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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지혜는 미래사를 오늘에 미리 알고 그 미래에 후회함이 없을 것을 오늘에 행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누리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 물질, 육신, 또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은사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로운 세상의 청지기는 내일 아침이면 집에서 쫓겨남을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 기한을 깨달은 청지기는 쫓겨나기 그 전날 밤에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다 불러서 그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 즉 모든 것의 기한이 있음을 알고, 이 기한의 시간을 바로 활용하는 사람을 지혜자라 했습니다.
모세는 시편에서 우리에게 날 계수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운 자가 되라' 고 말하면서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엡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했습니다.
오늘 읽은 전도서 3장의 말씀에서 솔로몬은 우리의 시간의 관리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이 가진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재테크를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바로 돈이라는 생각에서 많은 성공하려는 기업들이 사원들의 시간관리, 시테크를 합니다. 그러나 실은 시간은 돈 이상의 것입니다. "시간으로 돈을 만들 수는 있지만, 돈으로 시간을 살수는 없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시간을 아끼는 것은 귀한데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시테크를 잘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너무도 허무하리 만큼 짧기 때문이며, 이 짧은 기한에 부가가치가 높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전도서 말씀하는 솔로몬의 시간에 대한 지혜를 배워야합니다.
1-9절까지는 첫 부분인데 우리 인생에게 시간은 너무 짧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10-15절까지인데 시간에 대한 교훈입니다.
16-끝절까지, 셋째 부분에서는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먼저 1-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스물 여덟 가지의 때가 나옵니다.
긍정적인 것이 열 네 가지이고, 부정적인 것이 열 네 가지입니다.
이같이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집니다만 솔로몬이 고민했던 시간은 태어남과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느 누구도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2장에서 인간의 한계를 죽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죽음은 인생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은 시간인데, 어떤 인생도 피할 수 없는 것이요, 이미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생을 나게 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개인의 종말뿐 아니라 국가의 존립이나, 우주의 종말가지도 다 모든 것을 시작하셨던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시간 가운데서 허무를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지혜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제 눈 보기에 좋아 보이는 현실 가운데 있으면 그것이 영원하기를 원하지만,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한이 있습니다. 그 좋은 것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현실도 그 현실에 취하여 살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의 목적이 있음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또 부정적인 때로서 인생의 눈에 보기에 힘들고 불행하다는 현실이 있으면 한숨을 쉬고 언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범사에는 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되고 고통스러워도 인생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거기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들을 제공합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과 청춘과 성취의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쾌락의 즐거움도 주고, 공격의 기쁨, 소유의 기쁨, 창조의 기쁨도 누리게 합니다. 생산의 의미와 발견의 감격을 주고 웅변의 아름다움을, 사랑의 추억도, 평화의 즐거움도 안겨다줍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계속되지 못합니다. 다 기한이 있습니다. 우리 연세 많으신 분들이 어려운 일 당하면 "내가 이 꼴을 보지 않고 죽었어야하는데..."하고 푸념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생이 살면서 이런 저런 현실을 만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시간은 건강을 삼키고 노쇠를 가져다줍니다. 성공을 삼키고 상실감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춤추는 즐거움은 눈물 속에 감추어지고, 공격하던 자가 패배하여 도망하는 자가되기도 합니다. 가진 자가 아무 것도 없어서 구걸하게도 됩니다. 창조는 파괴로 끝나고 맙니다.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로 상실감을 느끼게 되고 질병에 걸리게되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이 세상을 끝내는 때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시간의 허무함을 아는 자는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서 이제 살려는 노력이나 성취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생산적인 수고를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허무주의자, 비관주의자는 동시에 극도의 방탕의 길을 걷게도 됩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하루살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오늘 먹고 마시는 일에 의미를 두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까? 과연 인생이 오늘뿐이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라면 성경도 허무를 가르쳤을 것이고, 그러면 세상을 하루를 살아도 마음껏 죄짓고 즐기며 허무를 안주로 삼아 술 취하고 노래하며, 쾌락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삶이 지혜 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여기서 전도서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성경은 허무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3: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전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것으로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무슨 이유로 일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사는 삶 자체가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사는 것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3장의 첫 부분에서 두 가지 시간에 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격랑 속에 예기치 않던 때에 기한이 다 되어서 죽음이 찾아옵니다. 건강하던 사람에게 질병이 찾아옵니다. 성공을 위해 달리던 사람이 이제 성공하고 그것을 누리려고 하는 때에 그것을 뺏기게 됩니다. 약탈이, 노쇠가, 실패가 찾아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합니까? 허무를 찾아 방황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속되는 것이 없습니다. 건강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젊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공도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유들이 영존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산적인 활동도 그러합니다. 언젠가는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 11절 말씀이 요절입니다.
우리들이 이 시간의 허무함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말씀을 믿어야합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섭리하심을 믿어야합니다. 사철을 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젊을 때를 주실 뿐 아니라 노쇠의 때도 하나님이 주심을 믿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 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죽음도 맞이하게 하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들은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감사, 찬양부터 해야합니다.
둘째, 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셨음을 믿어야합니다.
죽음이 아름다운 것입니까?
노쇠가 아름다운 것이라 말입니까? 실패가 아름다운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여름이 좋고 겨울은 싫다, 어떤 사람은 가을은 좋은데, 너무 추운 겨울은 싫다.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들이 불행하지 않으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겨울이라도 "아, 겨울이라서 좋다"해야합니다. "추우니까 겨울 맛이 난다"고 해야합니다. 또 여름에 "더우니 싫다" 할 것이 아니라 "여름은 더우니까 여름이고 여름은 여름 나름대로 좋은 것이라" 해야합니다. 눈이 와야 겨울이고, 추워야 겨울입니다. 짜증내는 사람은 여름에도 같은 이유로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 현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 젊음이 아름다움을 깨닫고 이 젊은 혈기를 주셨음을 감사해야합니다. 그리고 주신 젊음을 잘 사용해야합니다. 늙음이 오면 나는 이제 늙었으니 아무 쓸모가 없는 자다 할 것이 아닙니다. 내게 노쇠를 주시니 이 늙음은 아름다움이다. 성경은 백발은 늙은이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이렇게 끌어다 붙여 위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선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업에 어려움, 실패가 왔습니다. 실직이 왔습니다. 대학에 합격한 것만 하나님 뜻입니까? 낙방한 것도 하나님이 주신 현실이요 아름다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온전한 믿음입니다. 매 순간 마다 매 현실마다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깨닫을 때에 긍정적인 사고가 나오게 됩니다. 죽음이 내게 닥쳐와도 이것이 전 3:1에 말씀하셨던 모든 것이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제 내게 기한을 다 이루시고 이 세상에서의 존재할 목적을 다 이루시고 나를 불러 가시니 감사합니다. 내 영혼을 받으소서! 감사하면서 침상에서 경배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질병 앞에서 건강을 주셨음을 감사하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노쇠 앞에서 젊음도 주셨음을 감사해야합니다. 죽음 앞에서 생명을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합니다. 실패 앞에서 이제까지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이 믿음이 성숙한 믿음, 온전한 믿음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기한에 대하여 느끼고 허무를 느끼는 인생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 떠납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다 놓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기까지 깨닫는 것이 세상 철학입니다. 세상의 지식이 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 이 허무한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인생의 짧고 허무한 시간을 느끼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전3:11) “...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시간에 대한 세 가지 커다란 관점이 있습니다.
☛회교인, 불교인들이 말하는 동그란 원과 같은 시간관, 윤회적시간관입니다. 그들은 이 허무한 인생에 대하여 사색으로 추측하여 내 놓은 것이 해결한다고 한 것이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에 맞닿아 있고 그 생명을 다시 죽음을 낳고, 또 다른 생명으로 나고...이렇게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개도 되었다가 소도 되었다가 발레도 되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변증법적인 시간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사건은 또 어떤 정반대의 사건과 부딪치게 되는데 그러면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각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정반합의 이치로 발전하는 시간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독교의 시간관은 종말론적인 시간관입니다. 이는 일직선과 같습니다. 인생에는 처음과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도 그렇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 지었을 때에 기한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목적이 다 이루어졌을 때는 이 우주도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11절에 말씀하시길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생으로서 시간에 대하여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시작을 하셨는지도 인생으로서는 모르고 이것이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게 하셨습니다. 성경적인 시간관이 진리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기 때문에 귀하고 짧은 시간을 헛되게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전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주시는 목적은 선을 행하게 하여함입니다. 이럴 때에 세상에서 막고 마시고 수고하므로 낙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허무하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독자 같이 세상을 의미 있게 재미있게 살아가는 자가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수고하는 것은 헛된 것 같지만, 우리들도 이 같은 생활을 하지만 이 현실 가운데서 낙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리들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름을 여름대로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고 누리고 즐기며, 겨울을 겨울대로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고 누릴 줄 알아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서 잠깐 사는 동안 우리들이 하는 행위가 영원히 있을 것을 만들려면 하나님의 행하시는 대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금도 유지 관리 보존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사람이 더할 수도 사람이 덜 할 수도 없습니다. 기한에 다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분간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이 명하시는대로 순종하는 것, 경외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시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여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시간관리의 자세입니다.
(전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우리의 시간이 다 마치는 날에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들을 바로 사용했는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해야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는 불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들을 염려와 걱정으로 낭비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시간에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이루어 주실 것을 기도하고, 나는 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여기에 순종할 것만을 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기한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한도 있고, 우리에게 고난도 기한이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현실이 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