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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묵상글 들 ( 연중 28주 목요일-지지리도 복이 없는 자, 복을 걷어차는 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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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8주 목요일-지지리도 복이 없는 자, 복을 걷어차는 자
의도하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배치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분위가 정반대입니다.
오늘의 독서 에페소서는 은총, 평화, 복을 얘기하는 데 비해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너희는 불행하여라!"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대조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러니까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림"으로써 불행한 것임에 반해
에페소서의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은총과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다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복을 걷어차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복이 없어서 불행하거나
복을 누가 주지 않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복을 걷어차서 불행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에페소서와 연결시키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해서
온갖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인데 그 복을 개떡같이 여겨 차버리거나
오기로 차버리거나 아무튼 차버려서 복이 날아가서 불행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불행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지식을 알려주셨는데 그 예언자들을 죽여버린 조상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신비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차버리지요.
복음 다른 곳에서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듯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려버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복을 걷어자버린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을 은총으로 만나기 전에는 이들과 마찬가지였지요.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한 사람이었으니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지 않았으면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주신 하느님 은총과 복을 가볍게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주신 하느님 은총과 복은
우리가 그렇게 가볍게 여길 것들이 아니고
우리는 이것들을 가볍게 여길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간혹 자기 비하감과 열등감에 빠질 때도 있지만
정반대로 터무니없게도 자기를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다 교만에서 비롯된 정확하지 않은 자기 인식인데
우리는 진정 자기 주제와 분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 자기 주제 파악과 분수를 앎을 일반적으로 겸손이라고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이 겸손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겸손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고,
크신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은총으로 충만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충만이나 행복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경우입니다.
받지 않으면, 더 정확히 얘기하여, 받아서 들이지 않으면 해당 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게만 복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복 주시는 분인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그 복을 찾거나
주시는 복을 무시하고 걷어차서 그런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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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연중 28주간 (예수의 성녀 데레사 학자기념) <완덕의 길>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데레사 성녀가 걸었던 완덕의 삶을 본받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시기를 기도합니다.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21살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철저한 고행과 관상으로 참된 수도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동료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관상 수도회를 유지하였습니다. 1582년 알바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1622년 시성 되셨습니다.
데레사 성녀께서 수녀들에게 타이르는 말씀을 하셨는데 함께 묵상함으로써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기름진 땅이라도 아니 가꾸면 가시와 엉겅퀴가 날 따름이니 사람의 정신도 이와 같으니라. 영성적인 일들을 항상 좋게 말할지니 이를 테면, 수도자 사제, 은수자니라.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매양 말을 적게 하라. 하는 일, 대하는 일마다 조심성을 가져라. 언제나, 특히 하찮은 일에 마구 우기지 마라. 누구에게나 알맞은 기쁨으로써 말하라. 어떤 일에든지 조롱을 하지 말라. 신중과 겸손과 스스로 부끄럼 없이 남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서 기꺼워하는 이와 기꺼워하고 슬퍼하는 이와 슬퍼할지니 결국 모든 이를 얻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변명을 하지 마라.”데레사는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진보를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데레사 성녀가 동료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수도회를 지켜 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드높은 가르침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훌륭한 글을 쓰게 된 것도 성령께서 함께하신 덕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다른 것들도 말해 보렵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터라 두서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두서없는 편이 나을 성도 싶은 것은 애당초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줍잖은 까닭입니다. 그저 바라옵기는 주님께서 내가 하려는 일 전체에 당신 손을 펴 주시어 거룩하신 그 뜻에 맞게 해주십사 할 따름입니다. 비록 일이야 나 자신처럼 하찮은 것이지마는 언제나 주님의 뜻을 좇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인 것입니다.”
데레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몰랐지만, 성령께서 일러주셔서 훌륭한 저서들을 남기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언되기까지 하셨습니다(1970년,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해야 할 바를 성령을 통해 ‘바로 그 자리에서’이루어 주십니다(루가12,12).
완덕을 추구하던 성녀의 가르침에 힘입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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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47-54: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 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의 악함을 씻을 수는 없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안에서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례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는다고 해도 힘없고 약한 이웃을 헐뜯거나 정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비아냥거리며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나 않은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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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한상우 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들어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멈춰 서서
물들어가는
이가을을
조용히
바라본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이 세상의
풍경이다.
이 모든
시간은
은총으로
지나가고
있다.
아프게도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
완성되는
사랑의 이야기다.
끝내 남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뿐이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사랑이 아닌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을 찾는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간절한 사랑이다.
십자가 아래
아파하는
성녀 데레사가
있다.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사랑은 절제와
사랑은 참회와
사랑은 일치라는
충만한 기쁨으로
초대한다.
삶의 앞면과
뒷면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발에 묻은
거짓을 털어내는
기쁨의 오늘이다.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성녀 데레사의
삶이다.
성녀 데레사의
믿음과 사랑이
고스란히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사랑의 소명은
간절한 봉헌으로
서로를
자유롭게 한다.
바람에
흔들릴수록
깊어지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지나갈 수 없는
신앙의 여정이다.
날마다
사랑으로
지나갈 삶이다.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이 여정을
사랑과 함께
걸어간다.
지나가는
시간 안에
우리가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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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사도행전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들을 구해 준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사도 5,19-21).”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7).”
이 이야기들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구해 주시는 때는 언제이고,
순교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때는 언제인가?
어떤 상황에서는 구해 주시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버려 두시는가?”
“누구는 구해 주시고, 누구는 내버려 두시는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에는 왜 내버려 두셨을까?”)
사도들을 감옥에서 구해 주신 일도 은총이고, 사도들이 순교한 것도
은총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 하느님의 기적과 같은 일을 통해서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기적 체험’을 할 때도 있고, 그런 일이 전혀 생기지도 않고,
기도의 응답도 얻지 못한 채로 좌절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때는 언제인지,
안 들어 주시는 때는 언제인지, 우리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모든 일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작용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박해받고 있다는 것을, 또 우리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모르고 계셔서 안 도와주시는 것도 아니고,
또 능력이 부족해서 못 도와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아직 모르는,
당신의 어떤 뜻과 계획대로 세상일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순교는 ‘임무 실패’가 아니라 ‘임무 성공’입니다.
순교는 임무 수행의 ‘영광스러운 완성’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들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공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은 전체 인생의 일부, 그것도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가 살게 될 진짜 인생은 저쪽 세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고,
잘못된 일들을 반드시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자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일들에 대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49-51).”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박해받고 죽으라고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 그것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만,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사실 그 박해자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이고,
하느님께서는 박해자들에게도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구원과 멸망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이미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해자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자들이 있습니다(요한 16,2-3).
유대교의 박해 때에도 그랬었고,
우리 교회 역사에서도 자주 보는 일인데 ‘교회 내부의 박해’가 그런 경우입니다.
박해자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도 잘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자기들의 위선이 폭로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런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 말씀은, 위선자들이 옛날 예언자들의 무덤을 잘 꾸며 놓는 것은,
진짜로 예언자들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위선을 감추려고
예언자들을 존경하는 척 하는 ‘거짓 존경’일 뿐이라는 꾸중입니다.
(조상들이나 후손들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종교 지도자가(성직자가) 위선자라면, 자기 혼자서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멸망의 길’로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종교 지도자들(성직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예수님께서는 알면서도 죄를 지은 자들과
모르고서 죄를 지은 사람들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잘못된 인도를 받아서, 죄인 줄 모르고서 죄를 지은 사람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은(종교 지도자나 성직자는)
엄한 심판과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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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새벽을 열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빠다킹신부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화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아마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옆 사람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시는 분도 있지 않을까요?
“이게 꿈이야 생시야? 정말인지 내 뺨 좀 꼬집어 주세요.”
뺨을 꼬집어서 통증이 오면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고통을 느낀다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통과 아픔이 전혀 없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거나 죽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삶에서 왜 이렇게 고통이 많은지 모르겠다며 눈물짓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힘들고 죽을 정도로 버겁기도 하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고통과 시련을 피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어떤 형제님도 바이러스 확산으로 손님이 줄어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 순간, ‘배달을 전문으로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부러 지금 막 튀긴 치킨을 들고 아파트를 다니면서 냄새를 풍겼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바이러스 문제가 없었던 때보다 더 높은 수익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고통과 시련에 그냥 머문다면 어떨까요? 아마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시련을 넘어서자 기쁨의 삶이 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먼 훗날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의 삶에 더 큰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음에만 관여하시고, 삶에는 전혀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면서 고통과 시련에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합니다.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지금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사랑은 보지 않고 율법에 나와 있는 세부 조항을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굴레를 더욱더 무겁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는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는 달콤해 보이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위선으로 인해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됩니다.
지금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 삶의 또 다른 모습임을 인정하면서 주님과 함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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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는 가난한 사람이지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반 다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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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시련에 대해...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 그 이유를 묻지만, 아이는 더 소리를 높여서 울 뿐입니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잠시 뒤에 엄마가 오자 아이는 서러웠던 눈물을 더욱 쏟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운 뒤에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놉니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의 대상인 엄마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울고 있는 상태는 분명 고통과 시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어딘가 아플 수도 있고, 불편함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엄마만 나타나면 해결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만으로 내 고통과 시련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돈, 명예 등 세상의 것들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세상의 것들을 찾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굳게 믿듯이,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진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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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기우 신부님.
도대체 믿는 이들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서 나오는가?
지식의 열쇠로 열어야 할 섭리적 계획
- 믿는 이들의 도덕적 책임(Nobles Obliges)에 대하여
오늘은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백 년 전인 16세기 스페인에서 활약했으며 흔히 ‘아빌라의 데레사’로
알려진 성녀는 1622년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으며 1970년에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박사’라고 불렀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평신도로서 율법에 관한 지식으로나
사회경제적 지위로나 또는 종교적 영향력으로 볼 때 지도적 위치에 있던 바리사이들에 대한 날선
비판이 이어집니다. 루가 복음사가가 정리했던 여섯 가지 불행선언의 마지막 두 가지 비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저지른 다섯째 악행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듦으로써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반성하지 못하고 되풀이하고 있다는 역사의식 망각의 죄입니다.
오늘날 군국주의로 회귀하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연상시키지요.
여섯째 악행은 지식의 열쇠를 지녔으면서도 그것을 치워 버리고서,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린 죄입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율법에 관한 지식으로서 본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줌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지혜의 도구인데, 그 자체를 율법을 완벽하게 알 수도 지킬 수도
없었던 민중을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서 소외시킴으로써 율법을 권력의 도구로 삼았던 공동선
의식이 결여(缺如)된 무책임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양반 선비들을 연상시키지요.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 거룩한 지식의 열쇠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며,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그분 안에서 선택되었으며 세상에 태어나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세상 사람들에게 섬김으로써 나누어주어야 할
의무이기도 하지요. 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연상시킵니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 Obliges)라고 부르는 말은
부와 존경을 겸비한 귀족이 사회에 대해 행해야 할 책임을 말하는데,
이런 세속적인 이치는 종교적으로 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귀족들이 자격이 있어서 그러한 부를 차지하고 존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전적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분으로 인한 특권인 것처럼,
신앙인들 역시 자격이 있어서 그런 구원의 특권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은총으로
받은 것이므로 다른 이들에게도 섬김으로 그 자격을 입증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이 있는 한편, 다른 이들도 그렇게 섬김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라는 사회적 임무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대데레사 성녀가 ‘교회박사’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여성으로서는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받은 까닭도 이 점을 깊이 깨닫고, 실제 수도원 개혁으로 실행에 옮겼으며,
그리하여 데레사 성녀는 먼저 깊은 관상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삶과 활동으로 나아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도와 활동으로
하느님과 합일하려는 신비 체험으로 교회를 쇄신하는 길이 세상을 복음화시키라는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데레사 성녀가 수녀원에 입회할 당시에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여서,
왕정이 귀족 세력과의 경쟁관계 속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루터로 인해 교회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라진 혼란에다가, 남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정복함으로써
막대한 양의 은이 왕실로 유입되어 흥청망청 사치와 향락이 흘러넘치는 분위기에서
극소수의 선각자들이 개인의 존엄성을 깨우치려던 인간 의식의 맹아기였습니다.
세르반테스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쓴 때도 이 무렵이지요.
그런데도 가톨릭 교회 내부의 분위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왕실의 호사스런 타락과
세상의 혼탁함에는 무관심한 채 그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정복된 대륙에서 신자들을
늘리려는 교세 확장이 선교라고 생각하는 안이한 자세를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회 쇄신의 모범이 되어야 할 수도원조차도 귀족화되어 있었습니다.
기부금을 내고 입회한 이들의 영향력이 수도원 분위기를 좌우하는가 하면,
귀족 입회자들은 하녀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들어와서는 세속에서
귀족이 누리던 특권을 유지하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개혁하기 전에 기강부터 바로잡기 위해서 데레사 성녀는
1562년에 규칙을 엄격하게 보완한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하였습니다.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샌들만 신고 다녔던 데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자 기존의 회원들로부터 온갖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579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독립하기까지 18년 동안
데레사 성녀에게는 ‘영혼의 어둔 밤’이 지속되었습니다.
마침내 수녀원장으로 취임하던 날 데레사 성녀는 원장석에 예수님의 상을 모셔 놓고,
이분이 이 새 수녀원의 원장님이시라고 선언함으로써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 봉쇄수도원의 수도자에 대해서 세상을 멀리하려는 은둔자의 이미지로 바라보지만,
데레사 성녀는 ‘수도적 관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가 데레사 성녀의 영적 여정과 투쟁에 동반해 준 것도 이 조화와 일치로
복음적 섭리와 교회적 신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은총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마흔 살에 이르러 하느님의 신비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데레사 성녀는 기도와 활동의
조화와 일치를 통한 영혼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후배 수도자들을 위해 기록해 놓은 글들, 즉 영성 훈화라든가 주의 기도를 주해한
‘완덕의 길’이라든가 또 신비체험에 이르는 인간의식의 일곱 단계를 기록해 놓은
‘영혼의 성’ 같은 저술을 통해서 데레사 성녀는 당대는 물론 후대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귀중한 지혜의 열쇠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가르멜산에서 바알의 수백 명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했던 엘리야 예언자의
영성으로 사회악을 대적하여 공동선으로 변화시키고 최고선에로 나아가기 위한
‘관찰-판단-실천’의 지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사회교리의 방법론이 된
이 지혜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에 의해 전면적으로 수용되고 나서
바오로 6세가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언한 이유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은총을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우리는 거저 얻은 그 믿음이라는 특권을
세상에서 봉사라는 책임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며,
세상이라는 거친 들판을 맨발로 또 낮은 자세로 걸어가면서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섬기는 체험을 통해서 더욱 하느님께
합일할 수 있는 더 큰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지식의 열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믿는 이들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가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물음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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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는 구약 최초의 살인 사건을, ‘즈카르야의 피’는 구약 최후의 살인 사건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모든 죄를 예수님 세대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인 것은 조상들인데, 어째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조상들이 지었던 모든 죄를 종교 지도자들이 여전히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고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처럼 하였지만, 실상은 살아 계신 예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이 진정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죄를 참회하였다면, 예언자 가운데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몰아댔으며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곳곳에 수많은 기념관이 있고 해마다 수많은 기념일을 지냅니다.
이는 과거의 공과를 헤아려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도 사실은 기념 제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며 복음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이든 사회적인 차원이든 과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 또한 불행한 오늘을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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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020년 한해에 자동차 키를 두 번이나 잃어버렸습니다. 한번은 신부님들과 자전거 타러갔다가 가방을 잃어버리면서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한번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물병을 꺼내면서 주머니에 있던 자동차 키를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에 차에 기름을 넣으면서 열쇠를 찾았습니다. 귀신이 곡할 것처럼 열쇠가 주머니에 없었습니다. 분명 키가 있었기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왔었습니다. 생각하니 처음 운전하려할 때 딸깍하고 소리가 났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의자 밑을 보니 자동차 키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일 년에 두 번 잃어버리는 것도 속상한 일인데 세 번 잃어버리면 정신 줄을 놓고 다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니 성격이 급한 것이 원인입니다. 차분하게 여유를 가지면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속상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자동차 키를 잃어버린 것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2020년 일상의 삶을 멈추게 했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야 했던 코로나19를 생각합니다. 중국 우환에서 발생했으니 중국 탓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야생 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왔으니 야생 동물 탓이라고도 했습니다. 질병의 발생 장소로 병명을 정하는 것은 지역 혐오와 차별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우환 바이러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야생 동물의 터전을 우리가 파괴했기 때문에 책임을 야생 동물에게 묻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지구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지구가 인간에게 보내는 백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경제 활동이 멈추고, 인간의 환경 파괴가 멈추니 지구의 생태계가 좋아졌다고 합니다. 치료제를 만들고 백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희생시킨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책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위선, 허영, 교만을 탓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책임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탓하셨습니다. 자기들도 가지 않으면서 남도 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탓하셨습니다. 어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는 2000년 전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사목자와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갇힌 이에게 해방을 알리고, 묶인 이를 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굶주린 이를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은 ‘사랑’만으로도 우리가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 가족들의 사랑, 이웃들의 사랑, 그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았던 ‘사랑’ 말고는 하느님께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그토록 갖기를 원했던 ‘명예, 재산, 권력’을 필요로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필요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그토록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아닌지요? 이 가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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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데레사 동정 학자(1515-1582) 기념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 -
어제에 이어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비단 예수님 당대의 일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뿐
아니라 오늘 교회 지도자는 물론 모든 신자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부정적 성향이기에 회개하여 단斷, 끊어버리지 않으면 악순환의 역사가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뿐 아니라 눈만 열리면 온통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어제도 배수확하는 일에 전념하는 수도원 초창기부터 거의 30년동안 한결같이 일하는 자매들의 모습 또한 저에겐 회개의 표징입니다. 30대 초반의 처녀같았던 모습들이 60대 초반 초로初老의 나이에 들어섰지만 한결같이 밝고 성실한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기념하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로 불리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또한 강렬한 회개의 표징
입니다.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가 격려가 되고 감사와 감동을 주는 성녀입니다.
여성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포된 분으로 만67세 선종하기 까지 참 치열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스페인 아빌라 출신의 신비가 대 데레사였습니다.
성녀는 이상주의자일뿐 아니라 땅의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성녀는 일과 조직화의 큰 능력을 그녀의 상식과 현명,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와 결합시킴으로 성녀가 직면했던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한
참 지혜롭고 용감했던 영적 여장부였습니다.
성녀는 수녀 지원자들을 선택하는데 있어 지성과 좋은 판단력을 강조했습니다.
‘지적인 사람들(inteliligent people)’은 자기의 과오를 잘 알 수 있고, 또 안내되어야 할 필요성을 잘 알 것이란
성녀의 확신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리석은 수녀들로부터 보호해 주신다!(God preserve us from stupid nuns!)”, 성녀의 의미심장한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벽에 언뜻 눈에 띈 60호 영성생활 잡지의 기고한 분들의 면면이 또한 회개의 표징입니다.
제 대학때 은사이셨던 어느 학자 수녀님은 70대 중반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깊고 풍부한 글을 연재하고
계셨고, 수십년전 수도원에 피정왔던 어느 수녀님은 15년 동안이나 이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매 편집회의에
참석하여 한결같이 성실히 활동하고 있다니 이 또한 저에겐 회개의 표징입니다.
참으로 깨어 회개의 여정에 충실해야 겠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뿐 아닙니다. 굿뉴스 오늘 묵상란에 매일 한결같이 묵상글을 올리는 사제분들 역시 저에겐 끊임없이 분발케
하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온통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자문하면서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답은 단 하나 회개를 통해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뿐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우리 무딘 마음을 강렬히 두드리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 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상들이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예수님과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입니다.
악순환의 역사를 반복하는 당대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 및 종교지도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
입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 안팎의 이런저런 예언자들을 박해하지는 않는지, 또 예언적인 말씀에 귀기울이며
회개로 응답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유사한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알게 모르게 이런 부정적 모습의 신학자들이나
사제들 또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 또한 무지의 소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크게 꾸중을 들은 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었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합니다. 참으로 회개가 절실한 무지無知와 악의惡意의 사람들입니다.
회개의 구체적 실천에는 찬양과 감사가 제일입니다. 회개할 때 저절로 샘솟는 찬양과 감사입니다.
회개의 여정에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 은총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회개의 삶에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우리를 더욱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 둘은 함께 갑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답은 제1독서 에페소서 하느님 찬양이 주고 있습니다.
참 주목할 것이 그리스말 본문에서는 에페1,3-14절 까지가 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장중한 문체로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은총을 노래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매주간 월요일 저녁성무일도때 이 찬미가(에페1,3-10)를 신나게 노래합니다.
우리의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혀주는 ‘빛의 찬미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참 고무적이고 감동적인 찬미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총과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 은총과 축복의 통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잊었기에 무지속에서 방황하며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요 불행의 비극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가 그러합니다. 같은 바리사이였지만 바오로는 회개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에페소 신자들과 함께
노래합니다. 오늘 에페소서 찬미가의 축복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또 찬미와 감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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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범한 반역의 역사를 꿰뜷으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1)
예언자의 출현은 지금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에 반하는 불륜과 우상 숭배가 횡행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시켜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셨지요.
그런데 이미 다른 신에게 눈을 돌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는커녕 이를 전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인 예언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충과 위협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생생히 새겨져 있지요.
문제는 후대의 누구도 자신들이 선조들처럼 반역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역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평가한 예언자들을 기리며 공경하는 것으로 현재의 불의를 정당화하면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말씀을 들고 오는 이들을 없애버릴 궁리까지 하면서도 그렇게 여기지 않지요.
"책임"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역사에 물든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는 하느님의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니 그 핏값이란 상상할 수 없는 가치일 겁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길 주저하는 빌라도에게 군중이 "책임"을 운운하는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쌓이고 쌓인 모든 죄악을 몸소 속량하러, 말하자면 책임지러 오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오히려 그분을 죽이면서까지 책임을 떠안겠다고 큰소리 칩니다. 그들의 완고함과 무지가 죄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반복을 통해 힘 주어 서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1,1.3.4.6.7.9.10)
이 말씀은 오늘의 독서 대목 중 거의 대부분의 절에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에페 1,4)서부터 "때가 찰"(에페 1,10) 때까지 구원 역사를 이끌어 오시면서 단 한순간도 예수님을 제외하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그리 하실 것임을 사도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배반의 역사와 앞으로 예수님께서 걸으실 운명이 다르지 않고, 이는 예언자들의 역사와도 방향을 같이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역사의 민낯을 짚으신 것이지요.
우리의 '창조'부터 '부르심', '은총의 삶'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까지 모든 순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이마다 끼어든 고통과 눈물, 좌절과 실패의 순간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담겨집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이 모두를 섭리하신 성부 하느님, 이 모두를 품고 계시는 성자 예수님과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루카 11,52)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사이를 가로막고 은총의 순행을 방해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목소리에는 세상의 역사를 사랑의 섭리로 꾸려가시는 하느님의 통찰과 탄식이 겹쳐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대목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들추시는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복수하려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로써 정말 불행하게도, 반역의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우리 모두의 죄악과 어둠을 책임지신 예수님 덕분에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예수님 이후로 방향을 틀어 "때가 차면"(에페 1,10) 완성될 새 하늘 새 땅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지요. 모든 예언자, 순교자 들의 피로 비옥해진 신앙의 역사 안에서 믿음의 자취를 남기며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만으로 진정 행복한 신앙 여정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전구해 주실 겁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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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루카11,52)
코로나 19으로 개신교 교회 안에서 비대면 예배 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 어느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SNS을 통해서 듣고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가톨릭이든, 동방정교회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할 것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그분의 말씀과 삶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엇그제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의 큰 잘못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 안에도 예수님 구원 사업의 큰 걸림돌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같은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도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입으로만 믿고, 행동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요?
매일복음묵상글을 받아보시는 어느 자매님께서 어제 이런 답신을 보내주셨습니다.
"루카 신부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성령을 따라가는 삶,
참 어렵습니다.
항상 회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오늘도 회개합니다."
자매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참으로 어렵고 고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가 필요한 죄인들이고,
오늘 회개해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덕의 길'이시며, 우리의 '좋은 벗'이시고, '참되시고 성실하신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벗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그분을 따라가도록 합시다! 아멘♡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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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루카 11,47-54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을 위하여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들을 때 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바로 나를 향한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수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삶의 단면입니다.
주어진 기도생활은 한 마디로 칼 그 자체입니다.
단 한 번도 빠지거나 지각하는 적이 없습니다.
윗선에서 내린 규정 역시 목숨처럼 중요시여깁니다.
미사나 기도 등 전례생활, 영적생활에 있어서 천사나 성인(聖人)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세계로 내려오면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생긴 한 작은 현안이 그렇게까지 목숨걸만한 일도 아닌데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작은 상처 앞에 얼마나 호들갑을 떠는지 모릅니다.
끝도 없이 징징댑니다.
표독스럽게 따져듭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요합니다.
기도생활에 대한 투자는 대단한데 그 결실이 조금도 없습니다.
영적생활에 대한 열망은 각별한데 그에 대한 열매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저 역시 살아갈수록 어찌 그리도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중성의 극복, 위선의 극복이야말로 우리 신앙인들,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이자 어려운 숙제인 듯 합니다.
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놓고 형제들에게 ‘철저한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솔직히 전혀 모범도 되지 못합니다.
영적 도우미로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구절절 옳은 말만 늘어놓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얼마나 한심해할까 걱정이 앞섭니다.
이런 저를 향해 예수님께서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 가장 핵심적인 것은 뒷전인 채 별 의미 없는 부차적인 것, 껍데기, 시시한 것, 지나가는 것에 혈안이 되고 목숨을 거는, 그래서 오락가락하는 백성들을 더욱 햇갈리게 만들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자신을 향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본질적인 것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가시성’입니다.
영혼, 마음, 사랑, 정, 우정, 신앙, 진리...
결국 하느님께서 그 가장 끝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다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일,
정성을 바치는 일,
우리의 영혼을 그분 향해 높이 들어 올리는 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조금이나마 되돌려드리는 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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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1,47-54
예수님은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진리가 육화되신 분
오늘 복음은 ‘표징’에 대한 루카 복음의 결론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구원자’이시다는 믿음을 줄 참 표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만이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참 구원자이심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1938년부터 75년 동안 남성 724명의 삶을 추적 조사한 유명한 연구가 있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하버드대 학생들과 빈민층의 청소년들도 있었습니다.
이 연구를 책으로 편집한 ‘로버트 월딩어’는 이 연구를 이끄는 4번째 책임자입니다.
이 연구를 통해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요?
행복은 부와 명예, 열심히 노력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하면, “건강과 행복은 사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가족, 친구, 공동체의 질이 좋은 사랑의 끈으로 묶였다면
그 속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건강하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과 행복이 계속 이어지면 장수하게 되고 그것이 계속 이어지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해서 더 완전한 건강과 행복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너무나 당연한 가르침입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면 행복한지 다 압니다.
굳이 엄청난 시간과 엄청난 비용으로 수많은 사람의 삶을 일일이 연구 조사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누군가 사랑이 왜 행복한지에 대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해서 이 엄청난 연구가 진행된 것일 테고 그 표징을 찾던 사람은 아마 지금쯤 결과를 듣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표징은 이미 있습니다. 누구나 원하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알면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도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수많은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인정하면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전의 예언자들이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말로 전한 이들이라면 예수님은 그 진실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사랑하여 피를 흘려야 했지만,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꽃이 예쁜 줄을 안다고 말하며 사람에게서는 예쁜 사람을 찾아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천원의 가치를 안다고 하면서 만 원의 가치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부모의 사랑은 안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은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이것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은 믿으며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언자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상들이 그 예언자들을 죽인 것도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공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을 존중하면서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꽃이 예쁜 줄 알면 사람도 예쁜 줄 압니다.
꽃은 예쁘다고 하며 사람은 예쁜지 구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좀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곧 표징이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이미 가진 표징들을 무시하고 그 표징의 완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임을 솔직히 인정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못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말씀을 듣고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진리가 육체를 입고 내려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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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5. 이영근 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1015. 이영근 신부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들의 반응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금은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 요한은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종교 기득권자들에 대한 이러한 경고는 오늘날 진리에 대해 무감각하고 복음 선포의 생명력을 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교회 봉사자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우리는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마치 사냥하기 위해 매복하듯이,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저희에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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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5일 목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_김형균 스테파노 신부 집전
https://youtu.be/HNdOk8kTq_4 (29:28)
•2020. 10. 15.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형균 스테파노 신부(서울대교구 경찰사목위원회 위원장) 집전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7-54
* 신부님 강론 10:22 ~ 15:3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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