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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충돌의 디지털 미학: 컴퓨터 아트
컴퓨터 생성예술
◆ 컴퓨터 아트의 진행 과정
▲ 생성미학의 진행 과정
이 사람이 생성을 했는데 네. 누구 그림 같죠? 있잖아요. 파울클레. 파울클레라는 사람과 비슷하죠.
나중에는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목을 오마쥬와 파울클레, 파울클레에게 보낸 오마쥬. 파울클레의 작품을
분석해서 입력해서 나온 게 아니라, 아주 우연히 파울클레와 비슷하게 나온 거라고.
당시에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이야기 안했대요. 그래서 억울하다고.
여기서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컴퓨터 생성예술과 현대예술사이의 친화성 만약에 19세기까지의 예술이라면, 19세기
였다면 이런 것들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았겠죠.
그만큼 현대예술이 많이 변했거든요 엔트로피가 엄청 커졌다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컴퓨터로 예술을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직까지 다 추상입니다. 선을 긋는 것조차 굉장히 힘들어요.
직각을 그리거나. 기껏해야. 처음에는 사선을 긋는데도 계단식으로 올라갔어요.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아직까지 계산기였어요.
도대체 계산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 발상이 새로운 거죠.
다비드의 작품 중에 하나가.. 복구 하는데. 큐레이터가 복구에 필요한 미완성작품 사진을 찍어서 우편엽서처럼 만들
어서 보냈대요.
중요한 사람들한테 의견을 물어본 건데 그걸 가지고 작품을 만든 겁니다.
나중에는 나폴레옹인데 나폴레옹의 모습이 물방울이 되어서 해체된 것처럼 컴퓨터로 처리해서 만든 작품이죠.
후기작품들입니다. 이 사람이 7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작품을 안 해버려요.
왜 안하냐 했더니 지루하다.. 컴퓨터로 생성하다보니 다 비슷해 보이거든요.
그때쯤 되면 생성미학이 퇴조기에 이릅니다.
벤제〔Max Bense〕의 정보미학 이라든지.. 하나의 야심 찬 프로젝트로 즉, 미학이라는 것을 자연과학적인 엄밀함
위에 다시 정초시키겠다는 아주 야심을 가지고 작업을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던 겁니다.
이사람 이론적 작업은 오늘날 실패한 것으로 얘기가 된 거고.
그와 더불어서 프리더 나케〔Frieder Nake〕라는 사람도 컴퓨터로 안하겠다고 하고 홀연히 떠나버려요.
그 다음 사람으로 우리가 네스〔Georg Nees〕와 마케를 봤고요.
▲ 컴퓨터 아트 작품의 등장 배경
네스와 나케는 독일사람으로서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과 이론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으면서 작업을 했다고 하면 미국
에는 놀〔A. Michael Nol〕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네스와 나케와 놀 모두 N이잖아요. 그래서 컴퓨터 그래픽의 ‘쓰리 N’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정보미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에요.
물어봤어요. 정보미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랬더니 쓸데없는 인물학자의 잡념이다.
이런 식으로..(우리)는 실제사람을 가지고, 실제사람을 가지고 하는 생성하는 실험이다.
유럽 쪽의 이론적인 취향과 전혀 다른 미국 쪽의 실천취향 있죠?
왜, 실험적인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거죠.
막스 벤제는 정보미학을 가지고 수학적으로 정초하려고 했다면 놀이 볼 때에는 그 이론조차도 실제로 인문학의 일종
이다 라는 겁니다..수학, 과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학자의 담론에 불과하다 라고 말해버리고는 우리는 아주 과학
적 실험을 하고 있다_라고 이야기 합니다.
컴퓨터죠.. 미국에서 썼던 ibm 컴퓨터입니다. 디지털 컴퓨터이구요.
이 사람들은 어떤 장점이 있었냐면 프로그램하면 컴퓨터 들어가죠?
디코더가 있고 커맨더, 제너레이터가 있는데 당시로서는 오늘날 우리처럼 프린터 같은 것도 제대로 없던 시대였거
든요. 그래서 원래는 네스나 나케 같은 사람이 어떤 걸 했냐면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면 그림을 그릴 때 프린터
있잖아요. 프린터 설치할 때 뭐 깔죠? 프로그램. 그거 만들던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장점이 있냐면 당시만 해도 프린터 하는데 시간이 끔찍하게 오래 걸렸대요.
엄청 오래 걸렸는데 이 사람들은 카메라 끝과 음극관으로 뽑는 겁니다.
모니터 비슷하게. 그래서 카메라로 뽑을 때 마이크로 필름으로 뽑았데요. 필름상태로 출력되기 때문에 바로 봐서
그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필요하면 확대해서 인화를 해버리면 되는 겁니다.
오랫동안 찍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게 미국의 장점이고.
당시에는 이게 뭐냐 하면 독일 쪽 보다 사실상 미국에서 발전되었거든요.
문제는 뭐냐면 당시 사람들은 이것의 중요성을 하나도 몰랐어요.
그래서 아카이브는 하나도 안 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최초의 컴퓨터 그래픽은 기록상으로는 아까 독일 사람들 네스와
나케에게 돌아가지만, 실제로 당시에 이 사람들 인터뷰는 남아있거든요.
자기들이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지 인터뷰를 보면 내용이 상당합니다.
당시에 이 사람들은 디지털로 조각까지 하고 있었어요. 디지털 애니메이션까지 하고 있었고요.
이게 벨 연구소인데, 당시에 굉장히 좋은 분위기였다고 하더라고요.
벨 랩(lab)이 뭐냐면 당시에 작업을 하는데 완벽한 자유를 줬데요.
서로 만나서 잡담하고 카페에서 커피마시면서 작업하다 와서 서로 물어보고.. 이렇게 좋은 분위기였대요.
성과를 내라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도 없고, 굉장히 자유로운 창의적인 시험적인 분위기속에서 작업을 했던 사람들
입니다.
이 사람들이 떤 절차로 컴퓨터 그래픽을 하게 됐냐면 여름에 동료 중에 하나가 와서 60년돈가.. 컴퓨터에 버그를
내서 찍어봤는데 이상한 그림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예술작품 같다 이렇게 농담으로 말했는데 그 순간에 뻔뜩 하는 게, 아니 그렇다면 작품을 하면 되지
않느냐.. 실제로 이렇게 이론적인 동기로 된 게 아니라 아주 우연적인 사건으로, 그걸 계기로 일종의 장난삼아 시작
했던 작업인거죠.
이건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종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굉장히 짜임새 있다는 느낌이 들죠.
어떻게 만들었냐하면 수학에 가우스 분포라는 게 있데요. 100개의 점을 산포를 시키는 겁니다.
무작위로. 그 다음에 점들을 이어나가는 거예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선이 점들을 이어나가서 계속 위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맨 끝점까지 가면 뚝 떨어지죠? 거기서
또다시 이어서 올라가면서 뚝 떨어지고.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한거죠.
점들의 산포는 랜덤하죠? 아마 점들을 잇는 방식도 랜덤일 겁니다.
가장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져라. 이건 질서거든요.
이런 우연과 필연의 결합, 질서와 무질서의 결합을 통해서 이런 아주 보기 좋은. 「가우시안 콰드란틱」(Gaussian
Quadrantic)라는 작품입니다. 1963년이고.
여기 보면 재밌는 게 C 라는 게 나와 있어요. 카피라이트(copyright)잖아요. 저게 왜 문제가 됐냐면 이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 전시를 했어요.
이런 장난을 해서. 화랑을 빌려서 했는데, 전시는 흥행에 참패를 했죠.
아무도 보러 오는 사람도 없고, 당연히. 전시된 작품 중에 단 한 장도 팔린 게 없고, 그때 어느 신문에서 약간 호의 반
적의반한 기사를 썼데요. 그래서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조금 곤란했어요. 굉장히 비싼 돈 들여서 컴퓨터를 사용하게 해 줬더니 그 사람들이 하는 짓이
이런 거였거든요, 애들 장난 같은 거. 그러니까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간에 상관을 안
하는데 최소한 그 대신에 바깥에 비치지만은 않게 해 달라. 니들이 무슨 짓을 하는 지 바깥에서 모르게 해줄 수는
없느냐.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방법이 없다.
이미 보도가 되었으니까 누군가는 따라 할거다..한 가지 방법이 뭐냐면 카피라이터를 설정하는 거다.
그래서 카피라이트를 신청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 멋있는 나랍니다.
이게 1960년대 잖아요. 이 사람들이 이런 작품들을 해서 저작권신청을 한 겁니다.
그런데 특허청에서 딱 반려가 되요.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가 만든 거라면서, 어떻게 사람에게 저작
권을 줄 수 있느냐..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부랴부랴 해서 이게 실제로 컴퓨터가 만들긴 했지만 프로그램은 인간이 짠거다 하면서 프로그램
내용을 세세하게 써서 보낸 겁니다.
그런데 또다시 반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반려가 되었냐면 프로그램 내부에서 필연적인 부분 있잖아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 그 부분까지는 저작권을 인정할 수 있지만, 나머지 랜덤한 부분은 너희가 생성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따라서 저작권을 줄 수 없다_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자 놀이 또 부랴부랴 결국 그 랜덤 한 것조차도 우리가 디자인한 거다_라고 그렇게 설득해서 결국 카피라이트를
따 온 겁니다.
▲ 독일과 미국의 관점 차이
이게 차이가 딱 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뭐예요? 독일사람 같은 경우에는 창작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컴퓨터라고
생각하고, 미국사람들은 어때요? 창작의 주체는 역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독일 쪽에는 인간 예술가의 능력을 컴퓨터를 통해서 시뮬레이션 한다는 것이라는 이론적인 측면에 굉장히 관심이
있다면, 미국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컴퓨터는 일종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개발과 같은 굉장히 실용적인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거죠.
이 사람이 그 작품이 왜 그렇게 마음에 들었느냐 하면 하면 이게 역시 피카소의 「마졸리」(Majolie-나의 아름다운
여인)라는 작품이거든요. 이거랑 너무 비슷한 겁니다. 구축구조가, 구축원리가.
아까 우리가 나케 할 때도 나케가 우연히 생성한 파울 클레를 닮았죠?
역시 이것도 피카소를 닮았죠. 바로 이것 때문에 작품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거죠.
왜냐면 현대예술의 상태가 엔트로피 상태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떤 아이디어를 얻느냐면 아 그렇다면, 어떤 게
가능하냐면 비슷하잖아요.
가우시안 콰드란틱 하고.. 컴퓨터 말고도 예술가들이 스타일 흉내 내게 할 수 있지 않느냐. 미대가면 애들에게 과제를
냅니다. 그림을 그려 와라. 이번에는 피카소 풍으로 그려와 그러면 피카소 풍으로 그려 와야 합니다.
렘브란트 풍으로 그려와 이렇게 훈련을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컴퓨터로 하여금 너 피카소 풍으로 그려봐, 클레 풍으로 그려봐. 이런 식으로 입력을 해서..예술가들마다
자기 풍이 있잖아요. 우리는 파울 클레 그림을 보면 아, 이건 클레 꺼다. 혹은 달리 꺼다.
예술가들이 작업을 할 때는 그들 내부에 프로그램이 있다는 거예요. 그 프로그램을 분석해서 컴퓨터에 입력하면
컴퓨터가 비슷하게 만들어 낼 거 라는 거죠.
▲ 컴퓨터 아트의 프로세스와 시도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이 작품, 몬드리안의 작품이에요. 몬드리안의 작품이 왜 중요하냐면 우리가 추상이라 하더라
도 피카소의 추상, 클레의 추상은 좀 다릅니다. 왜냐면 아직 구상적인 요소가 남아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전혀 대상성이 없는 그야말로 순수회화, 오로지 형과 색으로 내는 회화, 그게 몇 사람 있는
거죠. 최초가 칸딘스키, 둘째가 몬드리안, 그다음이 말레비치정도일겁니다.
바로 1917년이 데스틸(De Stijl)이 결성된 해에요.그래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낸 겁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런 가시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게 동양의 음과 양을 의미한다고 하더라구요. 이게 세계 상태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몬드리안 풍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일단은 뭐예요? 제일 먼저 분석미학, 프로그램을 파악해야합니다.
그다음에 입력을 해서 생성을 하죠. 생성미학, 프로그램을 짜는 거죠. 분석부터 해야 합니다,일단.
보시면 알겠지만 제일먼저 테두리가 있죠? 테두리가 어떻습니까? 둥글죠? 테두리를 둥글게 마감하라.
이게 첫 번째에요. 두 번째는 바(bar)들의 길이가 위로 갈수록 짧아지죠? 위로 갈수록 바들의 길이를 짧게 해라.
세 번째, 나머지 바들의 길이의 비는 천차만별이죠? 랜덤하게 해라. 분석해낸 겁니다.
쉽게 말하면 첫 째, 각 테두리를 둥글게 마감해라, 위로 갈수록 바의 길이를 짧게 해라.
나머지는 랜덤하게 발생시켜라. 또 하나 빠졌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면 바들을 균등하게 배치시켜라.
이렇게 분석을 해내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입력을 해요.
컴퓨터에다. 입력을 한 다음에 생성 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생성시키니 이런 게 나오는 겁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밑에 카피라이트가 있죠? 그런데 비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뭔가 아직 어정쩡하죠? 아직은?
위에 것은 뭔가 훨씬 더 짜임새 있고 아래는 왠지 엉성한 느낌.. 그건 뭐냐면 아직 분석이 덜 됐다는 얘기에요.
뭔가 분석이 모자란다는 이야기입니다. 계속 분석하고 분석하면 뭔가 훨씬 더 가까운 게 나오겠죠.
이게 프로그램의 절차입니다.
이 사람이 결국에 어디까지 발생을 시키느냐면 그러다 튜링테스트까지 가는 겁니다.
우리 튜링테스트 아시죠? 쉽게 말하면 내가 커튼이 있고 저 뒤에 누가 앉아있는지 몰라요.
컴퓨터일 수도 있고, 인간일수도 있어요. 자판이 있으면 자판에게 질문을 해요. 그럼 그쪽이 대답하고 그게 모니터에
뜹니다. 그런데 대답을 하는 그 자가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나는 모르는 상태에요.
그 상황에서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겁니다.
2007년 K리그 우승팀은 누구지? 이런 식으로..그런 걸해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질문을 해서 테스트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쪽 사람이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구별할 수 없다면 그때는 기계가 인간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게 튜링테스트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때는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갖게 된 것이라고 가정하자.
하나의 오퍼레이셔널(operational), 쉽게 말하면 조작 가설처럼. 튜링테스트가 있었습니다.
그 실험을 하자는 겁니다. 지금은 아마 티가 날겁니다. 이건 인간이 만든 것이고 훨씬 짜임새가 있고 기계가 만든 것이
엉성하지만 분석을 정교하게 하고 프로그램을 정교하게 하면 어느 순간에는 인간의 것인지 아니면 컴퓨터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때가 올 거라는 거죠. 그때가 되면 컴퓨터가 인간처럼 예술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게 바로 이 사람의 테스트입니다.
▲ 컴퓨터 아트의 시각적 적용
제가 문제를 이렇게 냅니다.
이중에서 인간이 만든 것을 골라라. 1번 2번 3번 4번. 튜링테스트. 몇 번 입니까? 너무 규칙적이죠? 너무 산만하죠?
배치에서도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neg-entropy)가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답은 전부다 컴퓨터가 생성한겁니다. 편법으로 튜링테스트를 벗어나는 방법이죠.
사실은 이게 보시면 알겠지만 이런 것조차도 쉽지는 않아요. 아주 추상적이지만 기계를 그대로 시뮬레이션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겁니다. 작품들 중에서 인간냄새가 아주 덜 나는 게 있죠. 훨씬 더 기계적 냄새가 나는 것,
이런 건 시뮬레이션 할 수 있지 않느냐?
그게 바로 이런 겁니다. 옵아트 같은 거 말입니다. 이런 건 시뮬레이션하지 않느냐?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해봤는데.
이건 라일리라는 사람의 작품입니다. 옵아트는 착시를 일으키죠? 그래서 정지된 그림인데 막 움직이는 느낌이 나죠?
그런 작품이고 굉장히 기계적이고, 수학적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걸 컴퓨터로 생성해 냈어요. 이걸 우리가 사인 곡선인데 이걸 사인 곡선 주기가 점점점,.. 사인곡선을 사용
해서 했습니다.
이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평론가중에서는 라일리 것보다도 이게 더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놀이 아주 실망을 했다고.. 평론가라는 놈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톰슨이라는 사람이 분석을 했어요. 그런데 아니다, 다르다고 합니다. 라일리가 한 것은 여기를 보면 약간 얇아지죠?
여기는 거의 균등하게 나가는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수학적으로는 이게 더 정확해요.
그런데 이건 수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쉽게 말하면 이것은 오로지 작품의 객관적인 상태만을 분석한 거잖아요
라일리 같은 경우에는 그걸 볼 때의 지각까지 고려한다는 겁니다.
이게 더 착시 효과로는 더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는 이게 더 효과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건 객관만의 분석이다. 라고 한다면 아까도 말했듯이 미시 미학적 분석 이다.라고 한다면 이건 인간과 작품
사이에 관계가 있거든요. 여러분 아시겠지만 현실과 똑같이 찍은 사진이 더 실감나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영화에서 볼 때 실감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건 현실 장면이 아닙니다, 그게. 과장이 들어가 있어요.
뭔가 왜곡이 되어있어요. 그래야 실감나게 느껴지는 겁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첫 장면에서 막 총소리가 나잖아요. 그게 실제로는 사격장에서 듣는 총소리보다 더 실감
이 나요. 사격장에서 듣는 진짜 총소리하고 물리적으로 달라요.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실감나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단지 객관적 사실 객관적 물리적 사실로만 시뮬레이션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라일리의 것도 인간과의 관계 눈과 대상의 관계도 프로그래밍해서 넣었다는 겁니다.
아직도 프로그래밍 해서 넣었다는 거죠. 이런 것들이 마이클 놀 같은 사람의 실험이라는 거죠.
조금 더 넘어가보죠.
▲ 모어의 작업과 컴퓨터 아트의 진행방향
만프레드 모어〔Manfred Mohr〕라는 사람인데. 이제까지 컴퓨터 예술 했던 사람들은 -네스라든지, 놀이라든지,
나케라는 사람은 - 예술가들이 아니에요. 프로그래머들입니다. 그 자체로 보시면 이 세 작품들이 모두 비슷해 보여요.
우연발생기에서 무엇인가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컴퓨터예술을 가지고 자기 스타일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만프레드 모어.
만프레드 모어는 출신이 예술가에요. 컴퓨터 예술을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누가 하느냐면 컴퓨터 자체가 PC가 없었습니다. 컴퓨터 자체의 덩치를 보셨죠? 따라서 아무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스나 나케 조차도 허락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근무시간 외에만 사용했습니다.
욕먹을까봐. 그다음에 조금 알려지니까 허락을 해줘요. 몇 월 며칠 몇 시 그 시간동안 사용할 수 있게.
또 하나는 컴퓨터 언어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최고의 과학자들, 그것도 최고의 과학자들 외에는 할 수 없었거든요? 80년대 이후 더는 예술가들도 달려듭니다.
소프트웨어가 개발이 되요. 프로그램을 하지 않고 매뉴얼만 보고 설명만 가지고 - 여러분이 쓰는 페인트 박스나 포토샵
같은 것이 다 그런 겁니다. -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일일이 다 프로그램 해야 하고.. 이러다보니 최초로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가들 중에서 컴퓨터로
들어오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만드레드 모어이고 만프레드 모어의 작품이 훨씬 더 예술적이에요. 느낌이.
이 사람이 화가로서 했던 작업입니다. 이 사람이 음악을 좀 했었거든요. 재즈 뮤지션이었습니다.
딱 보면 음표들의 나열처럼 보이죠? 이건 아날로그. 이런 작업을 하다가 컴퓨터로 넘어오죠. 했을 때도 자신의 작품
경향과 굉장히 비슷하죠? 자기 작품 경향하고.. 컴퓨터로 생성해 낸 것입니다. 악보가 진행해 나가듯 나오죠.
이것도 무슨 다다이스트나 클레의 작품느낌이 납니다.
이건 주사위인데 확장을 해서 보게 되면 완전한 주사위 정육면체가 있죠. 거기서 점점점점 하나씩 면이 사라집니다.
이쪽으로 모이면 모일수록 주사위 완전한 모양이 되고 이쪽은 하나씩 선이 사라지면서 해체가 되는 그런 작업이죠.
이것도 주사위인데 정육면체가 돌아가거든요 선을 나눠 가지고 입체입니다. 애니메이션입니다. 돌아가는 거죠.
잘라가지고 돌아가는 장면을 둘로 잘라서 각각 돌아가는 거죠. 보면 벌써 앞에 했던 작품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이
올 겁니다. 훨씬 더 예술성이 강하죠.
이것도 정육면체 돌아가는 거 했죠? 특정장면만 선으로 잘라서 돌아가는 겁니다, 따로따로.
이것도 역시 잘랐죠? 이렇게 주사위를 이용한 작품이 많습니다.
이 작품이 뭐냐면 6차원입니다. 우리는 3차원 도형만 생각하잖아요. 우리가 감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건 3차원의
도형을 떠올릴 수 있잖아요. 4차원 도형이라고 한다면 벌써 떠오르지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구상적으로 생각을 할 수 없어도 수학적으로 계산은 가능해요. 그걸 묘사한 겁니다.
정육면체다 하면, 6차원이 있는 경우에는 대각선이 9개래요. 우리가 상상이 안가죠. 그걸 작품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 작품도. 훨씬 예술적이죠. 컴퓨터에서 최초로 자기의 스타일을 가지게 된 거 그게 바로 만프레드 모라는 사람 통해
서입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컬러가 들어오게 되고. 이런 것들이 모두 다 6차원을 표현한 겁니다.
보시면 차이가 날 겁니다. 네스, 나케, 놀 겁니다. 모어거고요. 금방 차이가 나죠. 쉽게 말하면 모는 결정의 상당부분을 예술가 자기가 하는 겁니다. 예술가가 하거든요 미적결정을..쉽게 말하면 랜덤하게 도형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생성된 모든 도형들이 모두가 미적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아니에요. 미적 흥미를 끄는 것을 선택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술적 행위가 되는 것이거든요. 컴퓨터가 하는 거 하고 인간이 하는 것이 아직 가시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게 확인될 겁니다.
◆ 컴퓨터 생성 예술의 발달과 한계
▲ 컴퓨터 아트에 대한 발상적 전환
여기서부터 컴퓨터와 예술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컴퓨터 예술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computer generated art입니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가 다, 직접 작품을 다 만드는 것.
또 하나는 computer assisted art, computer aided art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예술이에요.
전자는 컴퓨터가 주체가 되는 거죠? 후자는 누가 주체가 되는 겁니까?
예술가가 주체가 되는 거고. 컴퓨터는 일종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tool 이 되는 거고 일종의 tool에 불과해 지는 거고.
초창기에는 사이버내틱스(cybernactics) 활동이거든요. 인간의 두뇌활동 중에서 가장 시뮬레이션 하기 어려운 게
뭐에요? 인간의 계산 능력을 시뮬레이션 하기는 쉽습니다.
덧셈, 뺄셈, 사칙연산, 로그계산 금방 프로그램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술, 이건 굉장히 복잡한 거잖아요 오랫동안
비합리적 활동이라고 여겨져 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도전 의식을 느낀 거예요.
예술가의 창조적 의식을 시뮬레이션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실험을 해서 이런 관점에서 접근했던 게 초창기의 접근 방식이거든요.
당시로서는 컴퓨터로 그래픽을 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발상 이었죠.
그걸 위해서는 프로그램들이 필요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뭐가 됐냐면 프로그램들이 소프트웨어로 개발이 됩니다.
이게 소프트웨어가 되어 버리면 프로그램이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프로그램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술가들이 달려들게 됐겠죠. 이것이 1986년대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 그래픽 하면, 사람이 컴퓨터를 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걸 상상하잖아요.
그런 게 그렇게 그때부터 변하는데 만프레드 모어〔Manfred Mohr가 결절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되요.
그런 틀의 변화에. 오늘날 컴퓨터 예술 하면 다 뭡니까? 생성예술은 거의 다 없어요.
생성예술의 시도는 1970년대 정도가 되면 다 끊겨 버립니다. 나머지는 다 뭐예요? computer aided art고 실제로 인간
이 주체가 되어서 라고 해서 컴퓨터를 툴로 사용해서 컴퓨터 그래픽 툴로 사용해서 작품을 하는 것으로 변화하는데 그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만프레드 모어라는 겁니다.
▲ computer generated art - 컴퓨터 생성예술
가와노 히로시〔山野 洋〕같은 사람. 일본 사람인데요 지금 살아있습니다. 2월에 만나기로 했는데 제가 자기 책을
번역한 사실을 모르고 있죠, 당연히.
왜냐면 그 당시에 해적판으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왜냐면 그런 책 안 팔리잖아요. 억지로 책 필요하다고 내가 막
강요를 해서 그때 2000권을 찍었을 겁니다.
절판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엔 우리가 저작권 법에 가입이 안 되어 있을 때거든요.
이 사람은 아직까지 생성미학을 이야기 합니다. 컴퓨터 예술, computer generated art 만이, 그 것만이 컴퓨터 예술
이라는 거예요. 나머지는 가짜 컴퓨터 예술 이라는 겁니다.
컴퓨터가 주체가 되는 예술만을 컴퓨터 예술이라고 불러야지 요즘에는 다들 컴퓨터 툴로 요즘에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못하는 것들이 computer를 tool로 사용하면서 컴퓨터 예술이라고 부른다. 짜증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을 하나 보죠. 우리가 지금까지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 추상이죠? 왜? 그래픽 수준이 아직 이랬습
니다. 컴퓨터로 하여금 구상적인 작품을 만든다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건 사실 확률론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요. 마르코프 체인을 가지고도 이정도의 작품은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형상을 그려봐라.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이건 마르코프 체인 모델을 가지고는 완전히 안 되는 겁니다. 이건 변형생성논법 모델이 필요한 거죠.
그런 모델에 입각해서 구상적인 작품을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해럴드 케인입니다.
이렇게 생겼어요. 이사람 지금 30년 동안 계속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거든요. 소프트웨어인데, 그 소프트웨어를
깔면 컴퓨터가 알아서 그림을 막 그려요. 구상적인 그림을 그려요.
오늘날 이 사람의 소프트웨어는 스크린 세이버로 쓰이고 있어요.
스크린 세이버로는 무료구요, 제대로 된 프로그램은 9달러 12센트니까.. 30년 동안 개발한 겁니다.
이런 거예요. 사람 모양이 보이죠? 뒤에 식물들의 모습도 보이죠? 컴퓨터가 알아서 그린 겁니다.
그럼 굉장히 복잡한 완전히 다른 모델이 필요한 거예요. 왜냐 이렇게 형태가 됐다고 하면 컴퓨터가 결정을 내릴 건데,
이걸 뭘 만들 것이냐. 얼굴로 가라. 이렇게 결정을 했죠? 그럼 눈을 그리고 코를 그리고 입이 들어가야 할 겁니다.
그걸 하나 하나 서브루틴을 다 짜서 넣어줘야 하는 겁니다. 컴퓨터가 자기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랜덤하게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때는 컴퓨터가 어떻게 얘기해야 하느냐면 if/than 구조로 가야 하는 겁니다.
만약 이때까지 실행된 것이 if 이것이라면 실행시킬 명령은 A다 B다. 이런 식이에요 than..else 그렇지 않다면 이거다.
if / than / else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항상 가치를 치면서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그때 그때 상황을 보고 아 if, 이거구나 이것을 실행해라.
아 저거구나. 저것을 실행시켜라. 이런 판단들을 컴퓨터가 스스로 내릴 수 있게 그걸 입력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와노 히로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컴퓨터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거예요. 컴퓨터 프로그래밍 자체가. 서브루틴이란 하위 프로그램 하고 위에서
제어하는 메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서브하고 메인이 있는 거죠.
서브루틴 같은 것은 굉장히 간단하고 기계적인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계산기입니다. 딱딱딱딱 치면 쫙 하고 뽑아주죠.
그런데 그 계산기는 자기가 뭘 계산할지 판단 내려요? 안 내립니다. 내가 계산을 해야 할지 판단도 안 내려요.
인간이 치면 결과만 그냥 기계적으로 뽑아줄 뿐이거든요? 그게 바로 서브루틴들이에요.
그 서브루틴들을 잔뜩 해놔야 하는 거에요. 코를 그리는 서브루틴, 입, 눈 .. 그렇게 다 해 놓고 메인 프로그램을 짜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팔이 한쪽이 올라갔다 그럼 다음 팔은 똑같으면 재미없잖아요. 다른 모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팔의 길이와 각도까지.. 그 때 그 때 상태를 보는 메인 프로그램을 짜 가지고 메인 프로그램들이 그 상황을 판단하는
겁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서브루틴으로 짜여진 많은 것들 중에서 특정 프로그램을 실행 시키라고 명령을 내리는
거예요. 대뇌 중추부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메인 프로그램을 짜 가지고 그러니까 굉장히 복잡한 게임이 되는 거죠.
하나 하나 할 때 마다 일일이 다 서브루틴을 다 짜야하고 그것과 메인프로그램으로 연결되는 논리를 짜야 하는 거고.
굉장히 복잡한 거죠.
▲ 변형생성문법을 이용한 컴퓨터 아트
변형생성문법을 이용한 - 왜냐, 신호 차원이 아니라 의미론으로까지 가야 하는 거든요. 모든 것을 신호로 취급하는 것
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분석단위가 언어학과 기호학으로 올라가야 하는 거거든요. 바로 그런 시도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초창기에 보면 이래요. 초창기에는 대충 이런 식으로 그립니다. 아직도 추상적이죠? 추상적입니다.
오징어와 자라 같기도 한데 막연합니다. 아직까지도... 인디언 회화 같아요.
꼭. 아직까지도 색칠을 못했기 때문에 여기를 보면 바닥에 큰 도화지가 깔려 있고 로봇이 있죠? 그게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겁니다. 드로잉을 하면, 색칠은 내가 직접 했던 겁니다.
좀 더 발전하게 되면 자기가 색칠을 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알아서 채색을 할 수 있게끔.
여기 보면 로봇이 보이실 겁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구상도 아니고 추상도 아니고 애매모호하죠?
이게 발전 단계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가면 이런 그림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굉장히 복잡할 겁니다. 이게. 그러니까 지금 뭘 그려야할 것도 지정해주지 않는 겁니다.
컴퓨터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쉽게 말해서 여기 안에 메모리가 있어야 해요.
메모리가 탐색을 해서 뭘 그릴 건지를 컴퓨터가 알아서.. 사람을 그렸다 수염이 있다면 남자죠?
남자에 맞는 또 몸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팔이 이렇게 꺾어 졌다면 다음에는 이렇게 꺾어져라.
다 if than, if than, if than 메인 프로그램과 서브프로그램 이렇게 연결 되어서 정교하게 만들어 나가게 되는 겁니다.
보시면 아시겠죠? 여자구요. 치마를 입고 있거나 이런 것들.. 남자라면 바지로 가라, 여자라면 치마로 가라,
이런 식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기 얼굴 같죠? 자화상 같죠? 이 색채 같은 것도 수채화 느낌이 나게끔.. 이것들도 서브루틴으로 다 짜야 하는 겁
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옵션을 줄 수 있잖아요. 정확히 틀에 맞게끔 색채를 다 넣어라. 아니면 수채화로 듬성 듬성
듬성해라. 라든지.. 이것도 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끔 판단을 해서 알아서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30년씩 걸리는 겁니다. 지금도 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은 아마 그래픽 소프트웨어에 아마도 상당부분 서브루틴을 갖다 쓰면 되는 거거든요 3D, 퍼스펙티브 느낌
이 나는.. 퍼스펙티브가 있죠, 여기? 그런 것들을 자기가 직접 개발하지 않아도 남이 개발한 소스들을 갖다 붙여도
될 겁니다. 그랬을 것 같구요.
이정도면은 내 놓으면 디자이너가 디자인 한 건지 컴퓨터가 개발한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죠.
문제는 뭐냐, 보시면 아시겠지만 얘가 그릴 수 있는 게 2가지죠. 사람, 그리고 꽃, 나무.
그런데 말, 고양이, 개 ... 그릴게 한 두가지냐는 말이죠. 이런 것들을 다 어떻게 그릴 것인지 굉장히 복잡한 작업이죠.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 컴퓨터와 컴퓨터 예술의 성격 변화
사실은 이런 작업은 컴퓨터에서 1단계에 속하는 작업이에요. 쉽게 말하면 아직도 사람들이 그래픽을 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던 시기. 두 번째 인간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게 판단을 내리게끔
컴퓨터를 예술 창작의 주체로 삼았던 시점, 사이버네틱스의 관점, 그런 시점.
오늘날은 뭐냐면 예전에는 컴퓨터가 어디에 속했었냐면 군수산업, 우주, 항공 이런데 속했었잖아요.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가전제품이죠? 사이버네틱스 이런 차원의 관점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tool 이
되어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다 뒷전으로 밀려버린거죠. 최근 예술 작품들은 다 부수적인 겁니다.
대부분 다 software 가지고 예술적 결정은 예술가가 직접 내리는 식으로 하는 거죠.
왜 이런 식으로 컴퓨터 생성 예술이 퇴조하고 왜 computer aided art로 넘어가느냐.
그건 좀 전에 얘기했듯이 컴퓨터의 성격 변화입니다. 옛날에 우주항공, 군사, 이렇게 거대한 컴퓨터가 pc가 되어서
가전제품이 되어버렸거든요. 민수용이 되면서 그런 차원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 가와노 히로시의 논쟁 - 무엇이 컴퓨터 예술인가?
가와노 히로시 같은 경우 재밌는 논쟁입니다.
어떻게 컴퓨터를 가지고 어떤 것을 진정한 컴퓨터 예술이라 불러야하는가.
그래서 그 논쟁을 소개하는데 반대편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더군요. 어차피 마이크 놀의 논리가 이랬잖아요.
특허청에서 자기 이름으로 카피라이트를 받을 때 논리가 뭐였습니까? 컴퓨터가 생성을 한다하더라도 그 생성 엔진
까지 누가 짠거냐? 내가짠 것이다. 그래서 저작권은 나에게 있다. 이런 논리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가와노 히로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당신이 컴퓨터가 예술의 주체가 되었
다고 말은 하지만 그 프로그램조차도 당신이 짠 것이 아니냐. 결국은, 따지면 당신의 예술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
결국 미적 결정은 당신이 내린 것이다. 당신의 것도 실제로는 컴퓨터의 실력으로는 할 수 없는 거다.
당신이 말하는 컴퓨터 예술이라는 것도 computer generated art라는 것도 실은 인간이 주체인 예술이라 봐야 되지
않느냐. 왜, 그건 프로그램이니까. 거기다 가와노 히로시는 뭐라고 반론하느냐면, 그렇게 말하는 인간 사마들은,
인간님들은 어떠신가요? 당신도 자연의 프로그래밍 아닌가요?
당신들도 자연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 물리적인 법칙의 작용을 받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하지 않느냐.
그와 마찬가지 컴퓨터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더라도 컴퓨터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컴퓨터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에 컴퓨터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컴퓨터가 내리는 것이다, 아니다 라고
결정해 버린다면 똑같은 이유에서 인간도 자연에 의해서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내리는 자유의지의
결단도 사실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라고 얘기해야하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논리는 펴고 있죠.
가와노 히로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든 일단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컴퓨터의 성격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1세대, 2세대, 3세대. 가와노 히로시를 비롯하여 이 사람들은 아직 1세대 논리를 갖고 있는 거예요.
2세대만 해도 벌써 이제 더 이상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매뉴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거죠.
그 담에 1996년 이후의 3세대는 더 달라져요. 지금까지는 주로 컴퓨터를 가지고 이미지를 만들었잖아요.
이미지를 만드는 전통적인 회화방법이죠.
1986년에서 1996년 사이에는 소프트웨어가 정말 비쌌습니다. 하드웨어도 정말 비쌌습니다. 매킨토시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설계하는 건축가, 디자이너, 예술가들 일부만이 살 수 있었던 거죠.
1996년 이후부터는 PC 개나 소나 다 살 수 있었던 거죠. 그 비쌌던 소프트웨어 포토샵 같은 것 도 이제 번들로 끼워서
주는 단계죠. 대중들이 막 나와 버려요.
더 중요한 변화는 컴퓨터 성격자체가 interactivity(인터렉티비티)가 강해진 거죠.
네트워크,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컴퓨터 예술의 경향이 단지 이미지만 만드는 게 아니라, 굉장히 많은 영역으로 넓혀진
거예요.
네트아트, 데이터베이스 아트, 소프트웨어 아트, 가상현실, 온갖 것이 막 발생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 중에서 디지털이미지라 하면 아주 작은 일부분이 되버려요.
그런 변화가 1996년 이후에 생겨버린다는 것이죠.
▲ 컴퓨터 생성예술의 한계와 시사점
어쨌든 우리가 오늘 배운 것은, 정보미학, 생성미학이 사람들은 컴퓨터에서 화석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는 이게 다른데서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지금의 사람들이
컴퓨터를 단지 툴로만 사용하고, 일종의 판타지를 만드는 쪽에 주력하고 있는데 제가 볼 때는 이게 다른 맥락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로보틱스 문제입니다. 로보틱스의 문제가 뭐죠? 인간과 똑같은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이미 우리가 뭘 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듣고 이해하고 답변하는 능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하지만 감정모드까지 집어넣었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가장 최고로 어려운 로봇
디자인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의 창의성, 상상력을 가진 로봇의 문제거든요.
그렇게 된다 라는 건 아주 색다른 맥락에서 이 컴퓨터 생성예술이라는 것이 색다른 맥락에서 다시 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이야 아직까지 그저 말 조금 이해하는 그건 아마도 노무현씨가 물어봤잖아요. 로봇한테, “내가 누굽니까?” 그러
니까 컴퓨터가 “잘 모르겠는데요.” 그랬답니다.
다른 건 다 대답했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거죠.. 컴퓨터한테까지 무시를 당하고 로봇한테까지 무시를
당해버렸는데.. 그런 수준이지만 적어도 대답을 듣고 이해하는 그런 수준을 넘어가지고 그게 튜링테스트잖아요.
그 다음에 감정모드. 사람을 딱 보고 얘가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거나, 거기에 따라서 말을 선택하는 그런 능력들..더
나아가지고는 이제 컴퓨터가 창의적인 발상을 하거나 컴퓨터가 정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거나 소위 예술적
감성까지를 로봇에게 집어넣어야 될 때, 로보틱스의 관점에서 이게 언젠가 다시 또한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죠.
오늘날 프렉탈아트 같은 것도 아직 이런 계열에 속하는 겁니다. 프렉탈아트 같은 건 랜덤 생성시키거든요.
몇몇 분야들이 있죠. 아직까지도 이런 기초적인 화석과 같은 1세대 컴퓨터 아트를 사용한 분야들이 있습니다.
▲ 컴퓨터 예술에 대한 미술사적 논의
굉장히 많은 내용인데 주마간산 식으로 해버렸어요. 문제는 뭐냐하면 이 사람들이 당시에는 인정을 못 받았잖아요.
그래가지고 미국 쪽은 상당부분 많이 사라졌습니다.
독일 쪽은 뭐냐하면 몇몇 큐레이터들이 개인적으로 이걸 가지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다 소장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작품으로 소장 한다기 보다도 일종의 도큐먼트로써 소장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유품이 되어서 그대로 미술관으로 그대로 온 거예요.
그래서 그대로 살아남았거든요. 아주 운좋게..몇몇 큐레이터의 꼼꼼함 덕분에 이런 자료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구요.
최근에 들어와 가지고 예술 성격자체가 변화하고 있거든요. 아직까지는 미디어아트라는 것이 위상에서 불분명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미디어아트가 미래 예술의 주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유가 뭐냐하면 사람들의 이미
지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옛날에는 고정되어있는 그림을 사람이 그냥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림이 움직이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죠. 영화가 등장 했을 때.
최근에는 뭐냐면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림을 좋아하는 대중취향이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회화를 좋아하는 성향이 동영상을 좋아하는 성향을 바뀌는 겁니다.
최근에 들어와서 애들이 게임 같은 거 하잖아요. 이거는 interactivity(인터액티비티)가 되요.
내가 자극을 가하면 반응하는 그림이거든요. 그러니까 대중들의 이미지 취향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날 서예 하는 게 일종의 화석과 같이 되어버렸잖아요.
그것처럼 언젠가 타블러 라는 걸 딱 보면 사람들이 하품하면서 옛날에 이런 거 그렸었지..
왜냐 이게 바로 상호작용. 움직이면서 상호작용하는데 사람들이 익숙해진다_라고 하면은 이미지를 대하는 미적취향
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예술가들이 당연히 그걸 반영할 수밖에 없는 거고, 미디어 아트 쪽도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띠지 않겠
느냐. 그 정도는 커다란 이론적 무리 없이 예측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이 사람들이 다시 주목을 받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을 최초로 했던 사람들. 아직 미술사에 없었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미술사를, 이 사람들이 썼던
미술사를 또 다른 종류의 미술사, 기술로서의 예술사, 구성하는 시도가 최근에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컴퓨터 아트의 발전
◆ 컴퓨터 아트의 시작과 발전
▲ 정보 미학의 등장
초기 정보 미학과 생성 미학은 당시 쉐논(Shannon)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바탕으로 형성이 되었는데 쉐논의 이론
은 모든 것들을 다 신호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이 신호라는 것이 굉장히 넓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유전자 수준에서는 유전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요. 또, 그 밖에도 통신의 영역에서 사용이
될 수가 있겠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물리학에서도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현상들이. 아울러 인문, 사회, 과학까지,
굉장히 정보 개념과 커뮤니케이션 개념이 넓게 확산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실제로 쉐논은 상당히 정보 송신의 관점에서 아주 특수한 어떤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그 영역들이 굉장히
넓어졌습니다. 상당히 넓어져갔고, 그런 인제 흐름이 하나가 있었고, 그런 가운데서 정보 미학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거죠. 쉽게 말하면 쉐논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보 개념을 미학의 영역까지 적용시키면 어떻겠느냐 이런
발상에서 인제 미학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 컴퓨터를 이용한 예술
근데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두 가지 문화, 쉽게 말하면 자연과학의 문화하고 인문과학의 문화를 어떻게
통합시킬까 할 때 이제 하나의 툴이 발견되었는데, 발명되었는데, 그게 바로 컴퓨터입니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를 가지고 예술을 한다고 하면 일종의 예술이라는 측면들, 정신문화의 측면이 하나가 들어오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는 그 자체가 수학이거든요.
수학이고, 공학이기 때문에 이 둘이 통합이 될 수 있다, 이런 발상이었겠죠.
그래서 보시면 알겠지만 어떤 경향이 있었냐면 결국 정보 미학이라는 게 1970년대 중반 쯤 되면 이제 포기가 되는데
왜냐면은 강한 환원론이 있습니다.
인문과학, 정신과학 또는 예술, 이런 술어들을 물리학적 술어 또는 수학적인 술어로 번역하는데 따른 어떤 무리가
분명히 있었던 거죠.
우리는 뭐 버코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이런 경향들, 예를 들어가지고 미적 척도라는 것은 ‘C분의 O다, complexity
분의 질서다‘라고 하는 것들도 어떻게 보면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척도가 아니라, 미적 척도가 아니라 단지 질서도의
측정에 불과하다는 거죠. 질서 잡힌 게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측면이 있겠고, 또, 문제가 됐던 것은 또 한편으로는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구별의 문제입니다.
미적인 것이 다 예술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 미학 내에서 이런 구별이 없는 거죠.
어떻게 봐서 좀 그럴 듯해 보인다 하면 곧바로 예술로 선언해버리고, 이런 식의 개념적인 오류 같은 것들이 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그래픽이, 생성미학이죠 쉽게 말하면, 컴퓨터를 이용해서 예술 작품을 생성한다는
실험은 아마 70년대에 넘어서게 되면 시들시들해집니다.
오늘날도 물론 그 후예들이 존재하죠. 오늘날 존재하는 후예들로서 예를 들어가지고 소프트웨어 아트 같은 경우에
쉽게 말하면 소프트웨어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내는 게 예술작품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소프트웨어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바라보는 관점들이, 그런 예술 형태가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아트라고요. 심지어는 이 소프트웨어 아트를 가지고 라이브 퍼포먼스를 하기도 합니다.
지금 C++ 같은 언어가 아니라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 언어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간단한 프로그램 언어를 실시간으로 이렇게 짜서 실연하는 소프트웨어 아트의 퍼포먼스까지 가능한 이런 형태가
있고요.
그 밖에도 또 이제 인공지능 아트 같은 경우, 또 인공생명 아트, 이런 것들이 존재하죠.
음렬이라든지, 화상의 분포, 이런 것들이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번식하고 증식하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것
을 이미지로 출력하거나 아니면 사운드로 출력을 해서 살아서 진화하는 그림을 만들어낸다든지, 아니면 살아서 진화
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이런 방식이라든지.
아직도 여전히 알고리즘 예술이라고 하는 그런 형태로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근데 이제 70년대 들어와 가지고 이게 시들시들해진데 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의 성격 자체가 변했습니다.
▲ 컴퓨터 아트의 초기 단계
그래서 컴퓨터 아트를 크게 우리가 세 단계로 나누면 1956년부터 86년까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단계는 가장 간단한 겁니다. 컴퓨터라는 글자 그대로 계산기를 가지고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이런 발상
이에요. 컴퓨터라는 것은 일종의 계산기였고 거기서 그림을 그린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하기가 굉장히 힘든 겁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기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험을 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당시의, 최초의 컴퓨터
예술가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의 직업이 예술가가 아닙니다. 프로그래머들이에요.
공학자들이고, 엔지니어들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컴퓨터가 굉장히 귀했기 때문에 아무데나 있는 게 아니라 연구
소에 한 대씩 있는, 그 다음에 방 한 가득 있거나, 이런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자체도 많지 않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지고, 컴퓨터에 접근하더라도 또한 컴퓨터를 다뤄야 하거든요.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였고, 바로 이 극소수 사람들 중의 일부가 컴퓨터 예술을 실험을 했던 겁니다.
우리가 대표적인 사람이 허버트 프랑케 이런 사람 봤고요, 또 게오르그 네스, 프리도 나케, 마이클 노올 같은 소위
컴퓨터 그래픽의 3N.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원시적이고 또, 소박
합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요하냐면 이 사람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단 말이죠.
이걸 위해서 이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 이런 실험들을 통해서 뭐가 만들어지냐면,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거죠.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면
인간과 컴퓨터 사이에 인터페이스가 생겨버리는 것이고 굳이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매뉴얼을 가지고,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라는 것이죠. 그런 시대가 이제 80년대에 열리는 겁니다.
▲ 컴퓨터 아트의 발전 단계
이제. 그 다음에 80년대쯤 되면 이미 매킨토시에서 PC라는 게 이미 나온 지 꽤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또 항상 그렇듯이 예술가들, 특히 조형예술가 뿐 아니라 디자이너라든지, 건축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첨단
미디어의 최초 얼리어댑터의 역할을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사용을 해요. 굉장히 당시로서는 아직까지도 하드웨어가 상당히 비싸고, 소프트웨어도 상당히
비쌌지만 우리가 말하는 하이엔드 모델들이죠.
그런 것들을 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인제 이미지 형성의 툴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대충 기점을 보면 1986년도부터인데, 이걸 우리가 흔히 페인트박스단계라고 하죠. 쉽게 말하면 페인트 박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툴들이 소프트웨어의 형태로 개발이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포토샵 같은 경우, 화상처리 소프
트웨어로 이제 개발이 됩니다.
그 전에는 이런 걸 하기 위해서 다 뭐해야 하냐면 프로그래밍을 직접 해야 했었는데 이제는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되는
거죠.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이제 그걸 끌어들여가지고 자기의 작품을 만드는데 활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컴퓨터가 비쌌습니다. 하드웨어도 비쌌고요. PC라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프트웨어도 상당
히 비쌌습니다. 오늘에야 뭐 페인트박스라든지 포토샵 같은 거 대충 하나 사면 끼워주잖아요. 번들로. 당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비싸고요. 지금도 아마 상당히 비싼, 대중들이 이미 어떤 소프트웨어를 사게 됐다, 대중화
됐다, 그러면 아마 제가 볼 때는 기술적으로 3~4년 뒤진 겁니다, 그게. 그 누군가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지금 이미, 3~4년 앞선 어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죠.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1986년부터 96년까지는, 10년 사이에는 대개 아티스트들이 끼어들어요. 그러니까 주력이 바뀌는 거죠.
그전까지만 해도 엔지니어들이 만든 것들은 사실 예술성은 상당히 떨어집니다.
왜냐면 그 프로그램을 직접 하는데 의의를 두었기 때문에 예술성까지 발휘할 여유가 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 자체가 예술 쪽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잘해야 딜레탕트 수준이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86년 이후로는 정말로 제대로 훈련을 거친, 예술적 훈련을 거친 예술가들이 들어와서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내고, 그때부터 우린 비로소 상당히 예술적 가치를 갖는 작품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사실 1956년부터 또 86년까지 사이의 작품들은 많이 보존이 안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왜 그러냐하면 이 사람들이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인정을 하지 않았고, 또 그들이 출력, 오늘날이야
출력기술도 엄청나게 발달 되었지만 아카이벌 퀄리티, 쉽게 말하면 작품으로서 보존할만한 퀄러티를 갖는 출력 장치
도 많은 경우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일종의 도큐먼트로 남아있거나, 도큐먼트로 남아있지도 않은 상태가 되
었는데, 이제는 아카이벌 퀄리티를 갖고 있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엡손 프린터 같은 것들이 등장해가지고 작품과
같은 퀄러티를 갖는, 이제 출력이 가능해지면서 본격적인 예술이 시작된 겁니다.
▲ 컴퓨터 아트의 한계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뭔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뭐냐면 뭔가 좀 달아나버렸다는 느낌이 좀 들어요.
그건 뭐냐면 초기 컴퓨터 예술은 이 사람들이 프로그래밍을 했거든요.
가장 디지털이라는 게 가장 핵심적인 게 바로 뭐냐면 문자, 숫자를 쳐가지고 그걸 이미지로 실현하는, 문자와.. 알파
뉴머리코드의 변형, 알파 뉴머리코드를 가지고 거기다 이미지를 얹어내는 이런 측면들. 쉽게 말하면 ‘내가 프로그램
이렇게 짜면 이미지가 어떻게 나올 것이다’ 이런 것의 어떤 직접적인 연결들. 그런 것이 굉장히 매력적인데, 그게
이제 사라져버리는 거죠. 왜냐면 프로그램을 몰라도 이미지를 만들 수가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죠. 쉽게 말하면 초기의 생성 미학 같은 경우에는 컴퓨터가 예술적인
주체가 되거든요, 상당 부분. 많은 경우 미적 결정을 컴퓨터한테 맡겨버리는데 이제는 철저하게 컴퓨터가 뭐가 되는
겁니까.
예술가가 미적 결정권을 쥐기 때문에 컴퓨터는 그 툴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죠.
컴퓨터가 예술성을 갖는가, 이런 것. 쉽게 말하면 인간의 창조성을 기계를 통해 시뮬레이션 한다는 이런 이론적인
매력이 상당히 떨어져버린 겁니다. 오늘날까지도 아직까지도 가와노 히로시 같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주장
을 하죠. “요즘 말하는 컴퓨터 예술을 가짜다.” 왜? 그건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거고, 컴퓨터를 툴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가짜고 진짜 컴퓨터 예술은 그 미적 결정을 컴퓨터한테 맡겨버린다는 겁니다.
프로그램은 인간이 했지만 프로그램 자체, 프로그램 내의 미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 의지까지도 입력이 된,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컴퓨터 예술이라는 것이고요.
그에 반해서 소위 우리가 이제 둘로 나눈다면 컴퓨터 제너레이티드 아트(generated art) 컴퓨터가 생성을 하는 예술
작품과 컴퓨터를 그냥 도구로만 사용하는, 컴퓨터 어시스티드 아트(assisted art) 라고 했을 때 86년 이후로 이제
거의 컴퓨터 생성 예술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컴퓨터 어시스티드 아트가 이제 주력으로 등장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가짜다. 이건 가짜 컴퓨터 예술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게 1986년도의 상황입니다.
▲ 아날로그와 디지털, 디지털 매체의 자각
그리고 1986년도에서 96년도까지 그 10년 사이에는 컴퓨터 예술의 특성들을 가만히 보면 어떤 특성이 있냐면, 이게
디지털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이미지를 보면, 디지털 이미지를 강조 한다기 보다는 가능한 한 아날로그를 흉내 내려고 해요.
왜 그러냐면 어떤 예술이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면 이미 제도권에서 설정해 놓은 낡은 기준에 맞아야 되거
든요.
그러다보니까 사실상 그 컴퓨터 아트라는 것은, 미디어 아트라는 것은 사실 주변적인 현상입니다.
전체적, 예술적인 풍경 내에서 상당히 주변적인 현상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당시로서는 오죽했겠냐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날로그로 그린 그림처럼 보이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디지털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기 보다도, 오히려 아날로그적 속성들을 내세움으로써 “우리도 작품이다”
이렇게 주장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작품이야, 이렇게 주장한다는 거죠.
하지만 1986년에서 뒤로 점점 가면 갈수록 이게 아날로그로 만든 이미지하고 디지털로 만든 이미지가 차이가 분명히
나거든요. 우리는 금방 아실 겁니다. 디지털 느낌이라는 게 뭔가 매끈한 이미지들 있죠. 매끈한 이미지들. 질감이
없고, 뭔가 매끈하고. 그래서 뭔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이미지인데, 바로 그런 것들을 오히려 강조하는,
쉽게 말하면 디지털이 자기 자신의 매체성에 대한 자각에 도달하는 거죠 서서히.
굳이 아날로그로 할 수 있다 하면 굳이 뭐 하러 컴퓨터를 이용해서 하느냐는거에요.
한마디로. 예를 들어가지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말 회화처럼 뽑을 수가 있거든요. 수채화처럼 그릴 수 있거든요.
근데 그럴 바에는 정말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는 게 비용도 덜 들고 시간도 덜 들어요. 그럼 굳이 컴퓨터로 하려고
하면 굉장히 많은 소프트웨어적인 지식과 거기다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 노가다에 가까운 수작업들이 필요한데,
뭐 하러 그 짓을 하나라는 거거든요. 그럴 바에는 아날로그를 가지고 할 수 없는 쪽으로 나가자, 라고 하면서 후기로
가면 갈수록 디지털스러운 이미지가 강하게, 디지털임을 그대로 주장하는 그런 경향들을 보이게 되는 거죠.
그건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뭘 흉내 내요? 연극을 흉내 내죠? 사진도 처음 나왔을 때 뭘 흉내 냅니까?
회화를 흉내 내죠? 그러다 어느 정도 지나면, 아니다, 사진은 회화가 아니다해서 사진의 고유성을 찾아가고.
처음에 영화는 연극 막 올리듯이 막이 내려가면 커트, 이랬거든요. 처음엔 그렇게 찍습니다.
그래서 첫 초기 영화 같은 경우에는 커트가 뭐랑 일치 하냐면 막이 내리는 거랑 일치하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다, 그런 인식을 가지고 영화와 고유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트도 처음에는
아날로그 회화, 아날로그 드로잉, 또는 아날로그 조각 이런 걸 흉내 내다가 나중에 후기로 가면 갈수록 훨씬 더 강하게
디지털 자신의 매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디지털의 매체성을 부각시키는 예술
그러면 1996년부터는 완전히 또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왜냐하면 1996년부터 우리가 이제 주목해야 될 것은 컴퓨
터의 성격이 또 다시 변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1956년부터 변하기 시작했던 것은 뭐냐면 컴퓨터가 단지 계산기가 아니라 컴퓨터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화상을 처리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이었죠.
1986년도에는 그걸 갖다가 프로그래밍이 아닌 무얼 위해서,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그걸 할 수 있게
됐다라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전문가가 아닌, 컴퓨터 전문가가 아닌, 컴퓨터 공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예술가들까
지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측면이었다는 말입니다.
1996년에 들어가면 소위 그 디지털의 특성이라는 게 전면화됩니다. 그럼, 뭐냐면 world wide web, www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통신매체가 되는 겁니다.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어버리거든요, 이게.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게 되는
거죠.
그 전의 컴퓨터는 고독하게 뭐였습니까, 계산기였습니다. 또는 문서작성기였어요.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그 다음에 이제 뭐가 되는 겁니까, 컴퓨터가 영상을 처리하는 그런 장치였죠.
그런데 이게 전화선하고 연결되고, 모뎀으로, 그 다음에 초고속망이 깔리면서 완전 통신수단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전엔 아날로그로서는 불가능했던 그런 예술들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웹아트 같은 경우, 오로지 웹상에만 존재하는 아트겠죠. 그 다음에 넷아트, 네트워크를 통해서
아트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수많은 유저들이 한꺼번에 실시간으로 만나서 작품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한다든지,
이런 것들. 이런 가능성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한마디로 디지털이 갖고 있는 그 특성들이 전면화되는 것이 바로
96년 이후라는 겁니다.
96년까지, 86년에서 96년까지만 해도 주로 컴퓨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그 정도에요.
또는 컴퓨터를 가지고 조각을 한다. 하지만 컴퓨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조각을 한다라는 것은
작가가 컴퓨터 한 대 가지고 방 안에서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죠? 고립된 겁니다.
그런데 이제 컴퓨터가 고립된 게 아니라, 망으로 네트워크로 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 거죠. 1996년도부터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멀티미디어의 특성들이 다 드러납니다.
컴퓨터가 이제 모든 매체들을 다, 컴퓨터는 메타 매체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영화를 볼 수 있죠, 또 그것으로 뭘
할 수 있습니까, 그것으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가 있고, 조각을 할 수 있고,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의 성격을 갖고 있고요.
그 다음, 네트워크입니다. 다 연결되어서, 소위 원격 현전과 같은, 원격 텔레 프레전스 같은 것들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되는 거구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몰입, 쉽게 말하면 가상현실이라고 그러죠. 가상현실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96년
이후로는 사실 미디어 아트를 보게 되면 기존의 장르들을 디지털로 바꾸어 놓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
으로는 디지털이기 때문에 비로소 등장한 장르들이 있어요.
디지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그런 장르들, 좀 전에 얘기했던 데이터베이스 아트, 소프트웨어 아트라든지, 넷
아트라든지, 웹 아트 같은 것들, 또는 가상현실, 이런 것들을 바로 그 디지털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술 장르들이거든요.
1996년 이후로는 그게 막 이제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디지털 아트가, 컴퓨터 아트가 본연의 자기 매체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시대가 되어버린거죠.
그 다음 또 다른 하나의 변화는 뭐냐면 1996년도 이후부터는 컴퓨터가 이게 굉장히 대중화되어서는 쉽게 말하면 전문
가들이 사용하는 툴이 아니라 뭡니까, 가전제품이 되어버려요. 사실 컴퓨터라는 건 뭡니까, 요즘, 재미있게도 뭐냐면,
이 컴퓨터라는 것은 이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놀이의 도구하고, 노동의 도구가 같아져요.
사람들은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하지만 요즘은 컴퓨터를 가지고 놉니다. 이게 일종의 필수불가결한 가전제품이 되어
가지고 대중들이 그걸 다 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미지를 처리하고, 이미지를 가지고 장난하고 이러는 것들이
소위 웹 2.0 시대죠. 그 이후로는 대중한테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 컴퓨터를 가지고 이미지를 처리한다, 또는 사운드를 처리한다, 이게 이제 과거에는 소수 예술가들만의 일이었
다면 이제, 대중의 일상이 되어버렸다는거죠.
그러니까 완벽하게 디지털이 갖고 있는 민주주의적 가능성이라는 게 완벽하게 실현이 되는 거죠.
96년도 이후로는. 그 다음에 디지털이 갖고 있는 멀티미디어의 속성들, 이런 것들이 전면화 되는게 바로 1996년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대입니다.
▲ 디지털 시대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시기를 둘 수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최근에는 포스트 디지털 이어러(post-
digital era)라고, 디지털 시대도 지났다는 거예요. 디지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디지털 시대가 지났다
라는 것은 더 이상은 디지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디지털이 아닌 게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초기에 아날로그 매체가 지배하던 시대에 디지털이 나왔을 때는 디지털이 자기 매체의
고유성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의식을 강하게 해요. ‘나는 왜 쟤랑 다를까’, 그래서 그 열등의식 때문에 아날로그를
흉내 내려고 하다가 나중엔 자의식을 갖고 ‘아니다, 흉내 낼 필요 없다, 내 길을 가겠다’, 이런 의식이 존재하거든요.
하지만 이제 전체가 다 디지털화 됐을 경우에는 그런 자의식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차이가 이제 사라져버린다는거죠. 그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뭐냐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태어나가지고 본 게 디지털 밖에 없는 그런 시대가 등장하는 겁니다. 아마 지금쯤 미대에 들어와가지고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에 뛰어드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아날로그 체험을 안 하고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컴퓨터 게임하고 자라가지고. 어려서부터 컴퓨터 포토샵을 하고, 이래가지고 미대를 와버렸다는 거죠.
아날로그의 기억이 전혀 없는, 완벽하게 디지털 문화에서만 자란 세대가 등장한다라는 거죠.
그랬을 경우에, 이 세대들 같은 경우에는 아날로그에 대비되는 디지털의 매체적 특성, 이걸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아마 이제 그런 단계가 이제 포스트 디지털 이어러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 디지털을 이용한 아날로그 재현
자, 이제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점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이 가능하겠죠.
좀 전에 우리가 그런 얘기를 했죠. 하나는, 아날로그를 따라가는 것과, 또 하나는 아날로그와 선을 분명하게 긋고,
디지털 고유의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거죠.
철학적으로 보면 이제 여기서 두 가지 입장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빌렘 플루서 같은 사람이에요. 빌렘 플루서는 뭐라고 얘기 하냐면, 가상과 실제 사이의 구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라고 얘기합니다.
이 사람은 디지털을 일종의 목적론이라고 봐야 되나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갭이 점점 사라지는 것으로 이렇게 파악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언젠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갭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때 세계는 가상만큼 그 때 현실은 가상만큼 도깨비
처럼 유령스러워지고, 그 때 가상은 현실만큼 딱딱해질 것이다. 뒤섞여 버린다는 거죠.
이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하는데 이제 이론적인 바탕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메우는 방법들
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진의 예를 들어보면, 예컨대, 디지털 사진과 아날로그 사진, 디지털화는 우리는 픽셀로 처리하기 때문에 픽셀의
거칠음으로 아마 인식이 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록스에서, 제록스 로고 있잖아요, X 부분을 픽셀로 처리했죠. 이런 것들.
왜냐면 그 메모리의 문제가 있고, 또, 처리 속도의 문제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디지털로 아날로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는 한동안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메우는 방법은 뭐냐, 촘촘하게 배치하는 거죠.
아날로그하고 디지털은 원리가 달라요, 이미지 만드는 원리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같은 경우에는 이미지를 만드는 원리 자체가 선이에요.
우리가 그러잖아요. 그림을 그릴 때 드로잉을 하잖아요. 드로잉을 한 다음에 보통 채색을 하잖아요. 이게 이제 아날
로그적 그림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디지털은 특히 그 이전에 뭐, 텔레비전부터 이미 그랬지만 전자매체 같은 경우, 특히 디지털에 들어와가지고
선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단위가 선이 아니라 그냥 점입니다. 픽셀이거든요.
그러니까 점은 단절돼 있어요. 선은 이어져있지만 점은 단절돼 있단 말이죠. 이 단절된 점을 잇는다는 거예요.
잇는 방법은 뭐냐, 촘촘하게 배치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어떤 그 단위 화상, 단위, 한 단위 내에 대개
500만 픽셀정도면 그렇게 출력을 했을 때 사람이 아날로그로 찍은 것인지 디지털로 찍은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고들
흔히 합니다.
대게 500만 픽셀 정도면 인간이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거죠. 물론 필름을 가지고 대형 출력을
하거나 이럴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디지털이 상당히 아마 딸릴 거예요. 엄청난 정보량, 그 아마 당해내지를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미 벌써 우리가 몇 년 전에 1000만 픽셀을 다 도달 했거든요.
요즘 뭐 거의 카메라는 적어도 사진의 영역에서는 상당부분 차이가 사라졌습니다.
단적인 예는 코닥이라든지 아그파라든지. 아날로그 필름을 만드는 회사들이 이제 망해가는 거예요.
그러니깐 쉽게 말하면 셀룰로이드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셀룰로이드가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필름 사는 사람들 없죠,
다 디지털로 찍는단 말이죠. 사진작가들 뿐 아니라, 물론 아직도 고집스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은 역시 필름으로 찍어야 돼’, 이런 사람들. 그건 뭐냐면 CD 나오기 전에, ‘역시 녹음기는, 뭐야 ,음악은 LP로 들어
야해’, 그 당시에는 꽤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요즘 있어요, 없어요, 거의 없죠.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초기 단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사실은 이제 완전 거의 넘어갔다고 보면 됩
니다. 이건 이제 그만큼 메워졌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여길 보면, 세계를 뭐로 보느냐, 컨티뉴이티(continuity)로 보느냐, 디스컨티뉴이티(dis-continuity)로
보느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아날로그 세계는 컨티뉴이티에요. 쉽게 말하면 세계는 연속량입니다.
반면에 디지털은 0과 1, 딱딱 떨어지거든요. 디스컨티뉴이티입니다.
이 아날로그의 컨티뉴이티와 디지털의 디스컨티뉴이티, 이것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 빌렘 플루서는 이미 17세기에
이론적으로는 계발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 미분하고 적분이에요. 미분, 적분이라는 거죠.
우리가 세계를 갖다가, 세계를 세계 진행을 예측하고 또는 세계 진행에 기술적으로 개입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세계를
수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하다못해, 이명박씨처럼 무식하게 삽질을 하다 할지라도, 운하 판다고. 운하의 수심 같은 것 다 수치로 바꾸어 놓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근데 자연을 수학화 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그거에요. 자연은 연속량인데 반해서 수는 단절적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깐, 자연에다가 수를 갖다 대면은 이 수의 빈틈으로 자연이 빠져 나가 버려요.
남김없이 파악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 때, 그 수와 수의 사이를 메우는 방법이 바로 무한히 미소하게 잘라 나가고, 또는 무한히 붙여 나가는, 미분, 적분의
방법이었다는 거죠.
그게 이미 원리적으로 발명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수학화 하는 게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컴퓨터의 등장이라는 것은 또 다른 한편으로 뭐냐면, 옛날에는 미분, 적분 손으로 계산했잖아요, 근데 웬만큼 유의미한
계산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연필 들고 시작하면 평생 걸려도 안 끝나요,
이 계산이. 그런 계산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컴퓨터가 등장함으로써 사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갭을 메워주는
과제는 이론적으로도 17세기에 완수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실천적으로도 완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 디지털을 이용한 예술들
▲ 컴퓨터 네트워킹
그 다음에 최근에는 이제 병렬 분산형이라는거 있죠. 컴퓨터 여러 대를 네트워크로 이용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라든지,
그런 방법이라든지. 왜냐하면 컴퓨터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선형적인, 플롯차트에 따라서 움직이거든요.
이게, 쭉 가다 피드백이잖아요. 예스, 노, 그 다음에 다시 올라가고, 이런 식인데.
인간의 사고라는 건 그게 아니라 굉장히, 뭐랄까 공간적으로 무차별적으로 랜덤하게 액세스(access)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제 비선형적인 컴퓨터 네트워킹 같은 것들, 그런 기술들을 이제 개발하고 있거든요.
▲ 디지털에 대한 빌렘 플루서의 견해
근데, 이제 문제점은 그게 아니라, 데카르트는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데카르트 같은 경우는 원자론을
부정한 사람이에요. 데카르트는 원자론을 부정했습니다.
세상은 원자로 나눠져 있는 게 아니라고 하거든요.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이에요.
모든게 선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거죠.
하지만은 이 사람, 빌렘 플루서는 뭐라고 하냐면 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이미 무너졌다는 겁니다.
왜, 오늘날,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원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원자도 더 쪼개가지고 미립자를 이야기한다는
거거든요.
우리가 볼 때는 다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이것들이 뭐로 되어있는 것 입니까, 미소한 미립자
의 조합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세계하고 그 다음에 디지털하고 원리적 차이는 애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쪽도 입자고 이쪽도 픽셀 아니냐. 입자를 조합해가지고 뭔가 다양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생성
된다라고 하면, 픽셀을 조합해가지고 또한 모든 것들을 생성해 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한 빌렘 플루서의 견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지금 전송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감각 중에서 쉽게 두 가지입니다.
시각정보하고 뭐에요, 청각정보만이거든요. 거기다가 이제 뭐 최근들어가지고 터칭글라브라고 해서 촉각정보를
전달한다던지, 심지어는 최근에 들어서는 맛과 냄새, 이런 식으로 그, 전송이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아날로그
의 충실성을 디지털이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빌렘 플루서가 볼 때 이건 계속 시간의 문제라는 거죠. 언젠가 계속 따라갈 것이고, 정말로 그, 촘촘함들, 쉽게
말하면 아날로그의 그 촘촘함, 디지털의 그 느슨함. 이 사이의 차이는 점점 사라질 것이란 거죠.
그럼 결국 어떻게 되느냐. 이 사람이 얘기할 때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가상과 실제의 차이라는 것은 질적 차이가 절대 아니라는 거죠.
보세요. 어차피 실제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도 픽셀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점, 미립자로. 그 다음에 가상으로 부르는
이쪽, 디지털도 역시 픽셀로 이루어졌다는 거죠. 원리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질적 차이가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가상과 실제의 차이라고 우리가 흔히 부
르는 것은 뭐냐면, 질적 차이가 아니라 양적 차이라는 것이죠. 뭐냐 해상도 차이라는 것입니다.
해상도 차이라는 것이죠. 밀도의 차이라는 것이고.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그 밀도를 높여 나가면서 가상과, 디지털
가상과 아날로그 현실 사이에 차이점은 점점 줄어들고 구별할 수가 없게 되는 단계, 거기에 이르게 되면, 그 때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그 때의 현실은 가상처럼 유령으로 변할 것이며, 가상만큼의 유령으로 변할 것이고, 그 때
가상은 현실만큼 딱딱해 질 것이다.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 이게 빌렘 플루서의 생각입니다.
플루서가 이래가지고 도대체 뭘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아마도 여러분들 스타트랙인가 보면, 공간
하잖아요, 스캔 미(Scan me)하면 한사람 찌익 스캐닝해가지고 다른 장소로 옮겨 놓잖아요. 그런 것들, 전송들,
이런 것들은 완전 입자 구조를 다 바꿔가지고 스캔해서 그걸 다시 배열해가지고 저쪽에다가 옮겨 놓는.
지금 물리학에서는 입자, 아주 미립자 수준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하나의 미립자를 저쪽으로 옮겨 놓는 것. 전송하는 것. 그 다음에 요걸 하나를 옮겨서 세 군데에 동시에 나타나게
하는 것. 여기까지 가능하다고 하는데, 뭐 세포 하나를 옮기는 데 지금 시간으로는 10만년 걸린다나 뭐, 그런 사소한
기술적 문제는 있지만. 거기까지 이야기하는 건 모르겠습니다.
빌렘 플루서의 말을 굉장히 강하게 해석하면 거기까지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언젠가, 실제로 빌렘 플루서가 그런 말을 합니다. 생물학도 옛날에는 동물 분류에서 쭉 내려왔잖아요. 쭉 내려와서
지금 어디까지 왔냐면 세포 생물학까지 갔다가 이제 어디까지 갔냐면 분자 생물학까지 갔거든요. DNA 이런 거 까지.
물리학도 옛날에는 그냥 그렇죠.
뉴턴 물리학만 해도 당구장 물리학이잖아요. 이러다 최근 어디까지 갔냐면 완전 미립자까지 갔단 말이죠.
모든 영역에서 다 미소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뭐냐면 지금도 공학에서는 어디까지 갔습니까, 기계 만드는 수준에서 나노수준까지 갔단 말이에요.
미세조작이 가능해 진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스티븐 홀츠만의 견해
반면에 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첫 번째 스티븐 홀츠만이라는 사람의 『디지털 모자이크』라는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천구백구십 몇 년에 나왔는데 94년에 나온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4년에 나왔습니다. 바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디지털이 아날로그와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했을 때 있죠. 바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책에서 이 사람이 주장하기를 디지털 기술로 아날로그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가 할 수 있는 길을 허겁지겁 따라가서 하는 게 아니라 아날로그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가야
된다. 그러니깐 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데에는 아마도 모더니즘 미술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
클레멘트 그린버그라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이제 스티븐 홀츠만은 재스퍼 존스의 예를 드는데 재스퍼 존스보다 더
내려가다 보면 이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입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에서, 또는 예술에서 모더니티의 문제, 뭐가 현대적이냐, 그 기준을 뭐라고 하냐면 자기
지시성으로 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칸트가 세계를 탐구하기 이전에 세계를 탐구하는 수단이었던 이성부터 비판하잖아요. 그게 바로 현대성,
현대적 태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회화에서도 회화적인 재료를 가지고, 회화적인 도구를 가지고 형과 색채
를 가지고 바깥에 있는 자연을 탐구하기 이전에 형과 색 자체를 탐구하는 것. 그걸 점검하는 것. 모더니티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지시성이에요. 또는 반성성, reflexity 라고 하죠,
반성적인 것인. 이걸 갖고 현대 회화의 특성으로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자연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가 자기 매체성을 인식하고 자기 매체성을 탐구하는, 매체성을
들어내는 가상이라는 느낌보다는 이건 그림이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라는 건 3차원 공간에 환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자연으로 착각이 되거든요. 그럼 환영이 없고, 회화는 몇 차원 예술이냐면 3차원 예술이 아니라 2차원 예술이다,
평면 예술이다, 그러니깐 평면성을 강조하는 플랫니스(flatness)를 강조합니다.
회화는 회화여야 된다. 회화는 회화 자기 자신의 매체성을 투명하게 사라져서 자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매체성을 들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현대 회화다, 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깐 디지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이 사람은. 그걸 받아들여가지고 디지털도 자기
자신을 디지털 기술, 디지털이란 느낌을 사라지게 하고 아날로그 자연의 환영을 준다라기 보다도 디지털의 특성을
그대로 강하게 드러내라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온당한 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거죠.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1
디지털로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했던 것, 아날
로그와 디지털의 차이, 그걸 갖다가 이미 우리는 흔히 결성태로 파악을 하는 겁니다.
즉,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못해, 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 결성태를 미학적 장점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이 사람이 미스트(myst)라는 게임 얘기를 하거든요. 미스트라는 게임을 딱 보게 되면 3차원 공간의
환영이 있는데 이게 아날로그랑 전혀 다릅니다.
어떤 거냐면, 현실감이 안 나요. 왜냐, 아날로그로 딱 찍었을 경우에는 저 멀리서 보이는 것 색원근법에 의해서 뭐가
돼요 이게, 색원근법에 의해서 흐려 보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은 선명해보이거든요. 근데 디지털은 그걸 못하거든요. 왜냐면 공기 중에 있는 그 입자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아직 그게 안 되니까 미스트 게임을 보면 멀리 있는 거나, 여기 있는 거나 거의 같은 선명도를 가지고 나타나거
든요. 그러니까 이게 묘한 공간감을.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된다는거에요.
아날로그를 따라가지 못한 결함이 아니라 게이머들은 오히려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게. 묘한,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
에 와 있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는 거죠.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2
또 다른 한편으로는 뭐, 그런 것도 가능할 겁니다. 보시게 되면 CG같은 것 할 때 역시 매끈하잖아요, 이렇게. 디지털의
모자이크적 성격은 뭐냐면 특히 매핑할 때 나타나거든요. 매핑을 하려면 하나하나 점마다 다 색깔을 다 다르게 해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하니까 보통 폴리곤 단위로 하잖아요.
폴리곤 단위에서 한 폴리곤은 같은 색으로 칠해 버리니깐 결과적으론 매끈하게 나타나서 플라스틱 표면처럼 나타납
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최초에 디지털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다 뭐에요, 로봇, 아니면 곤충, 아니면 또 뭐죠, 로봇과 곤충과
장난감. 토이스토리 이런 거잖아요. 앤츠, 토이스토리. 그리고 사람이 나오면 대머리. 이런 거란 말이죠. 왜냐하면 머리
카락 하나하려면, 머리카락이 10만개잖아요. 머리까락 하나하나를 다 잘라야 해요, 요렇게.
그래서 그걸 시뮬레이션 해야 되거든요, 불가능하거든요.
그랬는데 그것이 오히려 결함일수도 있지만은 장점으로 바꾼 겁니다, 토이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3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의 매끈함들, 예컨대 카림 라쉬드 같은 사람, 디자이너 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 디자인 할 때, 디지털이 갖고 있는 매끈함, 금속성을 표현한 듯 이런걸 그대로 받아들여 디자인의 원리로
삼아버리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 작품을 딱 보게 되면 와~ 가상 세계에 있는 물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한 느낌을
준단 말이죠.
새로운 예술 예술언어를 만들어 낸다는 거죠. 그런 거라든지. 또는 디지털로 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거예요.
해상도가 낮다 낮다하는데, 결코 해상도가 낮지 않습니다, 디지털이. 어떤 의미에서냐면, 디지털로는 무한 줌인과
무한 줌아웃이 가능해요. 아날로그로 찍은 사진은 계속 줌인해가지고 들어가게 되면 나중에 어떻게 되요, 흐려지죠.
근데 디지털은 이게 복제이미지가 아니라 생성이미지거든요. 쑥 들어가도 계속 새롭게 생성하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런 거 아마 많이 보셨을 거예요. 우주 공간에서 쭉 들어가요. 은하계가 나오죠. 은하계에서 태양계로
들어가죠. 태양계에서 지구로 옵니다. 지구에서 미국으로 가죠.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로 가고, 플로리다에서
쭉 가가지고, 뭐 어디어디 마이애미, 그 해변에 사람이 누워있죠, 그 사람 딱 부딪힌 다음에 그 사람 피부로 들어가서,
피부에서 세포로 들어가고. 쭉 들어갈 수 가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거꾸로 뺄 수도 있고. 왜냐하면 생성해서 해주면
되기 때문에. 또 실제로 그런 작품들이 있습니다, 미디어 아트에서도.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치는데 처음에는 점점
작아져요. 그리고 주변에 다른 물고기들이 나타나죠. 근데 이 물고기 떼가 됩니다.
근데 이 물고기 떼가 나중에 뭐가 되요, 하나의 거대한 물고기가 되요. 그 다음에 그게 또 작아지면서 점점 이렇게
무한히 간다든지. 이런 게 아날로그로는 불가능하거든요. 디지털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4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게 있습니다. 아마 아날로그로 시뮬레이션 할 때 중력이 없다는 것.
아마 지금도 CG같은 거 보면 굉장히, 킹콩도 굉장히 잘 만들었는데, 그렇잖아요. 털이 있는 동물을 완전히 CG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가 동작하는 걸 보면 약간 방정맞아요. 중량감이 떨어지
거든요. 이게, 물론 그거 할 때 중력 엔진 같은 거 다 계산해서 하는데 아직까지도 중량감이 떨어집니다.
여러분들 스타워즈에서 로봇들 걸어가는 거 보세요. 이게 금속인데 하나도 무게감이 안 느껴지거든요. 뭐 이런 측면이
있거든요. 중량감이 없다라든지. 또 이런 것들을 장점으로 전환할 수가 있어요.
오히려 중력이 없기 때문에. 어느 예술가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물고기들이 하늘로 떠가는 거거든요. 하늘로 막 물고기
떼가 지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거거든요 공중을 헤엄쳐 다니는 거죠. 근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현실에서 그건 설치
불가능해요. 왜, 중력이 있기 때문에. 근데 디지털로 딱 들어가니깐 그게 가능하게 됩니다, 그게. 보여 줄 수가 있거든요.
그런 방식이 오히려 단점을 뭐로 바꾸는 겁니까. 장점으로 바꿔 놀 수가 있다라는 거죠.
이게 바로 이제 스티븐 홀츠만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티븐 홀츠만의 글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그게 불가능
하다는 거예요. 디지털로 그것을 메운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 사람 말을 그대로 읽을게요.
흔히 우리가 디지털을 가지고 자꾸 현실의 리얼한 시뮬레이션 쪽으로 자꾸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그걸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라고 합니다. 그건 왜냐, 불가능하다는거에요.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애초에. 연구에 따르면 실제세계와 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시뮬레이션을 만들려면 초당 85프레임.
지금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게 24프레임이에요, 이게. 근데 이게 85 프레임으로 돌아가야 하고요. 그 다음에 백만 곱하기
백만이에요. 이게 얼마입니까. 이거 계산이 안 나오거든요. 백만 곱하기 백만 픽셀이어야 하고요. 그 다음에 픽셀 당
1600만 컬러를 배정해야 하고, 그 다음에 좌우로 235도, 상하로 100도의 시각 영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갖다가 컴퓨터로. 컴퓨터는 메모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비트의 한계가 있거든요. 비트의 한계라는 건 뭡니까.
메모리의 한계이고요. 그 다음 또 다른 하나는 처리 속도의 한계입니다. 처리 속도에서 한계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액세스 속도. 얼마나 빨리 액세스 할 수 있느냐. 이런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한계를 뚫고 이걸 한다는 것을 ‘그저 언제가 기술이 발달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 디지털이 갖는 한계
한편으로는 사실 우리가 뭐 요즘 나오는 디지털 영화들, 또는 보시면 알겠지만 특히 베오울프라든지 이런 거 보시면
알겠지만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따라가는데 굉장히 많은 진척을 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럼 언젠가 아날로그와 똑같아지지 않을까. 근데 이 사람이 볼 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왜냐, 기술만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즉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하는 기술이 발전
하면 발전할수록 그에 상응해서 또한 발전하는 게 뭐냐면 대중들의 기대 수준이에요. 같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저도 처음에 스타워즈 1970 몇 년에 그걸 보고 놀랐거든요. 쇼킹했거든요. 근데 지금 여러분 가서 보세요.
다 보여요. 티가 팍팍 납니다. CG라는 게 3년 전 영화를 한 번 보세요. 벌써 아니거든요.
금방 그렇게 사람들이 그 수준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보는 수준이. 그렇기 때문에 이 갭이다라는 것은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결국 아무리 잘라 나간다, 잘라 나간다, 잘라 나간다, 픽셀을 미세하게 배치
한다, 배치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디지털에는 0과 1이 남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0과 1은 단절적이란 거죠. 그렇기 때문에 결코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시뮬레이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
라는 거죠. 그러니깐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기술적 불가능한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원리적 불가능까
지도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 디지털에 대한 빌렘 플루서와 스티븐 홀츠만의 견해 비교
사실은 이 원리적 불가능을 갖다가, 원리적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원리적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빌렘 플루서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물리학을 동원하잖아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의 연속,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세계다 하더라도 그것도 알고 보면 뭐로 되어 있습니까.
불연속의 세계다. 이렇게 이야길 하잖아요. 하지만 이 사람은, 스티븐 홀츠만은 그렇게 뭐 미립자 이런 수준까지 가질
않습니다. 우리가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의 아날로그는 역시 컨티뉴이티 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디지털은 아무리
미세하게 배치를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0과 1이고, 그런 관점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디지털을 가지고 아날로그를 대치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티븐 홀츠만의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학적 결론이 나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미디어는 아날로그를 흉내 내거나 대체하려거나 한다기보다는 아날로그로 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고 자기 디지털이라는 매체성을 감추기 보다는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이렇게 본다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가 보게 되면, 쉽게 말하면 제가 볼 때에는, 이 사람은 모더니스트에요, 디지털에 관해서.
모더니스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스티븐 홀츠만 같은 경우에는 모더니스트적 관점이죠.
매체성에 주목하는 것. 이걸 강조하는 것이고요.
반면에 누구죠, 빌렘 플루서 같은 경우에는 여기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던 아니면 전 모던입니다. 그러니깐 스티브
홀츠만이 볼 때에는 아마 그렇게 욕을 하겠죠. 너는 모던 이전이야. 디지털의 매체성을 가지고, 매체성을 살리지 않고
디지털을 가지고 자꾸 아날로그를. 그러니깐 누구입니까.
예건데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앤디 워홀이, 아니 누구죠,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앤디 워홀을 봤을 때, 황당한 거거든요.
왜냐,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활동할 당시에 미국 모더니즘. 잘 생각해 보세요. 잭슨 폴록이 있죠. 또 바넷 뉴먼 있죠.
마크 로스코 있죠. 또 누가 있습니까. 등등등등. 즉 추상이잖아요.
근데 갑자기 앤디 워홀이 구상을 들고 나온 거예요, 아예. 마릴린 먼로, 이런 걸 들고 나왔거든요.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러니깐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볼 때, 너는 그러니깐 모더니티가 아니라는 거예요. 프리 모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왜, 회화를 가지고 회화 매체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를 가지고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깐 너는 고전적인 회화랑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의미에서 프리 모던하다라고 욕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깐 넌 모던 이전이다. 현대회화 축에도 못 끼어. 이게 이제 이렇게 한거죠.
▲ 오늘날 빌렘 플루서와 스티브 홀트만의 대립
근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냐면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 그걸 가지고 뭐라고 부르냐면 포스트라고 부르잖아요.
앤디 워홀 이후를, 1960년대 이후를 다시 실제적인 것이 다시 재규환하거든요.
그러니깐 팝아트가 열린단 말이죠. 팝아트는 이게 재규환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걸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잖
아요. 그 다음에, 앤디 워홀 바로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포토리얼리즘, 쉽게 말하면 하이퍼리얼리즘이 오잖아요. 척 클로스 같은 사람들. 사진인데, 완전히 그림인데 사진
보다 더 생생한 그림들. 이런 시대라고 한다면 빌렘 플루서의 이론은 어디에도 가능해요.
사실 포스트 모던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이라는 것에 대해서 디지털 매체성에 대해서 스티브 홀트만은
굉장히 모더니스티의 태도를 취하는 거고요. 이미 이제 누구입니까, 빌렘 플루서 같은 사람은 굉장히 포스트 모던한
태도를 취하는 거고, 이 둘 사이의 지금, 대립이 있는 거죠.
▲ 최근 디지털의 상황
근데 요즘은 이런 대립 같은 것도 무의미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각자 자기 영역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영화
같은 경우는 결국 이리로 가야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영화에서도 거기만 매달리는 것이 꼭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베어울프 같은 경우도 문제가 있잖아요, 왜. 그게 아니라 꼭 디지털을 가지고 저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도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들이 있거든요.
예컨대 리얼한 게 아니라 쉬러 리얼하게 할 수 도 있고, 그렇잖아요. 하이퍼리얼 할 수도 있고 또는 추상적일 수도
있습니다. 수채화 같은 표현을 갖는. 또는 유화 같은 표현을 갖는. 굉장히 다양한 표현의 영역들이 있는데 오로지
블록버스터, 딱, 그리고 환영효과. 이런 것들은 또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 디지털이 갖고 있는 뭐랄까, 언어의 한계를 규정할 수가 있거든요. 영역별로 다 다를 것입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뭘 하는 것입니까.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영화처럼 만든단 말이죠. 영화처럼 만든다.
이게 그럼 과연 온당한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원래 쿨한 매체거든요. 해상도가 떨어지는
거고. 오히려 상당히 빈 부분을 관객이 집어, 채워 넣는 재미로 보는 건데. 그걸 가지고 아주 실사처럼 만든단 말이죠.
그럴 때 모종의 미학적인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컨대, 웨이킹 라이프 같은 경우에는 거꾸로 실사를 찍어서 뭐로 만들어요, 해상도를
떨어뜨려서 뭐로 만들어요, 만화처럼 만들잖아요. 만화영화처럼. 그런 방식도 있고.
그러니깐 지금은 선택 영역에 따라서, 또는 예술가의 뭐에 따라서,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 또는 자기가 표현하는 바의
성격에 따라서 다양하게 선택하면 된다는 거죠. 이런 게 있죠. 왜냐하면, 따른 한편으론 이 사람이, 스티브 홀츠만이
이야기했던 아날로그와 이것의 기술적 차이라는 것이 오늘날 상당히 줄어들었거든요.
토이 스토리 예를 들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이미 뭐가 나왔습니까. 베어 울프가 나왔거든요. 베오 울프가 나왔거든요.
그러니깐 이것도 나름대로 그 당시에, 내가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이, 그 당시에 뭡니까. 아날로그를 흉내 내던
것에서 뭐에요, 아니다, 디지털이 자기의식을 가졌을 때 그 어떤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거란 거죠. 그래서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이런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도, 그 때 그 때 필요한 틀을 갖다 써야 한다는 거죠.
▲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접점 (레노 마노비치의 관점)
그런데 이 문제를 과연 이렇게 제기하는 게 온당한가란 물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했냐면 디지털은 아직까지도 밀도가 떨어지는 것, 그 다음에 아날로그는 밀도가 꽉 찬 것. 그래서 이
밀도의 차이가 극복이 될 수 있느냐, 극복되지 않고 남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길 했단 말이죠.
과연 이게 이제 올바른 대립이냐. 사실은 이 두 사람이 싸운 적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 대립을 시켜 놓은 거거든요. 두 사람이 싸운 적은 없는데.
최근 레프 마노비치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뉴미디어의 언어』인가 하는 책을 보니깐 재미있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잘못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날로그 해상도가 꽉 차고, 밀도가 높고, 디지털이 해상도가
떨어지고, 밀도가 낮다라고 이해를 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봉합을 없앤 최초의 영화가 쥐라기파크 이거든요. 쥐라기파크란 말이죠. 거기 딱
보면, 사실 뭐 디워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꿰맨 자국 다 납니다, 그거. 근데 그걸 없앤 것이 1994년의 쥐라기파크거든요.
재미있게도 뭐냐면, 양자의 이미지 차이를, 이미지의 구결을 지우기 위해서, 아날로그 해상도를 떨어뜨린 게 아니라
디지털 해상도를 떨어뜨렸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더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은 생성 이미지이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생성 이미지는 뭐에요. 무한 줌인과 무한 줌아웃이 가능한
것에요. 오히려 이것이 훨씬 더 선명했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실사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 해상도를 높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상도를 떨어뜨려야만 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디지털 미학의 필요성
그런 측면에서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면 우리가
계속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거든요. 이미 영화도 사실 상당 부분 디지털로 넘어갔단 말이죠.
디지털로 넘어가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이미지들을 보는데 거기에 미학이 달라요. 분명히 달라요.
아날로그 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디지털 미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왜냐하면 이미지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지고, 다른 방식으로 수용이 되고, 다른 방식으로
편집이 되고. 그런데 이걸 옛날의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를 보고 조탁 된 이런 미학적 개념들을 적용시킬 수가 있느냐,
이런 문제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이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됩니다, 지금. 만들어야 되는 거고.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의 개념적인 도구들을 제가 지금 여러분들한테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 영화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그로 인한 디지털 미학의 필요성
영화 같은 경우에도 지금 굉장히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디지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카메라가
가상화 되는 거거든요. 카메라 자체가 가상화 되는 거예요. 카메라가 가상화된다. 그건 뭐냐면, 카메라맨이 필요가
없어요. 카메라맨이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왜냐, 디지털에서, 애니메이션 같은 것들이, 디지털 애니메
이션이라든지, 실사영화 같은 것들을 보게 되면 카메라가 실제로 찍은 부분도 있지만 상당 부분 안 찍은 거거든요.
근데도 그 퍼스펙티브(perspective)가 있다는 말이죠. 시점이 있단 말이죠. 그건 가상의 시점입니다.
실제로 저도 지금 작업을 하는데, 그 하늘에서 본 지구를 찍은 사람 있잖아요. 베르튀랑인가, 그 사람이 최근에 뭐를
내냐면 하늘에서 본 한국이라는 책을 내거든요. 그걸 볼 때, 찍습니다. 찍는데, 우리는 사진하면 가장 중요한 게 뭐
예요. 프레임이잖아요. 프레임이 없습니다, 딱 봐서 잘라요. 왜냐하면 물론 이게 화상도 차이는 있겠죠.
자르면 뭐, 자른 다음에 키우게 되면 약간 해상도가 떨어지거나, 그런데 그렇게 티가 안 나거든요.
그러니깐 이렇게 찍은 다음에 이걸 그대로 내는 것이 아니라, 이걸 적절한 미학적으로 또 자르 거거든요.
그러니깐 옛날에 영화 같은 거 찍을 때, 또 사진 찍을 때, 굉장히 현장 자체가 중요했어요. 현장 자체가 중요했지만,
프로덕션이 중요했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포스트 프로덕션입니다. 그러니깐 옛날에 영화 촬영하는데 6개월 걸렸다,
그러면 요즘에는 6개월이 아니라 딱 6주에 끝나고 나머지 2년을 작업해요. 그런 상황이거든요. 바로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미지의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걸 평가할 수 있는 기준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 디지털에 대한 세가지 입장 정리
그래서 일단은 크게 3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뭐냐면 빌렘 플루서의, 빌렘 플루서에서 부터
얻어질 수 있는 미학적 전략들.
빌렘 플루서가 이미지는 이래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런 식의 미학적 전략이 추출될 수 있다라는 관점에서 제가 제시를
하는 거고요.
또 하나는 이제, 그건 포스트 모던적이었다고 한다면 스티브 홀츠만과 같은 사람. 상당히 모더니스트적인, 디지털은
그대로 나아가야 된다는 이런 것들. 거기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레프 마노비치 같은 사람이 완전히 새롭게 제시하는.
해상도에 대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립을 갖다가 밀도의 차이냐 아니냐,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언급이죠. 그런 게, 그 3가지 입장을 살펴봤고요. 문제는 뭐냐면 다음으로 그런 게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냐면 디지털은 어설프게 아날로그를 따라가다가, 아까도 이야기 했잖아요. 갭이 있잖아요.
그 갭을 메우지 못할 때, 굉장히, 아니한만 못한 결과를 낳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캐니 벨리(27:04)
라고 하죠, 섬뜩함의 계곡이라다라는 그런 미학적 문제를 낳는데 그건 잠깐 쉬었다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