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대로 아버지는 9월 14일 오전에 수술실로 들어 가셨다.
수술 하루 전인 13일 날, 나는 아내와 함께 전주로 갔다.
열차 창밖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황금 들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넘실거리는 풍요의 황금 들녘도, 서녘 하늘에 붉게 걸린 낙조의 풍광도 더 이상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무거운 내 마음 때문일 터였다.
전북대 병원에서 가족들을 만났다.
많은 대화를 나눴고 한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불안을 씻고 평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나와 어머니만 병원에 남고 다른 가족들은 귀가하거나 형제의 집으로 갔다.
병실이 좁은 데다가 내일의 일정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은 쉬어야만 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젊은 레지던트가 들어왔다.
"내일의 수술을 위해서 환자분 사타구니 부위를 깨끗하게 쉐이빙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아버지의 쉐이빙을 내가 해드리고 싶네요. 도구 이리 주세요"
그랬더니, 그 청년 의사가 눈을 크게 뜨면서 "아이쿠, 정말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3번 정도 고개를 숙여 크게 인사를 한 뒤 그 청년은 병실을 나갔다.
그 레지던트는 환자관리가 자신의 직업일지라도 심적인 부담이 조금은 있었던 듯했다.
아무리 환자와 의사 관계라고 해도 상대방의 고추를 만지작거리며 면도를 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터였다.
어머니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셨다.
아버지는 3기 말 '대장암'이었다.
수술 전야에 꼭 필요 과정인 사타구니 쉐이빙이었다.
내 나이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고 만져보았던 아버지의 고추였다.
만지고, 당기고, 상하좌우로 밀쳐가며 꼼꼼하게 했다.
그러지 않고선 신체 구조 상 쉐이빙을 할 수 없었다.
과거에 무성하던 체모도 예전같지 않았고 실팍한 기운은 온데간데 없었다.
작고 힘 없는 신체 부위로 변해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쏟았다.
터럭 하나까지 온 정성을 다해 신중하고 깨끗하게 하고 싶었다.
의당 그래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했다.
항문 주위까지 완벽하게 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특히, 고환 아랫쪽 살갗은 우글쭈글 했다.
잔 물결처럼 깊은 주름이 져 있어 면도날이 잘 듣지 않았다.
왼손 엄지와 중지로 그 주름진 살갗들을 늘려가면서 오른손으로 크림을 발라가며 조심스럽게 쉐이빙을 했다.
"아버지, 불알 아랫쪽은 쭈글쭈글해서 시간이 더 걸리네요" 라고 했더니 아버지도 부끄럼 많은 시골 소년처럼 배시시 웃으셨다.
그 소년 같은 미소에 숱한 당부와 감사의 언어들이 묻어 있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아버지의 '사타구니 쉐이빙'이었다.
그러면서 부자는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현재의 심경.
과거의 행복.
미래에 펼쳐보고 싶은 당신의 버킷리스트.
아버지의 인생역정.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벽마다 무릎을 꿇으며 간절하게 새벽제단을 쌓았던 당신의 기도제목까지 가감 없이 들었고 긴밀하게 소통했다.
아버지의 몸에서 느껴지는 정과 사랑이 내 손 끝을 타고 온 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실된 대화 앞에선 인간 본연의 모습과 심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날 심야에도 역시나 그랬다.
아버지와 나.
서로에겐 매우 감사하고 귀한 밤이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대화를 즐겨 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팩트 위주로 굵고 짧게 하셨다.
그리고 각종 형용사나 부사, 감탄사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으셨다.
소통과 공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버지는 좀 '과묵하고 드라이한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3남 2녀 중에서 아버지와 그런대로 소통을 꽤 했던 편이었다.
그날 밤, 뒤돌아 보니 아버지께 자주 표현하지 못했던 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버지, 사랑합니다"란 말이었다.
쉐이빙을 하면서 난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고백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그 순간 아버지의 눈에서도,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내 눈가에서도 촉촉한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왜 그렇게 이 말을 자주 전달해 드리지 못한 채 살아왔던가" 하는 회한이 내 가슴을 찢었다.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좀 더 자주 표현해 드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쉐이빙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여러 차례 다짐했다.
"앞으로는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며 살겠노라" 고.
진심어린 사랑의 고백과 따뜻한 스킨십.
그건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자 숭고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수술실로 들어 가시기 전에 병실에 온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아내와 장성한 자식들에게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듣고 싶은 찬송의 제목과 페이지를 말씀해 주시면 가족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그 찬송을 불러드렸다.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을 담은 찬송이었고 애끓는 찬양이었다.
아버지는 편안하게 눈을 감으신 채로 그렇게 7곡을 순차적으로 들으셨다.
정말로 평온한 신앙인의 얼굴이었다.
큰 수술을 앞 두고 있는 여느 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낮고 굵은 중저음 목소리였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도, 이 땅에서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인간적인 걱정이나 두려움은 전혀 없다"라고 하셨다.
그게 아버지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한 평생 성실하고 진실되게 잘 살았다"고 고백하셨다.
"너희들도 매순간을 진실되게, 열심히 인생을 개척해 나가라"고 당부하시면서 한 명 한 명 자식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건네셨다.
설핏한 미소를 머금으신 편안한 얼굴로 대장암 3기 말의 아버지는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신앙심이 깊은 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안온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5시간에 걸친 큰 수술 끝에 아버지는 회복실로 나오셨다.
담당 의사가 수술실 밖으로 뭔가를 들고 나왔다.
그 스테인레스 용기 안엔 절제해 낸 아버지의 암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우리 자식들 눈에 비친 큼지막한 암덩어리.
충격이었다.
"아니 이럴수가, 저런 상태로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셨을까?"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는 웃는 얼굴로 상세하게 경과를 설명해 주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하고 고마운 분이었다.
한참 만에 아버지는 깨어나셨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아버지의 양손을 부여잡은 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지금은 일반 병실에서 회복 중이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면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한다고 했다.
의지가 무척 강하시고, 평생을 수행자처럼 살아오신 나의 아버지.
'항앙치료'도 잘 이겨내실 것으로 믿는다.
수술 이후 어머니가 병실에 남기로 하셨고 자식들은 각자의 일터로 다시 흩어졌다.
나도 상경했고 번개처럼 또 며칠이 지났다.
깊은 밤.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아버지의 체온이 계속해서 내 손 끝을 타고 전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쉐이빙하던 날 심야에 부자 간에 진솔하게 나눴던 깊은 대화.
그 소통 안에 소망과 사랑이 흥건했음을 나는 지금도 가슴으로 절감하고 있다.
영원토록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의 소망, 고백, 기도가 살아 숨쉴 것으로 믿는다.
병마를 잘 이겨내신 나의 아버지.
우리에겐 언제나 등대이자 멘토가 되셨던 인생의 참 스승이셨다.
"주님의 은혜로 빨리 완치되실 것을 믿습니다"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2001년 9월에 짧게 메모해 두었던 것을,
소천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2011년 12월 1일 심야에,
쉐이빙하던 날(수술이 있던 날) 싯점으로 다시 고쳐 썼다.
원문을 최대한 살려가면서.
(언제나 그렇지만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영원한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