 그만큼 박 대통령이 일본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 뒤 양국 관계가 더 악화되면서 박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선 어떤 언급을 할지가 국내외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앙SUNDAY가 일본 전문가들을 연쇄 인터뷰한 결과 이번 경축사에선 과거사 언급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고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한 전향적 제언을 담아야 한다는 제언이 많았다. 박영준 국방대 교수는 “일본은 과거사와 관련해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매우 작다” 며 “박 대통령은 그동안 과거사와 관련해 (비판적) 입장을 여러 번 밝혀 왔는데 이번 경축사에서도 과거사를 언급하면 역효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도 “지난해 경축사에서 과거사를 언급했으므로 이번엔 동북아 질서라는 큰 틀에서 한·일 관계를 조망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중국은 황사·대기오염, 한국은 세월호 참사 등 저마다의 안전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국제안전망을 건설하자는 제안을 경축사에 녹여 대일 관계의 물꼬를 트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주장이다.
익명을 원한 전직 고위 외교관도 “고노·무라야마 담화 등 한·일이 지난 50년간 과거사와 관련해 쌓아 온 합의를 바꾸지 말라는 원칙적인 언급을 하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향적인 내용을 제안한 이들은 특히 11월 베이징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일본이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한·일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고위급 대화가 열릴 필요가 있으므로 광복절 경축사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사와 관련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시각 역시 여전히 강하다. 외교부 동북아국장을 지낸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원칙적으로 언급해야 할 대목을 생략하면 일본은 ‘한국이 고립을 우려해 유화노선으로 선회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꽃놀이패를 쥐게 됐다’는 오판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경축사에는 최소한 ‘(일본이) 역사인식을 분명히 해야 신뢰가 생긴다’는 원칙적인 선을 긋는 동시에 ‘일본이 역사를 직시한다면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넣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박 대통령이 지난주 발족시킨 통일준비위원회를 경축사에서 소개하면서 일본의 태도 변화를 전제로 ‘남북 통일에 일본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언급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언했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여권 인사는 “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위안부 문제를 강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그런 전망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7월 30일 이례적으로 위안부 할머니 2명을 면담한 뒤 “개탄스러운 인권 침해”라고 비판한 데 이어 나비 필라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지난 6일 일본을 비판하며 공평·포괄·영구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그 같은 국제적 움직임을 소개하며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올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도 “과거사는 정교하게 언급하되 위안부 문제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과 연설기록비서관은 외교부·통일부 등의 의견을 청취한 뒤 경축사 초안 작성을 지난주 마무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광복절 당일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 경축사의 핵심 변수”라며 “최종본은 대통령의 연설 직전에야 확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15를 종전기념일로 부르는 일본에선 당일 각료나 자민당 의원들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경축사는 과거사 언급 없이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만에 하나 아베 신조 총리가 광복절에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한다면 경축사에선 강도 높은 일본 비판이 불가피할 것”이라고도 했다. 아베는 지난해 12월 26일 야스쿠니를 참배했다가 미국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산 바 있다. 야스쿠니 외에도 지난 5일 공개된 일본 방위성의 ?방위백서?가 독도를 10년째 ’일본땅’이라고 기술한 점도 경축사의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일본이 광복절 직전이나 당일 한국을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의 미래와 관련해 전향적 언급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그럴 경우 2014년이 동북아지역에 상징하는 함의를 경축사에 녹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올해는 청일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과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 등 동북아와 세계를 뒤흔든 전쟁 3개가 각각 100·110·120주년을 맞는 해다. 박영준 교수는 “이들 전쟁은 한·일과 중·일 갈등의 뿌리인 동시에 심화된 경제의존 속에서 정치적으론 반목하는 ‘동아시아 패러독스’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경축사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동북아의 화해·협력을 위해 한·중·일 정상회의를 제안한다면 역내 주도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한·일 정상회담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내년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점도 경축사에서 짚고 넘어갈 대목으로 꼽힌다. “반세기를 맞이하는 ‘65년 체제’가 최근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난 50년간 양국 관계의 성과는 향후 50년간 더욱 발전시키고, 부정적인 측면은 없애 가자는 언급을 해 봄 직하다. 구체적으로 박 대통령이 지난해 제안한 양국 공동 역사교과서 저술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자고 제안하는 방안도 있다.”(윤덕민 원장)
역대 대통령들의 8·15 경축사는 박정희, 남북대화 계기 마련 … MB, 독도 방문 후 日王 사과 언급
역대 대통령들의 광복절 경축사는 늘 관심의 대상이 됐다. 독립 · 건국 · 통일이란 3개의 테마를 녹인 복합적인 국경일이라 대통령들은 경축사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국내 정치권은 물론 일본과 북한도 우리 대통령의 8 · 15 경축사를 정부의 대일 · 대북정책 가늠자로 여기며 주목해 왔다.
가장 화제를 모은 건 2012년 광복절 직전 대통령으론 처음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해 8월 10일 독도를 찾아 경비대원들을 격려하고 한국령 표석을 둘러본 그는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엔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며 대일 강공 드라이브를 이어갔다. 현직 대통령이 일왕의 사과를 공개 언급한 것 역시 처음이었다. 일본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때 한국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밀월을 구가했던 한·일 관계는 급랭했다. 그 기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대통령들은 광복절 경축사를 주로 자신의 통일정책이나 대북 메시지를 밝히는 계기로 삼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8년 경축사에서 “우리는 북편(北便)을 바라보고 원감(怨感)을 금(禁)할 수 없다” 며 분단의 고통을 토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70년 경축사에서 “북한이 무력 적화통일 포기를 선언하면 남북 간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당시까지 정부의 노선이었던 북진통일론 대신 평화통일론을 처음 천명했다. 노태우 대통령도 88년 경축사에서 “장소 · 의제 · 절차에 구애 없이 남북 최고 당국자 회담을 갖자”고 했고, 90년 경축사에서도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98년 경축사에서 “통일은 무력이나 흡수가 아니라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룩돼야 한다”는 골자의 대북정책 3대 원칙을 제시하며 햇볕정책을 선언했다. 광복절 경축사는 정파를 떠나 전향적인 대북정책 선언의 무대로 활용된 셈이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94년 경축사는 달랐다. “통일이 갑자기 올지도 모르니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당시 정계와 외교가에선 “한 달 전(94년 7월 9일) 김일성이 숨진 상황에서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한 건 북한이 3년 안에 망한다는 뜻”이란 추측이 돌았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한 붕괴론의 효시가 됐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87년 경축사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자성론’을 제기했다. “우리가 힘이 없어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것을 깊이 인식하고 뼈아픈 과거를 자성해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 며 다시는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하는 각성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라 했다. 당시 재야 일각에선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란 비판이 나왔지만 큰 반발 없이 넘어갔다.
- 중앙선데이 | 강찬호 기자 | 제387호 | 20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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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외교 길을 묻다 · 국내외 전문가 30명 진단… |
| 9일(현지시간) 미얀마 네피도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가운데)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 한·중·일 외교장관회의가 역내 과제의 해결을 맡아야 할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말했다. 왼쪽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 오른쪽은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 [네피도=지지통신] |
"한국외교 위기는 일본에서 온다"
"한 · 일 갈등 속 아베 · 시진핑 만나거나, 북 · 일 가까 워지면 한국 부담"ARF 참석한 일본 기시다 외상 … 중국 왕이-북한 이수용과 회담
“한국과 일본 모두 어떤 관계를 구축할지 큰 그림을 보는 관점이 없다.” (히라이와 슌지 일본 간사이가쿠인대 교수)
외교가 국가 간 소통이라면 한국 외교는 위기다. 일본과는 2012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래 2년간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고 있다(지난 3월 한·미·일 정상회담 제외).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은 끊긴 지 오래다. 6자회담도 2008년 12월이 마지막이다. 다행히 한 · 미, 한 · 중 관계가 좋지만 늘 위험한 줄타기다.
그래서 국내외 외교 전문가 30명 (미 · 중 · 일 전문가 9명 포함) 에게 대한민국 외교의 현재와 미래를 물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외교의 위기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온다고 답했다. 가장 시급하게 해소할 위협이라고도 했다. 특히 중 · 일 관계의 경우 지금보다 개선되든, 악화되든 모두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중 · 일 관계가 나빠질 때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이 전체의 절반 가까운 14명이었다. 실제 일어날 가능성을 1점(가능성이 거의 없다)~10점(반드시 일어난다) 척도로 묻자 평균 5.5점이 나왔다. 전문가 중 12명은 중 · 일 관계 개선도 한국 외교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북한과 일본 간 관계 개선도 한국 외교의 위기요소라고 봤다. 현실화될 가능성도 평균 5.2점이나 됐다. 한국에 미칠 영향을 1점(매우 부정적)~10점(매우 긍정적) 척도로 묻자 평균 2.8점으로, 매우 부정적이었다.
미얀마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위협은 현실화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9일(현지시간)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을 한 데 이어 10일 오후 북한 이수용 외무상과 북 · 일 외교장관회담을 열었다. 한국 외교부의 허를 찌른 만남이었다.
전문가들이 한국 외교의 가장 큰 위협요인을 일본이라고 꼽은 건 한 · 일 관계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석희 교수는 “한·일 관계가 좋다면 중·일 관계가 어떻게 되든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며 “하지만 지금처럼 한 · 일 관계가 안 좋은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한다면 한국 외교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간 관계에서 역사나 안보문제 등 어느 한 부분이 관계 전체를 규정하도록 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프랭크 자누지 미국 맨스필드재단 사무총장은 “한·일 관계나 중·일 관계 등 동북아 정세는 서로가 윈-윈 하는 관계로 전개되는 게 바람직하다” 며 “미국과 중국도 경쟁할 땐 하지만 관계 개선을 위한 공식 · 비공식 대화통로를 항상 만들어 놓고 있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 | ◆ 특별취재팀 = 유지혜 · 유성운 · 정원엽 기자, | 베이징 · 도쿄 · 워싱턴 = 최형규 · 김현기 · 채병건 특파원, | 권정연 · 차준호 대학생 인턴기자 |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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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아베, 굳은 박 대통령 … "이 장면에 속 좁은 한국 됐다"
박근혜정부 외교 아쉬운 순간들 …주철기 "한 · 중, 집단자위권 우려" … 일본 협공 모양새 … 부적절 평가중국 방공구역 맞서 KADIZ 선포 … 주변국가 설득한 한국외교의 승리
지난 3월 25일 오후 네덜란드 헤이그의 미국 대사관저.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한 · 일 관계를 중재하기 위해 미국이 마련한 3자 정상회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님으루(대통령님을) 만나서 반갑스무니다(반갑습니다).” 아베 총리가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세 정상이 악수해 달라는 카메라맨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의 한국 전문가들은 “제3자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거나 속이 좁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출범 1년6개월을 맞은 박근혜 정부는 외교 분야에서 늘 여론 지지율이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패 사례’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보는 우리 외교의 숨은 아킬레스건이 바로 한·일 관계였다.
국내외 전문가 30명에게 ‘박근혜 정부가 외교적으로 가장 미숙하게 처리한 사안’을 물었다. 30명 중 21명이 “한·일 관계 관리”라고 답했다. 압도적이다. 한국 외교의 위기가 일본에서 올 것이라는 분석과 일치한다. <중앙일보 8월 11일자 1, 4, 5면> 그 다음이 남북관계 경색(4명)이었다. 미국에 한·중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응답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전문가들이 지적한 사건들로는 올해 박 대통령의 3·1절 기념사가 꼽혔다. 당시 박 대통령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1000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특별오찬이 끝난 뒤 “두 정상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고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공개한 것도 아쉽게 보는 장면이었다. 한·중이 연합해 일본을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한 데다 미국이 지지하는 집단적 자위권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게 적절치 못했다는 것이다. 김한권 아산정책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은 “중국으로선 역사문제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가 꽉 막혀 있는 한국을 자신들 전략에 놀아나는, 다루기 쉬운 상대라며 무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남궁영 국제정치학회장은 “전반적으로 아베 정부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는 것처럼 비치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일본 전문가 6명 중 5명도 한·일 관계 악화를 미숙하게 처리한 사안 이라고 꼽았다. 로버트 해서웨이 우드로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국장은 “한·일 사이가 나쁘면 한국의 정치·경제·안보 이익이 모두 저해된다. 한·일 관계 회복이 박근혜 정부의 ‘넘버 원’ 외교 목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전문가들은 시각이 달랐다. 쑤하오(蘇浩) 외교학원 교수는 미숙하게 처리한 사안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망 편입과 관련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가 외교적으로 잘한 사안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미 · 중 모두와 원활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19명)를 꼽았다. 지난해 말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에 대처를 잘했다고 한 전문가도 3명이나 됐다. 대형 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오히려 주변 국가들을 납득시키며 역으로 우리의 자체 방공구역(KADIZ)을 발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꼽은 한국외교 아쉬운 장면·발언
① 헤이그 3자회담 3월 미국 중재로 한·일 정상이 만났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일본 총리의 한국말 인사에 답도 하지 않았다. 전문가 평가 “제3국 사람들도 이에 대해 한국이 너무 경직돼 있다고 평했다. 미 · 일 외교가는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② 3·1절 기념사 박근혜 대통령이 “1000년이 지나도 가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전문가 평가 “집단적 자위권보다도 더 심각한 사건이었다. 안보와 영토·역사를 분리하지 않겠다는 경직성을 보여줬다.”
③ 주철기 브리핑 지난달 시진핑 주석 방한 때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두 정상이 집단적 자위권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전문가 평가 “한·중 정상이 일본을 협공하는 모양새였다. 기자회견서도 일본을 비난하지 않았는데 막판 브리핑에서 실수했다.”
④북한 잇단 미사일 발사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계속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통일구상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 평가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와 이산가족 상봉 실현 등 하반기에 북한 변수를 적극 관리할 필요가 있다.”
- 중앙일보 | ◆ 특별취재팀 = 유지혜 · 유성운 · 정원엽 기자, | 베이징 · 도쿄 · 워싱턴 = 최형규 · 김현기 · 채병건 특파원, | 권정연 · 차준호 대학생 인턴기자 |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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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 일 관계 개선 시급" 전문가 70%, 국민은 5%뿐
본지 · 아산정책연구원 공동 조사"대일외교, 반일정서 편승이 문제 … 국내 정치입지 떠나 실용 접근을"
전문가 30명 중 21명은 한·일 관계 악화가 박근혜정부 외교의 가장 큰 실책으로 보고 개선을 촉구했지만 국민의 반일 감정은 심각한 수준이다. 정부의 대일외교 행태가 국민 인식에 영향을 준 결과다.
본지와 아산정책연구원이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공동 설문조사에서 ‘박근혜 정부가 외교적으로 협력을 강화해야 할 국가’를 묻는 질문에 일본을 꼽은 응답자는 4.9%였다. 북한(10.6%)보다도 낮았다.
특히 전문가들은 중국과 일본의 관계 악화를 한국이 직면한 당장의 위협으로 꼽았지만 일반인 여론조사에서는 중·일 사이가 멀어지면 우리나라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응답이 18.2%에 불과했다.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란 응답은 38.5%였다.
북·일 사이가 좋아지면 한국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응답은 61.9%였다. 긍정적이란 답은 8.1%에 그쳤다. 전문가들의 경우 북·일 관계 개선이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답은 13명,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답은 11명으로 비슷했다. 미·일 사이가 좋아질 때도(50.5%), 중·일 사이가 좋아질 때도(51.8%) 우리에겐 부정적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일본과 다른 나라의 사이가 좋아지는 건 다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김지윤 아산정책연구원 여론조사분석센터장은 “정부의 외교정책이 일반인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며 “이런 인식이 굳어지면 오히려 정부에 큰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지금 대일외교의 문제는 정부 정책이 이미 존재하는 국민의 반일 정서에 편승하고, 일본 관련 문제가 터졌을 때 정책 담당자들이 국민 감정에 호소하는 보여 주기식 외교를 한다는 것”이라며 “양국 지도부가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탓하는 일을 멈추고 더 이상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상황 관리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수 서강대(정치외교학) 교수는 “대일외교에 있어서는 국내정치적 입지나 지도자의 철학을 떠나 한발 양보하더라도 더 큰 것을 움켜쥐는 실용적인 큰 선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 | ◆ 특별취재팀 = 유지혜 · 유성운 · 정원엽 기자, | 베이징 · 도쿄 · 워싱턴 = 최형규 · 김현기 · 채병건 특파원, | 권정연 · 차준호 대학생 인턴기자 |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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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외교 길을 묻다 · ‘유연한 미 · 중 ·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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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건건 충돌해도…? 중국, 미국이 주도하는 림팩 참여
국익 따라 움직이는 주변국들 …영토 · 역사 문제로 대립하는 중 · 일 … 11월 정상회담 위해 물밑서 접촉"신뢰라는 원칙에 갇힌 한국외교 적과도 손잡는 유연함 필요해"
지난달 28일 중국은 마이크로소프트(MS)를 반독점 혐의로 기습 조사했다. 두 달 전 미국이 해킹 혐의로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군인 5명을 기소한 것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사이버 보안 문제를 거론하며 날을 세웠다.
반면 중국은 올해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 합동군사훈련 림팩(RIMPAC)에 참여했다. 미·중이 군사훈련을 같이한 건 처음이다. 경제 분야에서 미·중의 협력은 더 단단하다. 중국은 1조2600억 달러(약 1293조원)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달 열린 미·중 경제전략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끈끈했다.
국제정치학에선 외교를 선택지를 많이 가져야 유리한 게임이라고 가르친다. 강대국들은 이걸 그대로 실천한다. 원수처럼 싸워도 국익이 걸리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악수한다. 적과의 동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글로벌 이슈와 지역 이슈를 분리한다. 안보와 경제 , 과거사와 현재 상황을 구별한다. 전문가들은 “‘신뢰’라는 한 가지 원칙에만 갇힌 한국 외교가 유연함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중국과 일본 관계만 해도 그렇다.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와 동중국해를 놓고 두 나라는 무력충돌까지 불사하고 있다. 지난 2월 동중국해에선 양국 전투기가 30m 앞까지 접근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하지만 지난달 시 주석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일본 총리를 만났고, 지난 9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중·일 외교장관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이 출범한 이래 처음으로 회동했다. 두 나라는 11월 정상회담까지 추진하고 있다.
한석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며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힘들다고 판단해 중국과 먼저 관계 개선하면 한국의 전략적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과 일본도 전략적으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선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 무드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은 북한을 제재하기 위한 한·미·일 공조에만 머물지 않고 북한과도 손을 잡고 있다. 아베 내각 특유의 실리 외교다. 북·일은 ARF 회의에서 10년 만에 외교장관회담도 열었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은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름의 전략 공간을 만들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근식(정치외교학) 경남대 교수는 “북·일 관계 정상화, 남북 관계 중단, 한·일 관계 최악이라는 세 가지 상황이 결합될 경우 한국은 아주 곤혹스러운 상황에 몰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도 실사구시 외교로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얘기다. 한 예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나 미사일방어(MD)망 등의 사안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유연하게 대응하라는 것이다.
서강대 김영수(정치외교학) 교수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미·일 공조만 잘 될 경우 북한에 대한 억제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며 “3국 간 정보 공유 등 실익에 대해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리 챙기는 미 · 중 · 일 외교 장면들
① 미·중 겉으론 4월 베이징에서 만난 양국 국방장관들은 영토분쟁 문제 등을 놓고 서로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정면충돌했다. 속으론 중국이 올해 처음으로 미 해군이 주도하는 림팩에 참가하는 등 양국은 안보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② 미·일 겉으론미국은 일본의 정상국가화 추진을 지지하고, 일본은 미국산 군사장비 도입 등을 통해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속으론 아베 일본 총리는 4월 방일한 오바마 미 대통령 면전에서 야스쿠니 참배 정당성을 주장, 국내 보수층 지지를 꾀했다.
③ 북·일 겉으론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대북 제재를 주도하고, 북한은 미사일 발사 도발을 일삼으며 일본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속으론 북한이 6월 29일 동해상에 미사일을 쐈다. 하지만 이틀 뒤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협의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④ 중·일 겉으론 일본의 센카쿠열도 국유화 선언 이후 양국은 군사충돌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등 영토분쟁이 격화하고 있다. 속으론 9일 미얀마에서 열린 ARF에 참석한 중?일 외교 수장은 한밤중에 비공개로 만나 중?일 정상회담 관련 논의를 했다.
- 중앙일보 | ◆ 특별취재팀 = 유지혜 · 유성운 · 정원엽 기자, | 베이징 · 도쿄 · 워싱턴 = 최형규 · 김현기 · 채병건 특파원, | 권정연 · 차준호 대학생 인턴기자 |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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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ARF서 북핵 비판 연설할 때 북·일은 회의장 나가 다른 방서 회담
이수용, 회담 뒤 곧바로 왕이 만나북·중 회담 어렵다는 한국 예측 깨
올해 미얀마 수도 네피도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9~10일)에서 외교전쟁의 승자는 일본과 북한이었다. 예년엔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하는 ARF 의장 성명에 관심이 집중됐지만 올해는 달랐다. 북한과 일본 대표단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됐다. 다자 외교 무대에 처음 데뷔한 이수용 북한 외무상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은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양자 회담들을 이끌어내며 ARF에서 실리를 챙겼다.
특히 압권은 10일 ARF 전체회의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발언을 앞두고 기시다 외상과 이수용 외무상이 한꺼번에 자리를 뜬 장면이었다. 다섯 번째로 입장을 발표한 이 외무상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16번째 발언자가 발언을 끝내자 자리를 떴다. 기시다 외상도 마찬가지였다. 윤 장관이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위협을 비판하고 드레스덴 선언 등 대북정책을 설명하기 직전이었다. 윤 장관의 발언 순서는 18번째였다. 북·일 두 외교 수장은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다른 방으로 들어가 정식 양자 회담을 했다. 북·일 외교장관 회담은 2004년 이후 10년 만이다.
30분여 지났을까. 이 외무상이 갑자기 밖으로 나오더니 이번엔 복도 건너의 다른 방으로 쑥 들어갔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회담한 것이었다. 북·중 회담이 어렵다고 전망한 우리 외교부의 예측을 깬 결과였다. 그 사이 북한 최명남 국제기구 부국장은 깜짝 기자회견을 열어 “핵무기 보유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으로 부득이 내린 결정”이라며 핵 보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개막 첫날인 9일에는 일본이 가장 분주했다. 일본은 미·일 회담에 이어 오후 한·일 회담을 했다.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이 다음 날로 미뤄지자 한밤중에 중국과 외교장관 회담을 열었다. 아베 신조 총리 취임(2012년 12월) 후 첫 중·일 간 외교장관 회담이었다.
북·일, 북·중, 중·일 회담은 ARF 시작 전부터 성사 여부가 주목을 받았다. 하나하나가 한국 외교에 미칠 영향이 커서다. 하지만 외교부 관계자들은 성사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능성이 낮다”거나 “성사되더라도 잠깐 서서 만나는 정도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막상 9~10일 회담들이 성사되자 이번엔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10일 “길게 (회담을) 한 것 같지는 않고 기존 입장을 서로 밝힌 것 같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 | ◆ 특별취재팀 = 유지혜 · 유성운 · 정원엽 기자, | 베이징 · 도쿄 · 워싱턴 = 최형규 · 김현기 · 채병건 특파원, | 권정연 · 차준호 대학생 인턴기자 |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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