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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래(未到來) 된 환희의 날
요한계시록 6:3~4
(계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계6: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언젠가 보았던 한국영화 중에 제 기억에 남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대감댁에 한 머슴이 있었습니다. 이 머슴은 그 집의 외동딸 아씨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우직하게 생긴 머슴은 어린 아씨를 연모(戀慕)하였지만 신분사회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며 마음에 슬픔이 생겼습니다. 그런 어느 날 대감이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온 집안이 멸족(滅族)의 위기를 만나게 되자 외동딸을 살려야 된다는 절박함으로 대감의 부인이 머슴에게 아씨를 부탁하며 패물을 주어 어린 아씨를 데리고 멀리 피신하라고 하였습니다.
아씨를 등에 업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먼 산골에 숨어들어 나무를 베어다 숯을 만들어 파는 숯장사를 하며 아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십니다. 밥은 물론 빨래며 청소 그리고 집안의 모든 살림을 챙기면서 아씨에게는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합니다. 외딴 산골에서 얼마든지 젊은 욕구를 아씨에 풀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각 방을 쓰며 오랜 세월 아씨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고 사랑해 줄 것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런 머슴의 헌신에 수년이 흘러 어느덧 성년이 된 아씨는 마음의 문을 열고 머슴을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다는 Happy Ending의 영화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스토리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인내를 보았습니다. 그 인내의 결과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열매 맺는 알곡 신자가 있는가 하면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쭉정이 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을 향하여 강제로 당신을 사랑하고 주장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애(求愛)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강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일곱 봉인한 두루마리의 둘째 인을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봉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인간에 대한 시련이 몰아붙입니다.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반응할 수 있다면 이것이 참 사랑 아니겠습니까?
3절에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둘째 인을 떼신 분도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말씀에 담겨 있는 뜻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로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봉인된 인을 뗄 때에 나타날 과정과 결과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인을 떼므로 나타날 현상에 대하여 4절에서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붉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프포스 퓌르로스’ 는 ‘피 혹은 불같이 붉은 색채의 말’ 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과 대비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양의 피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함이었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붉은 말입니다. 붉은 말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므로 피가 튀겨서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입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입니다. 주님은 붉은 말을 탄자에게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부여하여 그 택하신 자녀들에게 시험할 것을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붉은 말을 탄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한 영, 마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간교한 뱀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제는 붉은 말을 탄 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붉은 말을 탄자를 허락하시고 그 결과에 대하여 무엇을 바라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가야 이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분명 여기에 나타난 도둑은 본문에 기록된 붉은 말을 탄자일 것입니다. 그는 큰 칼을 지니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도전하여 올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정에서 믿음의 성도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생명을 내놓기 까지 사랑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결합될 때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을 통하여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이 사랑에 정상적으로 반응을 한다면 내게 어떤 상황이 발생한다하더라고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보이신 사랑에 반응하여 변함없는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랑하시는지 아시려고 시험하셨으며 (시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히브리어로 ‘바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검사하여 입증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고 승리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겪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마귀의 공격에서 이기는 결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늘의 상급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화평을 제하여 버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화평은 원문에 eijrhvnh(에이레네)라고 하였습니다.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은 화평이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질서정연한 것을 말합니다.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창조의 원리에서도 하나님의 뛰어난 질서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는 의미는 질서가 깨지는 것을 말합니다. 화평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권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질 때 화평도 깨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때로는 건강이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너와 나의 관계가 파탄 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환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엉클어지고 곤고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에 어느 정도 화평의 상태가 이어지게 되지만 결국은 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머물지 않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분의 간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지 않는 곳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곳은 무질서의 절정을 이룹니다.
이 세상에서 지옥의 권세에 눌리지 않고 자유함을 얻는 비결이 시편23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어둡고 지루한 두려움의 환경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있습니다. 영어로는 ‘your rod and your staff’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와 함께 계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목자에게는 양떼를 이끌어 방향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지팡이지만 이것이 막대로 쓰일 때는 죽이고 멸망하게 하려는 악한 대적을 물리치는 막대기가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두려움의 환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만 주님과 함께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는 죽이려고 덤벼드는 마귀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붉은 말을 탄 자에게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 칼’이라는 것은 외형적인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의 측면에서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칼이란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이것이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칼에 이유하고 있습니다.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또 다른 말로 성령의 검이라고 하였고 이 말씀의 특징에 대하여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은 회개하도록 성령께서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찌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살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됩니다. 혀에는 뼈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를 꺼꾸러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잠18:20)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악한 마음을 갖게 되면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아프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 성령으로 거룩함을 지니고 있으면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이 나옵니다.
마귀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감정을 건드리면서 서서히 그 악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 천 단계가 시기심이요 탐심입니다.
지난주에 둘째 아이의 내외가 외제차인 BMW를 타고 첫째 내외와 함께 저녁을 함께 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큰 아이가 자기의 신랑에게 “우리는 다음에 벤츠를 사자!”라고 말합니다.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지요? 시기심과 탐심 아니겠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점차 터지게 되면 분노의 감정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25일 발생한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이어지는 등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미네소타 외에 LA에서도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제2의 LA 폭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는 현시점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사람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촉발시키므로 서로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감정을 예수님의 보혈에 내얼 놓고 회개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마귀의 권세를 이기는 최종목표는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믿음의 동료들이 사자에게 물어 뜯겨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타죽은 모습을 보면서도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 있으면 자기들도 굶주린 사자에게 물어뜯겨 죽을 위기 속에서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찬양을 합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저들은 이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두려움이 몰아닥치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바울사도가 담대히 외쳤던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출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나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그 결과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번뿐인 인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죽음의 지경에 이르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주님이 내게 본을 보이셨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람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인내심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릎을 꿇는 순간 성령의 도우심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고, 천군천사들의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는 기도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저는 제 기도의 중심에 어떤 죽음을 맞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신경세포가 사라지고 뇌의 기능이 멈추며 호흡이 멈춰지고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그 순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 혀끝에 기능이 한 점이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게 하시고 제 의식이 남은 한 점 마저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 일생 최고의 날 환희 날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살다가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벅찬 감격이 생기고 기쁨이 넘칩니다.
저는 여러분도 저와 같은 기도를 드렸으면 합니다. 일곱 인을 떼시므로 믿음의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지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면류관 얻기까지 강하고 담대함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