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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05
5월24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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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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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https://pf.kakao.com/_xhGxjBxb/51874569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w94bbMtrBY&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7&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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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아 움직이는 희망의 복음>
가끔씩 초대를 받아 '한 말씀' 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본당에서 단체장이나 교육 분과 담당을 역임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 말씀'(주제 강의)은 피정이나 연수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지요.
참석자들의 기대치에 최대한 부응하기 위해서 '말씀 좋은' 강사를 찾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초청받는 강사 입장에서도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남 앞에 선다는 것 그 자체가 큰 부담입니다. '이토록 영적으로 불안정한 내가, 어떻게 영성생활의 쇄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주어진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나인데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다니 참으로 웃기는구나' 등의 반성을 합니다.
때로 재미있게 한다고 '오버'라도 하는 날이면 밤잠을 설쳐가면서 '내가 미쳤지 미쳤어. 왜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지껄였을까'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제 마음은 많은 경우 회색빛입니다.
제대로 된 복음 선포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언행일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자신이 먼저 살지 않는 사람이 행하는 복음 선포는 힘도 없을뿐더러 설득력도 없습니다.
말씀 선포자는 자신부터 먼저 진지하고 성실하게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철저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온 몸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선포한 말씀이 설득력 있게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승천대축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시는데, 다름 아닌 복음 선포에 매진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때로 말씀 선포가 죽기보다 싫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지못해 사람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뤄지는 복음 선포가 제대로 먹혀 들어갈 리 만무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 선포가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준비가 소홀했다든지, 기술이 부족했다든지 등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 원인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자주 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전도 사업은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복음은 스트레스로 다가올 뿐입니다.
돌아보면 부끄럽게도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도구 삼아 나 자신을 전하려는 경향이 많았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는 '나 자신'이 사라져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기보다는 그분께서 하시도록 그분 영역을 우리 안에 마련할 때 비로소 참된 복음 선포가 가능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저희 수도원에서는 매일 복음나누기가 생활화돼 있습니다. 가끔씩 행사가 있어 복음나누기를 빼먹기라도 하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끼니는 걸러도 괜찮은데, 복음묵상을 빼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뻔한 내용 가지고,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생활 분위기 안에서, 매일 보는 똑같은 얼굴들과, 매일 나눌 것이 뭐가 있겠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풍요로워지는 복음입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욱 심오해지는 복음입니다. 마음만 열면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복음입니다. 수도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저희 수련자 형제들은 복음 안에서 삶의 지침을 찾습니다. 복음을 통해 생활의 이정표를 세웁니다. 복음나누기를 통해 희망을 나누고 미래를 설계합니다.
결국 복음은 저희 같은 구도자들에게 있어 밥보다 중요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늘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습니다.
매일 복음에서 길어 올리는 삶의 진리들이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잘 내려옵니다. 그러나 가슴까지 내려온 복음이 다리까지, 손끝까지 내려오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복음이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복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복음, 행동을 촉구하는 복음, 우리 매일 삶의 에너지가 되고 고단위 비타민이 되는 복음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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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으려거든 전하라!>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GqIwWu4xUXc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 개신교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매주 예배를 보아야 했고 종교 수업도 해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종교 수업을 하시던 선교사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서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하러 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도 없는 정글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것도 대단했고 그것에 아내도 동의했다는 것이 참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어느 날 돈이 다 모여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참 좋아서 다른 종교 교육 교사가 바뀌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 집에 올 때 골목에서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몇 년을 걸려 모은 돈이었지만 선교사님은 그 돈 봉투를 강도에게 그냥 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꿈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할 때는 잘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그분에게 종교 수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뒤 희한하게도 개신교 선교 단체에서 모든 자금을 지원해 줄 테니 선교를 떠날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그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하면서 매우 신이 나 계셨습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심을 섭리를 통해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반드시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체험하면 기쁨에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더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다만 복음을 전할 때 당신께서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천사들만 본 여인들은 그 복음을 전하러 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든든하게 살고 싶거든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저에게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심을 언제 가장 많이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강론 준비할 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품을 받고서는 강론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새로운 것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정말 피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사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은 아마 “했던 강론 또 하네!”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고해성사 주면서 강론을 생각하다 고해 내용을 듣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제단 위에 딱 올라가면 강론 거리가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복음을 읽는 순간 떠오르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제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교구청으로 들어가니 강론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조금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을 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우리를 한 번도 굶기신 적이 없는데 목자가 자기 양들을 굶길 수 있는가?’, 혹은 ‘양식을 제 때에 주지 못하는 깨어있지 못함으로 주님을 갑자기 맞이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오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천지를 맑게 보게 해 주신다면 강론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천지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름이 약간 흘러가는 것을 말한 것이지 이렇게 완전히 맑은 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론을 다시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물론 영성관에서도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성체 조배실이 바로 사제관 옆에 있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성체 조배실에서 한 시간만 앉아있으면 매번 새로운 강론을 주십니다.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요즘만큼 강론 쓰기가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전엔 다음 날 강론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졸음을 쫓아가며 인터넷을 뒤졌던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할 말이 없었는데 요즘은 성체 앞에만 앉아있으면 예외 없이 강론 거리를 주십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내일은 안 주시면 어떡하지?’라는 불신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의심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론 준비할 때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실 때 숙제하라고 하셨다면 돌아오실 때 똑같이 숙제했느냐고 물으실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어머니를 만날 준비는 바로 마지막 때 하신 말을 실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어머니가 기다려지고 사실 이미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 하신 명령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만나기를 꺼리게 될 수 있습니다. 믿고 싶거든 전합시다. 전하면 만나게 되고 만나면 믿게 됩니다. 믿으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광고: 평화방송에서 제가 ‘오늘 다시 주님께’ 녹화한 것이 이번 주와 다음 주 방영됩니다. 오랜만에 녹화한 것이라 제 잘난 척만 한 것 같아 후회되지만, 그래도 시간 되시면 보시면 주일 미사에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 주일 오전 8시, 밤 10시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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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천상’이다. 이 ‘천상’은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 우리와 더욱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그분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분은 우리와 더 친밀히 일치하시고, 그러기에 ‘그분이 가신 데로’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천상’에 대한 향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생명에 결합하고자 하는 여망이다. 그러므로 주님 승천 대축일이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천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추구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지상에 있는 것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콜로 3,2)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주님 승천은 이제 막 일어나려 하는 보다 큰 사건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난다. 이 천사들은 구원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 역할을 한다. ‘구름’은 예수님을 못 보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특별한 구원 계시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구름’은 일반적으로 신적인 발현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 쓰일 뿐만 아니라, 다니엘서에서는(7,13) ‘종말론적 재림’의 상징과 예고로도 사용된다.(마태 24,30; 1테살 4,17; 14,14-16 참조)
루카는 예수승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고’해 주고 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11절) ‘그 모양으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하늘에 올라가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셔서 당신의 ‘통치권’을 확인시키고 온 인류의 역사를 당신 안에 모아들이실 것이다. 그 때문에 주님의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다시 오심에 대한 보증이다. 떠남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더욱 위로를 주는 당신의 현존에 대한 약속이다.
복음: 마태 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마지막 만남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마지막 말씀의 ‘선교 사명’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 [마태오는 복음 여러 곳에서 ‘권한’,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권위’에 대해 말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에”(7,29), 또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며 당신께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시고(9,6-7),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21,23)라고 묻는다.]
주님께서는 이 권한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권한이 그분의 부활과 함께 그분에게서 충만히 드러난다. 즉 부활은 승천으로 완성되며, 예수님을 성부 ‘오른편에’ 영원히 자리하게 하시어 온 세상의 주님이 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 주님 승천의 의미는 이렇다.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즉, 하늘이신 분이 다시 하늘이 되신 것이며,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주님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셨다.
예수께서는 이 ‘권위’로 사도들을 파견하신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19절) 사도들을 온 인류를 향해 파견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은 신앙 외에 세례와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에만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그 신비 자체에 ‘잠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과 승천으로서 인류가 하느님 아버지의 품 안에 들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도 똑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세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지상적인 생활보다는 천상적 생활 형태로 삶을 바꾸어 나갈 때 진실한 것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20절)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온 인류의 여정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자랄 것이다. 이 교회는 지상의 순례를 마치면서 사랑을 통해 실현되는 율법의 의미가 드러나고 생명의 신비가 벗겨지게 되면 사명을 다하고 끝나게 되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축복받은 이들만이 예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해 미리 마련하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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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오른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을 목격하고 체험하였습니다. 더 이상 새롭게 체험할 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보고 느낀 이들이 지금 갈릴래아의 산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의심하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의 본디 의미는 ‘주저하였다’입니다.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주저합니다. 신앙이란 그런가 봅니다. 애써 노력해서 깨닫고 이해하였다 싶다가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막막한 것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성인이 이른바 ‘어두운 밤’과 ‘사막’을 겪었고, 또 지나왔습니다. 신앙하면서 체험하는 의심과 주저함은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입니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고, 의심하고 주저하다가도 다시 힘을 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 안에 늘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멋지고 잘난 이들을 선별하시어 화려한 본보기로 내세우시고자 제자들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주저하는 이들의 나약함 안에서 당신께서 몸소 움직이시고 가르치시고자 산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 우리 삶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 드릴 수 있도록 오늘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삶에 빈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 빈자리에서 천상과 지상이 온전히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승천의 참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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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가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만일에 예수님의 승천이 ‘떠남’이라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의 말씀과 모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신 셈이 됩니다. 그리고 ‘재림’ 때까지는 우리 곁에 안 계시는 것이 되고, 예수님은 지금 ‘부재중이신 분’이 됩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승천은 ‘떠남’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모습을 목격한 것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9-1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일 자체는 놀라운 일도 아니고 새로운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을 사도들이 목격했다는 점인데, 그 ‘하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도들의 반응입니다. 사도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경배했고, ‘크게 기뻐했고’, 그 뒤에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거나 서운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기는커녕 크게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의 큰 기쁨은, 예수님의 승천은 ‘떠남’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하늘로 올라가셨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는 영적 공간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재림하실 것이다.”로 해석됩니다.(마태 24,30; 25,31)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도들이 크게 기뻐한 것은 자신들의 신앙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일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확인했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떠남’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심’으로 존재 방식이 변화된 일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승천은 예수님의 존재 방식이 변화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부재중이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뜻하는데,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모든 사람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맡기셨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즉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라는 지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지 말라는, 즉 ‘땅을’ 바라보라는 뜻이고, 이 말은, 사도들이(교회가) ‘땅에서’ 할 일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그 일은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는 당신이 하실 일을 사도들에게 떠넘기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력하라는 지시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선교활동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시는 예수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내가’(우리가)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우리가) 도와드린다는 것입니다.>
선교활동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내가 구원받기 위한 활동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라는 지시를 이미 내리셨습니다.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내리신 지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내리신 지시이고(마태 5,1-2),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온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고백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소금’으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쓸모없는 소금은 밖에 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5,13) (밖에 버려진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은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랑 없이 혼자서만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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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Uncontact Society(비대면 사회)가 가속화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개인들은 접촉이 아닌 접속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기보다는 인터넷 쇼핑을 통해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혼밥, 혼술 문화가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화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습니다. 저도 카카오톡을 통해서 한국에 있는 동창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지 않아도 바다 건너에 있는 사람과도 소통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물건을 집 앞에서 받아 볼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비대면 사회를 더욱 익숙하게 할 것입니다.
학교도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교실은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운동장은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장소였습니다. 코로나19는 이런 학교의 모습도 바꾸었습니다. 개학은 연기 되었고, 컴퓨터 앞에서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고 있습니다. 사이버 대학, 방송통신 대학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교육현장의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미사가 중단된 가운데 방송으로 진행되는 미사의 시청률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본당이 홈페이지를 통해서 미사를 공유하였고, 사제들은 본당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신자들이 없는 가운데 방송으로 성삼일 전례를 진행하였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신학적인 성찰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직장의 모습도 바뀌었습니다. 화상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화상회의는 불필요한 말을 줄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문제를 파악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기에 오히려 문제 해결을 더 빠르고 쉽게 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도 화상회의를 통해서 G20의 정상들에게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식 방역 모델을 설명하였습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회사를 운영하는 비용도 절감된다고 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성별, 세대, 이념이 사회를 구성하는 고리가 되었지만 코로나19 이후로는 능력, 업적, 재능, 창조성, 기술, 참신함이 사회를 구성하는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북미주 사제협의회, 동북부 사제협의회, 브루클린 사제협의회도 카카오톡으로 회의를 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대면 사회와 비대면 신앙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진리의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믿으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비대면 사회에서 교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성서’입니다. 성서를 읽고, 성서를 쓰는 모임이 있으면 좋습니다. 성서 백 주간, 청년 성서 모임이 있으면 좋습니다. 마르코 복음으로 성서공부를 했었습니다. 신학적인 내용도 필요했지만, 사회학적인 내용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본당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교우들과 함께 성서공부를 하면 좋겠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는 성서를 묵상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을 초대하고, 주어진 본문을 읽습니다. 그중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선포합니다. 성서 말씀을 읽고 느낀 점을 나누어도 좋고, 생활 나눔을 해도 좋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일 새벽에 그날의 복음 묵상을 본당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일이 있어서 평일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읽으셨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작해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홈페이지에도 오늘의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말씀에 충실한 신앙생활은 비대면 사회에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날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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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마태오 28,16-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 하나 남김없이 쏟으신
아니 당신을 송두리째 내던지신
이 땅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 갈릴래아에서
당신 마지막 모습 보여주시며
어딘가 또 다른 고통의 땅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리라는 희망 주시고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의 빈자리를
우리로 하여금 가득 채우시고
미련 없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걱정 없는 환한 웃음 지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우리조차 믿을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귀한 자리에 앉히시고
이제 또 하나의 당신이 되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살리는
복음의 기쁨을 널리 전하고
탐욕과 경쟁과 폭력을 조장하는
악의 무리를 쫓아내어
더불어 함께 사는 새 세상을 열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드러내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태초에 하나였던 하늘과 땅을
우상 숭배에 젖은 불의한 사람들이
애써 처참하게 갈라놓은 하늘과 땅을
다시 하나로 곱게 아우르시려고
이 땅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오르심으로써 더 깊이 내려오시고자
떨어지심으로써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자
희미해지심으로써 더 뚜렷이 보여주시고자
우리를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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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윤리신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질문은 과연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선한 존재인가”입니다. 윤리란 인간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악함을 전제하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변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 안에서 이미 결론이 나있는 듯 한데 다음과 같은 격언들에서 이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 격언을 보면, Lupus pilum mutat, non mentem. 즉, “늑대는 털을 바꾸어도 마음은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영어 격언에는, A leopard can’t change its spots. 즉, “표범도 자기의 얼룩을 바꿀 수는 없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국의 속담에도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윤리신학의 입장은 이와 다릅니다. 인간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나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악을 피하고 혹은 죄를 뉘우치고 다시금 선으로 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저의 행실과 생각을 돌이켜 보면 사제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교육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사제 생활을 함으로써 조금은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무엇보다 오늘 복음의 이후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사실을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온 지역에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과 같은 신앙으로 예수님을 맛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주님의 승천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주님이 어떠한 분인지 이제야 가까스로 깨닫게 되었는데 하늘로 떠나신다는 것은 서운함과 불안감을 동반했습니다.
여전히 학식이 부족했고 설교를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으며 그들을 비난하고 질시하는 세력들은 언제든 공격해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1독서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사도들이 이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군중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잡히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증언하게 됩니다. 한두 명도 아닌 모든 사도들이 다른 먼 나라까지 나아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이토록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이후, 비록 물리적으로는 주님과 멀어졌지만 또 다른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의 선언처럼,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이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떠나가심”은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과 “더 가까이, 함께 계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천 이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의 복음, 즉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단지 제자들에게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마음을 둘 때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주님 승천은 주님과 우리의 물리적 멀어짐을 뜻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실 것임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말씀하셨듯 기도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외롭고 쓸쓸할 때 함께 하시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분께서 다가오십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야만 합니다. 영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유일한 방법 밖에 없는데 바로 이것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는 유일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승천하신 예수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다시 예수님을 뵙게 될 날까지 우리를 사랑으로 보호해주시고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길 청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변화하기까지의 여정이 꽤나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보기 전까지,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누구신지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의심과 고통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과정 안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 숨겨진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모든 의심과 한계를 극복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가끔 녹록치 않고 슬픔으로 가득하다면, 이러한 제자들의 여정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약속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러할 때 주님은 다시 오시고 우리의 본성은 변화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아멘.
《어린이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MnprYvNz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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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최동일 베드로 신부님]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번 주일은 주님 승천대축일이자 홍보 주일입니다. 성자의 강생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셨다면, 성자의 승천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모든 업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역사 안의 한 시점과 공간에서 이루신 당신의 구원 업적을 모든 시대, 모든 장소로 확장하여 계속 이어 가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제는 당신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통해서 하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승천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지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이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승천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은 선교의 사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공동체이고, 이 목적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홍보 주일을 지내는 교회 안의 모든 홍보는 선교의 사명에 그 뿌리를 둡니다. 특별히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더욱 효과적인 여러 방법들을 활용하는 것이 홍보의 핵심 과제입니다.
이번 코로나19의 사태를 겪으면서 미디어를 홍보에 활용하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일례로 우리 교구의 홍보국에서 그동안 운영해 왔던 유튜브 채널의 구독사가 코로나19 이전까지는 750여 명에 불과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방송미사를 중계했던 두 달 사이에 2600여 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미디어를 통한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미디어의 발전이 우리의 삶(몸)과 정신을 분리시킬 위험도 존재합니다. 몸은 함께 있지 않으면서 미디어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디어를 활용하더라도 교회 안에서의 홍보는 언제나 선포가 되어야지 단순한 선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선전은 말, 영상, 글만으로도 할 수 있겠지만, 선포는 삶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육과 영이 함께 부활하셨고, 함께 승천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 선포 또한 육과 영이 늘 함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이를 홍보를 통해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서 더욱더 성찰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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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님]
<‘주님을 말하고 기억하고 살자’>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며 수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의 일들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판단하고 공유합니다. 좋은 이야기, 나쁜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갑니다.
그것에는 내 이야기도, 타인의 이야기, 사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누구에 대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합니까? 이 중에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제54차 홍보주일 담화를 통해서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착취하거나 권력을 휘두르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이야기들은 수명이 짧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는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삶에 자양분이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좋은 이야기를 말하고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들에는 성인의 이야기,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야기,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 강 칼라 수녀님의 이야기,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 이야기, 그 외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지 않고 일상에서 그 사랑을 품고 살아간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살아가게 한 힘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말하고 기억하고 살아가려 했습니다.
성경은 이야기들 가운데에 으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인류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 이유는 우리를 삼위일체의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에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 15)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해 주시고, 매일 미사를 통해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그리스도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초대로 인해 그리스도화 되어 성삼위의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초대의 응답은 우리 삶의 이야기로 귀결 지어져야 합니다.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성삼위의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에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여,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도록 합시다.
매일매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품에 안고 살아가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이야기꾼이 되어 성경을 말하고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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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옥수 도미니코 신부님]
<참 복음을 전하는 교회>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제품을 알리기 위한 홍보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홍보가 과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과장이 심해져 허위 홍보도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소비자 단체에 의해 지적당하는 제품과 기업들이 많은 것도 그 결과가 아닌 싶습니다. 제품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합니다. 개인이나 기업의 홍보를 위해 지나치게 고급화 전략을 쌓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상위 레벨의 스펙이 아니면 취업할 수없는 기업인데 막상 업무는 그런 스펙이 필요 없는 상황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인재를 낭비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경쟁에 젊은이들을 몰아넣는 시스템을 강화시킵니다. 기업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일상에서 이런 과장과 허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종교야말로 과장과 허위 홍보가 가장 많이 작동하고 있는 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우리는 신종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사회적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충격의 시작이 바로 허위 홍보의 종교에 의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후속파로 많은 국민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 왔습니다. 국론을 열시키고 종교가 국민들과 분리되어지는 모습들은 불안과 공포를 널어 희망을 일구어 가는데 많은 장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가톨릭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감염증 극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통해 허위와 거짓 홍보가 아닌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온 국민에게 드러냈습니다. 우리 가톨릭 역시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힘들어하는 신앙형제들과 이웃들을 구분하지 않고 한 가족으로 여기며 그들의 불안과 고통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희망을 일궈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긍지와 보람을 키울 수 있었고, 국민들 역시 우리 천주교에 대한 신뢰를 키워 온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게 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에 감사드립니다.
삶의 모습을 각색하지 않고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이 가장 올바른 홍보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이 선포는 전문가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사명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아픔과 고통에 함께 동참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모습, 나눔의 실천이 곧 복음 선포이며 홍보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힘이 우리 안에 있음도 확인하였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우리는 이미 복음의 기쁨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극복을 위해 절제하고 희생하며, 나눔을 실행하신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여러분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더 커져 있음을 확인하는 주일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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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에디슨의 명언을 하나 말해 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이 이 명언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에디슨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한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영감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천재는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도 소용없다.”
노력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강조하기에 이렇게 바뀐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천재는 곧 노력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1%의 영감 없이는 노력도 소용이 없다고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1%의 영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국어사전을 보니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
2.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신앙인에게 영감은 어쩌면 성령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것은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 없이는 천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은총에 우리의 적은 노력이 더해져서 더 큰 힘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1%의 은총이 99%의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 자기 노력만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교만은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힘에 맡길 수 있는 우리의 겸손을 통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천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구절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에게 정말로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맡기신 것이었지요.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수난 예고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지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도망치는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제자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이 약속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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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어떤 분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도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으세요?”
운동선수의 경우 슬럼프가 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합니다. 글 쓰는 작가도 무기력해지며 아무것도 하기 싫은 슬럼프가 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제로 사는 저의 경우는 어떤지를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글이 잘 안 써질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슬럼프라고 부를 정도의 무기력감을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슬럼프는 뜻대로 잘 안 풀리는 상황과 게을러져 버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일 뿐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됩니다. 게을러져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느꼈던 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기도하면서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게을러지려는 나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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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천의 삶>
-승리, 희망, 기쁨-
하느님은 교회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나고 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로 잘 드러납니다. 끊임없는 전례 수행 은총이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 삶의 꼴을 알게 모르게 아름답게 형성해 줍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전례도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히면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에 이은 찬미가 및 아침기도 세 후렴 시편들, 그리고 즈카르야 노래 후렴은 역시 줄줄이 얼마나 풍요롭고 깊고 아름다웠는지요! 이 곡들을 노래로 하면 무려 아침 1시간쯤 지납니다. 말 그대로 영혼이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하늘을 나르는 듯 마음도 참 밝아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찬미의 맛,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이란 말을 실감합니다.
-“알렐루야, 하늘에 오르시는 주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세상의 모든 이가 갈망하던 날, 거룩한 주님의 날 밝아 왔으니
세상의 희망이신 구세주 예수, 하늘 높이 오르셨도다”-
-“1.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에게서 떠나 승천하신 주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니라. 알렐루야.”
“2.만왕의 왕을 높이고 하느님을 찬양하라, 알렐루야, 알렐루야”
“3.예수께서는 사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도다, 알렐루야”
-“내 아버지시며, 너희 아버지이신 분께로 가노라,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그분께로 나는 올라 가노라, 알렐루야”-
영혼을 살리는 참 아름다운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의 고백의 기도들입니다. 계속되는 부활 축제 시기, 알렐루야 말마디 안에 ‘승리, 희망, 기쁨’이 함축되었음을 봅니다. 토요일 성가연습시간때 마다 미리 맛보는 주일 전례의 아름다움입니다. 미사 복음 선포 전, 시편 화답송 후렴 역시 얼마나 흥겹고 아름다운지요.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하느님 오르시도다.”-
성가연습시간에 성가대장 마르코 수사에게 “수사님, 18번 곡이네요!” 던진 덕담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이 곡을 노래할 때는 모두가 영적 승천의 기쁨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참 아름다운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젠 하늘도 예전 하늘이 아닙니다. 주님 승천하심으로 하늘길은 활짝 열렸고 하늘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지난 한 주간 미사중 불렀던 부활 감사송의 가사와 곡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풍요로웠는지 이미 영적 승천을 앞당겨 체험한 한 주간의 미사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믿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렸나이다
주님의 죽음으로써 저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주님의 부활로써 모든 이가 새생명으로 부활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즐거워하며
하늘의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지상의 천사들이 되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처럼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 자체가 하느님 공부요 강론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전례 은총으로 삶이 전례화될 때 저절로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적 승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례는 아름답게 거행하며 하느님을 기억할뿐 아니라 살라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영적 승천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첫째, 승리의 삶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승리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 높이 오르시는 승천의 장면은 그대로 영적 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평생 영적 전쟁중인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신자들입니다. 주님의 영적 승리에 참여할 때 말 그대로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그러니 이 또한 은총입니다.
이 은총의 힘이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영적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은 영원한 영적 승리의 모범입니다. 승천 하시는 주님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한 천사들의 말은 그대로 우리를 향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아니 이미 벌써 오셔서 우리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적 승천의,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영적 승리의 삶은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가 죄다. 정말 죄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파스카의 삶이자 영적 승리의 삶이다. 이래야 영적 탄력도, 영적 감수성도, 영적 투쟁력도 유지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주님의 전사들이야 말로 영적 승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승리, 영적 승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주님 승천은 그야말로 빛나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참으로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모든 것 다 있어도 희망이 없으면 불행합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진 절망의 그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이 사라질 때 속절없이 무너져 황폐화되는 내면에 사람은 저절로 거칠어 지고 사나와 지고 차거워 집니다.
바로 영적 승천의 삶은 그대로 희망의 삶을 뜻합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감사와 신자들의 깨달음을 위한 기도’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희망이 넘치는 기도문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바로 우리의 간절하고도 영원한 희망이 농축되어 있는 기도요, 우리의 기도로 바칠 때 실현되는 궁극의 희망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 간절한 희망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어 하늘에 올리시고 당신 오른쪽에 앉히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표지입니다. 이 주님께 늘 우리의 눈길을 둘 때, 희망이 가득한 영적 승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기쁨의 삶입니다.
영적 승천의 삶은 기쁨의 삶입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희망은 바로 ‘기쁨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으로 오히려 더 우리와 가까이 계시게 되었으니 참 역설의 신비가 고맙습니다. 하늘 높이 초월해 계신 초월자超越者 주님이, 땅 아래 우리와 함께 하신 내재자內在者 주님이 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겸손한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이 되었고 승천하신 주님은 하늘인 우리 안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고 행복해 했던 시를 다시 나눕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가득 떠오른/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이제 주님 승천하심으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승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나는 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 그대로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인 임마누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감격스런 고백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음이 얼마나 영적 승천의 삶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 교회에 속한 우리이기에 우리 또한 기쁨 충만한 영적 승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제54차 홍보주일이기도 합니다. 교황님의 홍보주일 담화문이 참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정말 설득력있게 설파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것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과 함께 참 아름답고 깊고 풍부한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삶의 성경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story와 내용contents이 알찬 내 삶의 이야기 책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간혹 영화나 책을 볼 때 이야기story도 내용contents도 없는 것들을 대할 때는 얼마나 공허하던지요. 정말 이런 이야기story도 내용contents도 없는 무의미하고 헛된, 재미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황님의 담화문은 1.이야기 엮어가기, 2.모든 이야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3.이야기들 가운데 으뜸 이야기인 성경, 4.늘 새로워지는 이야기, 5.우리를 새롭게 하는 이야기로 구성된 참 좋은 묵상글이며 말미의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오 성모 마리아님, 여인이시며 어머니시여, 당신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당신 품 안에서 엮으셨으며,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당신 삶으로 이야기하셨나이다. 저희 이야기를 귀여겨 들으시고 이를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시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이야기마저 당신 이야기로 삼으소서. 역사를 이끄는 선한 끈을 저희가 알아보게 하소서.
저희 기억을 무뎌지게 만드는 삶의 엉킨 매듭을 바라보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가다듬어 주시어, 모든 엉킨 매듭을 풀어 주소서. 거룩한 영의 여인이시여, 믿음의 어머니시여, 저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어 저희가 미래를 향한 평화의 이야기를 이룩해 나가도록 도와 주소서, 또한 모든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저희에게 보여 주소서.”
참으로 고백상담성사를 주는 모든 사제들은 물론 모든 신자들이 마음 깊이 새겨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영적 승천의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름답고 깊고 풍부한 각자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가십니다. 승천하시기 직전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화두같은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28,19-20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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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날을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승천 사건과 그 이후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마당에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만나는 무수한 신비의 역설 중 하나일까요?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을, 비움에서 풍요를, 가난에서 행복을 이야기하듯, 주님의 떠남에서 오히려 영원한 현존을 거머쥐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다른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마태오 복음사가와 달리, 예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신 후 승천하셨다는 한두 줄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태오는 예수님의 승천을 하늘로 올라가신 물리적 사건에서, 본래 신성의 자리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 시야에서는 사라지셔도 그로써 더욱 긴밀히 함께하신다는 영적 현존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예수님 승천 사건을 구체적으로 소상히 기록했습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제자들은 이 극적인 만남의 순간에도 하느님 왕국의 도래가 확실히 "언제"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제자됨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의 조급함이랄까요. 그들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고도 하지요.
"그 때와 시기는 ... 너희가 알 바 아니다."(사도 1,7)
예수님께서 선을 그으십니다. 그건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일이고 당신도 모르신다고 이미 분명히 언급하셨지요(마태 24,36 참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승천 사건과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이 세상에 주님 현존을 이어갈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9)
이미 주님의 부재를 처절히 체험했던 제자들이 다시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첫 번째 상실과는 달리 영광과 위엄의 모습으로 떠나시지요. 게다가 현존의 약속을 단단히 새겨 주셨으니, 이제 그들은 빈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볼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이 세상을 가득 채운 주님을 찾고 감지하고 느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성 삼위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3)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주님을 머리로 하는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떨어질 수 없지요. 그분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제 영광과 영달을 위해 예수님을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걸 제자들은 알아가는 중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함께함이고 내어줌이라 하지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공이나 부귀영화의 보장보다 더 값집니다. 변치 않을 사랑의 보증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오실 분, 성령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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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 떠나신 뒤에 경험한 제자들의 공허한 빈자리는 너무도 컸습니다. 기대는 사라졌고 미래에 대해서 어두운 전망만 가슴을 메웠습니다. 사회적 위치도 낮았고, 죄인 취급을 당하고 멸시 받으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던 그들을 인정해 주시던 주님께서 떠나신 뒤에 느끼는 제자들의 공허함은 부활 전 빈 무덤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니시기 전 마지막 유언 같은 새로운 약속을 제자들인 우리에게 해주십니다.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나약한 인간성을 아시기에 성렁을 보내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공허한 제자들의 그 빈마음은 성령의 못자리가 될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약한 우리의 인간성 안에서 함께 계십니다. 능력있고 잘난 사람보다도 불완전한 우리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을 하늘에 들어 올리어 봉헌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나약함, 불완전함, 허전함, 공허함, 좌절감, 이별의 슬픔 그리고 상실감으로 얼룩진 공간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주실 선물인 성령의 공간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준비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는 나약한 믿음을 새롭게하여, 곧 오실 성령께 힘을 받아, "땅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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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아벨의 의로운 피로도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도, 모세의 열성으로도 예언자들의 충성으로도, 결코 그 누구도 열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하늘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날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모두 ‘승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사도 1,11)
하늘, 그것은 지붕이 없는 저 위 어디쯤의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무소부재하시니, 그 모든 곳이 하늘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이 내 안에도 계시니, 내 자신이 하늘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거처이니 말입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편에 앉히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승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는데(5,24),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5). <열왕기 하권>에는 예언자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올라가셨고(2,11), <토비트서>에서는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20)
그렇다면, 승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사도신경의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승천”도 물리적인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어느 한 장소로 있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나 같이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곧 승천을 통해서 육신의 모습은 사라지셨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 영광을 주시려 찾아오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처럼, “승천”은 떠나감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어 함께 계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오 벗이요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영광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식탁의 자리에 와 계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먹이십니다. 이토록,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은 우리에게 복이 내리는 날이요, 우리가 영광을 입은 날입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말씀하셨듯이, 영광스럽게 하늘나라에 들어가시어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지상 삶의 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우리가 단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현양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을 의미합니다. 곧 세상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권능을 지니신 주님으로 살아계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오늘은 홍보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의사소통의 참된 힘은 ‘이웃되기’(제48차 홍보주일 담화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답하셨습니다. 곧 어려운 형제를 돌보아주는 것이 이웃이 되는 길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사소통이 고통을 달래주는 향유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맛좋은 포도주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웃되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승천의 삶이 될 것입니다. 곧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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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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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XJBivz2WF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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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 18)
우리 삶의 자리
거기에서
더 깊어지는
승천의 신비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승천입니다.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의 승천입니다.
사랑이 넘치면
자연스레 승천을
향합니다.
승천은 사랑의
힘을 믿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 뜨립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며 더욱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승천처럼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승천은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고 멀어지는
이별이 아닙니다.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사랑은 성장하고
사랑은 깊어지고
사랑은 넓어지는
승천의 신비입니다.
주님 승천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주님을 닮아
성장하는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하늘과 땅
이 모두를 하나로
깊어지게 합니다.
사랑또한
주님 승천처럼
성장해야 서로를
살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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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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