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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도를 ‘서울’이라고 결정한 분은 누구일까?]
金炯敏이다. 김형민은 1907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고 38살인 1946년 9월28일 최초로 서울시장격인 한성부윤이 되어 "서울시"라고 이름을 고쳤다.
1948년 12월14일까지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서울이 수도란 한글이기에 반대가 많았지만 수도 이름이 쉽게 불려야 한다는 뜻으로 소신을 지켜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이름이 되었다. "서울"이란 이름의 뜻이 여러가지이지만 설(雪) 울타리의 줄임말인 "서울"의 뜻 을선호한다. 겨울에 눈(雪)이 많이 내릴 때 연약한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 國家 라는 뜻이다.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란 것 이외에도 일본식 한성을 모두 우리 언어로 바꾸었다. 서울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바꾸었다. 정(町)을 동(洞)으로, 통(通)을 로(路)로, 정목(丁目)을 가(街)로 고쳐 서울시의 행정 구역명칭을 지금의 형태로 바꾸었다.
황금정통(고가네마치도리)이 본정통(혼마치도리) 같은 일본식 가로명도 이때 을지로, 충무로 등 대한민국 영웅들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황금정통(黃金町通)은 을지로 (을지문덕), 소화통(昭和通)은 퇴계로(이황)가 됐다. 충무로 (이순신)와 함께 세종로(세종 대왕), 충정로 (민영환), 원효로 (원효대사)라는 이름도 이때 생겼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회복할 필요 가 있었다. 위인의 이름을 땄다. 세종대왕, 이순신, 을지문덕, 이황, 민영환, 원효대사가 이때 소환됐다.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바는 "서울" 이라는 지금의 공식 명칭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서울은 대중들 사이에 서 입말로 널리 불린 이름이었을 뿐, 문서상으로는 어디까지나 한양, 한성, 경성 등으로 지칭되 었던 도시였다.
그럼에도 김형민은 독립국 수도 의 공식 이름으로 "서울"이라는 순수 우리말 명칭을 강하게 주장하여 지금의 이름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서울"이라는 도시명에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한문으로 쓸수 없고, 원래 "서울"은 보통명사로 그저 '수도'라는 뜻이니, 당시로서는 어색했을 만하다.
이광수 등 민족주의자들이 일제 말기 친일파가 된 것은 영어를 못했기 때문이다.
김형민은 신앙심이 투철했던것이라 어느 목사의 주선으로 하와이의 이오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교육학 학사과정을 거치고, 미시간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를 할때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1943년 불온 사삼범으로 지목되어 개성경찰서에 체포, 1년 반 투옥되었다. 1945년 8월 16일 동생들과 3.1석유 상사를 만들어 운영 하던 중 미군정 존 하지 중장으로 부터 한성부윤(서울 시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와서 1946년 5월10일 38세에 경기도 경성부윤으로 임명되었다.
하지 중장의 삼촌이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김형민과 함께 수학하던 동창이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경성부윤으로 추천하게 되었다는 說이 있다.
2개월 후인 1946년 9월 28일 경성부의 "서울시" 승격으로 초대서울 특별시장이 되어 2년 7개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기고 시장직을 그만두고 다시 3.1 석유상사 대표로 취임했다.
일제하 한국학의 거두들이 일제 말기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친일 행위를 함으로 반민족범죄자가 된 것은 당시 세계흐름을 영국과 미국으로 읽지 못하고 일본이 영원히 동북아 제국국가로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만약 영어를 능숙하게 하였다면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일본에 충성하는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면에서 김형민은 세계사 흐름을 안 인물이었기에 38살에 서울시장이 될수 있었다.
김형민은 젊지만 식견이 높았다. 이승만 우상화로 서울을 이승만의 號인 "雩南市"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김형민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서울시" 로 밀고 갔기에 "서울市"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또, 김형민이 대한극장을 세우다.
김형민은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석유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 애수 등 영화를 보면서 한국에 좋은 영화관을 만들어 서울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自費와 서울市와 20세기 폭스사의 협조를 얻어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세계적은 극장 대한극장을 만들 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자유당은 반 자유당 성향의 김형민에게 9배를 넘는 세금을 추징해서 대한극장을 포기하고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국쾌남에게 대한극장을 넘기게 된다.
김형민은 1998년 향년 90세 타계하였다.
-서울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