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양 내무서 구금과 고문
1948년 2월 22일 주일 아침 10시경, 참아버님께서는 기성교단의 질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정책이 야합한 가운데 평양 내무서에 구금됐다. 평양 기독교 지도자 83명의 공동명의 투서로 이승만의 스파이, 부녀자 재산 갈취, 사회질서 문란 등의 무고한 혐의가 씌워졌다.
3월 초하루 ‘하늘 큰 잔치’라는 섭리적 행사를 위해 예복을 짓고 정주 본가(本家)와 곽산 처가(妻家)에 기별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는 중에 보안서 처녀 끄나풀(諜者)의 밀고(密告)로 사건이 야기됐다. 20여 명의 식구들도 취조와 가택수색을 당해 교회는 상가(喪家)와 같았고, 심한 감시로 인해 식구들은 흩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온 한국 해방은 하나님의 섭리사적 사건이요, 참아버님께서 공생애노정을 출발하는 기점이었다.
1945년부터 3년 동안 기독교와 하나되기 위한 길을 가셨지만, 결국 기독교는 참아버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실체적인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출발은 좌절된 채 1948년 2월 옥고의 길을 가셨다.
기독교가 재림메시아를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몸소 종의 종 자리에서 출발하신 고난 길이었다.
이를 계기로 해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이 오랜 세월 수고해서 남긴 공적과 나라와 세계의 판도를 다 잃고 세계적인 광야로 쫓겨난 입장에 서게 되셨다. 4천3백년 역사를 43년 당대에 재탕감해야 하는 한스럽고 통분한 현실에 직면하셨다.
* 한민족사 4300년, 애급고역430년, 복귀섭리역사 4000년(아브라함에서부터 현재까지)
가혹하고 포악한 고문에 몇 번씩 쓰러지고 의식을 잃어도 ‘아버지, 걱정 마소서, 아직 안 죽었습니다. 당신에게 약속한 절개와 책임 해야 할 사명이 아직까지 내게 있으니 동정 받을 때가 아닙니다.’ 라고 기도하셨다.
고문을 받아 쓰러지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요,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사탄에 대해서 호령하시며, ‘쳐라! 때가 되거든 7배 이상을 퍼부을 좋은 재료를 수습하는 자리다.’고 하시면서, 고문대에 올라가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고 맞섰다.
흉터를 보실 때면, “인류와 하늘이 나에게 준 훈장이다. 이 흠집을 가진 너는 승리해야 돼!” 라고 맹세를 되새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