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 / 정선례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마중물'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나오는 물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지하수를 펌프질할 때 물을 끌어올리려고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 했다. 물이 잘 나오다가도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펌프 안의 물이 사라지고 손잡이를 반복하여 당겨도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펌프에 물을 한바가지 넣고 손잡이를 위아래로 당기면 물이 콸콸 쏟아진다. 요즘은 사라진 풍경으로 손으로 물을 끌어올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물은 농부들에게도 한 해 농사의 성패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기에 논에 수시로 나와서 물이 새거나 논두렁이 무너진 곳이 없는지 살핀다. 벼는 심을 때부터 여물이 들 때까지 물 속에서 자란다. '하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논에 붙어 살다시피 하여 물을 관리해야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벼농사를 잘 지으려면 물이 한참 필요한 벼이삭이 팰 시기인 하지 후에 물이 논으로 계속 흐르게 대는 것이 중요하다.
가뭄에 논물 싸움은 예사다. 논농사는 밭농사와 달리 물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창 미자 아버지 별명은 놀부였다. 유독 물 욕심이 많아서이다. 놀부의 논 주변에 논을 가진 이웃들은 그와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남의 논둑에 구멍을 내서 물이 흐르게 했고 다른 논에 물꼬를 막고 자기 논에 한방울이라도 더 들어가게 밤새 지켰다. 주변 논이 쩍쩍 갈라져도 제 논에 물 댈 궁리만 한다고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비난을 해도 모른 체 했다. 광산 김씨 집성촌으로 아재, 당숙, 삼촌이 대대로 살고 있는 자작일촌 자연 부락으로 타성받이가 거의 없었지만 가뭄이 심한 해에는 친척도 친구도 없어져 버린다. 평소 집에서 큰소리를 내지 않는 남정네 사이에서 들판에서 고성이 오가고 물꼬를 만지던 삽, 괭이가 날아다닌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농심도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이다.
요즘은 농어촌공사에서 물을 가두는 저수지를 농촌 곳곳에 만들어 물 관리를 잘해 주어 한 해 가뭄 정도는 수월하게 지나간다. 이때에는 귀한 물이 수로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나무판자에 비닐을 대고 돌로 눌러 물을 방방하게 댄다. 그런 후 다른 논으로 흘러 들어가게 물꼬를 터 준다. 어느덧 논물 싸움도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농부들은 제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고 한다. 나도 올해 처음으로 그걸 느꼈다. 신랑이 우시장에서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느라 물 관리를 도맡아 했던 것이다. 가뭄에 비 소식은 살아 돌아온 조부모님보다 더 반갑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