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들이 빽빽하다. 옆 차선을 달리던 택시가 좌측 깜빡이를 켠다. 속력을 줄여 주니 앞으로 들어오며 비상등으로 깜빡깜빡 인사한다. 일부 운전자는 막무가내로 끼어드는데 이분은 운전 예의를 잘 아는 사람이다 싶어 흐뭇하다. 바쁜 중에도 양보하자 고마워하는 모습에 어느 택시 기사가 떠오른다.
승용차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전을 익힐 겸 달맞이 고개로 가던 길이다. 빨간 신호 등을 만나 차를 세우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꽝.!” 소리가 나며 차가 울컥 튀어 오른다. 옆자리의 남편이 앞으로 엎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돼 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고 어지럽다던 남편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앉았다. 뒤차 운전사가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차를 갓길로 밀어내보니 뒷 범퍼와 오른쪽 문짝이 크게 부서졌다.
그는 인근 지역 택시 기사인데 조금 전 출근해서 첫 손님도 태우기 전이란다. 잠시 잡념에 들어 앞을 제대로 못 보았다고 했다. 왜 그렇게 속력을 내었는지 모르겠다며 손을 싹싹 비비고 허리를 굽힌다. 무사고 운전 경력 십 년을 채우고 개인택시를 운영할 계획인데 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어쩔 줄을 모른다. 부서진 차량을 수리하고 렌터카를 내주며 다친 몸도 치료해 줄 것이니 사고 신고를 말아 달라고 사정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새 차를 구입하고 일주일 만에 당한 일이라 말문이 막힌다. 잘못을 인정하며 간청하는 것으로 봐서 올바른 사람 같은데, 택시 기사로는 큰 오점이 될 사고를 신고하는 게 옳을까. 그렇다고 법대로 하지 않는 게 잘하는 일인가. 한참 헤아린 끝에 차를 새로 마련해 액땜한 셈이라 여기고 경계의 마음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견인차를 불러 부서진 차를 실어 보내고, 덜 상한 택시로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우리 집 동 호수를 물어 왔지만, 차를 완벽하게 수리하고 그동안 쓸 수 있는 차량만 보내면 된다고 했다. 병원에 가보니 큰 탈이 없어 그 사람의 개인택시 면허 취득에 이상이 없기를 바랐다.
사고 경위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기사의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했다. 십년 무사고의 베테랑 운전사가 신호 대기 중인 차를 들이받은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실수로 사고를 낸 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신고를 못 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택시 기사의 언행이 솔직해 보여 그의 바람 대로 해 준 게 잘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서투른 초보 운전자인 나도 큰 탈 없이 차를 운행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매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인간은 누구나 선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선량하던 이가 어느 경우에는 괴팍한 심성을 드러내고, 사납던 사람이 의외로 온화해지기도 한다. 각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가끔 생각지 못한 실수도 저지르고 순간의 판단이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을 우리라는 관계로 묶으면 남의 일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택시 기사도 고의로 내 차를 부순 게 아니라 순간의 실수로 사고를 낸 것이다. 개인택시 운영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한번의 부주의로 그 꿈이 송두리째 날아간다면 가슴 아픈 일이겠다. 그래서 피해 보상은 해 줄 것이니 편리를 좀 봐 달라고 인간적으로 사정한 것이리라.
오래전 선인장을 키울 때도 무척 고생했다. 다른 화초들과 조화롭게 키우려고 들여다보며 물을 많이 주었더니 썩어버렸다. 사막 식물이 여타 식물과 같을 것이라는 오해와 무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다시 선인장을 들여와 목을 조금씩 축이게 했더니 이번에는 시들시들 말라 갔다. 이러다 또 실패할까 봐 겁이 났다. 궁리 끝에 화분 받침대를 바꿔 주었다. 밑에 구멍이 난 불받이를 빼고 쟁반같이 가운데가 오목한 받침대를 끼웠다. 그것의 역할은 아주 컸다. 화분을 거쳐 내려오는 물을 모아 두어서 선인장이 그것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새 받침대는 화초에게 덕을 주면서 주인까지 편하게 해 주었다.
잘 수리된 차를 받아 지내던 어느 날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 내려갔더니 백도, 포도, 토마토 등이 세 상자나 와 있었다. 어떤 택시 기사가 남편 이름을 대고 전해달라며 맡겼다 한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그가 가져온 백도는 어느 것보다 부드러웠으며, 포도는 달콤했고, 토마토는 싱싱하고 속이 꽉 차 있었다.
그 운전자는 지금쯤 교통 법규와 운전 예의를 잘 지키며 개인택시를 운행하고 있을 것이다. 택시 기사를 나쁜 사람으로 구분 짓지 않고 배려해 주길 잘했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아마 그도 갈 길이 급한 운전자를 만나면 군말 없이 슬쩍 끼워 줄 것이다.
첫댓글
잘하셨습니다.
그러게요, 모든 일에 있어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닌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