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형컨테이너 선박으로 빼곡한 컨테이너 항만. 항구 밖에서 대기하던 컨테이너가 부두로 들어온다. 접안과 동시에 수입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시작된다. 높이 60m의 안벽(STS)크레인은 컨테이너박스를 선박에서 차례로 들어내 육상 야적장으로 옮긴다. 대기하던 컨테이너 화물차는 컨테이너를 싣자 말자 어디론가 떠난다. STS 크레인은 다른 야적장에서 수출용 컨테이너를 집어 컨테이너 선박으로 옮긴다. 5시간 뒤 작업이 끝나고 컨테이너선은 큰 바다를 향해 다시 떠났다.
항만작업의 총 지휘자 ‘플래너’
항만은 선박의 입항부터 출항까지 모든 작업이 물 흐르듯 진행된다.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지휘자처럼 누군가가 하역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지시를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플래너(Planner)라고 부른다. 단어 그대로 배가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물류를 어떻게 처리할 지 계획전반을 짜는 사람이다. 항만 터미널의 경쟁력은 얼마나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물류를 처리하느냐에 달렸다. 터미널의 경쟁력은 플래너에 달린 셈이다. 정윤석 한진해운신항만 플래너(43)는 “모든 항만작업은 플래너들이 만들어 준 데로 이뤄진다”며 “항만작업은 플래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계획을 짜는 것을 ‘플래닝’이라고 한다. 플래닝에는 3가지가 있다. ‘선석 플래닝’은 배를 어디에 접안하고, 몇 번째 순서로 접안 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쉽 플래닝’은 어떤 컨테이너를 몇 번째로 선박에서 내릴지, 어떤 순서로 컨테이너를 선박에 실을 지를 결정한다. ‘야드 플래닝’도 있다. 컨테이너를 하역 때 어느 야적장에 갖다 놓을 지를 결정한다.
플래너는 현장 부두 인력배치와 STS크레인의 컨테이너 물량 배분도 책임진다. 과거에는 서류를 보며 일을 처리했다. 예컨대 종이에 선박과 컨테이너 적재현황 그림을 그린 뒤 일일이 어떤 컨테이너 박스를 어떻게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런 조종을 해주지 않으면 하역작업 도중 배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 수도 있다. 지금은 일부 재래부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과정이 전산화됐다. 특히 컨테이너 전용부두에는 터미널 오퍼레이팅 시스템(TOS)이 잘 갖춰져 있다.
항만 물류를 총괄한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그만큼 일의 강도가 높다. 24시간 팀제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말은 물론이고 추석과 설도 못 쉰다. 업무시간에는 짬을 내기 힘들다. 점심시간이 별도로 없을 정도다. 15분 정도 급히 점심을 먹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야 한다.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기가 쉽지 않다. 그 시간에도 배는 들어오고 크레인은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받는 전화량도 엄청나다. 하역작업과 관련된 모든 클레임은 플래너에게 돌아온다.

컨테이너 항만 전경. <제공: 한진해운신항만 주식회사>
플래너들의 업무환경
플래너들은 통상 주간과 야간근무를 교대로 한다. 하루 낮에 일했으면 다음날 야간근무 하는 식이다. 주야간 12시간 교대근무다. 근무시간도 들쑥날쑥한 데다 항만 터미널이 외진데 있다 보니 젊은 직원의 경우는 업무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2009년 부산신항만에서 문을 연 한진해운신항만 주식회사에는 9명의 플래너가 있다. 이들이 지난해 처리한 컨테이너는 240만 TEU다. 1만TEU급 컨테이너 240만 박스를 처리했다는 얘기다. 해운산업이 전반적으로 불황이지만 터미널사업은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업무는 팀이 공동으로 한다. 한 컨테이너 선박이 들어오면 3~4명의 플래너가 붙어서 접안, 하역, 출항 등의 계획을 유기적으로 짠다. 팀웍이 중요해 규율은 센 편이다. 팀원 중 한 사람이라도 역량이 모자라면 팀 전체가 고생을 하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팀 전체가 진다. 한번의 실수는 수억 원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서류 하나만 잘못 체크해도 ‘대형사고’다.

정윤석 플래너
경력 18년차인 정윤석 플래너도 잊지 못할 실수담이 있다. 선박에 적재된 컨테이너 내용물은 선사에서 전자문서(EDI)로 터미널에 넘긴다. 터미널에서는 이 문서를 보고 컨테이너의 내용물과 중량 등을 확인한다. 한번은 냉동 컨테이너가 선적이 됐다. 하필이면 그때 전산에 문제가 생겨 서류를 별도로 받아 수작업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한 컨테이너를 놓쳤다. 그냥 일반 컨테이너로 처리를 했더니 컨테이너 내용물들이 모두 녹아버리는 사고가 났다. 정 플래너는 “그때 아주 크게 혼났다”며 머쓱해 했다.
플래너가 되려면
플래너는 별도의 자격증이 없다. 플래너는 처음에는 배를 탄 선원들, 특히 해양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이 했다. 배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보통신(IT)이 발달하면서 일반대학 출신들도 할 수 있는 직업이 됐다. 항만물류회사에 취직한 뒤 부서 배치를 받다가 플래너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정윤석 플래너의 경우다. 아직도 해양대 출신만 뽑는 터미널도 있지만 점차 일반대학 출신들에 많이 개방하고 있다.
특히 항만 특성상 지방에 많이 위치해 부산, 인천, 울산, 광양, 목포 등 지역대학출신들이 강세다. 무역학과, 물류학과 정도면 무난하다. 정보통신분야를 공부했으면 더 좋다. 점점 더 IT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윤석 플래너는 “학력보다는 건강하고, 밤샘 근무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끈기와 인내력 있는 사람이 알맞다”며 “무엇보다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업무가 많은 만큼 보수는 같은 항만직종에 비해서 수당 등이 조금 더 많다.

플래너는 처음에는 배를 탄 선원들, 특히 해양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이 했다. 배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한 때 세계 3위였던 부산항은 중국의 거센 추격에 밀려 5위까지 떨어졌다. 중국에 맞서려면 효율성을 앞세워 환적화물(한국을 거쳐가는 화물)을 많이 유치해야 한다.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이 플래너다. 어떻게 컨테이너를 실으면 빨리, 안전하게 선적할 지, 어떤 배를 어떻게 배치시키면 입출항이 쉬울 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선박의 경우 항만에 몇 시간 대기하느냐에 따라 경제성이 달라진다. 기름값이 원채 비싸기 때문이다. 선주들은 빠르게, 값싸게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항만을 선호한다. 정윤석 플래너는 “고민 끝에 낸 아이디어로 물류 처리량이 증가하고 시스템이 개선되면 큰 보람을 느끼게 된다”며 “아직도 효율성을 개선할 부분이 많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 ‘플래너’라는 직업이 생긴 것은 1978년이다. 부산 컨테이너터미널(현 허치슨터미널)이 들어서면다. 1980년대 부산 북항을 중심으로 컨테이너 항만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플래너도 늘었다. 현재 국내 플래너는 2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부산 신항에 50여명, 북항 50명 등 부산항에 100여명이 있다. 그밖에 인천, 포항, 목포, 광양 등에 100여명이 있다. 부산신항만 개장 초기에는 플래너를 공개 모집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결원이 생길 때만 뽑는다. 항만에서는 굉장히 전문분야라 1년 이상은 교육을 받아야 배치가 가능하다. 정윤석 플래너는 “일은 분명 고되지만 내 손으로 항만전체가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굉장한 자부심과 사명감이 생긴다”며 “계속 연구·개발하면 20~30년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