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학 시대의 신앙] 자유 의지와 양자 물리학
필자의 어린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부모들이 담임 교사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잘못하면 많이 때려서 사람 되게 만들어 주세요.” 실제로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매질하는 교사가 많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 크게 반발심을 느꼈고, 교사들의 체벌이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자유 의지
‘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자랐으니, 아이가 잘못했다면 그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 그러니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매를 맞아야 하지 않나?’
또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른들이 가르치는 대로 자란 아이는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없다는 말이니까, 때려서라도 바로잡는 것에 아이는 말대꾸하지 말라는 것일까?’
어느 생각이 옳은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가끔 윤리 수업 때 배우는 철학사에서 프랑스 종교 개혁자 칼뱅의 ‘예정설’을 듣게 되었다.
예정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포함하여 세상 끝날까지 예정하셨다. 또 누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지도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정해 놓으셨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만 알고 계신다고 하였다.
요즘은 예정설에 대한 해석이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어린 나는 이를 듣고 ‘하느님께서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다.’라는 생각에 몹시 분개했다. 급기야 신앙을 버리는 일까지 각오하고 이 내용이 사실인지 따지러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다.
신부님은 이 내용이 잘못된 것이며,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년)의 ‘불확정성 원리’를 듣게 되었다. 이는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 발명될 만한 것이 없을까
“이제 이 세상에서 발명될 만한 것은 모두 발명되었다.” 120여 년 전인 1899년, 미국 특허청장 찰스 두엘이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그가 한 말이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산업 혁명으로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고, 많은 발명가가 여러 산업에서 수많은 발명품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물리학자 맥스웰이 전기와 자기 현상을 하나로 통합하여 빛이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이른바 ‘전자기파’가 알려지고 나서, 테슬라와 마르코니는 이 전자기파를 이용하여 무선 전신을 발명하였다.
에디슨은 전기의 흐름을 빛으로 변환하는 백열등으로 밤을 밝혔고 영화를 발명하였으며, 벨은 전화기를 발명하였다.
그 당시 물리학계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 법칙으로 천체의 움직임과 기계적인 현상을 모두 설명할 뿐만 아니라 예측도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인 라플라스는 심지어 물체의 현재 위치와 속도를 알면 모든 물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결정론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양자 물리학의 기초를 마련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플랑크도 1874년 물리학 공부를 막 시작하던 때에 지도 교수에게서, “물리학에는 이제 더 이상 발견할 만한 것이 없다. 메워나가야 할 세부적인 것들만 남았다.”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1920년대 말, 하이젠베르크가 제창한 ‘불확정성 원리’ 이론을 계기로 물리학계는 큰 전환기를 맞는다. 뉴턴 이후 정립되어 온 고전 물리학에서는 ‘운동 법칙에 따라 모든 운동이 결정되어 있다.’고 했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물리학에서는 ‘초기 조건에서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곧 물체의 위치를 측정하면 그 물체의 속도 또는 운동량을 알 수 없게 되고, 속도를 측정하면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한 물체의 양자 상태는 알아낼 수 없다. 양자 상태를 알아내고자 측정을 한다면, 그 물체는 더 이상 본디의 양자 상태에 있지 않고 측정된 결과의 새로운 양자 상태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한계를 말한다.
하지만 양자 물리학의 발견에 막대한 기여를 한 플랑크와 아인슈타인도 양자 측정의 확률론적인 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이 남긴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문을 드러낸다.
자유 의지를 둘러싼 과학적인 논란이 말끔히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자 물리학이 인간이 가진 자유 의지를 증명하는 이론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이론을 통해서 적어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여지는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자유 의지
자연 현상만으로 선과 악을 논할 수는 없지만, 인간 행위의 선악을 따지려면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집회서는 선과 악의 선택에 관한 인간의 자유를 언급한다.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15,14-16).
마태오 복음에서도 죄악은 인간의 외부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15,19-20).
스티브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세 가지 결정론에 빠졌다고 말한다.
첫째는 생물학적 결정론이다. 곧 자신의 문제를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것인데 이른바 ‘조상 탓’을 말한다.
둘째는 심리학적 결정론이다. 곧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 탓으로 ‘부모 탓’을 말한다.
셋째는 환경적 결정론으로 자신의 배우자나 동료, 상사, 국가, 사회에 자신의 문제를 전가하는 ‘남 탓’이다.
스티브 코비는 이러한 결정론에서 벗어나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는 습관을 만들라고 권한다.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자유 의지로 미래를 만들어 나가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과학 시대의 신앙] 카오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1,1-2).
인도 · 유럽 조어에서 파생된 ‘하품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상태, 곧 창세기에서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 ‘카오스’(chaos)이다. 이 카오스에 하느님께서는 질서를 부여하셨는데, 이를 ‘코스모스’(cosmos)라고 한다. 곧 코스모스는 질서 정연한 우주이고, 카오스는 질서와 반대가 되는 혼돈을 뜻한다. 이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대비를 이루며 창세기가 시작된다.
새로이 의미를 추가해 가는 카오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카오스는 새로이 물리학적인 의미를 추가하게 되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는 ‘루카시안 석좌 교수’(Lucasian Chair of Mathematics)라는 명예직이 있다. 제2대였던 뉴턴은 1669년부터 33년간 석좌 교수를 지냈다.
제16대 석좌 교수를 지낸 제임스 라이트힐 경은 뉴턴의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른바 프린키피아) 발간 300주년을 기념한 강연에서 과학자들이 집단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턴 운동 법칙의 결정론적인 면을 잘못 확대해석하여 움직이는 물체는 모두 ‘예측 가능’한 것처럼 일반인들이 믿게끔 오도되었다는 것이다.
뉴턴의 운동 법칙에 따르면 모든 움직임은 완전히 예측 가능한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1960년대 이후 어떤 경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카오스’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프린키피아의 주요 내용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의 법칙’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두 천체가 서로를 당기는 힘, 곧 중력에 관한 것이다. 중력의 방향은 서로를 향하고 중력의 크기는 두 천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두 천체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운동의 법칙에서는 힘이 어떤 물체에 작용하면, 힘의 방향으로 물체의 속도가 증가한다. 이때 힘(F)의 크기는 물체의 질량(m)과 가속도(a, 속도가 증가하는 정도)이고, 이를 표현한 수식이 바로 그 유명한 ‘에프는 엠에이’(F=ma)이다.
과학자들도 밝히지 못한 움직임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고 했지만, 뉴턴은 운동 법칙에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 곧 움직임에 변화가 없는 것에는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대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 첫 번째도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것 또한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지니, 움직임을 일으키는 근원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엇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논리에 크게 문제될 만한 것은 없지만, 단순히 ‘움직임을 일으키는 근원’이 아니라, ‘움직임에 변화를 일으키는 근원’이라고 해야 더 타당한 설명이 되겠다.
힘을 알고, 그 힘이 물체를 어떻게 움직여 나갈지를 계산하는 연구 분야를 ‘동역학’이라고 한다. 뉴턴 이후의 천체 물리학자들은 하늘에서 움직이는 천체들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천문학자 라플라스처럼 극단적인 결정론자도 등장하였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라플라스에게 물었다. “그대가 쓴 천체 물리학책에는 왜 신이 등장하지 않는가?” 라플라스가 대답하였다. “저는 그런 가설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이신론자, 또는 무신론자임이 엿보인다.
유신론자가 창조는 물론 그 이후의 역사에 개입하는 인격신을 믿는 데에 반하여, 이신론자는 신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신을 부정하며, 무신론자는 아예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상당수 현대 과학자가 라플라스처럼 이신론자 내지는 무신론자의 범주에 속하는 듯하다.
뉴턴 이후 물리학자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셋 또는 그 이상의 천체가 중력으로 서로 당기는 경우만 해도 그 움직임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였다. 이 ‘삼체문제’는 1887년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의 환갑을 기념하여 현상금을 내건 문제로 나왔는데,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상금을 받긴 하였으나, 그 또한 완벽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카오스와 나비 효과
1940년대 이후 디지털 컴퓨터가 복잡한 과학 문제 해결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컴퓨터로 날씨까지 예측할 수 있다고 기대하던 시기였다.
미국 기상학자였던 에드워드 로렌츠는 1961년 기온과 기압, 풍속 이 세 가지 기상 변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수식을 만들어 계산해 보려고 했다. 하루는 얼마 전에 했던 계산을 다시 확인하면서, 처음부터 하지 않고 중간 부분부터 다시 계산해 보았다. 계산 시간을 아끼려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컴퓨터는 유효 숫자를 여섯 자리까지 썼지만, 인쇄되어 나온 숫자는 반올림하여 세 자리만 나왔다. 하지만 이 숫자를 쓰더라도 오차가 0.1%밖에 되지 않으므로 괜찮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 시간쯤 뒤에 돌아와 보니, 그전에 했던 계산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컴퓨터가 고장이 난 줄 알았지만, 사실은 0.1%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오차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나비 효과’라는 말이 나왔다. 아마존강 유역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여섯 달 뒤 텍사스에 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카오스에 대해 흔히 알려진 대로 어떤 결과를 바꾸려고 초기 조건을 살짝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초기 조건의 조그만 차이가 나중에 ‘예측할 수 없는’ 큰 차이를 만든다.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한 의존성’이 바로 ‘결정론적인 카오스’의 특징이다.
‘카오스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연구도 활발한데, 이는 첨단 기계 또는 전자 장비가 오작동하는 것을 막는 데에 필요하다. 간단한 방법은 작동 중간중간에 현 상태를 측정하여 원하는 범위에 들어가도록 바로잡는 것이다.
카오스적인 삶을 피하려면
인간의 삶은 카오스처럼 매우 복잡하여 예측할 수 없다. 나날이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한다. 공자가 하루 세 번 자신을 돌아보았다는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이나, 천주교의 아침, 저녁 기도와 하루 세 번 삼종 기도를 드리며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카오스적인 삶을 피하게 해 준다.
모든 피조물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만(결정론),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다(예측 불가능)는 예정론은 결정되었지만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카오스 이론과 무척 닮았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 칼뱅의 예정론을 듣고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이를 부정하는 양자 물리학의 불확정성과 양자 카오스 연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보통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미시 세계를 지배하고, 그보다 큰 거시 세계는 결정론의 뉴턴 물리학이 지배한다고 하지만, 거시 세계도 미시 세계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결정론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정해진 것도 예측은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현재를 살펴보며 미래를 만들어 가자.
[과학 시대의 신앙] 말 글 수학
미사 때 우리 아이들이 가톨릭 성가를 보며 킥킥거리고 웃어 댔다.
“하느님과 게임을 하재요.”
정말 가사 가운데 “우-리-게-임-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었다.
말과 글이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 배우지만, 말과 글은 완벽하지 않고 모호해서 자칫 오해할 수 있다. 말은 공기의 진동인 소리로 전달된다. 아주 먼 옛날엔 요즘처럼 녹음할 수 없어서 그 소리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래서 내용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인류는 기원전 삼천년 무렵부터 말을 글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비롯하여 이집트와 중국 등 여러 곳에서 문자를 사용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글을 남기기 시작하던 그 당시에 ‘과연 글이 말을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는 글로 남긴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의 제자 플라톤이 남긴 여러 글로 우리는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플라톤도 ‘글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기억력이 퇴보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선불교는 ‘불립 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전하는 것이므로 오롯이 말이나 글에 담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가 남긴 도덕경의 첫 구절인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 마찬가지다. ‘도’를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렇게 설명한 ‘도’는 본디 뜻하려던 ‘도’가 이미 아니하게 되니, 말이나 글로 ‘도’를 나타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곧 늘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게 됨을 말한다.
탈출기 3장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을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를 뜻하는 히브리어 ‘YHWH’는 네 개의 자음 사이에 어떤 모음을 넣어 읽느냐에 따라 ‘여호와’로도 읽히나, ‘야훼’로 읽는 것이 정설이다. 그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존재하심’을 의미한다고 본다. 정녕 하느님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이신 분이시다.
과학을 연구하려는 언어, 수학
이처럼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시는 하느님을 성경에 오롯이 담았다고 볼 수 있을까? 현세를 사는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1코린 13,12 참조).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도 불완전하고 이를 표현할 말과 글도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므로 그 본디 의미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일상에서 쓰는 ‘인공어’와 이와 대치되는 ‘자연어’ 사이의 모호하고 불완전한 것을 극복하려고 수학이 발전되었다. 플라톤이 열었던 철학 학원 ‘아카데메이아’ 입구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마라!’ 이는 엄밀한 사고를 위한 훈련에 수학과 논리학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민수기에는 구약의 여러 규정과 관련한 숫자가 나오고, 요한 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자 그가 잡은 물고기 수로 ‘153’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21,11 참조), 이는 모두 자연수의 표현이다.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우주가 자연수의 조화로운 ‘비율’(ratio)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영단어 ‘rational’은 ‘합리적’이라는 뜻도 있지만, 자연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있는 ‘유리수’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 뒤 ‘수’는 ‘무리수’를 포함하여 ‘실수’로 확장되었고, ‘허수’를 포함한 ‘복소수’가 도입되어 다양한 물리 현상을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수학자 데카르트는 기하학적인 점의 위치를 숫자로 나타내는 ‘카티전’(cartesian)좌표를 만들어 ‘기하학’을 ‘대수학’적인 방법으로 나타낼 수 있게 하였다. 뉴턴은 운동 법칙과 중력 법칙(만유인력의 법칙)을 전개하려고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고,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물리학을 연구하려고 ‘행렬’을 도입하였다.
또한 핵물리학 이론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는 자연 과학을 연구하며 수학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학은 과학을 연구하려는 언어로 발전되었다.
진리가 참인지를 증명하려 하다
그럼 수학이라는 언어는 일상어와 달리 완전한가?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연구한 수학자 괴델은, 1930년대에 ‘불완전성의 정리’를 증명하여 전 세계 수학자와 과학자, 철학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20세기 초까지 힐베르트를 포함한 수학자들은, ‘자명한 진리로 인정된 공리 체계 내에서 모든 명제는 증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완전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괴델은 그 자명한 진리를 여지없이 박살 냈다. 모순이 없는 공리체계에는 증명할 수 없는 ‘참명제’가 반드시 있으며, ‘그 자체에 모순이 없다.’는 것 또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정립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다섯 개의 공리를 기초로 수많은 정리를 증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다섯 번째인 ‘평행선 공리’의 내용은 이렇다. ‘두 직선이 한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두 직각(180°)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을 연장할 때 두 각보다 작은 내각을 이루는 쪽에서 반드시 만난다.’ 공리치고는 그 내용이 상당히 길어 보인다.
수많은 수학자가 다른 네 개의 공리로 이 평행선 명제를 증명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오히려 평행선 공리를 부정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평행선 공리나 다른 대체 공리는 앞선 네 개의 공리로 증명할 수 없는 ‘참명제’인 셈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 수학자 칸토어는 “자연수의 개수도 무한대이고 실수의 개수도 무한대이지만, ‘실수의 개수인 무한대(알레프-1)’가 ‘자연수의 개수인 무한대(알레프-0)’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칸토어는 ‘알레프-0’과 ‘알레프-1’ 사이에 또 다른 무한대가 있는지에 대한 증명은 할 수 없었지만, “두 무한대는 연속적이어서 둘 사이에는 다른 무한대가 없다.”는 ‘연속체 가설’을 남겼다.
괴델과 미국 수학자 폴 코언은 ‘연속체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알레프-0’과 ‘알레프-1’ 사이에 또 다른 무한대가 있다는 공리를 도입한 수학 체계도 만들 수 있고, 없다는 공리를 도입한 수학 체계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수학은 물리학을 비롯하여 현대 과학을 기술하고 전개하는 데에 탁월해 보인다. 앞으로도 과학 기술의 발전은 수학이라는 언어에 더욱더 의존할 것이다. 그럼에도 수학은 불완전하다.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참된 사실은 반드시 있으며, 신의 존재 여부 또한 수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괴델은 ‘인격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주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과학 시대의 신앙] 불(不), 겸손
몇 년 전 “가톨릭 신자 절반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과학 때문”이라는 미국 통계 자료를 보았다. 20세기 과학과 기술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미신에 가까운 신앙에 자신의 인생을 걸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학 없는 종교, 종교 없는 과학
종교 내에서도 섣불리 과학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질 거라는 생각이 팽배한 모양이다. 과학이나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는다거나, 한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에 대하여, “과학 없는 종교는 맹신이요,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하였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신앙과 과학은 진리를 향한 두 날개”라고 하였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주님’(6,200여 회)과 ‘하느님’(4,400여 회)이며, 그 밖에도 ‘지혜’(총 589회, 구약 522회, 신약 67회)와 ‘사랑’(총 581회, 구약 285회, 신약 296회)이 있다. ‘지혜’는 구약에 압도적으로 많으며, ‘사랑’의 비중은 신약에서 약간 높다.
구약 시대부터 현대 과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자연 현상에 관한 설명을 신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집회 1,1)고 한 것처럼,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자연법칙까지도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믿었다. 하지만 이제 수많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면서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필요 없게 된 것인가?
‘신앙과 이성’ 또는 ‘종교와 과학’이라고 대비하지만, 이는 모두 진리를 추구한다. 흔히 이성이나 과학은 ‘어떻게’(How)의 문제를 다루고, 신앙이나 종교는 더욱더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문제, 곧 ‘왜’(Why)의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진단에 따르면 뉴턴 이후 현대 과학의 성공이 객관화될 수 있는 것만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바람에, 존재론적인 문제가 과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철학이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는가 하면,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의 마지막 저서 「위대한 설계」 첫 장에서 “철학은 죽었다. 과학이 진리 추구의 횃불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철학까지도 죽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취할 것 같지는 않다.
무신, 이신, 유신 그리고 회의론자
오늘날의 과학자 절반 이상이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Atheist)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흔히 ‘전투적 무신론자’라고 불리는데, 모든 종교는 인류를 악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며 종교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미국의 911 테러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뿐 아니라 이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에게도 공격의 화살을 돌린다.
다른 과학자도 상당수는 ‘이신론자’(deist)로서, 신을 창조주로 인정하지만, 우주와 인류의 진화에 더는 관여하지 않고 자연법칙에 맡겨 둔다고 여긴다. 스티븐 호킹은 무신론에 가까운 이신론자였고, 아인슈타인은 이신론자에 가까웠다. 많은 이가 아인슈타인은 ‘유신론자’(Theist)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신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종교가 인격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여겼다.
필자는 대학교 1학년 때 아인슈타인이 쓴 글을 읽고 상당 기간 고민했다. 그는 유다인이지만 어린 시절 천주교 교육 기관에서 배운 적이 있다. 그는 인간이 죽은 뒤 그 삶을 판결할 인격신이 있다고 믿지 않았고, 영원한 삶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 불과하며, 잠시 머무는 삶에서 우주의 신비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입자 물리학자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기고, 교수직을 은퇴한 뒤 영국 성공회의 사제이자 신학자로서 활발히 저작 활동을 하는 존 폴킹혼 같은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인격신을 믿는 유신론자 과학자는 많지 않다.
미국을 중심으로 사이비 과학, 유사과학에 대한 고발과 계몽 활동을 하는 ‘회의론자’(Skeptics) 단체가 있다. 대표적인 회의론자로는 유명한 과학 저술가인 마틴 가드너가 있다. 그는 이신론을 넘어 유신론자이기는 하지만 종교 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겸손해야 할 과학과 종교
미국의 많은 개신교회가 진화론에 반대하며 창조 과학을 주장하지만, 천주교회는 진화론을 상당한 과학 이론으로 받아들인다. 창조 과학자들은 창세기의 창조 과정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현대 과학이 밝힌 여러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하는 바람에 도킨스 등 무신론자 과학자들의 비웃음을 자초하였다.
일부 창조 과학자는 창조 과학을 계속 끌고 나가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되자 살짝 겉포장을 바꾸어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였으나, 이 또한 사이비 과학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게놈 프로젝트’를 주도한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저서 「신의 언어」를 통하여,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잘못된 것이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처럼 진화론을 과학 이론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신의 섭리를 인정하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를 주장하였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잘못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일시적인 주장에 묶어 놓으면, 그 주장이 무너질 때 우리의 신앙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천주교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더라도 그 과학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신앙 안에서 안심하고 열린 마음으로 마음껏 과학을 탐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단,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는 응용기술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른 윤리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
분명 20세기 과학은 인류에게 엄청난 풍요와 함께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난 호에서 이야기한 대로 ‘불확정성 원리’(양자 물리학), ‘불가 예측성’(카오스), ‘불완전성 정리’(괴델의 정리) 등 과학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
이와 더불어 정치 · 사회 · 경제 분야에 큰 충격을 가져온 수학적 정리에도 이 ‘불가능성 정리’가 있다. 197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케네스 애로가 1951년이 정리를 발표하며, 세 가지 이상의 선택지 가운데 각자의 선호도에 따라 투표로 결정할 때 합리적이고 공정한 투표 방법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여기서 ‘합리적’이고 ‘공정한’이라는 수식어에는 엄밀한 수학적 표현이 담겨 있다. 불가능성 정리는 ‘민주 제도에 대한 맹신’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인간이 ‘이성’이나 ‘과학’을 통해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그 한계 또한 이 네 개의 ‘불’(不)이론으로 정리된다. 사실은 이보다 더 많은 한계가 있다. 이처럼 이성과 과학은 그 한계를 겸허히 드러낸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과 종교도 겸손해져야 한다. ‘겸손’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37회 검색된다.
[과학 시대의 신앙]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실까?
어린 시절 세상의 구석구석을 모두 가 보는 꿈을 가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골목골목을 이 잡듯이 누비고 다녀야 세상을 다 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곳을 가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바로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생각을 해 본다. 런던은 여덟 살에, 로마는 아홉 살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아홉 살 때 간 로마와 여덟 살 때 간 런던은 시공간이 달라 똑같은 경험을 할 수가 없다. 이는 모든 시점에 모든 곳을 전부 가 보겠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시간과 공간에 모두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것’과 ‘말이 안 되는 것’
그렇다면 ‘모든 곳에 존재하고’(ubiquitous), ‘모든 것을 알며’(omniscient), ‘무엇이든 할 수 있는’(omnipotent),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은 정말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어렸을 때 읽은 ‘장화 신은 고양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필자의 기억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았다.
꾀가 많은 한 고양이가 가난한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마왕의 성을 빼앗기로 마음먹고 마왕을 찾아갔다.
“위대하신 마왕님, 마왕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렇다. 난 뭐든 할 수 있는 위대한 마왕이다.”
“무엇으로든 변신하실 수도 있으시지요.”
“그럼, 당연하지.”
“무례하다고 나무라지 마시고, 제 청을 들어주세요. 그 무시무시한 용으로 한번 변신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왕은 용으로 변했고, 고양이는 그 앞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아이코, 너무 무섭습니다. 마왕님, 그럼 이번에는 아주 예쁘고 귀여운 생쥐로 변신해 주세요. 그럼 마왕님이 얼마나 전지전능하신지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다시 한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왕이 생쥐로 변신했다. 고양이는 그 틈을 타 생쥐가 된 마왕을 날름 잡아먹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동그란 사각형’을 그리실 수 있을까? 또 ‘당신이 아닌 존재’가 되실 수 있을까? 고양이처럼 그런 생각은 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느님
포항공과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김호길 박사의 호를 딴 ‘무은재 도서관’에는 김호길 박사의 과학적 신념을 담은 글이 크게 걸려 있다. “자연 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
그 반면에 한동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영길 박사는 그의 형 김호길 박사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창조 과학자인 그는 ‘한국창조과학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생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두 분 모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앙에 관한 한 두 분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김호길 박사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초월적인 신을 피조물과 같은 수준에 놓아 비교했고, 김영길 박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신을 붙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진화론을 가설 이상으로 받아들이며, 종교와 과학이 조화롭게 양립할 수 있음을 밝히셨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젊은 시절 마니교에 빠져 방탕하게 살았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나름대로 진리 추구의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진리의 교회’로 돌아온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고심했다.
어느 날 머리를 식힐 겸 바닷가를 거닐던 성인은 행동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한 아이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너 뭐 하고 있니?”
“바닷물을 조개껍질로 떠서 전부 여기 모래 구멍에 담으려고요.”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 조그만 구멍에 다 들어가겠니?”
그 순간 성인은 그 말이 바로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인 것을 깨달았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 ‘계시’를 믿는 신앙과 ‘이성’을 따르는 과학과 철학이 있다.
계시는 조금씩 ‘베일’(veil)을 ‘걷어’(re) 내듯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reveal) 것을 말하고, 두 자연수의 조화로운 ‘비율’(ratio)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피타고라스처럼 비율을 계산하여 이를 ‘따지는’(reason) 것이 이성이다. 하지만 계시와 이성 모두 유한한 인간에게 진리를 ‘온전히’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손쉽게 검색하여 뭐든지 알아볼 수 있는 시대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하느님보다 과학 기술의 속성을 더 따르는 것 같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 특히 ‘인공 지능’(AI) 분야는 갈수록 발달하여 전지전능할 듯한 기세이니 말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불만이 많아 보인다. 반면에 갈수록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과 원활히 소통하여 자율 주행 운전도 척척 하고, 심심할 때에 말동무까지 되어 주는 인공 지능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지만 인공 지능이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실행했을 때, 왜 그렇게 했는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내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수준이다. 인공 지능의 내부 계산 과정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는 결국 인간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인공 지능의 결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인공 지능 또한 인간이 만들었기에 완벽하지 않고 실수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인공 지능의 자율 주행 자동차에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까? 혹시 사고가 나면 인공 지능이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이성의 열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님 뜻대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이성을 초월하신 주님을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설령 계시의 도움이 있어도 성경 말씀에서처럼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너무도 부족하다.
첫 인간의 이름 ‘아담’(Adam)과 라틴어 ‘humus’에서 유래한 인간을 뜻하는 ‘휴먼’(human)은 모두 ‘흙’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겸손’(humble)도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 곧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