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난 1950년 10월에
작고하신 조부님(7남3녀중 장남. 저는 조부님의 장남의 장남으로서 장손자이며, 저희 종중 종손) 소유 토지 4건과 1959년 11월에 작고하신 증조부님 소유 토지 1건을 지난해 8월부터 시행중인 부동산등기이전에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종손인 제 앞으로 이전하는 절차를 밟기 위해 서울 사는 둘째 남동생 혁기와 송정리역에서 만나 함께 이전 대상 토지가 있는 함평읍 소재 법무사 사무소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인천집에서 택시로 광명역에 와서 역사내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다음 09시37분발 송정리역 10시57분 도착 KTX 411번 열차를 타고 내려가
오전 10시57분 송정리역에 도착 하여 같은날 오전 수서발 STR을 타고 내려 와 나보다 조금 먼저 도착한 혁기가 그린 렌트카에서 렌트해 놓고 있는 K5 렌트카로 함평에 12시경 도착 하여 함평읍 5일 장터내 육회전문 식당에서 육회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경 부터 4시경 사이에 함평읍내 2개 법무사 사무소에서 일을 본 후 1건당 4명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 하여 4건 총 16명으로 부터 보증을 받는 난제를 함평읍 거주 토박이인 사촌동생 혁용이에게 1건 4명을, 나머지 3건 12명은 역시 함평읍 토박이인 故 사촌형 차남 기덕에게 대신 받아 달라고 부탁 하였더니 모두 흔쾌히 승락을 하여 그들에게 보증서 양식을 넘겨 주고 나니 오후 4시20분이 되어 바로 송정리역으로 가서 근처 렌트카 주차장에 렌트한 차를 반납하고 열차시간이 촉박하여 송정리역 상행선 플랫트홈까지 막 뛰어가 열차 출발 몇분 전에 가까스로 플랫트홈에 도착 혁기는 수서행 STR 5시22분발 열차를, 나는 4분 뒤 용산행 KTX 482번 5시26분발 열차를 각 무사히 타고 올라왔는데, 내가 탄 열차는 광명역에 2시간59분 후인 20시25분에 도착하는 완행 고속인것을 승차 후에 확인 하고서 내려 올때는 1시간20분 걸리는 열차 요금이 31,000원 이었는데 올라 갈때는 27,000원인 이유가 완행이어서 그런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집 근처 사는 장남 율이가 광명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해서 인천을 왕복하는 3002번 광역버스를 타고 가면 되니 오지 말라고 했고
광명역 도착 후 역사안에 있는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아 버려 마침 늦게 까지 문을 열고 있는 파리 바게트에서 두유와 샌드위치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니 오후 9시가 넘었고 이어서 광명역 6번 출구에서 오후 9시30분 출발하는 3002번 광역버스를 타고 오후 10시30경 집에 무사히 도착 하였는데 조부님 별세 후 71년 증조부님 별세 후 62년이 된 수십년 동안 그대로 남아 내려 오던 해목은 난제를 이번에 시행중인 특조법(1959년 12월 31일 이전에 사망한자의 재산에 대해서는 당시 민법규정상 장자 상속이었으므로 이번 특조법에 의해 대습상속과 증여를 원인으로 종손인 제 앞으로 소유권 이전이 가능하다고 함)과 오랜 경험이있는 법무사 그리고 사촌동생 5촌조카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게 되어 종손으로서 너무 너무 마음이 홀가분 함.
♧ 이전절차를 밟는데 필요한 증조부님 제적등본등을 함평읍에서 발급받으면서 광복 후인 1945년 9월부터 정부수립 전인 1948년 7월까지 초대 함평면장을 지내신 조부님(承字一字)의 사진이 읍사무소에 걸려 있는지 여부를 읍장님에게 문의 한바 조부님사진이 함평면 1代 면장을 지내신분 으로 기재되어 회의실벽에 걸려있다면서 안내를 해주어 회의실벽에 걸려 있는 광복 직후 조부님얼굴 사진을 올려다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음.
♧조부님께서는 1893년생으로 6ㆍ25때인 1950년10월에 함평면 관내에서 당시 인민군치하 빨갱이들에게 끌려가셔서 도끼로 맞아 학살당하셨다고 하며
함평초등,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중학과정을 통신강의록으로 수료하고 단신으로 상경 중동고보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 1923년 졸업 후 전남관내 8개시군에서 권업과장 등으로 재직 하던 중 공출미 할당량 목표 달성 미달로 권고 사직을 당하고 고향에 머무르시던 중 광복 후 초대 함평면장으로 추대 되셨다고 하며 제헌국회의원에 출마를 하였으나 낙선하고 고향에 머물고 계시다가 위와 같이 학살을 당하셨고 조부님께서 작고 하신 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8남매 장남이신 부친께서 나이 29세때 가장이 되어 아주 어렵게 생활을 하시게 되어 저희 7남매도 매우 곤궁하게 자라 김일성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던 쓰라린 기억이 있음.
♧경성법학전문학교는 이준열사가 1회로 졸업한 법학교의 후신으로서 1945년 광복 후 경성제대 법학과를 흡수하여 서울대 법대로 개편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