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10,34ㄱ.37ㄴ-43; 콜로 3,1-4; 요한 20,1-9
+ 찬미 예수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어제 파스카 성야 미사 때 뵈온 분들도 계시고, 또 오늘 아침에 새로 뵈온 분도 계시네요. 모두 부활 축하드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에 대해 성공회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님의 해설이 와닿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과 그 주변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문화는 이승과 저승을 엄격히 구분했고, 저승에 속한 사람이 이승으로 건너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유다인들 중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부활을 믿는 사람들도 그것은 세상 종말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그리스 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승과 저승의 장소적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이었고, 유다인들에게는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경계에 혼란을 가져다주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법 체제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핍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자신들의 재판과 처벌이 공정하지 않았음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구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것이 참이라고 증거하기 위해 어떤 이는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했고 어떤 이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내놓았습니다.
고대 세계에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주인이 종을 죽일 권리가 있었습니다. 범죄자들이나 전쟁 포로들은 검투장에서 서로를 죽여야 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오락삼아 구경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제국의 사법 절차에 따라 제거된 어떤 인물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위험했습니다. 그것은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인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는 지속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사람과 사람이 맺은 관계의 끝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관계의 끝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그분의 눈에 소중하며, 모든 삶이 그분의 눈에 소중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께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너무나 그립다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미사에 참례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미사는,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2천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의 몸을 영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을 우리 안에 모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와, 이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신다>”고 고백합니다.
어제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감사 기도 제1양식을 바치며 우리는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거룩한 천사의 손으로 이 제물이 존엄한 천상 제단에 오르게 하소서.”
우리는 이 미사와 천상 제단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을 떠난 분들을 우리가 눈으로 직접 뵙지는 못하지만, 하느님 아버지 앞에,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모두와, 이 세상 너머에 계신 분들 모두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제자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없애버리려고 박해하던 사람이 한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이 두 분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무엇이 이분들의 삶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겸손해서, 별로 변화된 것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변화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자동차로 새로 난 도로를 달리다가, 도로를 내기 위해 반으로 쪼개진 산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율배반적이지만, 그 도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저 자신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몇 달 뒤 같은 길을 달리다가, 잘려나간 산 양쪽에 진달래가 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꽃을 피워낸 진달래가, 무참하게 파헤쳐진 산을 다시 아름답게 만들고 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나무에게 물었지,
하느님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그러자 나무는 꽃을 피웠네.”
I asked the tree,
‘Tell me about God.’
then it blossomed.
겨우내 죽은 줄 알았던 나무들이 꽃을 피우며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에서 꽃을 피워 하느님에 대해 얘기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으로 꽃을 피워 주님 부활을 노래해야겠습니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신학교 방에 있던 구문초, 어느 날 갑자기 꽃을 피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