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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부일 영화상] 당시 부산일보[1958년 1월 29일자]는 부일 영화상 제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본사에서는 부일 영화상을 제정하여 금년부터 각기 상을 수여하기로 하였다.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부일 영화상은 영화 문화의 급속하고 올바른 발전을 위하여 제작 관계자에게는 예술성을 높일 것을 자극하고 흥행 관계자에게는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흥행하는 의욕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신문사에 의한 영화상인지라 얼마만큼의 성과를 올리게 될는지 예측하기 어렵지마는 우수한 영화가 제작 또는 수입되고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서 보다 나은 보다 진실한 생활을 영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본사에서 영화상을 제정한 궁극의 의도인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당시 부일 영화상은 범람하는 외국 영화에 맞서 한국 영화의 발전을 선도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시상식 첫 해인 1958년 「잃어버린 청춘」이 최우수 한국 영화상과 감독상[유현목]을, 「시집가는 날」의 김승호와 「실락원의 별」의 주증녀가 남녀 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부일 영화상 탄생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각종 영화상들이 앞 다투어 제정되었다. 1962년에는 문화공보부가 대종상을, 1963년 조선일보사가 청룡 영화상을, 1965년 한국일보사가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을, 1968년 서울신문사가 서울 신문 문화 대상 등을 만들어 한국 영화 전성시대를 뒷받침하였다. 제2회 부일 영화상 때는 연기 부문 남녀 조연상을 비롯하여 각본, 촬영, 미술, 음악 등 기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6개 부문을 신설하는 등 최대의 영화제전으로 성장해 나갔다. 제3회 부일 영화상 때는 신인 연기상이 신설되어 「가난한 애인들」의 이수련이 수상하였으며, 그 후 태현실, 이낙훈, 고은아, 남정임, 문희, 윤정희, 김창숙, 김희라, 윤여정 등이 신인상을 받아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 가는 대들보를 탄생시켰다. 제6회 부일 영화상[1963년] 때는 특별상을 신설하여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을 제작한 한양영화사에 첫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으며, 제9회 부일 영화상[1966년] 때는 남녀 인기상을 신설해 김진규와 김지미가 첫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이후 인기상은 남우 부문에서 신성일이 3회, 신영균과 최무룡이 각 2회씩을 차지하였으며, 여우 부문에서 윤정희가 4회, 문희가 2회, 고은아가 1회를 차지해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임을 과시하였다. 영화인은 물론 팬들과 부산 시민이 정성 들여 가꾸어 온 부일 영화상 시상식이 열렸던 극장과 퍼레이드가 펼쳐졌던 당시 부산의 거리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부일 영화상은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과 한국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인해 1973년 4월 14일 제16회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부일 영화상은 2008년 35년 만에 부활하였다. 『부산 일보』는 2008년 9월 17일자 신문에 이렇게 알렸다. “국내 최초의 본격 영화상으로 지난 1958년 부산일보사가 제정하였던 부일 영화상이 35년 만에 부활됩니다. 부산일보사는 창간 62주년을 기념해 1973년 제16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던 부일 영화상을 부활시켜 부산 국제 영화제 기간인 오는 10월 9일 부산 해운대 그랜드 호텔에서 제17회 시상식을 갖습니다. 역대 수상자를 비롯한 영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부일 영화상 시상식은 영화인들의 축제 한마당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부일 영화상은 PIFF를 한층 더 풍성하게 하는 한편 부산이 아시아 최고의 영상 산업도시로 성장해 가는 데 크게 일조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부활된 부일 영화상은 18개 부문의 시상자를 선정해 1973년 중단되기 전보다 두 개 부문을 늘렸고, 특히 영화인들이 대거 몰리는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식 다음날로 시상식 날짜를 고정해 한국 영화인의 최대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