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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 손에
욥기 7:1~10
오늘 저녁 생각하게 될 말씀도 고통 중에 있는 욥이 엘리바스에게 한 답변입니다. 욥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 중에서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형편이 잘 되거나, 하는 일이 바쁠 때는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며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의 심연에 빠져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했습니다.
욥은 자기의 인생이 마치 해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는 품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생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39편 4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깊은 면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31편 15절에 보면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무슨 일을 한다고 해 봐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욥은 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느 사람이 교도소에서 30년간을 보내고, 그러니까 청춘을 감방에서 보내고 자유의 몸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감방 안에 있는 동안 혼자서 독방에 있었는데, 하도 심심하고 답답한 날을 보내다가 감방 안에 개미 한 마리가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그것을 잡아 가지고 열심히 훈련을 잘 시켰다고 합니다. 하도 오랜 세월 훈련을 시키니까 미물인 개미이지만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앞으로 가라면 가고, 뛰라면 뛰고 별난 재간을 다 부리는데 이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와서 30년을 교도소에 살았으니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나올 때 얼마 받은 돈을 가지고 고급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라도 한 번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30년간 교도소 밥만 먹었으니 지겹기도 해서 식당에 들어가 양식이나 청해 먹으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30년간 같이 지내 온 개미를 데리고 나왔는데, 자기 나름대로는 그것밖에는 사람에게 보일 것도 자랑할 것도 없어서 테이블 위에다 앉혀 놓고 “가만히 앉아 있어” 하니 꼼짝 않고 앉아서 주인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개미가 얼마나 재간을 부리나 하는 것을 자랑하고 놀라게 할 마음이 있어서 시중을 드느라고 바삐 왔다갔다하는 웨이터를 불렀습니다. “여보시오, 웨이터” 했더니 인사성 있게 훈련된 웨이터가 와서 깍듯이 인사를 하며 “손님 부르셨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합니다. 이 사람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30년 동안 훈련시킨 개미의 쇼를 처음으로 보여 주려고 웨이터에게 말했습니다.
“웨이터, 이 테이블 위에 개미가 보이시오?” 그런데, 이 웨이터가 얼굴이 붉어지면서 “손님, 죄송합니다”하면서 가만히 앉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쇼를 하려 하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집어 싹 비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개미가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경영하는 사업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권력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재간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며칠 전에 어느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내외분이 독일에 가서 요업을 전문으로 하여 기술을 습득하고 한국에 와서 16년 전에 공장을 설립하셨는데, 급격히 성장해서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다른 공장을 훨씬 앞지르는 업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출도 잘 되고 목표를 세우면 그 이상으로 사업이 발전되는데 ‘하면 되지, 안 될 것 무엇 있나?’하는 생각이 들고, 자신이 생기고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좀 교만한 생각도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일 년 동안 외국의 거래처에 부도가 나고 하는 일마다 가로막히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모든 공장 시설을 다 팔아도 빚을 갚기는커녕 빚더미 위에 올라앉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우리 머리와 손으로 익힌 기술이야 남아 있을 것이 아니냐”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이 정말 암담하게 되니까 정신이 멍해지면서 정신 이상 현상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때 깨달은 바가 크다고 합니다.
‘아하, 사람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구나. 내가 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지’ 하는 생각이 너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창립할 때 제가 예배를 인도했었는데 “17년만에 재창업하는 마음으로 회사를 경영하겠으니 예배를 인도해 주십시오” 해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간증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자랑하지 맙시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지식도, 가문도 사실 우리 가운데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시편 90편 3절 이하에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했습니다.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고통과 슬픔의 연속입니다. 욥의 말을 들어보세요. 3절 이하에 “이와 같이 여러 달째 내가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구나.” 마음의 고민을 표시한 말입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아가기 때문에 그 본능만 충족시켜 주면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 충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어서, 그 마음이 평안해야 하는데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없으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벌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가운데 심한 벌 중의 하나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데 나 혼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 사람의 괴로움이 얼마나 클까요? 그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시편 127편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했습니다.
욥이 지금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5절에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했습니다. 구더기가 생겨 나는 썩은 상처, 고름이 흘러내리는 종기, 재가 덕지덕지한 온 몸, 이러한 모습이 욥의 질병을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상피병이란 일종의 문둥병입니다. 이러한 병자는 보기에는 지긋지긋한 환자로 표현되어 있고, 접촉하거나 가까이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부잣집 대문에 누워 그 집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연명했고 개들은 와서 나사로의 헌 데를 핥아 주었다고 했습니다. 헤롯왕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했습니다.
다윗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시편 38편에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했습니다. 나 자신의 고통도 크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볼 때 더욱 고통이 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인간 생활에서 또 다른 하나의 깊은 면을 말합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여러 가지 면으로 말씀했습니다. 풀의 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라 했습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습니다. “권무십년”(權無十年)이라는 말도 같이 사용됩니다. 십 년 가는 권세도 없다는 말입니다. 잠깐 지나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아주 철학적인 표현입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인생이 그러합니다.
“꿈꾸는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꿈 속에서 좋아서 웃고, 슬퍼서 울고, 화가 나서 소리치고, 무서워서 도망치고, 만나서 반갑고, 헤어져서 섭섭하고, 얻어서 기뻐하고, 놓쳐서 섭섭해 하다가 깨고 나면 그만입니다. 꿈속에 살면 안됩니다. 그것은 몽유병자입니다. 인생은 꿈처럼 지나갑니다. 수에 칠 가치조차 없습니다. “밤의 한 경점 같다”고도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했습니다. 빠르다는 말인데 다른 데 보면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 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나이 겨우 130세라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제가 처음 목사가 되어 목회를 시작할 때, 그러니까 제가 27세 때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같이 일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때는 저 자신도 너무 젊어서 목사 일 하기가 좀 어색할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결혼 주례를 하게 되었는데, 27살 난 목사가 29살 난 신랑의 주례를 하면서, “신○○군은…”하는데 잘못된 것은 아니나 저 스스로가 좀 어색했습니다. 그 동안 수천 쌍의 결혼 주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어린 종, 젊은 종”이라는 호칭으로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기도하시는 분이 안 계십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노(老) 종”이라고 부를 때가 올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이 빨리 지나갑니다.
더구나 시간이 매우 짧습니다. 얼마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정된 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루 살면 하루만큼 우리의 한정된 삶에서 줄어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루 한 시간을 의미없이 보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헛되게 잘라먹는 일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 순간의 시간은 수백 파운드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돈으로 계산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미루지 아니합니다. 내가 이 길을 통과할 기회는 다시 없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는 체험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야겠다는 마음의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시간이 있는데. 아직도 내일이 있는데. 다음에 하지’하면서 미루기를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참회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육신을 사랑하여 육신을 좇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이 결과는 사망인 것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이 죄악의 사슬에서 벗겨 주시옵소서. 육신의 욕정을 끊어 주시옵소서. 세상의 재미있는 취미 생활에서도 끊어 주시옵소서. 내가 살아야만 합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내가 이런 사망의 골짜기, 유혹의 거리에서 헤매고 있어야 합니까? 내 육신은 즐기고 있으나 내 영혼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나를 여기서 건져 주시옵소서. 그러나 지금 당장은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7년이나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여자를 둘 데리고 사는 것은 죄입니다. 이 죄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런데 조금만 더 있다가 그렇게 해 주옵소서.”
“내가 남의 남편하고 사는 것이 죄인 줄은 압니다. 이 죄에서 떠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말고 1년만 있다가 그렇게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해야 할 줄 알면서도 아직 못하고 살았습니다. 용서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열의 하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진 다음에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주님의 날 해서는 안될 취미 생활 때문에 아버지 전에 나오는 것을 빼 먹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여기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런데 금년 겨울이나 지나서 떠나게 하옵소서.”
“주님, 제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야겠기에 주일이고 평일이고 모르고 공부만 시키느라고 죄를 많이 범했습니다. 아이를 우상처럼 생각했습니다. 용서하옵소서. 이제는 하나님 먼저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우리 아이 대학에 합격한 다음부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2.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시네 쉬라시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오라 쉬게 해 주시리라
3. 주께서 지금도 기다리네 기다리네
죄짐을 가지고 다 나오라 어서 주 앞에 오라
4. 주님의 소리를 들어 보라 들어 보라
그 이름 믿는 자 복 받으리 어서 곧 일어나라
(후렴)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내일 오라”하지 아니하시고 “지금 곧 나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지금 오면 고침 받고 용서 받고 복 받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욥은 이제 애원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사람에게 불평,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역경 중에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는 것 이상의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고난받은 백성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형편을 잊어버리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3편 1절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44편 24절에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라.” 이 말씀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으면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오늘 할 일은 미루지 말고 오늘 합시다.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은 오늘, 지금 해야 합니다. 돌아오면 삽니다. 어려움을 당하십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