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 / 이팝나무
연달아 여고 동문 모임이 있었다. 월요일엔 전임 회장단, 이튿날은 기수 대표가 만났다. 첫 모임은 후배가 운영하는 국밥집에서 열렸다. 일곱 명밖에 되지 않아 단출했다. 허파, 간, 순대 등의 고기가 가운데 놓이고 각종 쌈이 푸짐했다. 음식을 맛보다는 눈으로 먼저 먹는 나는 아예 먹지 않는 요리이다. 오늘의 물주인 선배가 이미 주문까지 해 두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맛이나 보라고 권해 작은 거 하나를 집었지만 고기 잡내만 물씬 풍길 뿐이었다. 결국 콩나물국밥을 따로 시켜서 배를 채웠다. 현 회장이 올해 명랑 운동회로 치러지는 동문 체육대회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장소는 삼겹살 집이었다. 학교는 다른 직장보다 일찍 퇴근하기에 약속 시간이 남아서 혼자 천변을 걸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데다, 연초록 물결이 아름다워 걸을 맛이 났다. 그 바람에 너무 멀리 갔는지 오히려 10분 지각하고 말았다. 어제와는 달리 기수별로 모인 선후배가 꽤 많았다. 우리 기에서 회장이 나왔지만 나 말고 다른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눈에 익은 선후배와 1년 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집행부에서는 당일 대략적인 행사 개요를 안내하면서 후원금 모금을 당부했다. 또 내년에 회장이 될 상임부회장을 누구로 할지 협의했다.
해마다 6월 둘째 주 토요일에 여고 총동문회가 열린다. 벌써 올해로 25년째다. 나는 초창기 몇 년을 빼고는 꾸준히 이런저런 역할을 맡았다. 고향 언저리에서 직장 생활을 했기에 가능했다. 집행부에서 재무를 6년 하다가 나중에는 회장이 되었다. 이번 회장은 우리 기에서 세 번째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이 어느 학교나 비슷한 시기에 열리기에 한 번도 준비된 단상에 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회장이라는 감투가 무거웠다. 20년 가까이 동문회에 관심을 두다 보니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1년에 한 번 얼굴 내미는 것보다 가까운 데서 고만고만 살아가는 선후배가 주기적으로 만나 모교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잘되기를 비는 마음이 더 귀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중과 여고는 담벼락 하나 차이였다. 여고는 처음엔 여중 건물 한쪽에서 개교하였다. 몇 년이 지나도록 독립된 건물이 없었다. 내가 사는 읍 지역에는 농업고등학교 하나뿐이었고, 인문계는 아예 없었다. 공부 좀 한다는 학생은 인근 도시로 다 빠져나갔다. 내가 입학할 무렵에야 비로소 3층으로 된 하얀색 단독 건물이 세워졌고, 3학급에서 5학급으로 정원이 늘었다. 학교의 적극적인 홍보 덕인지, 아니면 중3 담임 선생님의 각별한 애정 때문인지는 지금도 헷갈리지만 나는 담임의 권유로 지역에 있는 신생 여고(그래도 중학교 더부살이부터 역사를 세기에 9회 졸업생이다.)에 진학했다.
운동장이 있어야 할 곳엔 푸른 보리밭이 길게 이어졌다. 하필 교복 겉옷과 플레어스커트도 초록이어서 보리밭과 깔 맞춤한 그때 사진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공부는 시험 볼 때나 하는 것이었고, 3학년이 될 때까지 친구들과 신나게 논 기억이 훨씬 많다. 내가 가고 싶었던 도시의 명문 여고는 월요일 아침마다 보는 쪽지시험부터 시작해서 월말 평가 등으로 1년 내내 시험이 이어졌다. 우린 중간과 기말 평가만 보면 그만이었다. 도시로 간 친구들이 평가와 경쟁에 시들어가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고 바빴다. 그들은 내 ‘평생 친구’가 되었다.
지난달 친구 딸내미 결혼식장에서 40년 만에 여고 동창을 만났다. 그새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아니, ‘인숙’이가 어때서 개명하고 그래? 나처럼 촌스러운 이름도 꿋꿋이 버티는데.” 내가 한마디 하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선례’가 어때서? 이름 좋아.” 하하. 이런 말도 듣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여러분을 만나면 항상 마음이 설레는 선례, 선례, 양선례입니다.” 지금이야 율동까지 곁들이며 너스레를 떨지만 한동안은 나도 남들처럼 세련된 이름이기를 바랐다. 한자 뜻풀이로는 한술 더 뜬다. 착하고 예절까지 바르게 사는 게 어디 쉽냐고?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인숙이는 수도권에 고급 미용실을 여러 개 둔 사업가로 성공했단다. 어쩐지 머리에 쓴 두건이며, 목에 감은 머플러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런데 그녀가 또 말했다. “넌 절대 이름 바꾸지 마. 그 덕에 교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야. 정말 대단하다.” 교사에서 교감, 그리고 학교를 경영하는 교장이 되는 건 교단에 있는 사람에게는 비교적 자연스럽다. 벽지 점수 따느라고 섬에서 아이 셋 데리고 3년을 살아야 했고, 원하는 근무성적 받느라고 마음고생 하기는 했지만 다른 직장보다는 비교적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문화여서 크게 어렵진 않았다. 때마침 인사 시스템이 민주적으로 바뀐 것도 한몫했다. 승진보다는 건강하게 정년퇴직하는 걸 교직 목표로 삼아 열심히 달리다 보니 어느새 종착점이 가까워졌다.
그런데도 여고 친구들은 나를 대단하게 생각한다. 고향의 큰 학교 교장으로 온 것을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갈 데 없으니까 고향으로, 힘이 없어서 작은 데로 못 가고 큰 학교에 왔다고 설명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 잘했다고 낯선 사람 앞에서 칭찬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혹 의사나 고위 관료나 대학교수라도 된다면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저절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내가 잘해서 이 자리에 올랐다고 착각할 일도 아니다. 동창과 친구, 그리고 선후배와 이웃의 보이지 않는 염원과 지지가 있었던 것이다. 때맞춰 피어나는 꽃과 나무가 고맙다. 새 생명의 탄생을 보는 듯 해가 갈수록 신비로움이 더해 간다. 건강하게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 묵묵히 아이를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이 있기에 내 일터가 즐겁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나와 한 울타리에서 근무하는 이 인연이 고맙다. 차선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길로만 가는 도로에서 만나는 옆 차 운전자도 따지고 보면 고마운 존재이다. 그 덕에 나는 오늘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세상 모두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첫댓글 저도 비슷한 생각 자주 합니다. 지금 내가 잘살고 있는 것은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나서이며, 사고 없이 운전하는 것도 다른 이들이 안전 운행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그래도 교장선생님이 되신 것은 능력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장 선생님을 알게 돼서 기쁩니다. 매번 글도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겠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 빚을 열심히 갚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행보를 항상 응원합니다.
의사나 고위 관료나 대학교수 못지 않게 교장선생님도 존경받는 직위라고 생각합니다. 교장선생님은 세상 모두에 지고 있는 빚을 전도하면서 많이 갚고 계시네요. 글벗들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좋은 데로 인도하셨잖아요.
선생님처럼 멋진 교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깨에 권위가 가득한 분들만 많이 봤어요. 같이할 수 있어 행운입니다.
하하하하하. 이 글 읽고는 도저히 답글을 달지 않을 수가 없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힘나는 아침입니다.
양 교장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 날마다 바쁘네요. 여고 동창들이 당연히 대단하게 생각하지요. 고향에 있는 큰 학교 관리자로 왔는데.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든든하게 자리 잡고 환하게 웃으실 선생님이 그려집니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인사는 또 얼마나 따뜻할까요?
선생님의 품성을 글로 느낄 수 있어 기분 좋습니다.
멋진 여자.
저한테는 맛있는 차로 갚으세요.
하하, 언제 갚을까요?
약속만 정해 주세요.
멋진 양교장님, 몇 가지 몫을 하면서 세상에 빛을 나누는군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친구 덕분에 저도 미소 짓네요.
선생님의 매력에 안 빠지시는 분이 없군요. 하하. 멋지세요.
교장으로 승진하기 까지의 일대기를 쓰셨네요. 그렇죠. 대단한 자리에 올랐어요.
친구들이 부러워 할만해요.
마침, 개명을 생각하고 있던 시기에 선생님을 만났었지요.
이렇게 멋진 분도 이런 이름을 갖고 사는 것에 위안을 얻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그냥 살기로 했답니다. 하하
선생님 웃는 모습과 성품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걸 아실까요? 존경합니다.
하하, 과한 칭찬입니다.
개명을 생각했다는 게 놀랍니다.
이름이 같으니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는가요?
한 번도 저는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