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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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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기성 세대가 중ㆍ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구호 중의 하나는 " 국산품 애용" 이었다. 외제 물건을 쓰는 것은 매국노나 하는 짓이었고 국산품 애용은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배웠다. 양담배를 피우는 것은 도덕적인 비난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범죄 행위였다. 그렇다고 외제 물건들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식료품이나 전자 제품들이 "미제 장사"들에 의해 몰래 유통되었을 뿐이다(물론 이들은 적발될 경우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요즘 가장 싸고 흔한 과일에 속하는 바나나는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전설적인 과일에 속했다. 월남(지금의 베트남 남부)이라는 나라에서는 바나나가 사과보다도 싸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요즘의 청소년들이 들으면 호랑이가 담배 먹던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불과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국산이냐 외제냐를 가리키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물론 한우냐 수입 쇠고기냐, 우리 농산물이냐 중국에서 수입한 농산물이냐를 가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품질과 가격의 문제이지 더 이상 국산이냐 외제냐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써클 K라는 외국 상표의 편의점을 이용하고 맥도널드 햄버거의 집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거리에서 외국인과 마주치게 되는 일은 다반사이며, 위성방송을 통해서는 24시간 외국의 방송 프로를 직접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도 88올림픽등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 깊숙이 진출하고 있고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세계 각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외국 여행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제주도로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은 우스갯소리의 자격을 상실했다. 우리는 지리적인 간격을 뛰어넘어 지구 저편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우리만의 느낌이 아니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고, 또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다.
"지구촌"이라는 정감 어린 말은 이런 변화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전세계는 이제 하나의 마을로 변모했다. 비유하자면 한 집 건너 아무개 집에서 어젯밤 부부 싸움을 했는지, 개울 건너 아무개 집 쌀독에 쌀이 떨어졌는지를 훤히 아는 일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이 (전원일기)의 양촌리처럼 인정 어린 곳인지 아니면 옆집 아이가 점심을 굶어도 쌀 한 됫박 주지 않는 비정한 곳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제부터 지구촌을 낳은 세계화란 무엇이며, 이런 세계화 추세 속에서 우리 민족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살펴보자.
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화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과 문명권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민족과 국가들끼리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가 점점 확대되는 과정을 세계화라고 할때, 이러한 과정은 유사 이래로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피어린 정복 전쟁의 결과였기는 하지만 엄청난 영토를 지배했던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 사람들은 세계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통합체라는 "사해 동포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세계의 통합은 단지 머리 속에서 그려진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과 문명권으로 통합되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세계화가 진전되었다. 우선 근대 과학과 기술은 교통과 통신 수단을 발달시킴으로써 전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실로 증기 기관의 발명은 세계화의 실질적인 출범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 수단은 세계화의 전제였을 뿐 그것의 직접적인 동인는 아니었다. 세계화의 직접적인 동인은 일찍 산업화를 이룬 서구의 몇몇 선진 공업국들간의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자국의 상품 시장만으로는 이윤 추구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없게 되자 자본주의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라틴 아메리카로 침략해 들어갔다. 이러한 침략의 발길로 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이리하여 강대국의 자본은 국경과 민족을 넘나들며 세계를 점점 더 하나의 울타리 안으로 묶어 갔다.
그러나 오늘날 말하는 "세계화"란 이상과 같은 일반적 맥락에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표면화되고 있는 최근의 새로운 국제질서와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현재 세계는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유기적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가고 있다. 현대의 세계화 과정은 국제 질서 속에서 국경이나 국적의 의의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다국적ㆍ초국적 기업들의 활동이 세계 경제를 선도함으로써 기업 활동의 무국적화 경향이 점차로 확산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란 한 국가에 본부를 두고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기업을 말한다. 이런 기업의 고위 간부는 주로 기업의 모태가 되는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지만 기본적으로 모국에 대한 충성보다는 기업 자체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다. 이러한 경향은 초국적 기업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초국적 기업은 더 이상 모국에 얽매이지 않은 채 표류하고 움직이면서, 자신의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어느곳에나 둥지를 틀 태세가 되어 있다. 초국적 기업들은 자신의 주재국의 이익은 말할 것도 없고 모국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 기업은 어떤 국가에도 매여 있지 않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이윤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한국 IBM이 한국 기업인가 미국 기업인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물음일지도 모른다.
두번재로 인류 사회는 환경 위기, 자원과 식량의 부족, 인구 증가 등의 전지구적 문제들에 봉착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어느 한 나라나 몇몇 나라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과거 미국이나 일본 등의 선진국들은 자국의 공해 산업을 제3세계로 내몰면 공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임이 드러났다. 제3세계에서의 환경 오염은 산성비, 오존층 파괴, 열대 우림의 축소 등을 통해 선진국을 포함한 전 지구촌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인위적인 국경선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하나의 연관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소련 군함이 동해에 방사능 폐기물을 쏟아 붓는다면 그것은 단지 한국과 일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인 것이다. 환경 문제에 대처하려면 지구촌의 모든 민족과 국가들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 식량 부족이나 인구 증가 등의 문제도 이제 국제적인 협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세번째로는 교통과 정보 통신의 혁명이다. 교통과 정보 통신의 혁명으로 세계인들의 시ㆍ공간적 경험과 생활 양식은 동질화해 가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의 긴밀한 교류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 그 교류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화되고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15억 인구가 지켜본 걸프전 생중계는 첨단 정보 통신 기술의 공간 단축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세계 각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세계는 점점 더 유기적인 체계로 통합되어 가고 있다. 이렇케 지구촌의 모든 구성원들의 운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오늘날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세계화" 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러나 도도한 세계화의 흐름을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한다해도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대처 방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이제 세계화와 민족(또는 민족주의)이라는 축면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세계화와 민족, 국가
이상에서 우리는 지구의 모든 국가와 민족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전 지구적인 상호 의존 관계가 과연 어떤 내용을 지니고 있는가이다. 과연 국경이나 민족의 고유성은 점차 사라지고 지구촌이 하나의 공동체로 되어 가고 있는가? 더불어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사라져 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계화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여전히 -또는 과거보다 심하게- 국가나 민족의 이해 관계가 대립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화 과정에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EC 12개국의 통합을 추진한 마스트리트 조약은 여러 나라들을 - 느슨하기는 하지만 - 하나의 정치, 경제적 단위로 묶는 데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그 협상 과정과 승인 과정에서 각 나라의 이해 관계의 상층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경제의 무조건적 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일본 문화의 공식적 수입을 결사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자본과 문화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기는 하지만, 국가 이익과 민족의 생존에 대한 관심 역시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는 엄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 우리 민족이 취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현재 세계화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언론은 세계화를 무엇보다도 개방화와 등치시킨다. "국제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여당 국회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나라에 (자본이) 들어가는 것이 경제 침략이 아니다. 세계지도를 놓고 조건이 좋은 데로 입지 결정을 하는 것이 세계적 공통 현상이 된었다. 이제는 주식도 외국이 가질 수 있어 어느 나라 기업이냐는 의미가 없다. (중략) 어떻게 하면 외국 기업이 많이 들어오겠는가 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민족이나 민족 기업의 발전을 운운하면서 외국의 자본, 상품, 문화에 대해 빗장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식민지 치하에 있었고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세계화에 적응하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민족주의 과잉을 걱정하면서 이제 모든 문제를 민족적 관점을 넘어선 국제적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세계화가 곧 국가나 민족적 차이의 철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일군의 진보적인 학자들은 초국적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현제의 세계화를 식민주의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강화된 식민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들간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은 조건에서 세계화, 국제화는 곧 비교 우위를 갖는 국가와 그들 국가의 국적을 가진 기업들을 더욱 살찌우고, 약세에 있는 나라와 그 나라의 기업 국민들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농ㆍ수산물을 비롯한 외국 상품의 수입 개방과 외국 자본 투자의 유치에 대해서는 국가적ㆍ민족적 차원에서의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예를 들어 세계화 바람에 들떠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쌀 시장을 냉혹한 국제 경쟁의 논리 속에 밀어 넣는다면 국제적인 농산물 파동이 발생할 때 우리 민족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주식인 쌀을 마음놓고 남의 나라 농민의 손에 맡겨 둘 수 있을 만큼 세계가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물론 개방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나 쇄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세계 시장으로부터의 격리나 고립이 불가능할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은 현실에서 방어적이며 폐쇄적인 자국 중심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는 데에는 이들도 동의한다. 다만 이들은 민족적 관점을 넘어 국제적 관점을 취해서 개방화 추세에 순응하는 것만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는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국제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적 관점이고 민족 국가이다. 물론 이때의 민족주의란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아니라 전진적이고 개방적인 민족주의를 말한다. 세계화가 민족주의 일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대립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가 견지해야 할 세계화와 국제화의 노선은 섣부른 국제주의 노선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전진적인 민족주의여햐 한다. 즉 국제 질서가 요구하는 표준에 우리를 맞추면서도 실질적으로 민족의 이익을 도모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인류 생존
세계화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경쟁을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모든 국가와 민족을 무한 경쟁의 시장으로 밀어 넣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무한한 경제 전쟁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국제 사회의 주체적 일원으로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방적인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단지 이러한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 전략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민족과 인류 전체의 삶의 개선과 발전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부 국제화론자의 전면적인 개방과 국제 경쟁력강화 논리는 그 이면에 다른 민족이나 국민은 어떻게 살든 우리 민족과 국민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의 또 하나의 측면은 이러한 사고 방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 준다. 즉, 앞에서 보았듯이 세계화는 전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환경, 기아와 빈곤, 인구 등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문제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민족이 서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대처하지 않는 이상 해결 될 수 없다. 무한 경쟁이나 양육강식의 논리는 사실 이러한 전 지구적 문제를 발생시킨 주범이며, 또 지금도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한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세계화는 전 인류로 하여금 약육강식의 경쟁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서 사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개방적인 민족주의는 세계화의 추세에 단지 순응하는 것도 아니고 또 반대로 거기에 역행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보편 인휴적인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생존을 사고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촌을 단지 먹느냐 먹히느냐의 살벌한 경쟁터로 말들어 가려는 움직임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민의 삶과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가질 때 우리 민족은 비로소 지구촌의 한 주민으로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공동선과 민족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줄 아는 성숙한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 민주화와 국제 관계의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체적인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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