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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광개토태왕비문 기록내용]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0以辛卯年倭來渡破百殘00新羅以爲臣民以(永樂)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伊殘國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00000便國城百殘王困逼獻0男女生九一千人細布千匹殘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取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帝躬率水軍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 시대
온조백제가 구태백제의 지배하에 있자 광개토대왕은 구태백제를 궤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한강입구로 들어가는 강화도해안의 관미성을 부수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를 궤멸시킨 후 속리산에서 제천의식을 치르고 돌아 오는 길에 보기병으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 받았다.
[지도]고구려 수군을 이용한 광개토태왕의 백제 공격로
한강변(강동구)의 세계최대 규모의 10여기의 전방후원분들은 백제 초기 황제들의 무덤들이 틀림없다. 발굴하지 않으려는 배경에는 일본열도 일본왕들의 전반후원분들이 바로 백제황족들이라는 역사적 진실이 드러날까봐서 친일세력이 이를 은폐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다.
[광개토대왕비문]과 [환단고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百殘:註 온조백제)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屬國)이어서 조공(朝貢)을 바쳐 왔는데 왜(倭:註 구태백제의 후국인 응신조왜 군사 지칭)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구태백제가)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伊殘國:註 구태백제)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都城:註 남한성. 진사왕은 A.D 371년 7월에 한강 이북 10여 성을 빼앗긴 후 수도를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을 핍박하니 백잔왕(百殘王:註 온조백제 진사왕)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과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0以辛卯年倭來渡破百殘00新羅以爲臣民以(永樂)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伊殘國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00000便國城百殘王困逼獻0男女生九一千人細布千匹殘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取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註 구태백제를 비하하여 이잔(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또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倭)가 동일세력이라고 구태백제 군사가 왜(倭)로 적혀 있다.]
「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A.D 205년 7월에 온조백제는 구태백제(九台百濟)에 정복되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十月 星于東井」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七月太白犯月」
위 "星于東井" 문구 중 "星"는 혜성이라는 뜻이나, 위 문구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대 무리를 뜻한다. 그리고 "東"은 동쪽을, "井"은 역(易)에서 남쪽을 뜻한다. 또 "井"은 수군(水軍) 또는 해상(海上)을 통하여 이동해 온 세력이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위 "星于東井" 문구는 대 무리가 해상을 통하여 동남쪽 방향에 있는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는 뜻이다. 이는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해상을 통하여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 "太白犯月" 문구 중 "태백(太白=太陽:태백성은 금성을 가리키나 이 문구의 태백은 해를 가리킨다)"은 해가 하늘(위)에 있다고 하여 "위(尉)"자를 사용한 위구태(尉九台)를 가리키고, "달(月)"은 월지(月支:달님의 아들 또는 마한이 다스린 지역을 뜻하는 용어) 즉 전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 지역에 건국된 온조백제(溫祚百帝)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또 고대 우리민족은 태백(太白)이 범(犯)하는 곳에는 전란(戰亂)이 일어난다고 믿었는데, "太白犯月"은 태백으로 지칭된 위구태가 월지(月支)로 지칭된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때부터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이 되어 백제(百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본서는 이때부터 온조백제(溫祚百濟)로 적는다.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힘을 배경으로 A.D 371년에 치양에서 고국원왕이 거느린 보기병 2만을 물리치고 A.D 371년에는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평양성을 점령한 후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었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A.D 371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었다. 移都漢山」
위 한산을 일부 사학자들은 재령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에는 위 한산이 지금의 양주라고 적혀 있다.
A.D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이 온조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진사왕이 있었던 곳은 남한성(南漢城)이었다. 이로 보아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이 있기 전 수도를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溫祚百濟) 진사왕(辰斯王)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에 구태백제(九台百濟)가 기각숙니(紀角宿) 등을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阿莘王)을 세움으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A.D 396년에 온조백제(溫祚百濟)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다시 항복한 후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阿莘王)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태자 전지를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이는 A.D 396년 광개토왕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괴멸되지 않은 금강 이남 지방 구태백제 무리들의 압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인질을 왜(倭)에 보낸 것은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왕이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A.D 405년 3월에 온조백제 아신왕이 암살당하자.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은 인질로 와 있는 아신왕의 태자 전지(支)를 온조백제로 보내어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키고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註 아신왕기(阿莘王紀) 14년 3월조의 "백기가 대궐에서 서쪽으로 필련을 펴 놓은 것 같이 뻗혔다" 라는 문구는 왕이 암살 당한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아신왕은 이때 암살당하였고, 같은 해 9월조에 "왕이 돌아갔다" 라고 적혀 있는 것은 왕위 공백기를 숨기기 위하여 아신왕의 사망시기를 실제보다 6개월 늦추어 적어 놓은 것이다.]
A.D 407년에 전지왕(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에 각 임명하였다.
A.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앉힌 후 여신(餘信)에게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맡겼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여영(餘映)이 A.D 416년, 420년, 424년에 백제왕으로 나온다. 이를 보면 이 무렵 구태백제왕 여영이 대외적으로 백제왕 행세를 하였고 온조백제 전지왕(支王)이나 구이신왕(久辛王)은 대외적으로 전혀 백제왕 행세를 하지 못하였다. [註 일부 사학자는 여영(餘映)을 전지왕(支王)이라고 주장하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전지왕(支王)은 A.D 420년(일본서기에는 A.D 414년)에 죽었는데,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여영(餘映)이 A.D 416년, 420년, 424년에 백제왕으로 나오고 그 뒤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여영(餘映)은 A.D 420년에 죽은 전지왕(支王)도, A.D 420년에 즉위한 구이신왕(久辛王)도 아니다.]
그 후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A.D 420년에 전지왕(支王)과 구이신왕(久辛王)을 각 제거함으로써 온조백제는 대(代)가 끊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이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기(久辛王紀)에 구이신왕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즉위 후 곧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구태백제 비유왕(毘有王)이 온조백제의 왕통(王統)을 이은 것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비유왕의 즉위년도에 맞추어 구이신왕의 사망년도를 늦추어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註 전지왕 15년 정월조에 "무술일에 혜성이 태미성의 위치에 나타났다. 十五年春正月戊戌星于太微"라고 적혀 있는데, 혜성(星)은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대무리를 뜻하고, 태미성(太微星)은 세력이 미미해져 있는 전지왕(支王)을 뜻한다. 이 문구는 정월 무술일에 대무리가 세력이 미미해져 있는 전지왕 앞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온조백제의 대(代)가 끊어진 시기를 살펴보면,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조(A.D 396년)에 백잔(百殘:온조백제)은 북쪽에 이잔(伊殘:구태백제)은 남쪽에 있었는 것으로 적혀 있으므로, A.D 396년경은 아직 온조백제의 대가 끊어지지 않았다. 진서(晋書)에는 여영(餘映) 다음 백제왕이 여비(餘毗:비유왕)로 적혀 있고(七年百濟王餘毗復修貢職 以映爵號授之), 여비(餘毗) 다음 백제왕이 여경(餘慶:개로왕)으로 적혀 있다(毗死子慶代立). 즉 비유왕, 개로왕은 여영(餘映)의 뒤를 이은 구태백제왕이다. 따라서 온조백제는 구이신왕을 마지막으로 대(代)가 끊어졌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북사(北史) 등에는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고, 시조는 구태(仇台)이며, 수도는 고마성(固痲城:웅진)이라고 적혀 있다. (有仇台者始國於帶方..治固麻城 周書 百濟傳),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于帶方故地..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 北史 百濟傳),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其都曰居拔城 隋書 百濟傳), (百濟國本亦扶餘之別種 舊唐書 百濟傳), (百濟扶餘別種也 新唐書 百濟傳). 이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당한 후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A.D 475년 이후의 상황을 적은 것이다.[출처 http://cafe.daum.net/kimdaejangremove/2Md/214]
백제왕 계보
1대 온조왕(BC18~AD28년) 2대 다루왕(28~77년) 3대 기루왕(77~128년) 4대 개루왕(128~166년) 5대 초고왕(166~214년) 6대 구수왕(214~234년) 7대 사반왕(234년) 8대 고이왕(234~386년) 9대 책계왕(286~298년) 10대 분서왕(298~304년) 11대 분서왕(298~304년) 12대 계왕(344~346년) 13대 근초고왕(346~375년) 14대 근구수왕(375~384년) 15대 침류왕(384~385년) 16대 진사왕(386~392년) 17대 아신왕(392~405년) 18대 전지왕(405~420년) 19대 구이신왕(420~427년) 20대 비유왕(427~455년) 21대 개로왕(455~475년) 22대 문주왕(475~477년) 23대 삼근왕(477~479년) 24대 동서왕(479~501년) 25대 무령왕(501~523년) 26대 성왕(523~554년) 27대 위덕왕(554~598년) 28대 혜왕(598~599년) 29대 법왕(599~600년) 30대 무왕(600~641년) 31대 의자왕(641~660년)
광개토태왕비문에는 2개의 백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백잔이요 또 하나는 이잔이다. 백잔은 온조나라 '십제'를 의미하고, 이잔은 구태나라 백제를 의미한다. 해(고)추모의 아들 온조백제(백잔)는 시조를 고추모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고, 구태백제(이잔)는 시조를 부여왕이였던 위구태로 시조로 모시고 제시를 지냈고, 황족의 성씨는 부여씨로 사용했다.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濟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隋皇失馭由於征」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담로'는 부여어 '다물(다무로=담로=담)'에서 온 말이다. '담'자가 들어간 지역은 모두 백제담로지역으로 보면 된다. 담아도(대마도).담안(대만).담라(탐라)도 모두 백제담로였다.
백제의 영역(22담로:총독은 황제의 자식들이나 황족)
「백제는 (본국 한반도을 기준으로)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서해)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東北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 」舊唐書 百濟傳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이며, 북쪽은 고구려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동쪽은 신라이다. 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 」新唐書 百濟傳
* 본국 한반도를 기준으로 기록을 이해해야 하는데,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남쪽경계가 왜라고 하니 지나지역의 남쪽지역인양 착각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통전 백제전 등에 의하면 백제는 진(晋)나라 때 요서(북경에서 유성 사이)와 진평(양자강 남쪽 복건성 복주 방면)에 요서.진평 2군을 두었고, (요서군은) 유성에서 북평 사이에 있었으며, (양자강 남쪽에 있는) 백제군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었다. 백제가 요서와 진평에 군은 둔 것은 이때부터였다.
「백제는 진나라 때 요서군과 진평군을 가지고 있었다. (요서군은) 지금의 유성(대릉하 부근 조양)에서부터 북평 사이에 있었다. 百濟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 요서군, 진평군 2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백제는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 지방에) 백제군을 두었다. 百濟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진나라 때 고구려는 요동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에) 요서군, 진평군 2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백제는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 지방에) 백제군을 두었다. 晋歲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백제는 요서를 다스렸다. (중국동해안지방에 있는) 백제군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군은 요서(遼西)에 있는 백제의 군현이 아니고 송나라가 A.D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한 군현의 이름이다. A.D 463년에 송.백제 연합군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북평에서 난하 사이 난하 서쪽 지방에 A.D 465년에 백제가 군현을 설치하자 이에 백제와 사이가 나빠진 송이 A.D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福建城) 복주(福主) 방면에 진평군(晋平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A.D 471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과 송의 진평군이 있는 중국동해안지방을 점령하므로써 송은 진평군을 폐지하였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영유하는 강남(江南:양자강 남쪽)을 진평(晋平)이라 했다. 그 곳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D 502년) 11월에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중국동해안 분국 중심지는 지금의 복건성 복주(福州) 바로 아래인 천주(泉州)였다.]
백제사 개요
1. 고추모의 아들 온조 십제건국(B.C18년) 2.부여왕 위구태 백제 개국(A.D 204년) 3. 구태백제, 온조 십제와 일부 가야국과 일본열도의 야마대연맹 복속시킴(A.D 205-208년 사이) 4. 가야 7국 평정(A.D 208년경) 5.장춘 방면에 백제분국(부여)둠(A.D 238년) 6.요서지방 진출(A.D 313-316년) 7.중국동해안지방 진출(A.D 316년) 8. 남평양(지금의 평양) 점령(A.D 371년) 9. 중원진출(A.D 386년경) 10.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가 궤멸되어 구태백제 지배층이 일본열도로 피신함 11.웅진시대에 일본열도의 왜와 연합하여 호남 영산강지역의 마한 잔존세력 복속 12.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멸망 13.의자왕과 부여융은 당나라로 압송.요서지역에 백제국 개국 150년간 유지, 일부 백제황족은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일본서기] 편찬
백제는 황해도(대방)에 개국한 구태나라를 의미한다
구태백제의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구태(九台)가 처음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구태백제의 수도는 대방군에 있지 않았다. 중국의 정사인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시조(始祖)가 구태(仇台)라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고마성(固麻城:웅진)에서 다스렸다고 적혀 있으며(治固麻城),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치성(治城:왕성)을 고마성(固麻城:웅진)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으며(號所治所曰固麻), 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국성(國城:왕성)에 구태(仇台)의 묘(廟)가 있는데 일년에 네번 그곳에 제사 지낸다고 적혀 있다(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 이를 보면 구태백제의 수도는 웅진에 있었다. [註 한원(翰苑) 所引 괄지지(括地志)에 "國東北六十里 有熊津城 一名 固麻城"이라 적혀 있다. 즉 고마성을 일명 웅진성이라 불렀다.]
구태백제 역사
가. 대방고지로 이동하여 온조백제와 마한연맹 정복
위구태는 A.D 204년 10월에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九台百濟)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溫祚百帝)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보면 온조백제는 초고왕(肖古王)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고(高)자나 구(仇)자가 들어가는 왕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부터 온조백제의 왕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 영락(永樂) 6년조에는 왜(倭:구태백제가 서.남해, 대마도, 일본열도 방면의 倭를 군사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비문에는 구태백제가 "伊殘" 또는 "倭"로 비하되어 적혀 있다)가 백잔(百殘:온조백제)을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註 구태백제에 정복된 익산 금마 마한은 여러개의 소국(小國)이 모여 연맹을 이룬 소국연맹(小國聯盟) 형태였으나, 온조백제는 건국 후 주변 소국(小國)들을 정복하는 즉시 해체(解體)하고 직할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규모는 커도 1개의 나라였다. 따라서 구태백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후 정복지를 통치한 방법은 각 달랐다. 온조백제는 왕이 전지역을 직할통치 한 중앙집권체제 국가였기 때문에 담로를 보내지 않고 온조백제왕만 구태백제왕이 책봉하였다. 그러나 익산 금마 마한은 수십개의 소국이 모여 연맹을 이룬 소국연맹 형태였기 때문에 구태백제의 왕자, 종친들이 각 수개의 소국을 맡아서 통치하였다. 이때 각 소국(小國)의 왕(王)은 구태백제왕이 보낸 담로들에게 복속하였고, 각 소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린 사람은 구태백제왕이 보낸 담로들이었다.]
나. 야마대연맹 복속시킴
익산 금마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초고왕(肖古王)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A.D 97-103년경에 일본열도에 세워진 소국연맹)을 복속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 2년조에는 임나(任那: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고,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에는 왜왕(倭王)이 백제의 후왕(侯王)으로 적혀 있으며,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왜(倭)는 백제의 보좌였다"고 적혀 있고,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46년조에는 백제(百濟)와 왜(倭)가 초고왕 때부터 교류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동 49년조에는 일본열도왜와 백제 군사들이 가야지역에서 같이 군사활동을 벌여 점령한 점령지를 백제에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 백제와 일본열도왜가 교류를 시작한 해가 신공황후 46년(A.D 246년)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초고왕 재위시기는 A.D 166년부터 214년까지이고, 구태백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해는 A.D 205년 7월이며,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한 해는 A.D 208년경(내해이사금 13년)이므로, 야마대연맹이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기 시작한 때는 A.D 205년 7월에서 208년 사이 어느 해이다. [註 A.D 205년 7월-208년경은 야마대연맹의 신공황후 재위 때이다, 신공황후가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긴 것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을 복속시키기 이전에 벡제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통로에 있는 남해(南海)와 대마도에 있는 소국(小國)들을 먼저 복속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다.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 받음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 49년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3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과 온조백제 군사들을 동원하여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 49년은 A.D 249년이 되나, 실제로는 A.D 208년경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 황전별(荒田別) 록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久)들과 같이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卓淳國)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때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칠 수 없다. 다시 사백(沙白)과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증가할 것을 청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原註 이 두 사람은 성을 알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沙白)과 개로(蓋盧)와 함께 가게 하였다. 모두 탁순(卓淳)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沈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四九年春三月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至卓淳國將襲新羅時或曰兵衆少之不可破新羅更復奉上沙白蓋盧請增軍士卽命木羅斤資沙沙奴[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俱集于卓淳擊新羅而破之因以平定比自火本南加羅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仍移兵西廻至古奚津屠南蠻沈彌多禮以賜百濟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亦領軍來會時比利中布彌支半古四邑自然降服」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3년(A.D 208년) 봄 2월 서방의 군.읍을 순시하고 열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註 구태백제와 야마대연맹 군사 지칭)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十三年春二月西巡郡邑浹旬而返夏四月倭人犯境遣伊伐飡利音將兵拒之」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4년(A.D 209년) 가을 7월 포상8국(浦上八國:註 삼국사기 열전 勿稽子傳<물계자전>에는 骨浦<골포:마산>, 柒浦<칠포:칠원>, 古史浦<고사포:고성?> 등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 勿稽子條<물계자조>에는 保羅國<보라국>, 古自國<고자국:고성>, 史勿國<사물국:사천> 등으로 적혀 있다)이 공모하여 가라국(註 아라가야)을 침범하니 가라국의 왕자가 와 구원을 요청하므로 왕은 태자 우노(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을 시켜 육부(六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탈환하였다. 十四年秋七月浦上八國謀侵加羅加羅王子來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將六部兵往救之擊殺八國將軍奪所虜六千人還之」
A.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기 49년(A.D 249년)조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왜(倭)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의 백제관련 기사를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초고왕과 구수왕은 온조백제(溫祚百濟) 지역을 다스린 구태백제(九台百濟)의 후왕(侯王)이다.
위 신공황후기에는 백제.야마대연맹 연합군이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4개읍을 항복받았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조에는 신라가 가라국(아라가야 지칭)를 구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과 삼국유사 물계자편에도 적혀 있다. 일본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백제.야마대연맹 연합군은 7국을 평정하였다가 신라군의 개입으로 아라가야를 도로 빼앗겼다. 이때 신라가 아라가야를 구원한 것은 아라가야가 A.D 201년에 신라와 강화한 후 그때부터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으 보인다. [註 이때 백제.야마대연맹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된 가야국들은 구태백제가 책봉한 왕으로 왕통(王統)이 바뀌었고, 이때부터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들이 가야 지방으로 대량 이주함으로써 가야 지방의 중심지가 종전까지 김해, 고성, 함안 등 해안과 가까운 곳에서 고령, 거창 등 내륙 지방으로 바뀌었으며, 부여 무리들의 특성상 이때부터 가야 지방에도 기마전술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라. 장춘 방면의 부여를 백제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고이왕기(古爾王紀) 5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A.D 23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고이왕(古爾王) 5년(A.D 238년) 봄 2월 부산(釜山:註 부여 지역)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五年春二月田於釜山五旬乃返夏四月震王宮門柱黃龍自其門飛出.」
위 부산(釜山)의 부(釜)는 부여를 뜻하는 고대말 불달(해님<천제>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산(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말 "달"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達" 또는 "山"으로 적었는데, 이 경우는 산(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자주 사용된 말이고,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진(辰)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2월에 만주중앙에 위치한 부여 지역으로 출병하여 50일만에 평정을 마치고 돌아와 4월에 부여 지역을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A.D 238년에 위구태가 부여 지역으로 출병한 것은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구태의 인척 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구태는 부여 지역으로 출병하여 부여를 지킨 후 장춘 방면의 부여를 떼어 내어 구태백제의 분국(分國)으로 만들고 분국왕으로 간위거(簡位居)를 즉위시켰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가 즉위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尉仇台死,簡位居立),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간위거는 이때 즉위하였다.
구태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떼어 내어 분국으로 만든 것은 그때까지 요동의 공손씨와 구태백제(장춘 방면의 부여 포함)가 동맹세력이었는데, 요동의 공손씨가 위나라에 토벌됨으로써 장춘 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장춘 방면의 부여를 구태백제왕이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A.D 246년에 간위거왕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A.D 238년부터 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 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離間戰術)에 넘어가 A.D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마. 유성에서부터 북평까지 요서지방에 진출
A.D 313-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한 후 유성(柳城:지금의 조양)에서부터 난하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나라태수(樂浪太守:대릉하 방면), 대방태수(帶方太守:대릉하 방면)를 두었다.
그 뒤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서진(西晋)이 망하는 틈을 타서 서쪽으로 난하에서부터 북평(北平:註 북경)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광양태수(廣陽太守:북경 동쪽 계 방면), 조선태수(朝鮮太守:난하 서쪽 방면)를 두었다.
통전 백제전 등에 의하면 백제는 진(晋)나라 때 요서(북경에서 유성 사이)와 진평(양자강 남쪽 복건성 복주 방면)에 요서.진평 2군을 두었고, (요서군은) 유성에서 북평 사이에 있었으며, (양자강 남쪽에 있는) 백제군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었다. 백제가 요서와 진평에 군은 둔 것은 이때부터였다.
「백제는 진나라 때 요서군과 진평군을 가지고 있었다. (요서군은) 지금의 유성(대릉하 부근 조양)에서부터 북평 사이에 있었다. 百濟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 요서군, 진평군 2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백제는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 지방에) 백제군을 두었다. 百濟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진나라 때 고구려는 요동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에) 요서군, 진평군 2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백제는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 지방에) 백제군을 두었다. 晋歲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백제는 요서를 다스렸다. (중국동해안지방에 있는) 백제군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군은 요서(遼西)에 있는 백제의 군현이 아니고 송나라가 A.D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한 군현의 이름이다. A.D 463년에 송.백제 연합군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북평에서 난하 사이 난하 서쪽 지방에 A.D 465년에 백제가 군현을 설치하자 이에 백제와 사이가 나빠진 송이 A.D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福建城) 복주(福主) 방면에 진평군(晋平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A.D 471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과 송의 진평군이 있는 중국동해안지방을 점령하므로써 송은 진평군을 폐지하였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영유하는 강남(江南:양자강 남쪽)을 진평(晋平)이라 했다. 그 곳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D 502년) 11월에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중국동해안 분국 중심지는 지금의 복건성 복주(福州) 바로 아래인 천주(泉州)였다.]
바.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양자강하류에서부터 월남(越南) 사이 즉 지금의 강소성(江蘇城), 절강성(浙江城), 복건성(福建城), 광동성(廣東城), 광서자치구(廣西自治區)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비류왕기(比流王紀) 1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비류왕(比流王) 13년(A.D 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 十三年春早大星西流夏四月王都井水溢黑龍見其中」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백제분국(百濟分國)의 대장군이 서쪽으로 난하를 건너 북경 방면과 중국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백제의 수군이 강해졌다는 뜻이며, 검은 용(龍)이 왕도의 우물(井)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은 새로운 분국(分國)을 개척한 백제분국의 수군 대장군이 왕도로 와서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분국왕으로 임명된 사람은 대방태수(帶方太守:대릉하 방면), 조선태수(朝鮮太守:난하 서쪽 방면), 광릉태수(廣陵太守:양자강하류 방면)를 겸한 양무(楊茂)로 추정된다.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가 晋.宋.濟.梁 나라 때 양자강 좌.우에 진출해 있었다고 적혀 있고,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백제가 제(齊:산동성 방면), 노(魯:齊 서남 방면), 오(吳:양자강하류 방면), 월(越:吳 남쪽에서부터 월남 사이 중국동해안지방) 등지를 평정하여 관서를 두었다고 적혀 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양자강 좌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晋宋濟梁據江佐右」北史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양자강 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晋宋齊梁據江左」周書 百濟傳
「전략. 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齊:註 산동성 방면), 노(魯:註 제나라 서남쪽 방면), 오(吳:註 양자강하류 방면), 월(越:註 吳 남쪽에서부터 월남 사이 중국동해안지방)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王爵)을 분봉(分封)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征伐)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明治年間)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고 부진(不振)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로 돌아왔다. 先是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設官署索籍民戶分封王爵屯戌險塞軍征賦調悉準內地明治年間百濟軍政衰頹不振權益執行盡歸聖朝」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는 강남(江南:註 양자강 남쪽 중국동해안 지방)을 진평(晋平)이라 했다. 그 곳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D 502년) 11월에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註 상해 서남), 회계(會稽:註 강소성 소주),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註 복건성)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遼西)와 진평(晋平) 등의 군(郡)을 취하고 백제의 군(郡)을 폐했다. 濟所領曰遼書晋平江南有越州其屬縣一曰山陰二曰山越三曰左越四曰左越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攻取越州改暑郡縣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十二年以新羅民於泉州以實之是歲以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晋平等百濟郡廢」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濟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隋皇失馭由於征」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백제는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東北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 」舊唐書 百濟傳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이며, 북쪽은 고구려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동쪽은 신라이다. 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 」新唐書 百濟傳
사. 중원(中原)에 진출
구태백제(九台百濟)는 A.D 316년에 양자강하류와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자치구 방면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으로 진출한 후, A.D 383년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군대가 비수에서 동진(東晋) 군대에 패배하자 후위(後魏:A.D 386~) 때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였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강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에 북위 때 중원에 자리잡았다. 自晋宋齊梁據江左後魏宅中原」周書 百濟傳
위 중원은 하남성(河南城) 낙양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심지이다.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백제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에 발령한 태수들의 명칭에 청하태수(靑河太守:산동반도 북부지방)와 성양태수(城陽太守:산동반도 남부지방)가 들어 있다. 이를 보면 백제는 양자강하류 방면에서 중원으로 진출할 무렵 지금의 산동성(山東城), 강소성(江蘇城) 방면에도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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