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을하늘 청아하고 높디 높은 하이얀 구름 따라 그리 좋아하는 대간길 중에 청화산 시루봉 능선을 오래전 추억따라 다녀왔다.
단절은 참으로 무서운 마음이다.
담배를 끊는 것은 어렵다. 습관이란 인간이 가지는 편향을 가지는 일이다. 절간에 계시는 수행자의 생활의 근본은 먹고 자고 싸는 일이 우선 해결되어야 한다. 도道는 평상심이리는 것은 종종 듣지만 기본이 없는 수행은 없다. 인간은 생활이 넉넉해지면 먼저 다른곳에 눈을 돌리고 남자는 오락거리 여자는 물질로 치닫는 것은 어쩔수 없는 본질인지 모른다. 단절한다고 한단계의 성숙으로 가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먹는 것은 삶의 기본이다. 먹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관계의 어려움은 문제가 심하다. 연예를 백년해도 단 하루의 결혼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결혼은 서로의 본질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해야만 존재할수 있다. 연예는 의식주의 문제는 없지만 결혼은 당장 의식주가 해결해야 한다. 서로 갈등은 생기는 것은 모두가 이 기본적인 문제 해결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단절은 기본적인 삶의 해결이 항상 동반되는 것이다. 알려는 마음의 기본이 없어면 얻어지는 것은 단절을 가지는 것은 초보적인 생각인지 모른다.
등고자비 登高自卑 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산꾼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런 것이다. 어릴때 늘 듣는 말중에서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는 초등학교 때부터 들을수 있는 말이다. 높은 곳이나 먼곳이나 처음부터는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가지는 높은 꿈이나 남들이 가지는 행복이라는 것도 부러위하는 이유가 단지 높은 곳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 때문이다. 맹자는 " 도道 라는 것은 지척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먼곳에서만 찻으려고 한다. 자신이 해야할 일이 쉬운것 부터 있는데 사람들은 어러운 것만 찻는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에게 친절히 하고, 윗사람들을 대접한다면, 저절로 평천하 平天下가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했다
산꾼인 우리는 누구나 산을 가면 처음부터 가지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늦던지 아니면 빠르던지 힘들든지 즐겁든지 하는 것은 각자의 산길이지만 모두는 산을 내러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산을 갔다왔다 하는마음 조차 잊을수 있지만 다시 그 산에 오면 또 처음부터 올라가야한다. 산 대장을 오래하다 보면 가본산중에서 힘든 산일수록 자주 간다는 것이다. 30년전에는 설악산을 한달에 4번씩이나 그것도 무박으로 다녀오고 덕유종주도 무박으로 달려간적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산이 누구나 올라오는 산꾼은 처음부터 올라오도록 만든다. 알면서 가는 길은 참으로 힘드는 일이다. 우리의 삶도 알고 있기에 늘 반복하는 짓을 하고 또 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단절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알고 기는 것을 반복하는 삶을 그것이 늘 존재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늘 가는 산을 왜 가는지 알아야한다.
삶이 어렵다는 것은 단 하나 서로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일 문제이다.
원할하지 못하다는 것은 단지 단절의 문제일
뿐이다. 공자님 말씀대로 밤낮없이 생각만 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조언보다 못하는 짓이라 했다. 자신의 한계에서 어떤 새로운 것은 생기기 힘들다. 우리는 혼자 잘알면되는 착각에 산다. 자신이 지금 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누구의 비교대상이 되어야한다. 물론 특이하게 천재라든지 획기적이라 하는 것도
다른 것들이 있고 비교가 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본인은 혼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일한 존재는 아니다. 세상에 그런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상이 있고 후손은 만들지 않어면 생기지 않는다. 본인이 어렵고 힘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든지 해결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동원한다. 각자가 하는 방법은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혼자보다 누군가가 도와주는것을 느낀다면 빨리 해결할수 있다. 물질적 이든지 정신적이든지 어떤것도 마치 물에 빠진사람
형편이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 한다. 그런데, 가깝고 믿음이나 잘아는 것이면 더욱 신뢰가 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신을 찻는다든지 기도를 하든지 반성과 기대를 희망하는지 모른다. 근처 절에 자주가면 이따금 천도재라는 제를 자주지낸다. 조상의 천도라고 하는데 일종의 조상을 모시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모나 조상이 계신다. 부모나 조상을 받드는 사람들은 모두 집안이 훌륭하고 잘사는 것같다. 집안이 평온하면 배우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잘아는 큰 사업을 하고 관계되는 분들과도 잘지내는 훌륭한 분이 계신다. 그런데, 종종 천도제를 절간 큰스님에게 부탁드린다. 조상님들을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지만 마음수양이나 바라는 마음이나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있다고 한다. 물론 혼자서 잘먹고 잘사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자라는 것은 남이 알아조지 않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지 않다.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조상과 후손이나 서로의 관계가 없어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모형제가 없고 고향도 없고 홀로 들판에서 생존을 하는 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지금 어러우면 계시는 부모나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들을 모시는 일을 해보는 것도 자식이나 후손에게 좋은 연결고리이다. 어려운 이웃이나 힘든분들을 보시하는 것도 자신의 삶에 주는 크다란 선물이다. 단절은 죽음이고 소멸이다.
나와 꼭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나 자신 하나뿐이다. 삶에서 모든 관계에서 본질은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과의 관계가 좋아야 남들과의 관계도 좋아질수 있다. 마음이 비슷하다고 사실은 내 마음의 결정이지 타인이 같을수도 다를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은 상대방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여도 타인들이 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내가 가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말의 뜻을 전하는 것은 단지 그 순간의 말의 전달로만 생각하고 내 뱉을 뿐인데 말의 뜻을 가지는 것은 단지 본인이 정하는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뱉은 말이 상대에게 그렇게 강하고 뼈져리는 것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 이라는 것이다. "글르는 말을 다할수 없고 말로는 뜻을 다할수 없다." 는 '주역'의 '계사상전'에 나오는 말이 있다. 글과 말을 비교했을때 글은 말단이 되고 말은 본질이 된다. 아무리 보고 싶은 사람과 문자나 편지를 보내도 스마트폰으로 말을 하거나 직접만나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못하다. 글로는 말을 다할수 없고 말로는 뜻을 다할수 없다. 이를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뜻을 알아차리는데 집중할 뿐, 자신의 뜻이 상대방에게 글이나 말로 전달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글이나 말로 오릇이 전달하고자 헛되이 힘쓸뿐, 상대방의 뜻을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관계는 상대성이라는 이치를 빨리 아는 것도 자신을 아는 지름길이다. 무엇이든 내가 가지는 습성은 내 마음을 소중히 하는 버릇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어릴때 듣는 말로 심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의 결과는 항상 나만이 가지는 것이다.
유창한 말은 정성스러운 마음 앞에서는 무력해 지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나와 같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와 비슷해질려는 마음은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결과이다. 타인의 마음을 단절하는 것도 나에게는 좋은 보살핌이다. 글은 손끝에서 나오고 말은 입에서 나오며 뜻은 마음에서 나온다. 정성스러운 뜻앞에서 유창한 말은 무력하며, 간절한 말앞에서 유력한 글은 무력하다.
'주는 의존' 은 마음이든 물질이든 뮌가를 주는 행위를 통해서 관계의 안전을 확보하려 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갈등을 피하려는 모습은 겉보기엔 따뜻하지만, 마음속에는 소외되지 않으려는 불안이 깔려 있다. 문제는 항상 타인을 우선하다 보니 내 감정과 욕구는 억압되어 점점 분노와 허탈함이 쌓인다는 것이다. 주는 의존의 또 다른 핵심은 주는행위가 진심인 동시에 무의식적 거래라는 점이다. 은연중에 품고 있는 보상 심리와 도덕적 우월감과 맞닿아 있고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은 좋은사람 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면서 외로움과 소외를 피할수 있었고, 사랑과 인정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들의 내면은 결핍과 탐욕이라는 모순적인 양면성 상태일지 모른다. 너무 다른 두 마음이 마주해 싸우면서 괴로움은 어쩔수 없다. 이런 마음은 남에게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과잉 친절은 항상 지쳐가는 마음이 너무 많은 것을 남에게 소모한 탓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실체도 없는 것을 붙들고 있어면 지치고 문제는 가면을 쓰면 본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면은 없애는 것이 좋다.
누군가가 끝까지 나를 책임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상대에 대한 고마움이나 책임감 없이 요구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이처럼 타인이 나에게 해주는 것에 따라 감정이 크게 흔들리는 것과 같다. 삶의 중심이 외부에 있어면 항상 불안하다.
지배층들은 항상 새로운 진리라는 것을 만들어 지배를 할려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면 항상 대중의 지배자가 된다. 옛시절은 신이라는 개념으로 끊없는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는 원시시대부터 지배층이 존재했다.
후진국이라는 것은 아직도 자연의 순수성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항상 새로운 진리에 의해서 사라지고 또 다른 지배자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인긴은 한낮 인간이기에 말로써 지배한다. 지배자가 직접 무력이나 행위로 하기보다 합리성이 동반된
진리를 발명해야 한다. 지배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여론이나 하나의 토론으로 만드는 진리라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논리가 하나의 진리로 굳어질때, 당연히 따라야하고 자발적 복종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유지되지, 이의제기나 여론이 형성되면 만들어 놓은 진리는 허구가 되는 것이다. 권력은 진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발생한 비효율을 견디지 못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믿고있는 진리라는 것은 만고불편의 진리라는 상상도 예측불가하는 변화들에 가득한 세계에선 불안으로 도피할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란 항상 새로운
덧칠은 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진리는 망상이라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것에 변화를 주면 모든 진리라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 이것이 현실이고,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바로 현실인 것이다." 지금의 질서를 하나의 진리로써 규정지을때 어떤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일이다. 진통제로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는 항상 새로운 병이들고
사라지고 만들어지는 순환 뿐이다. 진리는 단절되지 않는 것은 허상이다.
생각과 단절은 상반되는 것이다. 생각이란 단지 무의식처럼 인간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가지는 하나의 반추이다. 그것을 만들고 안 만들고는 마치 자동차 출고시 가지는 옵션 같이 태어나면서 얻는 본능인지 모른다. 언어를 배워서 표현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기 전부터 가지는 것이다.
생각으로 정의한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 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때쯤은 사춘기를 넘어서는 시절이 되어야한다. 그땐 나를 괴롭히는 생각과 진실의 구별에 대해 갈등과 반추에 성숙을 얻을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생각을 찻는답시고 진실을 소홀히 하는 생각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어설픈 방법이다. 생각을 도구로 활용할 때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을 바같세상의 진실에 맞춰 바꿔나가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생각에 바같세상의 진실에 끼워 맞추려 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현실은 내머리속 생각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어떠하든지 현실에 일어나는 일은 제갈길을 가기 마련이다. 일방통행의 운명을 타고난 것은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은 진실을 사랑해야 한다. 생각은 도구일뿐이니 새도구를 만들면 된다. 바로 그기서부터 멋지게 시작하면 된다. 단절은 생각을 빛내는 도구이다. 용기있는 자는 항상 현단계 오르기 위해 진실앞에 굴복하는자가 되어야한다.
우리는 인간으로나 동식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이라는 것을 만드는 생각에 갇혀산다. 공자님은 논어라는 기본사상에,
노자님은 도덕경의 사상에서 갇혀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에 갇혀살고, 부처님은 불가의 깨달음을 버리는 것에 갇혀살고, 선지자들도 각자의 생각을 가지든지 버리든지 하는 마음에 갇혀산다.
깨끗한것, 맑은 것, 혼자 나은 것 같은 것도 그것에 갇혀산다. 버려라고 하는 불가의 이론도 사실은 그것에 갇히도록하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버리라는 공空이라는 개념도 갇히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을 잘모르는 것을 흔히 잔인하다, 게으르다, 짐승같다, 미개하디는 등의 말로 인용하지만 동물들이나 우리가 모르는 종족들을 야만이니 금수같으니 하는 것은 그것들의 본성이나 환경에 따라 사는 본능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자체가 문제이다. 사자는 먹고살기 위해 사냥을 하고, 상어도 살기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늑대들은 후손을 키우기위해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는 각자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 뿐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핆요한대로 인용하고 가늠할 뿐이다. 지구에 살아있는 동안은 그 문화에 갇혀살고 갇히기를 반복햐는 것이다. 갈망하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고 갇힌 자유를 찻다가 죽음으로 찻는 것이 삶의 탈출이고 해방이다. 모든 것들은 각자가 갇힌대로 사는 사형수들인지 모른다.
인간은 속한 사회에 살아가기위해 본인의 의사외 상관없이 교육을 받거나 익히게 되어있다. 부모님이나 사회의 모든 것들로 부터 사회의 모든 법칙과 규칙을 배우게 되어있다. 배우는 것에는 언어나 글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문화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면서 발전하고 다양한 고유의 영역을 가진다. 스승이라는 개념도 먼저 배운이들의 특권이다. 가르침이란 어찌보면 답습이 될수도 있다. 근대에서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모든 교육이나 사상도 식민지 사관을 벗어날수 없고 지식인이라는 타이틀도 일본유학이 대세였다. 식민지 교육의 영향은 해방을 맞이해도 그 굴례를 벗어나지 못한다.
스승의 제자가 가르치는 것이기에 그 제자들은 벗어나기에는 시간과 문화가 필요하다. 맞다고 하는 것을 틀린다는 것으로 바꾸기는 힘들다. 언어나 문자도 식민지 사관을 벗어나기에는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고유의 문화나 사회가 될려면 한 세기를 넘고
성숙되고 상처를 받고 다양해야 한다. 번역이라는 것도 언어도 중요하지만 그 작가의 의도나 고유의 사상을 모르면 글장난이다. 지금은 지구촌의 시대이다. 살아남는 것은 고유의 콘텐츠가 되어야한다.
교육은 아직도 식민지 사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항상 초보부모와 모자라는 교육자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회의 그늘을 만든다는 것이다. 각자 개개인의 능력을 획일적인 한쪽으로 가는 것만 가르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밝은 별이여, 내가 그러하듯 나도 변치 않는다면 좋으련만 ᆢᆢᆢ
고독한 빛으로 밤하늘에 높이 걸려
영원히 눈 꺼풀들을 열어두고 지켜보는
강한 인내심으로 잠들지 않는 자연이라는 은둔자처럼,
물결이 제사장 같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인간의 해안을 맑게 정화하는 것을,
혹은 산과 황야 위에 새롭게 떨어지는
그 부드러운 흰 눈의 가면을 응시하면서."
존 키츠의 위대한 첫번째 유일한 시를 쓰고 오년후 세상을 떠났지만, 시詩 작업은 행복한 미적 삼매를 기록한 것이고, 최고의 순간에는 삼매를 일깨운다는 것이다. 고요함은 "그리스 항아리에 대한 송시 " 의 중심주재이다. 키츠는 대영박물관의 약탈품 파르테논 '신전의 엘긴 대리석' 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판화 종류를 베껴 그리기도 하면서 실제 유물의 요소들과 자신의 상상력을 겔합하여 시간, 열정, 추구와 이를 초윌하는 고요의 존재감을 담는 항아리를 창조하였다. 우아하게 곡선을 이루는 형태에 의거하여 여성으로 의인화 한다.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예슬작품은 모든 의미에서 정물화이다. 항아리 표면에서 사는 인물들은 소음, 움직임, 추격, 두근거리는 맥박, 욕망의 강탈 등 긴박한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모든 것에 좋으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서로 반목할지 모르는 암소와 암소를 도살할 사제, 정숙한 처녀와 그녀를 쫏는 발정난 총각들이 모두 조화로운 구성물 한마디 예술이다. 키츠의 삶은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지않고 오히혀 추악한 고통과 쇠퇴로 가득하고, 부당함, 질병, 노화, 죽음, 자연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만 덧없다. 청춘은 사라지고 꽃이 시들어간다. 오직 관찰자의 높은 시선으로 관조할 때만 아름답고 우아한 삶의 완전성이 드러나는 실제의 살이 아닌 가공물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각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명상을 시도한다.그러나, 파도는 실수를 하면서 잔잔한 본래의 고요의 바다를 만든다. 파도는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파도는 수면의 본질이듯이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다. 인간의 심연의 본질은 수면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항상 고요하다.
명상은 표면은 있는 그대로 두고 근본적인 고요함이 우리를 끌어당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눈을 뜨던지 감든지 마음의 고요를 갖는 것이다. 숭산스님의 말씀대로 "오직 모를 뿐이다." 큰 아름다움은 사소한 생각들을 날려버리고 지워버린다. 무위 無爲야 말로 창의적인 천재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공간이다.
교육이란 무엇일까? 단지 스승과 제자가 이루는 관계라는 것이다. 유명한 알렉산더로 대왕은 동방 원정을 하는 이유도 끊임없이 갈구하는 문화의 개척인지 모른다. 알렉산더로 대왕은 어릴때부터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 라는 철학자 였다. 그 유명한 플라톤의 제자이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아버지 필립포스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은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우린 자식은 혈연관계가 친자관계이지만, 내가 얻는 가치관이나 생각들은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전달된다면, 그는 내 영혼의 자식이고, 정신적 친자일지 모른다. 정신의 유전자는 교육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어릴때 국민학교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
강순효라는 분은 항상 수업시간 중간에 좋은 책을 읽어주셨다. 그 소리는 천사의 목소리이고, 그 내용은 하늘의 울림이었다.
그 교실은 80 여명의 애들과 조용한 울림 뿐이었다. 굶주리고 가난한 철부지 시절 읽어주는 작은 소리는 살아생전 늘 들리는 교육의 전달보다 그리운 스승의 참모습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으로 플라톤은 서양 철학의 이정표를 얻었지만,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는 제자인 위대한 알렉산더로 대왕은 헬레니즘 문화를 이루는 위대한 선구자로 기록되었다. 훌륭한 스승은 위대한 제자로 인해 세상을 깨우치는 가교이다. 스승이 없어면 교육은 사라지고 독선만이 가득한 이익만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만 나타내는 결과위주의 사회만 존재한다.
오늘도 대간길 그길을 몆번 다너도
오늘 같은 구름 바람은 처음인가,?
천번을 오르고 올랐지만 오늘도 절간
스님은 30년동안 새벽에 오르고 있네.
오십년 산을 다녔지만 오늘 만난 청아한
구름은 어찌 저리 찬란하는가?
그냥 가라 쓰라 읽어라 생각은 나중에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