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알고 있다
요한계시록 21:8~11 I.
인생에 고난이 올때 어느 도시 열악한 성당에 새 주임 신부가 부임을 했습니다. 이 신부가 부임하 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은 강론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주의 종으로서 특별한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너도나도 고해성사를 하겠다고 앞다투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이 신부님은 귀가 안 들렸 다는 겁니다. 누군가 내 약점이나 허물, 더구나 부끄러운 죄를 알고 있다는 건 상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고난을 주님이 알고 계신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주님이 내 진실과 충성을 알고 계신다면 아무도 몰라줘도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9절 한 절 안에 “주님이 알고 있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내가 알고 있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당시 소아시아 지역 일곱 개 교회를 통해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의 원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여기 소아시아는 우리가 오랫동안 터키 라고 불렀던 “튀르키예”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일곱 개 교회 가운데 오늘은 두 번째 서머나 교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곱 개 설명하는 모든 시작의 말씀이 꼭 같습니다.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교 회는 “모든 성도는 사역자”라는 만인제사장 신학에 세워진 교회이니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에 게 주신 말씀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아!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고백하고 맛있게 말씀을 먹으면 됩니다. 일곱 개 교회에 주신 말씀을 살펴보면 교회들마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이 있습니다. 칭찬을 들었는가 하면 책망을 듣습니다. 본받을 만한 일이 있는가 하면 따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두 교회는 칭찬만 듣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모범이 된 교회가 서머나교회입니다. “서머나”라는 말은 “몰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몰약은 매우 쓴 맛을 가지고 있어 지독한 고난을 의미하기도 하나 몰약은 짓뭉개질 때 좋은 향기를 풍긴다. 고난을 통해 향기를 풍기는 교회가 서머나교회입니다. 성도들에게 교회에 위기와 고난이 오히려 좋은 향기가 되더라 하는 것입니다. “김포”는 “쇠가 떨어진다”는 말인데 마치 이곳에 비행장, 공항이 생길 것을 알고 지은 이름 같습니다. “서머나”가 몰약, 강한 고난, 좋은 향기라는 뜻을 가진 것은 마치 이곳에 서머나교회가 생길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 선한 사람에게 고난이 오는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왜 주님의 몸된 교회들이 환란을 겪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가진 가장 오래된 질문, 논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논쟁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신정론”이라는 신학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인생사에서 고난은 참 신비합니다. 고난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없는 사람도 없고 고난이 없는 공동체도 없습니다.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깨끗하고 순결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 받아서 큰 인물이 되어져 가더라는 겁니다. “왜 선한 사람에게 고난이 오는가?”하는 신정론은 연구하고 논쟁해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지금 내가 이해가 안되지만 내 고난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 크신 사랑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나님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마땅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통하여 유익을 주신다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 교리 가운데 참 귀한 교리가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고난을 당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최후의 승리를 얻는다 하는 교리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모든 고난 여정을 하나님이 아신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남모르는 고난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II. 고난 중 풍성한 은혜 주님이 알고 계셨던 서머나교회의 고난이 무엇일까요? 9절 말씀에 의하면 환난, 궁핍, 유대인의 비방 즉 박해였습니다. 서마나교회가 겪던 고난은 코로나가 아닙니다. 전쟁이나 재난 혹 질병 따위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권력 안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를 숭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매를 맞습니다. 끌려가 고문을 당합니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회 공동 체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이방인들에게 고난을 겪는 것도 서러웠지만 동족 유대인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이유로 온갖 핍박을 가해오니 이것이 더 아프고 서럽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물론 요즘도 북한 공산 국가나 일부 이슬람 국가 외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순교 하거나 환난 궁핍을 겪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도 환난과 박해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인류 역사상 지금 같은 탈종교시대는 없었습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엔티 크리스천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나안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 고 하면서 유대인이 유대인을 핍박하듯이 교회를 비난합니다. TV나 넷플릭스 그리고 SNS, 온라인,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난무합니다. TV를 켜면 동성애, 마약, 무당, 폭력과 성적인 자극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콘텐츠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교묘하게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환난입니다. 정신적인 박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늘의 독수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호랑이다. 사자 다. 이리떼다.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한 마리 양이 되는 겁니다. 교회는 양떼들의 모임입니다. 독수리 같은 날개가 없습니다. 말처럼 달리고 뒷발질하는 다리 도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들이받을 뿔도 없습니다. 공격무기, 방어할 아무런 힘도 없는 한 마리 양일뿐입니다. 서머나는 크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무역 상권을 쥐고 살던 부자들이었습니다. 서머나는 종교적인 도시였습니다. 황제 숭배와 이방 우상들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부유한 도시에서 유독 가난한 사람들이 서머나교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이면서도 장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도시에서 기독종교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서머나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되고 역설적인 일입니까? 서머나교회는 이런 환난과 궁핍, 박해와 고난 속에서 한순간도 하나님없이는 살 수가 없었습 니다. 하나님 놓치고는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 붙들지 않고는 하루도 지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두렵습니다. 낙심이 됩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 보고 살았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한순간도 버티어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살 수 있는 교회가 서머나교회였습니 다.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말씀을 배웠습니다. 성도들의 모든 가정은 목장교회였습니다. 가정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날마다 이적과 표적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그때 성도들이 불렀던 노래가 있다면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도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 하는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III.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의 모순, 역설 성경에 서머나교회가 등장하는 것은 오늘도 똑같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보다 신실한 성도들이 남모르는 고통 중에 견디고 버티어 내다가 문득문득 지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습니다. 오히려 잘난 척 하더니 꼴 좋다. 무슨 죄를 몰래 지어서 저런 어려움을 겪을까? 수군수군한 소리와 눈길이 따갑습니다. 그러면 이길 힘이 없어집니다. 이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들아, 딸아. 내가 알고 있다. 내가 보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게임 끝! 그러면 끝나는 겁니다. 요즘 따라 전에 없는 은혜와 기쁨 중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목장 식구를 돌봅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어려운 봉사 자리를 성실하게 지킵니다. 크지 않지만 봉헌생활에 진심을 다합니다. 그런데 문득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왜 저리 혼자 설치고 다녀. 교회 일만 하다가 뭘 먹고 살아? 금송아지라도 묶어 두었나? 이때 손에 힘이 빠지고 풀썩 주저않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내가 다 보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게임 끝! 그 순간 새 힘이 솟구치고 승리의 길을 갈 수 있는 겁니다. 일반 병실엔 하루 한번 의사가 지나가지만 그러나 중환자실에 밤낮 간호사, 의사가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지킵니다. 내가 환난과 궁핍, 박해와 핍박 중에 있을 때 주님의 눈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은 내 손을 꼭 잡고 계십니다. 힘을 내라. 너는 반드시 이겨낼 거야. 네 믿음 절대로 꺾여지지 않는다. 내가 안다. 내가 보고 있다. 주님의 손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힘내라 너는 반드시 이겨낼 거야. 그러면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10절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에 모순이 있고 역설이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으면 그다음 이어지는 어떤 말씀을 기대합니까? 금방 그 고난이 지나갈 거야. 네가 지금은 궁핍하지만 대박이 터질거야.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거야. 곧 부자가 되게 해 주마. 넣어둔 주식이 몇 배로 껑충 뛸 거야. 그래야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모순된 말씀을 보세요. 지금은 네가 집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너희 중 몇 사람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할 거야! 10일 동안 즉 고난에 만수가 다 찰 때까지 이 고난은 계속될 거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 가?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지금보다 너는 더 험악한 꼴을 당하고 죽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뺨이라도 맞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네 처음도 알고 지금 너의 형편도 알고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안다. 세상이 어려워진다 하는데 얼마나 어려워질는지 내가 다 알고 있어. 그러나 네가 끝까지 승리할 것 내가 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네가 마지막 날 얼마나 멋진 승리를 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로 설 것인지 내가 알아.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건 내가 안다. “종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란다. 믿음 생활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란다. 짤막한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나 하나님 나라에서 너를 응원한다. 너를 영접할 것이다. 나는 심판주다.” 이게 부요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너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부요하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승리하 게 될 것이다.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모두 주님이 갚으실 것이다. 라고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IV. 잘 살다 잘 죽어라! 서마나교회에 주신 마지막 결론적인 말씀이 무엇입니까?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잘 살다 잘 죽어라! 참 잔인한 결론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을 교회에서는 너무나 쉽게 사용합니다. 사실 이 말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죽어도 충성만은 꺾지 말라는 겁니다. 목숨을 잃어버려도 신앙만큼은 타협하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것에 손해가 나도 네가 가는 믿음의 진실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담대하라. 비굴하지 말아라. 당당히 죽으라 말씀하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너무 많은 고난을 당해서 죽게 생겼으니까 살려서 집으로 가시라고, 교회 로 돌아가시라고 감옥에서 내 보냅니다. 사모님께서 “목사님, 타협이라도 하셨습니까? 신사 참배라도 하셨습니까? 순교하셔야지 왜 나오셨습니까?”했답니다. 목사님은 그 길로 돌아가서 순교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꺾이지 않는 충성 이게 바로 죽도록 충성 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도 자신의 신앙 도리와 의리를 지켰습니다. 이것이 죽도록 충성입니다. 초대교회에 서머나교회가 있었던 것은 오늘도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잘 살다가 잘 죽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당당히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믿음의 사람이 병에 걸려도 고쳐주지 않고 멋있게 죽도록 하십니다. 수렁에 빠져도 건져내 주시지 않고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도 믿음 지키라 는 겁니다. 오해를 받아도 벗겨주시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놀리시는 겁니까?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안다. 그대로 죽어라. 똑바로 살다 똑바로 죽어라. 너를 위해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이 땅에서 받은게 아닙니다. 죽어야 받는 하나님 나라 면류관입니다. 잘 산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남들처럼 건강했으면 정말 멋지게 살다가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리고 중병에 걸려 고생만 하다가 죽습니다. 혼자 고생하는게 아니에요. 주변 가족들에게까지 오랜시간 고통을 남기고 죽는 분들이 있습 니다. 죽는 순간까지 믿음 지키다가 마지막에 근사하게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서머 나교회입니다. 이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잘 죽는게 네 사명이다. 그 혹독한 고난 가운데 네 믿음을 정결하게 하랍니다. 네 곁에 고난 당하는, 병들어 죽어가는 가족이 있을 때에, 가족 사랑에 배신하지 말고 잘 돌보고 잘 죽어 라. 그게 네게 주신 사명이다. 이걸로 인해 네 믿음 약해지면 안 된다. 지금은 죽지만 둘째 사망 지옥엔 근처에도 안 갈 것이다. 잘 죽은 사람이 받는 상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들이 서머나교회입니다. 성공신학, 번영신학과는 거리가 먼 메시지입니다. 튀르키예 일곱 교회 가운데 지금도 남아있는 교회는 서머나 즉 지금의 이즈미르 지역에 있는 서머나교회입니다. 물론 초대교회 서머나교회는 아니지요. 17세기에 설립했던 폴리캅 순교기념교회가 서머나교회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가 당한 환난이라고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폴리캅 목사님입니다. 요한계시록은 A.D. 95년경에 씌여졌습니다. 사도 요한의 편지가 서머나에 전해질 때 이미 폴리캅은 그 교회 멤버이었을 겁니다. 20년 후 이그나티우스가 서머나에 또다른 편지를 보낼 때 폴리캅은 서머나교회 감독이었습니다. 폴리캅 감독은 A.D. 155-6년경 순교를 합니 다. 총독이 재판정에서 폴리캅을 회유합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당신을 나도 살리고 싶다. 단 한 번만 예수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대답 하라.”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86년간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왕으로 섬겼다. 그분은 단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찌 내가 내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총독이 다시 말합니다. “끝까지 당신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면 굶주린 사자가 당신을 찢을 것이오. 사자를 무서워하 지 않으면 타오르는 불꽃이 당신을 사를 것이오.”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나는 잠시 불에 타 순교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다시 살아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오. 잠시의 불꽃을 두려워하는 당신들은 어찌 영원한 지옥의 불꽃은 무서 워하지 않습니까?” 어떤 위기, 어떤 고난, 어떤 믿음의 타협을 강요하는 환난을 만난다 할지라도 끝까지 붙들어 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밤 아니 오늘 이 아침 우리가 함께 들으십시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다.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어떤 순간에도 주님은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고통 없이 살고 싶어요! (약 5:13)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의 고통이, 최초의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노동과 출산도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이들이 타락한 이후에는, 농사도 출산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교 역시 이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고통은 죄인이나 큰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거든, 큰 대(大)바늘로 여러분의 손가락 끝을 한번 찔러 보십시오.
아무리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리고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그 손가락 끝에 상당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 고통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苦痛)의 사전적 의미는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입니다.
즉 우리의 몸과 정신을 포함한 우리 삶 전체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면 원칙적으로 육체와 마음은 함께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와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현대 뇌과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2011년 펴낸 책이,
며칠 전(4.16)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왼쪽 팔의 절반이 잘려나간 ‘빅토르’라는 환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왼쪽 팔 부위에서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때때로 가려움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검사결과, 빅토르의 뇌손상이나 지적 장애가 있는 환자는 아니었습니다.
빅토르는 다만 ‘환상통(幻想痛)’, 즉 ‘환상 속의 통증’을 앓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라마찬드란’ 박사는 특수한 거울 상자를 고안하여, 이 환자의 눈에 왼쪽 팔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빅토르의 고통은 사라졌습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육체와 마음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은 육체의 문제인 동시에 마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신앙도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평안할 때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고통스러울 때는, 우리의 신앙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누구보다도 영성이 깊었던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아무리 깊은 사람에게도, 고통은 힘들고 괴롭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살펴본 욥의 이야기에서도 사탄은 이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모든 복을 거두어 들이면, 그의 신앙이 깊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마침내 사탄은 욥의 온 집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욥의 몸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움을 참지 못한 욥의 입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느냐는 우리의 인생관 및 신앙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즉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표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 고통은 인간에게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말씀 야고보서 5:13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여기 ‘고난’은 ‘나쁜 일을 견뎌내는 것, 고통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하면 불평을 쏟아냅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쏟아내는 불평이 거친 욕설이나 저주로 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잊고자 마약이나 술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고통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를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우리의 몸에 위험이 닥치면, 우리 몸의 각 부분은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뇌에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어떤 위험으로부터 어느 부분을 보호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위험을 피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뜨거운 냄비를 만지면 손의 감각기관들은 통증이라는 비상신호를 재빨리 뇌로 보냅니다.
그러면 뇌는 재빨리 손을 냄비에서 떼도록 지시합니다.
만일 손끝의 감각기관들이 통증 신호를 제대로 뇌에 전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손이 심한 화상을 입을 때까지 냄비를 붙들고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고통 역시 우리가 정신적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제는 당신의 마음과 머리를 쉬게 해줄 시간입니다’하는 경고방송입니다.
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무시하고 생활하다가 결국 정신적인 장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더 무리하면 건강도 나빠지고, 더 나아가 생명에도 지장이 있음을 알려주는 ‘위험 경고등’이며,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종의 ‘브레이크’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주변에는 이런 몸의 ‘위험 경고등’이 망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천성 무감각증(CIPA)은 감각신호를 뇌로 보내는 신경섬유가 발달하지 못하여 통점, 냉점, 온점 등의 감각을 뇌에서 깨닫지 못하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선천성 무감각증 환자는 피곤함, 허기, 배설본능, 성욕 등은 정상인과 같이 느끼지만 고통, 뜨거움, 차가움과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합니다.
따라서 선천성 무감각증 환자는 심각한 상처가 나도 금방 깨닫지 못하기에, 항상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고통이 있기에 오히려 우리의 삶이 더 안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우리의 고통을 단순한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의 고통을 ‘기도의 기회’라고 가르칩니다.
즉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명종이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행복할 때보다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될까요?
그것은 고통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존재, 더 나아가 하나님만큼이나 똑똑하고 힘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닌, 부족하고 미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환란을 받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8-9).
20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쁜 일들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 먹은 세상을 깨우시기 위한 그분의 메가폰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신앙이 좋은 분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도저히 감당치 못할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생겼습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날 시간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열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곁에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2. 고통은 이웃과 공감(共感)하게 도와줍니다.
앞서 저는, ‘고통은 육체의 문제인 동시에 마음의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표현 속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들 중에 하나는 ‘고통은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보고 연구하거나 각종 과학실험을 한다고 고통의 실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고통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남자 산부인과 의사와 여자 산부인과 의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의학적 지식이나 경험에서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여자 산부인과 의사보다 훨씬 더 앞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내가 더 잘 안다’고 하며 큰소리 칠 수 없는 부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산의 고통입니다.
출산의 고통은 실제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감히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의 경우, 수많은 임산부들의 비명소리와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임산부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짐작’일 뿐 실제로 출산의 고통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가난한 나라들이 밀집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요즘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 죽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일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해서, 잘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부자들이 바로 옆 동네에서 굶어 죽어가는 자신의 동포들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부자들은 가난한 동포들의 고통을 관찰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관찰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 그리고 마침내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위에서 우리 인간들을 팔짱 끼고 지켜 보시며, ‘살기 꽤나 힘들겠군’ 하시며 혀만 차고 계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만일 그렇게 세상을 구경만 하고 계셨더라면, 예수님의 사랑은 여러분이 TV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수준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TV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 보았자,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몰입일 뿐, 실제 그 배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값싼 동정심이나 베푸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실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실제로 몸소 다 겪으셨습니다.
하늘 위에서 인간들의 고통을 단순히 관찰만 하지 않고, 직접 인간의 육체를 가지사 그 모든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인정하시고, 공감하시고, 짊어지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의 방관자(傍觀者)가 아닌, 고통을 함께 짊어질 참 친구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고통을 이웃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기회로 선용(善用)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을 말과 혀로만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손발이 잘리는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손발이 없는 장애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암을 겪어 본 사람이 암투병하는 환자들의 애환(哀歡)을 제대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식을 잃어 본 사람이 자식을 잃고 애타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고통을 겪은 만큼, 더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교제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통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후서 1:3-4).
고사성어 중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 특히 같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마음 문을 엽니다.
같은 고통을 느껴 본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 없으면 진실한 사랑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씨앗이 되길 원하십니다.
3. 고통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즉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보통 사람들이 받는 고통들을 대부분 겪어야 합니다.
최근 끊임없이 보도되는 유명 인사들의 이혼 보도들은, 아무리 대단한 스타들이라도 역시 인간으로서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지난 2010년 10월, TV에서 행복론을 열강(熱講)하던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 부부가 동반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최윤희 씨는 그 동안 정부와 기업체는 물론 여러 TV 프로그램들에서, 암울한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강연하던 ‘행복 디자이너’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폐와 심장질환이 찾아오자,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
2년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려갔고 또 한 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해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고 …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 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큰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역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목표로 살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우리들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이 땅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여러분의 삶의 최종 목표로 놓고,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 번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하늘나라를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됩니다.
여러분의 고통도 허무한 괴로움이 아닌 하늘나라를 향한 디딤돌이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고통의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나라까지 동행할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인생 목표는 무작정 장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상급 받는 삶을 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하며 피해 다니지만,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담대하게 고통 속으로 뛰어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더 큰 상급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이처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더욱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까지 3주 동안, 우리는 악의 문제를 죄, 불행, 고통으로 나누어 간단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악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가장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집결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무한한 용서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 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신다’는 약속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완전히 끊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단단히 하나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죄를 이기고, 불행을 견디고, 고통을 뚫고 일어서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디모데후서 2:11-12).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악을 이긴 승리의 깃발입니다.
이 ‘악의 문제’에 대한 설교를 마치며, 저는 여러분들에게 책을 몇 가지 소개하고 싶습니다.
복잡하고 광범위한 이 세상의 ‘악의 문제’를, 이 짧은 설교들로 다 다루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책들을 시간이 날 때 한번 읽어 보시면, 악의 문제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김학중 목사설교 고통없이 살고 싶어요 야고보서 5장13절 고통없는 삶|작성자 엔젤로테
24. 3. 24.
상처 입은 치유자
이사야 61:1~3 I.
사역의 출발 : 성령이 임하시면
어릴 때 우리집 앞에는 토끼풀이라 불렀던 클로버가 많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세잎 클로버 가운데서 네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서 풀밭을 기어 다니 곤 했습니다.
어쩌다 네 잎 클로버 하나를 찾으면 다듬돌에 눌러 말린 후 책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곤 했습니다.
클로버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은 1만분의 1 정도가 된다고 하지요.
클로버는 원래 이파리가 3개지만 자라는 과정에서 상처 입고 생채기가 나면 상처 입은
그 자리에 잎이 하나 더 생겨서 네 잎 클로버가 된답니다.
예부터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라는 꽃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실 네 잎 클로버는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어낸 결과라는 겁니다.
네잎 클로버 행운은 상처에 피해를 넘어선 상처의 수혜자였던 것입니다.
저는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을 “상처가 갖다 준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만 멘토링을 하면 탁월한 설교자가 될 것 같아서 종종 입 모양 만드는 법, 배에 힘을 주는 법,
설교내용에 맞는 표정을 짓고 제스처로 말하는 법을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꾸중을 하기도 합니다.
한 분 목사님이 꾸중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가 되었는데 설교 잘하고 싶지 않은 목사가 어디 있어요.”
그러더니 탁월한 설교가가 되어서 지금 아주 큰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누구나 교회를 섬기면 탁월한 목회자로 살고 싶지요.
사업을 하면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업 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부 잘하고 싶지 않은 학생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영적인 승리를 하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큰 열매를 거두며 살고 싶지요.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이사야 61장1절은 우리가 영적인 사역자로 출발하려고 할 때 그 출발점이 어디 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공의 문에 들어서는 그 첫 걸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본문의 말씀은 “메시아 예언”입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에서 예수님이 들어갔을 때에 회당장이 이사야서 두루마리 성경을 건네 줍니다.
두루마리 성경을 쭉 펼치더니 61장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에 대한 예언이고 이 예언이 이제부터 이루어져서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누가복음 4장 바로 앞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요?
모든 성경의 4장 앞에는 3장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과 함께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 그래요.
그 열린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성령이 임하셨다. 그러면 끝난 겁니다.
이게 영적인 승리에 들어가는 첫걸음입니다.
모든 사역의 출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하나님이 보증을 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셨다면 하물며
오늘 우리는 교회를 섬길 때에, 영적인 승리를 부과하고 싶을 때에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고 싶을 때에 어떻게 사역을 시작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영적인 승리가 가능할까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사61:1) 입니다.
II. 선지자 사명 :
가난한 자에게 “내게 기름을 부으사”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사역자가 된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선지자의 사역, 제사장의 사역, 왕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뭘 해야 될까요? 교회가 주님의 몸입니다.
몸은 우리 주님이 하셨던 그 일을 이 땅에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하 는 것입니다.
왕의 권세를 가지고 왕의 사명을 감당하는게 교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 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 땅에 주님이 주시는 복을 펼치려고 할 때에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떤 사역자가 되어야 할까요?
그게 선지자, 제사장, 왕적인 사명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여기 가난한 자는 세상에 잘나고 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난한 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복음은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먼저 전해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지는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은혜를 입을 다른 길이 없다.
내가 살아갈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외에는 나는 살 길이 없다.
주려 죽게 된 가난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좀 더 쉽게 설명하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마5:3) 라고 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누가 내게 먹을 것을 주는 거지?
내가 의지하고 믿을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내게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게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때에 복음에 부유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은 너도 나도 의에 가난한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의에 가난하여 도무지 의롭게 되는 길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서는 내가 너를 의롭다고 일컬어 주노라.
의롭다고 내가 너에게 신분을 바꿔 주노라. Justification 칭의입니다.
모든 인간은 손에 가난한 자이고 의의 가난한 자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너도 나도 모두 가난하게 왔다가 가난하 게 살아갑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얻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건강에 가난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관리해도 늙고 병드는 걸 어떡합 니까?
뻔히 아프고 힘이 드는데 알고도 금방 고칠 수 없는게 병든 내 몸뚱어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감정적으로 참 가난합니다. 내 마음인데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할 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말아야될 욕망을 사랑합니다.
주님만 품고 살기도 벅찹니다. 감사만 하기도 벅찬 세상입니다.
그런데 온갖 더러운 것, 미움, 원망, 용서치 않음, 썩을 것들을 가득 담고 살아갑니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사랑에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기름을 부어주셔야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III. 제사장 사명 :
마음이 상한 자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상처 입은 치유자의 두 번째 사명은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본문의 말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입니다. 물론 성경은 의학서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인간의 모든 아픔의 원인을 진단해 줍니다.
요즘 융합의학이 유행인데 성경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종합적, 통전적 치유책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 의학에서 마음 상한 것이 만병의 근원이란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더디게 깨닫는데 사탄이란 놈은 인간의 상한 마음을 참 좋아합니다.
그 상한 감정, 치유받지 못한 감정을 통해 인간을 실패로 몰아갑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자기 백성인 양 사탄은 상처에 붙어서
내 인생을 실패와 지옥으로 몰아가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 신앙생활 곧잘 하는 사람,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
인간 관계도 원만한 사람인데 상처를 입게 되면 너무나도 쉽게 자기 인생을 포기해 버릴 수 있습니다.
언론에 알려진 바대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연예인이라고 알려졌는데 자살을 해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뭐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판단을 상처로 해 버리기 때문에 그가 결단하는 것, 그가 말하는 것,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그 상처 관리를 잘못해서 곪아 터지면 우울증이 됩니다. 열등감이 됩니다. 비교의식이 됩니다.
가시덤불이 또아리를 틀고 가슴에 앉아 있어요.
그러 면 속에든 것이 상처밖에 없으니 말하는게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 둘 소중한 관계가 무너지고 신앙 인격이 무너지고 인생이 파괴되어집니다. 이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에게 걸려 넘어지면 은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실패하게 되더라고 하는 거지요.
어떻게 나의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탄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상한 마음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살 수 있을까요? 상처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는 상처도 없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없습니다.
지금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치료책은 최근에 개발된 신약이 아닙니다.
오래된 우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안에 치료책이 있습니다. 치료의 능력 이 있습니다. 치료의 방법이 있습니다. 치료의 길이 있습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 위에서 내 모든 상처와 실패와 고난과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능력입니다.
주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못 고칠 병이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을지어다.
우리 예수님은 그 당시에 언급할 수 있는 모든 병을 고쳤다는 성경의 기록이,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각종, 모든 이름의 질병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쓰러워서 친히 어루만져 고치셨다는 기록이 30번이상 등장합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 세상 살아갈 때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공포에 휩싸여 살아가느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나오더래요.
1년 365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읽어 보니까 366번 나오더래요.
제가 그랬습니다. 4년에 한번 윤달도 있다. 그 날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 그 소중한 우리 인생이 도둑맞고 내 인생 아닌 속은 인생을 사는 것일까요?
여러분, 과수원에서 사과 따기 제일 좋은 때가 언제일까요? 주인이 없는 날입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주인으로 계셔야 되는데 그 주인이 아니 계시니까,
그 빈자리에 사탄이 와서 사탄이 주인인양 똬리를 틀고 앉아서 나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기도 시간마다 예배 시간마다 여러분의 아픔, 상처를 우리 주님께 보여드리십시오.
숨기지 마세요. 맡기세요. 고쳐달라고 요청하세요. 아프다고 말하세요. 주님이 고쳐 주십니다.
어떤 영성훈련에 가면 그룹핑을 하고 그 방의 이름을 지어요.
제가 그 모임에 참석했을 때 우리 방 이름은 쓰레기통입니다. 왜 쓰레기통이냐?
우리가 설명을 그렇게 했어요. 우리 하나님이 쓰레기통인 것 같다. 우리는 쓰레기를 만드는데, 인생 자체가 쓰레 기인데, 아픈 쓰레기, 실패의 쓰레기, 미움의 쓰레기,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냄새 나는 것, 썩어 문드러지는 것, 주님 앞에 내어 맡기면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얘 야, 네 아픔이 이것밖에 없니, 네 고통이 더 없어? 실패는 더 많지 않았니? 뭐든 지 가져오너라. 다 받으시고 빈자리에 은혜를 주시고 보화를 주시고 승리를 주시 고 기쁨을 주시고 희락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할렐 루야!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 살아갈 때 아픔이 있습니다.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간암 선고를 받고 약 4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면서 아들 목사 님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어요. 「빛, 색깔, 공기」라는 김동건 목사님의 책입니다.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아픔은 있더라. 다 고난이 있더라. 다 실수하더라. 문제없는 사람은 없더라. 그 문제, 고난, 아픔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 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그 상처와 아픔과 고 난과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더라. 상처에 갇혀 살아가는 것, 실패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 문제 때문에 실언만 하고 앉았는 것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문제가 비록 해결 안 될 수 있고, 천천히 해결될 수 있지만 거기 에 갇혀 살지 않는, 문제 자체를 이기는 능력이 있더라.” IV. 왕의 사명 : 자유를, 놓임을 선포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상처 입은 치유자의 세 번째 사명은 왕의 사명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왕입니다. 포로된 자는 노예입니다. 갇힌 자는 감옥에 갇힌 죄수입니다. 노예를 놓아주고 죄를 풀어주는 사명권은 왕에게만 있습니다. 지금도 사명권은 대통령에게만 있습니다. 이 왕권이 우리 주님께 있고 교회에 있고 천국의 열쇠가 이 교회에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어요. 힘없는 죄수의 몸으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립 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쏟아내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힘없이 죽어 실패하는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사탄의 머리를 부셔뜨리신 것입니다. 박살낸 것입니 다.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 주신 것입니다. 지옥의 문을 해결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예수 십자가에 죽음이 내 죄를 해결했다고 믿으면 자유가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되고 죄악의 감옥에 갇혀 살던 인간의 숙제가 한순간에 해결되어졌습니다. 마귀의 포로가 된 저 사람 자유를 선포하노라. 죄의 감옥에 갇혀 사는 저 사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자유케 하라. 많은 현대인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복음적인 부자, 복음적인 무소유자가 되어야 그리스도인이지요. 가질만큼 가졌는데 돈돈돈 돈의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온갖 관심과 가치판단이 돈돈돈 돈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오는 남편 콧구멍이 500원짜리 동전으로 보이더래요. 옆에서 보니 잘생 긴 귀가 노란 신사임당으로 보이더랍니다. 인간의 욕망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상처로 분노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뭔가의 중독되어서 끊어내지 못하고 중독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정의 영에 사로잡혀서 보는 것이 전부다 부정적입니다. 판단이 부정적입니다. 말하는게 부정적인 언어 외에는 불평, 원망, 비난, 비판 밖에 할 줄을 모릅니다. 세상 사람 아무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고요? 정신 차리세요. 그런 당신을 세상 사람 아무도 좋아하 지 않습니다. 이념의 종이 되어 통전적인 시각을 잃어버린 확증편향의 노예들이 이 땅에 얼마 나 많이 있습니까? 심지어 마약의 종이 되어버린 인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브라질에서 출발해서 돌고 돌아서 우리나라 항구에 왔는데 배 밑바닥을 점검하다 보니 가마떼기만한 시커먼 자루 3개가 나와요. 그걸 끌어올려서 보니 3,500억원 어치 마약이었습니다. 한 번에 300만명이상 투약 할 수 있는 마약을 숨겨오다 발각되었습니다. 마약이 그렇게 좋으면 너 혼자 쳐 먹지 왜 불쌍한 이 땅의 젊은이들을 다 죽여. 마약이 우리 집 가까이 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 코앞에 와 있습니다. 무릎 앞에 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영적인 권세들이 하나님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프게 하고 여러분 앞에 똬리를 들고 있는 상한 마음의 울타리들, 상한 마음의 가시덤불이 무엇입니까?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무엇이며 분단은 무엇이며 미움은 무엇입니 까? 이 시간에 병든 몸, 깨어진 관계, 세상의 실패, 모두 십자가 밑에 풀어 놓으시길 바랍니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묶여 있는 당신 자신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길 바랍 니다. 미움으로부터 너를 놓아 주노라. 유혹으로부터 너를 놓아 주노라. 상처로부터 자유할지 어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희년을 선포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노라”(사61:2) 나는 용서하고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겁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상처를 주님 앞에 쏟은 것 뿐인데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는 거예요. 하나님 아파요. 실패했어요. 내 힘으로 안 돼요. 그랬는데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V. 남의 상처를 치유하는 왕 상처 입은 치유자!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내 죄가 해결되고 내 상처가 치유되고 내가 자유를 얻는 데서 끝나면 안 됩니다. 남의 발을 씻겨야 합니다. 남의 상처를 치유하는 왕의 권세가 내게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게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불쌍한 지체들을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아픔만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상처에 갇혀 있는 노예입니다. 이웃을 섬기고 치유하다 보면 내 상처는 간 곳이 없어집니다. 어느덧 나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선지자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상처가 물러가고 귀신이 두려워 떨며 도망갑니다. 제사장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왕적인 권세를 행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사역자이다. 모든 성도는 소그룹의 목자가 되어라.” 이것이 우리에게 비전입니다. 이 시간 고칠 수 있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고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면 그대로 안고 살아가세요.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장애인이 있고 장애인에 갇혀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안에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고칠 수 없는 약점을 통하여 여러분을 성숙한 하나님의 제자로 삼아 가시는 것입니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 내 어머니는 평생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사셨습니다. 한소망교회 초기 유치부가 생기던 날부터 당신이 몸져누우실 때까지 영유아 유치 부 교사를 하셨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우는 아이를 업어 주는 교 사말입니다. 교회가 커진 다음에도 허리를 수술해야 한다는데 자꾸 아이를 업고 다닙니다. “엄 마 다리도 불편하시면서 허리도 불편하시면서 왜 자꾸 아이를 업고 다니세요. 이 제는 우리 교회도 이만큼 커졌어요. 이제는 교사 내려 놓으세요.” 그때 우리 어머니 하시던 말씀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밤늦게 공장에서 돌아오면 네가 동생 운다고 달래도 안되면 너도 울고 앉았는기 라. 너희 형제가 울면 눈물 꾹 참고 엉덩이 한짝씩 때리고 잠을 재웠지. 울고 있는 애들을 보면 그때 울고 있는 너희들이 생각나. 어미가 못나서 어린 자 식들 평생 울리고 살았던 죄값 갚느라고, 죄값 갚느라고... 내 뒤에 있는 아이가 유치부 아이가 아니고 너희들이란다.” 내 어머니 아픈 허리로도 우는 아이 업어주던, 나를 업어주던 사랑으로 평생을 사셨지요. 상처 입은 치유자의 멋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