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흑백 사진 / 김봉임
고구마를 삶아서 먹고 있다. 내가 농사지은 고구마다. 황토밭에 심고 김을 메주는 건 나지만, 빨갛게 달고, 토실하게 하는 건 자연의 섭리다. 밭에 대봉감도 농약을 안 해서 상품 가치는 없지만, 두 자루 따왔다. 물로 씻어서 채반에 담아 놓았더니 홍시로 달콤하게, 말랑말랑 해가고 있다. 겨울에 함박눈이 내릴 때, 따끈한 고구마와, 홍시를 먹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정직하다.
쌀쌀한 밤공기가 문틈으로 새어 든다. 창문양쪽 커튼을 가운데로 잡아당겨 문틈을 가렸다. 보일러도 가동했다. 아랫목 경대 앞에 앉아있다.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은 까칠해 보인다. 어머니가 60대 초반에 찍은 사진 속의 모습과 똑같다. 거기다 어머니가 즐겨 입으시던, 누비 조끼를 입었더니, 완벽한 어머니의 자화상이다.
조끼 품이 커서 약간 줄이려고 한다. 작은 방에 재봉틀이 있지만 누비라 손바느질로 해야 한다. 가위가 필요해서 경대 서랍을 열었다. 길고 까만 가위와, 크고 작은 바늘이 꽂혀 있는 무명실꾸러미도 있다. 구석에는 은비녀와, 친정어머니 작은 지갑이 있다. 그 속에는 주민등록증과, 만 원짜리 구권 두 장이 들어 있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유품이다. 보잘 것 없는 유품들이지만, 나는 요긴하게 쓰고 있다.
가을옷을 장롱에 집어넣고, 겨울옷을 꺼내 벽에 걸었다. 오래된 옷은 무겁고, 유행이 지나서 옷 수거함에 넣어 버렸다. 장롱 앞쪽 중앙에는 서랍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오른쪽 서랍을 당겨 보았다. 오래된 각종 보험증권이 있고, 누런 종이의 여러 가지 세금 영수증도 있다. 20년이 넘은 영수증은 버렸다.
이번에는 왼쪽 서랍을 당겨 보았다. 친정어머니의 밭, 등기 등본이 있다. 한 장 넘겨 보았다. 나주군 동강면 운산리 ... 지번이 있고, 어머니 주민등록증 사본이 있다. 한 장 더 넘겨 보았다. 밭 두 필지 구백 평을 내게, 매매한다는 계약 조항이 적혀 있다. 그저 물려받은 듯 했는데 등기 등본에는 한 평에 오천 원꼴, 매매로 적혀 있어, 눈물이 글썽여진다. 아마도 어머니는 값싼 밭이지만, 생전을 지으신 소중한 밭이라, 큰 딸인 나에게, 아까운 토지를 잘, 지키라는 뜻으로 양도를 해 준거 같다.
언제까지 이 밭을 지킬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농사지은 고구마와, 대봉 감을 형제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밭에서 얻은 농산물을 만끽하며 글로 써 본다는 것이 나로서는 일상의 유익한 여가라고 생각한다.
오른쪽, 왼쪽 서랍을 닫고, 가운데 서랍을 당겨 보았다. 빛바랜 흑백 사진이 가득히 담겨있다. 주로 남편과, 나의 유년 시절 찍은 오래된 사진이다. 남편은 광주 서중 다닐 때, 교복을 입은 사진을 들고, 임곡초등학교에서 1등을 해, 광주서중을 합격했다며, 내게 자랑을 했었다. "그 시절에 꿈이 변호사였는데,"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었다.
단발머리 동강북교 흑백 졸업 사진은 귀퉁이가 떨어져 있다. 그래도 초등학교 시절, 학우들의 기억이 오래 남는다.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은 흑백 사진들을 보고 있지만 별로 기억이 희미하다.
남편과 내가 제주도 신혼여행 때, 용두암 자락에서 찍은 흑백 사진 보고 있다. 남편은 정장에 구두를 신고 서 있다. 나도 마찬가지로 미니스커트 양장에 구두를 신고 있다. 촌스러워 웃음이 나온다. 그때의 아쉬운 추억이, 가슴을 저미어 오길레 다시 사진들을 모아서 서랍에 담아, 가운데 칸에 넣었다. 오늘따라, 빨간 고구마가 더없이 달고 맛있다.
첫댓글 서랍 정리를 하다 보면 추억들이 새록새록 쏟아져 나오지요. 얘기 잘 들었습니다.
네 조미숙 선생님, 서랍속에 자질구래한 것들이 이야깃 거리가 되고,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네요.
어머니가 900평 밭을 물려 주셨군요. 밭으로 쓰기에는 너무 넓은 평이라서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합니다.
반장님 이시군요. 네 밭이 너무커서 절 반은 과일 나무를 띄엄 띄엄 심었더니, 관리를 못해서 엉망이에요. 그래도 감은 너댓 자루 따서 나누었네요, 나머지 절반은 고추, 마늘, 고구마, 콩 심는데 군데 군데 빈 땅이 많아 제대로 수학을 못해요, ㅎ ㅎ
김봉임 선생님 어머니의 흑백 사진은 귀중한 우리나라 근대 문화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저도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네 허숙희 선생님 그때는 사진사만 사진을 찍었어요 , 지금은 이런 사진들이 자료가 될수도 있겠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