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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경건
제목 : 참된 경건
성경 : 약 1:26~27
찬송 : 421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31210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러분!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말씀이 그 심령에 심겨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심령 깊이 영혼에 심긴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은 사람의 삶은 어떻게 드러나야 할까요?
이것은 오늘날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신앙입니까?
약 1:26 “누군가가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인다면, 이런 사람의 신앙은 쓸데없습니다.”(새한글성경)
흔히들 ‘그분 믿음이 좋다’라고 칭찬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무엇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일까요? 예수 믿고 부자 되고 성공한 사람일까요? 큰 교회 다니고 유명한 목사님과 잘 아는 성도일까요?
그래서 나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기준이 성경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제 야고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앞서 밝힌 구원론과 신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이제 잘못된 경건, 곧 잘못된 ‘신앙생활’의 행태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동시에 참된 ‘신앙생활’의 본질과 실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훌륭한 신앙의 기준을 정확히 제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혀를 재갈 먹이지도 못하고 그의 마음을 속이면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신앙생활은 헛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흠이 없는 신앙생활, 곧 아버지 앞에서 참된 경건은, 어려운 가운데 처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더럽혀지지 않는 그것입니다.”(약 1:26-27/채영삼 역)
야고보는 이제 성공한 신앙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굳이 ‘경건’이라고 표현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26절에서 통상 ‘경건한 자’(개역/개정)로 옮겨지는 “쓰레스코스”라는 말은 본래 종교가 요구하는 일련의 의례나 규범들을 따르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좋다는 즉 참된 경건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혀를 재갈 물려야 합니다!
약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혀를 재갈 물린다.’라는 말은 분명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스스로 그의 말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갈이 뭡니까? 말의 입에 물리는 것으로, 말을 탄 주인의 뜻에 따라 멈추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좌로나 우로 방향을 바꾸기도 합니다. 말은 재갈을 물려 통제하고 소는 코를 뚫어 길을 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 자신의 말(言)을 통제할 수 없다면 또한 그의 경건, 그의 신앙생활은 헛것, 곧 허탕이라는 말입니다. ‘헛것’(마타이오스)은 “공허한, 헛된, 효과 없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 이런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속이 텅 빈 것을 뜻합니다. 있어야 할 내용이 없어서 결국 아무런 효과도 나지 않고, 그 만큼 가치도 없는 빈껍데기라는 뜻입니다. 마치 약이 다 닳아버린 건전지와 같습니다. 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은 잘 하면서도 말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는(아파타오) 셈입니다. 속아서 결과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얻을 줄 알고 있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약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렇게 속는 이유가 뭡니까?
자신이 신앙생활에서 요구되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모양들은 모두 갖추었고 그것으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정기적으로 헌금을 드리고, 직분을 맡아 봉사를 하는 등, 종교 생활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말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런 분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야, 나는 못 참아. 그러나 뒤끝은 없어”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자기는 막 말을 내뱉고 잊어버리지만 듣는 사람은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내뱉고, 해야 할 말은 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로해야 할 때 분을 내는 말을 하고, 진리를 말해야 할 때 거짓을 둘러댑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말’의 통제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이미 18절과 21절에서 밝힌 대로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18절) 신자의 마음, 곧 거듭난 생명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성도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있기 때문입니다(21절). 그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과 그의 혀는 그 마음에 심겨 있는 ‘말씀’의 통제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리, 그의 행위로 인해 열매를 맺어, 생명과 복을 누리는 자리로 가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혀, 자신의 말을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는’것이 됩니다. 그의 마음 역시 그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증거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그 안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의 길을 따라 말하지 않고, 자신의 거짓과 탐욕과 분에 자신의 혀를 맡깁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생활, 그의 경건은 아무런 효력이 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의 혀, 그의 말은 그의 마음에 심긴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과 혀, 마음과 말, 마음과 삶이 하나가 되면서, 그의 심령에 심긴 하나님 말씀의 생명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말씀의 생명이 꽃처럼 피어나고, 열매처럼 그의 삶 속에 맺어집니다. 그의 심령에 심긴 말씀과 그가 하는 말이 서로 다른 길을 달릴 때, 거기에는 허망하고 무력하고 쓸모없는 껍데기 신앙생활만 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튀르키에의 속담에는 “혀는 검보다 실상은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파사인의 속담에는 “혀가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라비아인의 속담에는 “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지나 혀는 쓸수록 더 날카로워 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진찰 받으려 가면 의사들이 혀를 보자고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혀를 보고 여러 가지 병을 알아냅니다. 이따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혀를 내밀고 혀의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혀는 어떠합니까?
영국의 어느 교파에서는 목사가 설교할 때에 예복을 입고 목에 줄을 드리운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그런 예복 차림으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다음 강단을 내려올 때 어떤 부인이 가위를 들고 와서 “목사님 목에 드리운 줄이 너무 길어서 보기 흉하니 좀 잘라봅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꼭 잘라야겠습니까?” “그렇고말고요.” “그렇다면 자르지요” 드디어 그 여인은 긴 줄을 잘랐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이 넌지시 하는 말이 “내가 자매님의 조언을 이루어 주었는데 자매님도 저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주시지요?”하고는 목사는 “자매님의 혀를 좀 내미시오. 그 혀가 너무 길어 보이니 좀 잘라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혀가 너무 길어서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면 너무 곤란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도 귀는 둘을 만들고 입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말을 적게 하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석(私席)에서도 말을 많이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석(公席)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로 말은 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실수가 적습니다. 특별히 풍설을 전하지 말 것입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23:1)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무족언이 천리행’(無足言 千里行)이라는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혀에 재갈을 물리십시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그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심령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구약의 모든 율법에서 그대로 드러난 대로 사랑과 ‘긍휼’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은 스스로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로 불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율법을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실 만큼 이웃에 대한 긍휼은 하나님 말씀의 주요한 근간입니다.
약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야고보는 참된 신앙생활, 참된 경건에 대해 밝힌 26~27절 이후, 2장 1절부터 26절 내내 바로 신앙, 곧 믿음과 긍휼을 행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는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무슨 사회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었겠습니까? 일자리가 충분했던 것도 아닙니다. 또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주는 입장에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 보상하시리라는 마음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경건입니다. 불순한 동기가 없으니까 정결하고 깨끗한 경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물질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쉽게 대답합니다. "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선한 목적에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 가운데 일부를 떼어서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돼지가 하루는 길거리에서 암소를 만났습니다. 돼지는 암소에게 다가가서 평소에 자기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을 토로해 놓았습니다.
"얘, 암소야. 반갑다!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느냐? 사람들은 내 고기를 가지고 햄도 만들어 먹고, 베이컨도 만들어 먹잖아. 어디 그것뿐이야? 내 창자를 다 빼 가지고 순대로 만들어 먹고 심지어 발가락도 족발이라고 해서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 암소만을 좋아할까?"
암소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이유는 뻔해. 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먹잖아. 그러나 나를 생각해봐. 나는 살아있으면서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주고 또 맛있는 우유를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하는 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어차피 죽으면 남에게 다 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고 나서 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나쁜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베풀어주고 나누어주면 다른 사람에게서 칭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칭찬해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편지 한 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움켜쥐고는 나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신은 나의 것이지요. 나는 아주 쉽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우선 당신은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한히 값지며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포기의 풀도 살 수 없듯이, 내가 없으면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고 말 것입니다.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은행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내게 어떤 신비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들과 수없이 만납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순전히 나 때문에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난 어쩌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사람들,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이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나의 힘은 사실 무한하답니다. 그러니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입니까? 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이웃들에게 내 주머니를 털어서 돕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나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특히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사랑의 실천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라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세속’은 원래 ‘세상’(코스모스)이지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 그분의 구원과 심판의 섭리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영적으로 하나님께 반역적인 세상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표현은 종종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을 교회와 세상이라는 영역으로 양분시켜 놓고, 세상을 위치적으로만 생각하여 잘못된 금욕주의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도, 회사나 학교, 정치나 경제적으로 활동하는 그 한복판에서도 참된 경건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헛된 경건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보다는 세속이라는 표현이 나은 이유입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세속적이 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경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테레인)이라 할 때, 그 ‘지킨다’(keep)는 표현은 물론 사람이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호하고 지켜낸다는 뜻이 있지만, 종교적 율례나 의례들을 규칙적으로 준수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만일 후자의 의미를 염두에 두었다면, 야고보는 신자가 신앙생활의 외적인 요구사항들을 ‘지키는’것으로 스스로 경건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든지 세상 속에 있든지 모든 더러운 것들과 거짓된 것들과 악한 것에서 자신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참으로 경건해진다고 말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지켜야 하는 것은 예배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정작 세속적인 공격 한가운데 있는 ‘너희 자신’이라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모두 경건한 척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경건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2:16에서 말씀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유혹합니다. 타락한 성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명예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세상에 물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짭니다. 그러나 바다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들은 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빛과 소금된 우리들은 세상이 어두우면 더욱더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부패했으면 더욱더 짠맛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Sunday Christian"이 되지 말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DNA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무엇보다 혀를 재갈 물리는 삶을 살아야 하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참된 경건을 이루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