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연애의 고수 (隨筆)
影園 김인희
한낮 태양이 정수리에 퍼붓던 날에 매미는 혼절하듯 울었다. 장미의 몸부림은 선홍빛으로 붉게 더 붉게 자신을 덧칠했다. 아스팔트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 펄펄 끓는 가마솥의 입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과 대결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선풍기는 일찌감치 두 손 번쩍 들어 기권하고 에어컨이 온종일 동동했었다. 한여름 열대야에 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동에 시달린 에어컨의 수고를 치하한다.
때로는 가히 위협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계절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의 끈적끈적한 감촉을 거부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This, too, shall pass away!’라고 독백하곤 했었다.
어느 날부터 밤하늘 입김이 달라졌다. 아마도 하늘이 머리 위에서 더 높이 올라간 시점이었을 것이다. 캄캄한 하늘에 빛나는 별의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이따금 그 별의 언저리를 유영하는 구름이 시인의 하늘을 재현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하늘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았다.
그녀가 별을 대할 때는 언제나 경건하다. 옷매무새를 어루만지고 가장 착한 소녀가 된다. 그리고 거룩한 의식인 양 도사리고 있는 촉발 직전의 일탈을 감지한다. 마음은 어느새 집시가 되어 한없는 배회를 꿈꾼다. 해마다 이맘때면 재발하는 불치병이다.
그녀가 지내온 삶의 여정은 잔잔하다. 이토록 신열을 앓으면서 온몸에 열꽃이 피어도 내색하지 않고 잠잠하게 다스리는 내공이 무섭다. 그녀가 수년 전에 쓴 ‘나는 아직도 연애를 꿈꾼다’라는 수필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졸작에서 그녀가 꿈꾸는 연애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실소를 머금는다.
그녀는 지금도 연애를 꿈꾸고 있다.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한 후 강의 들으면서 동분(東奔)하고 리포트 과제하면서 서주(西走)하고 있다. 그녀가 품은 공부에 맺힌 한(恨)을 더 말해 무엇하랴. 공부 때문에 동분서주를 탓하는 그녀의 넋두리는 행복한 비명으로 치부해도 무난하다.
다만 그녀의 일탈을 꽁꽁 묶어버린 공부가 야속할 따름이다. 강변에서 가을바람이 코스모스를 껴안고 쓰다듬는 백마강에 가지 못하고 있다. 한밤중 작은 동산에 올라 별을 찾고 시를 읊조리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서글프다. 한 권의 책을 끼고 침대에 들어가는 달콤한 시간을 누릴 수 없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어 몸부림친다.
그녀의 책상 위에서 노트북은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는 100m 경주자다. 탁상 달력은 빼곡한 일정을 잊을세라 날마다 일정을 브리핑한다. 스마트 폰은 유능한 비서가 되어 일정을 재차 확인해주고 출타할 때는 친절한 내비게이션을 자처한다.
어쩌면 산적한 일은 그녀가 사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업무의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과중한 무게로 짓누른다. 그녀가 능수능란하게 업무를 해치우면 다른 업무가 슬그머니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하여 그녀는 업무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만끽하려니 꿈도 꾸지 않고 있다. 일찌감치 산적한 일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려고 작정하고 업무가 앞에 다가올 때마다 허밍으로 반기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업무의 무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면 자유로운 휴식을 느끼기보다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엄마의 심정으로 동동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산적한 일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그녀, 산더미 업무는 그녀의 운명이다.
그녀는 지금도 연애를 꿈꾼다. 아무리 과중한 일이 있다손 간절한 꿈을 외면할 수는 없다.
수년 전 연애의 대상은 무궁무진했다. 시인과 작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백산맥>을 읽을 때는 장거리 연애를 했었다. <칼의 노래>를 읽을 때는 작가와 주인공 모두의 매력에 빠져서 가족에게 삼각관계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미술 전시회가 있었던 날은 연애의 상대가 외국인이었다. <총·균·쇠>의 저자가 한국에 왔을 때는 팔십 대의 노학자와 높은 나이의 벽을 뛰어넘었다.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선물 받은 <土地>를 읽을 때는 16권을 읽는 동안 여류작가와 깊은 사랑에 빠졌었다.
산더미 같은 일을 옆으로 밀고 작정했다. 그녀는 지금 연애의 상대를 간택하는 중이다. 그녀의 이상형에 맞는 상대를 찾았다. 인터넷 서점을 열어서 요리조리 따져보고 속을 살짝 들추어보고 파트너를 찜했다.
며칠 후면 그가 당도할 것이다. 백마 타고 오는 왕자를 기다리는 마음에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연애의 고수, 그녀!
첫댓글
연애의 대상을 수시로 바꾸고
수불석권에 전율하는 그녀!
그 열정에 사랑의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