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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 신 ★
오늘날 신발의 재료(材料)는 고무와 가죽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 선대(先代)들은 생활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짚을 이용해 신발을 만들었다. 짚신을 만드는 과정을 우리의 선조(先祖)들은 '짚신을 삼는다'고 했으며 재료로는 짚, 삼(麻), 닥(楮), 왕골, 부들 등이 사용되었다.
짚신의 종류는 삼(麻)이나 닥, 그리고 왕골 등의 재료 첨가(添加)에 따라 고운짚신, 엄짚신, 부들짚신, 왕골짚신 등으로 분류되었다.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초리(草履), 초혜(草鞋), 비구, 망리(芒履), 미투리, 삼신, 절치, 탑골치, 청올치신, 털미기, 짚세기라고도 했다. 짚신은 외출용(外出用)과 작업용(作業用)으로 구분하여 외출용은 신발 앞부분의 '새끼 코(새끼로 만든 코)'를 여러 개 넣어 촘촘하게 했으며, 작업용 신발은 코를 드물게 했다.
짚신의 역사는 약2000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마한(馬韓)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적었는데 초리가 바로 짚신이다.
▲신라 : 짚신모양 잔밭침대 (토기) 경주부근 발굴. 경주박물관
▲가야 : 집신모양 잔밭침대 (토기) 부산 복천동 고분군(古墳群) 53호무덤 출토
짚신을 삼는 방법은 짚으로 새끼를 한 발 쯤 꼬아 네 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하여 바닥을 삼고,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꼬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두 줄로 새끼를 꼬아 짚으로 감아 올려 울을 만든 후,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발에 신기에 알맞게 된다. 짚신은 원래 처음 삼을 때는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만든다. 다만 오래 신으면 모양이 변형되어 오른쪽 왼쪽으로 나눠지는 것이다.
짚신에는 베틀신이라는 한 짝짜리 짚신이 있다. 베를 짜는 사람이 왼발은 버선을 신고
오른발은 베틀과 연결된 짚신을 신고 끊임없이 발을 뻗었다 끌어당겼다 하면서 베를 짜던 짚신이 베틀신이다.
'젓가락도 짝이 있고, 짚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俗談)과는 달리, 베틀에 달려 있는 베틀신은 늘 외짝이었다.
혼기(婚期)에 접어든 복순이가 베짜기를 다 마치고, 그 베로 이불을 만들어서 시집을 가도
외짝 베틀신은 짝을 찾지 못한 채 베틀에 그냥 매달려 있다.
▲(上)베 짜는 여인. 1907년 평양근교 (下)베틀신
김홍도 풍속도 <길쌈>의 베틀 부분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이익의 개탄처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짚신 신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이전에는 정승을 했던 선비들도 짚신을 예사로 신었다고 한다.
▲길가의 짚신장수--1890년 호주 선교사가 찍은 사진
▲장날의 짚신장수
▲짚신장수 아버지와 아들
▲짚신가게
▲잡화점 한쪽에 걸려 있는 짚신
▲짚신을 판자벽에 주렁주렁 걸어놓고 파는 짚신장수
▲미투리장수
조선 초기에는 양반과 평민 사이에서 의복은 분명히 구분 되었지만
짚신은 양반, 평민 할 것 없이 같이 신는 평등한 신이었다.
▲짚신 : 볏짚으로 삼은 신. 초혜(草鞋)
▲미투리 : 삼이나 노끈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 마혜(麻鞋). 승혜(繩鞋)
▲머리카락과 삼실(麻絲)을 섞어 짠 미투리
겅북 안동 이응태 묘에서 부인(원이엄마)의 편지와 함께 발굴
옛적에는 신혼(新婚) 때나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비명(非命)에 떠날 경우 그 아내가 죽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짚신을 만들어 관(棺)속에 넣어 주는 눈물겨운 사연(事緣)도 있었다. 평생토록 수절(守節)하며, 훌륭하게 유복자(遺腹子)를 키워 대(代)를 잇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윤두서 <짚신 삼기>
▲김득신 <여름날의 짚신 삼기>
▲김득신 <짚신 삼기>
짚신에는 환생(還生)이라고 하는, 다시 태어남이 있었다. 옛사람들은 해지고 떨어진 짚신이라고 해서 아무 데나 버리지 않았다.
짚신은 볏짚으로 만들었고, 그 볏짚은 좋은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짚신을 밖에 버리고 왔다는 것은 거름을 버리고 왔다는 뜻이 된다. 해지고 떨어진 짚신은 반드시 마당에 있는 두엄터에 버려졌고, 그렇게 버려진 짚신은 두엄터에서 썩어서 거름이 되었으며, 그 거름은 논바닥에 뿌려졌고 논바닥에 뿌려진 그 거름은 벼 포기를 키워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벼 포기는 가을에 다시 벼 낱알을 떨어내고 볏짚이 되었고, 그 볏짚은 다시 짚신으로 환생(還生)을 했으니,
인간사 회자정리(會者定離)가 거기에도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 해진 짚신을 두엄터에 던져 놓았던 것은, 영원히 이별(離別)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그런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해지고 떨어진 짚신에는 다시 태어남이 있었다.
★ 412년 전의 미투리 한 켤레와 편지 ★
1998년,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 모를 무덤 한 기의 이장(移葬) 작업이 있었다.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外棺)은 갓 베어 놓은 듯 나뭇결이 살아 있어 혹시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추측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까지 이어진 유물 수습 과정에서 무덤은 수백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관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 내자 미투리의 몸체가 드러났다. 조선시대에는 관 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문데다 미투리를 삼은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 이 미투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검사 결과 미투리의 재료는 머리카락으로 확인되었다.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는지 그 까닭은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韓紙)에서 밝혀졌다. 한지는 많이 훼손되어 글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그리고 끝에는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잘라 미투리를 삼았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이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다.
원이 엄마의 편지
구구절절 그리움으로 아로새겨진 편지주인공이 세상을 뜬 것이 1586년 5월이고, 묘가 발굴되고 유물과 함께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 1998년 5월이니, 꼭 412년 만에그들 부부의 지극한 사랑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원이 아바님께 (원이 아버지에게)
병슐 뉴월 초하룻날 집에서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자내 샹해 날드려 닐오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말하기를)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날하고 자식하며 뉘긔 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나와 자식들 누구에게 의지하여 어찌살라고)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는고 (다 던지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자내 날 향해 마음을 엇디 가지며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나는 자내 향해 마음을 엇디 가지런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매양 자내드려 내 닐오되 한데 누어 새기보소 (함께 누우면 언제나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엿비 녀겨 사랑호리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은가 하야 자내드러 닐렀더니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하며 당신에게 말했지요)
엇디 그런 일을 생각지 아녀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몬져 가시난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자내 여히고 아무려 내 살 셰 업스니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가 없어요)
수이 자내한테 가고져 하니 날 데려가소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자내 향해 마음을 차승(此乘)니 찾즐리 업스니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아마래 션운 뜻이 가이 업스니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이 내 안밖은 어데다가 두고 (내 속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자내를 그려 살려뇨하노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따 이 내 유무(遺墨) 보시고 내 꿈에 자셰 와 니르소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내 꿈에 이 보신 말 자세 듣고져 하야 이리 써녔네 (내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셰 보시고 날드려 니르소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자내 내 밴 자식 나거든 보고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사뢸 일하고 그리 가시지 (말할 것 있다 해놓고 그렇게 가시니)
밴 자식 놓거든 누를 아바 하라 하시논고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겁니까?)
아무리 한들 내 안 같을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텬디(天地)같은 한(恨)이라 하늘아래 또 이실가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자내는 한갓 그리 가 겨실 뿐이거니와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려 한들 내 안 같이 셜울가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그지그지 그지 업서 다 못 써 대강만 적네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유무(遺墨) 자셰 보시고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자셰히 뵈고 자셰 니르소 (내 꿈에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다만 자내 보려 믿고있뇌 이따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뵈쇼셔 (몰래와서 보여주세요)
하지 그지 업고 이만 적소이다.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지만 이만 적습니다)
- 현대어로 옮긴이 : 임세권(안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
원이 엄마의 편지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망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韓紙)를 조심스레 벗겨서 돌려 보니 한글로 쓴 편지가 있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심금을 울렸던 이 편지는 남편의 장례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씌어진 것으로
죽은 남편에게 그 아내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내는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하고픈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내려 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적어 나갔다.
구구절절 그리움으로 아로새겨진 편지주인공이 세상을 뜬 것이 1586년 5월이고, 묘가 발굴되고 유물과 함께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 1998년 5월이니, 꼭 412년 만에그들 부부의 지극한 사랑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첫댓글 저는 짚신은 신어보지 못했습니다. 일정 때 게딱짝은 신어 봤습니다.
그러나 시골분들이 짚신을 신으신것은 봤습니다.
이민혜선생님의 글과 사진을 보니 옛 생각이 물씬 납니다.
상경한 후 방콕하던 어느날 '구한말 행상들의 모습을 모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엿장수, 물장수, 땔감장수의 세 편으로 만들었는데, 자꾸만 사진을 찾아내어 보태다보니
한편의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반 씩 쪼개기로,.. 그리고 역사적인 것도 조사해 보기로...
우리 유년은 주로 검정고무신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운동화로 바뀌던 때가 아니던가요?
청주 근교의 외가에 가서 머슴들이 행랑채에 모여 짚신 삼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어릴적 머슴들이 사랑방에서 짚신 삼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이 귀한 자료를 발굴하여 이리 올려 주시니 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선생님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매번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주시니 넘 감사합니다.
정리해 놓고 보면 간단한 것 같은데, 눈이 예전 같지 않아 그런지 사진 작업이 쫌 힘드네요.
매일매일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짚신 삼던 조상님들의 재주가 이어져 부산의 신발산업이 크게 발달했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가지 자료가 너무나 귀하고 흥미있어서 한참을 즐겁게 보았읍니다. 원이 엄마의 편지와 머리칼 섞어서 짠 미투리 사연은 가슴이 저립니다.
아무쪼록 건강 조심하셔서 귀한 자료 많이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새해에 더욱 즐거운 일 많으시기 바랍니다.
고요님의 응원에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원이엄마의 편지와 미투리는 언제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행복한 나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생님 귀한 자료 올리셨네요.
짚신을, 미투리 털매기 짚세기 라고 어릴때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젊은 날 홍성 고향 집을 나설 때 털매기 열댓켤레
짜서 단봇짐 어께에 메고 김제 까지 걸어오셨다는 얘길 하셨거든요.
그리고 가끔 짚세기 삼는것도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을 추억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짚신장수와 짚신가게 사진 4장으로 시작하였는데, 이것저것 조사하다 보니 하나의 멋진 작품이 되었네요.
정리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되어 보람을 느낍니다.
외가에서 미투리와 짚세기를 삼던 머슴들을 본 기억만 있을뿐, 누가 언제 신었는지는 캄캄하네요.
조한금 선생님은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으셔서 이야기가 술술 나오시나봐요. 부럽습니다.
오십도 되기 전 엄동설한에 떠나신 아버지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우리 우리 설날' 잘 지내세요..
짚신 이야기는 여러분이 하셨고...
원이 엄마의 편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TV에도 나와서 흥미롭게 본 적 있는데 한글 원문을 읽은 건 처음입니다.
애끓는 절절한 글을 남긴 원이 엄마는 그후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이렇게 정리를 잘해 주셔 가슴 경건히 여미며 읽습니다 어릴때는 옆에 있던 물건들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는 것들... 저도 이들을 사랑해 짚신.갓. 담뱃대. 북집 옹 대바구니등 간직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지난 날을 회상하시기 바라며 정리를 합니다.
시작은 미약했는데 그동안 찾아내어 포토샵을 거친 사진이 300여 장이 되어갑니다..
계속 애독자가 되어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