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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사순절 주일설교.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 25~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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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설교를 하다보니 마가복음 10장, 마태복음 10장으로 말씀을 드렸고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0장으로, 전부 10장만 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도 오늘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공통점, 통일점이 예수님으로 귀결되듯이 일관성 있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 교회의 강단에서 늘 선포 되고, 그 말씀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일컬어 대부분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이름을 붙여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선하다’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사마리아 사람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그 자비를 베푼 행위를 선한 행동이라고 인정 받기에 충분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해 보았더니 하나님은 다양한 속성(성품)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두 가지로 분류 합니다. 하나는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신적 존재로서 하나님 자신만이 지니신 속성(비공유적 속성)인데, 유일하시고, 불변하시고, 자존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다.... 이런 속성들입니다.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또 하나의 속성은 사람들과 공유(공유적 속성)하는 속성인데,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사랑하시고, 공의로우시고....이런 속성들입니다. 이 공유하는 속성중에 하나가 바로 ‘선하다’라는 속성입니다.
사마리아인을 선하다라고 이름 붙인 것은 사마리아인에게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공유하실 만한 그 아름답고 고결한 성품의 면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모범적이고 칭찬 받을 만하고 배워야할 성품의 상징으로 삼아도 좋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 알고 있으시지만 좀 더 깊고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시 그 상황에 직면했다는 현실감을 가지시고,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어떤 인물과 흡사한가?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견주어 무엇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가? 등에 대해서 묻고, 해답을 얻으시는 복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멘.
율법교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가르치고 율법의 계명들을 해석해 주는 전문가 집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 생활에서 분쟁이 생기면 율법교사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대부분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교사들을 존경했고, 율법교사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학문과 지적 수준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 중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이런 질문을 했다고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율법교사의 속 마음은, “네가 알면 얼마나 아는지 좀 들어 보자, 조금만 무식한 소리를 하면 내가 혼내 줘야지” 이런 의도로 질문 했을 겁니다.
극도로 자기 자존심이 강하고 알량한 지적 교만에 빠져 있는 인물이 율법교사였습니다. 쭉정이만 있는 벼는 익어도 고개가 숙여지지 않지만 잘 익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것인데, 이 율법교사가 어느 수준의 인경을 지니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역으로 율법교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저런 이야기와 비유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 중에 말씀하시는 화법을 살펴보면, 어이없고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질문에 대한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역으로 질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교만한 마음을 훤히 알아 보셨습니다. 자기 교만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 특히 지적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고수를 만나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도 율법교사와 너무나 비슷한 과거를 지닌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찬양가수 이정림이라는 분을 아실 겁니다. 이 분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신은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나고 배움도 많지 않은데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 하나만으로 세계 곳곳 안 다녀 본 곳이 없고, 높은 사람, 잘난 사람 안 만나본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내가 어떻게 이런 호사를 누려 볼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씀 하십니다. 지금은 목사님과 결혼해서 사모님이 되셨는데 이 분의 찬양을 들어 보면 정말 목소리는 찬양계의 이선희급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맑고 고운 목소리로 찬양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도 못 받고 믿음도 연약하기 그지 없을 때 제 아내가 이정림 가수의 찬양을 계속 듣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마디 했습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나는 저 목소리가 왠지 싫다. 왜 한사람 노래만 계속 듣나 다른 노래들도 많은데..” 이런 핀잔을 준 적이 있습니다. 이 후에 제가 큰 은혜 받고 찬양을 가까이 하게 되었을 때 이정림의 찬양이 얼마나 가슴 깊이 울리는 은혜의 메아리인지 짜릿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에게 과거의 제 무지하고 경솔한 발언을 취소하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사역한 교회 중에서 이정림 찬양 사역자가 집회 하는 것을 두 번이나 실제 경험했습니다. 두 번째 찬양 집회에서는 함께 대화도 나누고 기념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2021년 제 페이스북에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 보니 제가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이정림 찬양사역자와 함께!! 크고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한 집회를 갖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이정림 찬양 사역자님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은혜 받으니 이런 놀라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도 율법교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교만하고 냉랭하기만한 이기주의자 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녹여 주시고 비난 하던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감동 받는 경험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런 변화를 받은 것처럼 과연 율법교사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변화 되었을까요?
27절을 읽어 드립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아멘.
이 대답에는 짜증과 비웃음이 동시에 묻어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지키면 당연히 영생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물어 볼 걸 물어봐야지, 이 정도는 유대인 어린아이도 다 아는 것 아냐, 지금 나하고 장나하자는 거야 뭐야”, 이런 심정으로 거칠게 대답했을 것이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요동하는 심리 상태를 다 아시면서 차분하게 말씀 하십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가 성경을 그렇게 잘알고 있으면서 왜 실천을 하지 않고 있느냐, 네가 대답한 그 말씀 그대로를 정확하게 행동으로 실천하고 삶으로 증명해라, 그리하면 살리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라는 하신 것은,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면서, 남에게는 이 말씀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기는 잘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율법교사의 행함 없는 믿음을 질타 하신 겁니다.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율법교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을 하였고,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충분히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하신 것으로 착각 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말씀에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지,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영생을 얻을 구원자가 눈 앞에 있음에도 소경과 같이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믿어야 영생 얻는 다는 말을 해 봤자 생떼를 부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 네가 그렇게도 잘 알고 있는 율법조문 만이라도 제대로 좀 지켜라, 그러면 살아가는데 문제 없을 것이고, 그 살아가는 기반 위에서 이제 지식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믿음과 영생의 길을 깨닫기를 바란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영생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교사의 초보적이고 겉핥기에 머물러 있는 알량한 지식을 돌려서 질타를 하신 겁니다. 눈치가 있으면 여기까지의 대화속에서 자신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자신의 뒤틀린 감정과 분노 때문에 계속해서 예수님을 몰아 부칩니다.
29절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아멘.
이 대답의 속뜻은 또 무엇일까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이웃(유대인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내 증인이고 하나님도 내 증인이 되어 주실 겁니다. 당신만 모르고 있으니, 이를 행하라 어쩌라 그런 말을 도대체 왜 나한테 하는 겁니까?
아마도 울그락 불그락 하며 말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화가 나서 말하기를, 나는 이웃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추가로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있기는 합니까? 그게 누구입니까? 말좀 해보세요. 율법교사는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 대신 비유를 말씀 하십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지고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옷도 벗김 당하고 죽도록 매을 맞고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길가던 제사장이 강도 만나 버려진 사람을 목격했지만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그냥 가 버립니다. 레위인도 지나가다 그를 봤지만 그 역시 그냥 지나갑니다. 두 사람이 버려진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한 것을 보면, 슬쩍 쳐다보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오늘의 주인공인 사마리아 인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는 예루 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7km 떨어진 지역에 있는 도시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지만 이 도시는 버려진 도시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자신의 백성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시켜 유대인들과 혼합민족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버린 이 도시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극도로 경멸하였고, 예루살렘을 통행할 때에 이 도시를 피해서 멀리 우회해서 다녔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절대 출입 금지구역이 사마리아였고, 절대 접촉금지 대상이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나 버려진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33절에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버려진 사람을 보고 단번에 든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누구나 다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지만, 아무나 이런 마음이 즉시로, 수시로, 동일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마리아 인이 불쌍히 여긴 감정은 그가 사마리아 인이라고 무시당하고, 차별 당하는 와중에도 그의 속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해 있었다는 증표가 됩니다. 믿음의 주인되시는 우리 예수님의 가장 특별하신 마음이 바로 불쌍히(긍휼히, 측은하게, 자비롭게)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굶주리고 있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양식을 주셨습니다. 앞을 못 보는 맹인 두 사람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만져 주시고 앞을 보게 하셨습니다. 한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몸에 손을 나병이 깨끗해 지도록 치유해 주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 아들이 죽은 것을 보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말라 하시며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여러 고을로 다니시면서 큰 무리들 중에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마음이 바로 불쌍히 여겨 주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상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몸에 장애를 지니고 있고, 사람들로부터 차별당하고, 소외 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 다니셨습니다. “참 안됐다, 불쌍하다, 어떻게든 도와주면 좋겠는데...” 이렇게 한 번 스쳐 지나가는 한 마디 말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직접 찾아가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불쌍히 여기시면서 마음으로, 생각으로만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즉시 도와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곧바로 우리의 필요을 채워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도 이웃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런 교훈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알고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고급 정보들을 배웠으면 뭐 하겠습니까? 실천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토록 불쌍히 여겨 주셨던 그 크신 은혜를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난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불쌍히 여김 받은 대로 남에게 불쌍히 여김을 베풀 수 있을지 지켜보고 계셨을 겁니다.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행동을 합니다. 34, 35절입니다.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아멘
사마리아인은 버려진 사람에게 응급조치만 해 준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치료 받을 곳에 데려다 놓았고, 치료에 들어갈 비용이 얼마가 들든 다 부담하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해 줄 수 있겠는데 저렇게 까지 하는 것은 오버 아닌가, 참 오지랖도 넓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입맛만 다실 정도가 아니라 모두 가 배불리 먹게 해 주셨습니다. 맹인의 두 눈을 보게 하실 때 한 쪽눈만 보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실 때 한 시간만 살아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완벽하게 돌봐주는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쌍히 여겨 주셨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 정도까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율법 교사는 지식으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그러한 지식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기는커녕, 강도 만나 버려진 사람처럼 자신의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널려 있는데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영생에 들어갈 준비가 완벽하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 “하나님을 사랑 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성경의 큰 두 가지 계명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영생 얻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계속 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영적맹인인 것을 모르고 한치 앞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구렁텅이로 인도하는 그릇된 인도자 였습니다.
비유의 말씀을 마친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엄하게 말씀 하십니다. 우리 다같이 36, 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아멘.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의 물음에 율법교사는 그간의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를 누그러트리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도 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대답은 하긴 했는데, 그의 입술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은 죽어도 하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끝까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의 결기가 엿보입니다. 율법교사가 그 마지막 자존심을 꺾지 않는 이상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진정한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예수님이 율법교사의 속 마음을 다 아시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사마리아 사람 같이) 하라”고 그 하찮은 자존심을 깨트려 버리십니다. “잘난체 하고 말로만 폼 잡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 만큼만 하고 살아라”라고 대놓고 무안을 주신 말씀입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주님이 제 속의 나쁜 자존심 덩어리도 이렇게 부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은 묵묵부답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돌이켜 그렇게 행동 했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구원 영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 주님의 명령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 합니다. 그러나 듣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 중요한 것은 들린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고, 승리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님의 동행자로 우뚝서게 됩니다.
제가 지난 번 설교 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참 다운 삶의 모습 세 가지가 확연하고, 뚜렷하게 드러나야 된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① 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참여하려고 변화 되어가는 ‘되어짐(Being)’의 모습
②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가는 ‘머무름(in christ)’의 모습,
③ 항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거룩과 경건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 앞에 (라틴어-coram Deo)’ 두려움으로 서 있는 모습,
이 세가지 였습니다. 기억 나시죠. 첫 번째가 되어짐(변화, 새사람)의 과정 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인해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의인이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불완전하고 미완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의 모든 언행들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속성)을 닮아가려는 변화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되어짐(Being)’의 과정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마리아 인처럼,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각자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도와 주었던 행동을 기억하시고, 사마리아인을 여러분의 ‘되어짐’의 학습 인물로 삼으십시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을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으셔서 실천하고 열매 맺는 선한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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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언제나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은혜와 사랑으로 지켜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