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가 충돌해 건물 2동이 완파되고 국방부 건물에도 여객기가 충돌하는 등 동시 다발적인 테러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테러로 인한 사망 실종자는 4763명이며 미국은 테러 용의자로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지목하고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켰고 세계경제도 한동안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되고 음모설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용어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프리메이슨' 단원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어떻게 미국정부가 국민을 희생시킬 수 있는 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전례를 살펴보겠습니다.
* 목차
1. 미국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닙니다.
2. 911 테러, 음모의 증거들
3. 911 테러로 엘리트들이 얻은 수확 (결과이자 목적)
4. 결론
1. 미국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보이지 않는 검은 세력에 의해 조정되는데 그들은 유대인 재벌과 이집트 신앙을 믿는 프리메이슨입니다. 유대인 재벌은 세계적인 금융, 석유, 무기, 곡물, 자원 기업을 소유하고 있고, 거의 모든 언론사도 이들의 손 안에 있어 언론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 줄 알고 있지만 사회 고위층인 엘리트들은 거의 프리메이슨 소속입니다. 조지 워싱턴, 조지 부시, 빌 클린턴 등 대부분의 대통령이 프리메이슨이며 이들의 목표는 세계정부를 세우는 것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이러한 공작을 수행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CIA는 마피아와 손잡고 마약거래를 통해서 돈을 법니다.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의 부정을 보다 못한 링컨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이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두 분 다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정부의 모든 정책은 유대인 재벌과 프리메이슨의 목적을 위해서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국민을 비롯한 사람 목숨은 파리만도 못하게 생각합니다. 다음의 실례를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1) 진주만 기습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은행을 장악한 유대인이 양쪽 진영에 돈을 빌려줘 돈을 벌기 위해 일으켰습니다. 독일이 패망하고 가난에 허덕일 때 히틀러를 도와 돈을 빌려주고 군수산업을 발전시킨 사람은 미국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독일을 부추켜 전쟁을 일으켜 또 다시 떼돈을 벌려고 했던 유대인은 독일이 예상 외로 잘 싸우고 유대인을 핍박하자 미국을 통해 이를 제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차례 중립을 약속했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역시 프리메이슨)은 전쟁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마침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어 어느 한 나라가 공격당하면 도와준다는 군사동맹을 맺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음모를 짭니다. 내용은 일본이 미국을 선제 공격하도록 해서 전쟁에 참여할 명분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태평양 함대를 하와이에 파견해 일본의 유류 보급선을 끊습니다. 중국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일본은 유류 공급이 끊기면 비행기, 군함, 자동차를 다 세우게 돼 나라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무리인 줄 알면서도 진부만을 기습 공격하기로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주일 미국 대사가 보고 했지만 미국 행정부는 이를 무시합니다. 미군 정보부대도 일본의 야마모토 작전 계획의 암호문을 해독해 육군성에 세 번 이상 보고했지만 역시 무시 당합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전투기들이 진주만을 공습했지만 루스벨트의 지시대로 둥글게 배치된 미군 비행기는 이륙도 못하고 파괴당합니다. 그렌데 특이한 점은 진주만에 항공모함은 없고 1차 대전 이전에 제작된 고물 군함 8척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한 항공모함 3척은 이미 호위 구축함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했던 것입니다.
진주만 기습에 의해 군인 2341명이 사망하고 1143명이 부상했으며 비행기 다수가 파괴되고 군함 8척이 침몰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의 비겁한 기습에 당한 미국민과 의회는 열렬히 전쟁을 원하게 됬고, 루스벨트는 무리 없이 전쟁에 참여해 군수 업체의 배를 불려주게 됩니다.
단지 전쟁에 참여할 명분을 얻기 위해 자국 군인을 무참히 희생시킨 미국 행정부를 보면 이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알프레드 머라 빌딩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9층짜리인 이 건물에는 마약단속국 등 미국 연방정부의 각 기관 사무실과 탁아소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출근한 시간에, 탁아소가 있는 건물을 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범인이 테러에 대한 선전효과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또 사고 당일은 바로 2년 전 사교집단인 다윗파의 방화자살 사건 날짜와 같다는 점이 중요한 단서였다.
범인으로 붙잡힌 티모시 맥베이(당시 26세)는 사건 발생 90분 후 발생 지점에서 100km쯤 떨어진 거리에서 과속으로 달리던 중 속도 위반으로 순찰대의 검문을 받았습니다. 구금된 맥베이는 보석금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담당판사가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하루 더 구금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검문 경찰관이 맥베이를 알아보고 검거했습니다.
맥베이는 사건 발생 2년 전 텍사스에서 집단자살한 사교집단 다윗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으로 168명이 죽고, 6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폭파 주범인 맥베이는 사건 발생 6년 2개월이 지난 2001년 6월 11일 인디애나주 테러호트 연방교도소에서 사형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고 사건의 내막은 완전히 다릅니다. 폭탄 전문가에 의하면 연방정부가 발표한 대로 건물 밖 트럭에 암모니아 사제 폭탄을 가득 싣고 터뜨려도 건물의 튼튼한 기둥을 날려 버릴 수는 없다고 합니다. 또한 폭탄은 내부에서 폭발해 유리창을 비롯한 건물 잔해가 외부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언론 보도는 한결 같이 건물 내부에서 폭발이 있었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 이유 옶이 정부 발표대로 언론이 태도를 바꿉니다. 정부에서는 트럭 폭발로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폭발 지점에는 폭 10m, 깊이 2.45m의 큰 구덩이가 패었다고 했지만 사진상으로 건물 앞에 큰 구덩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안 검색이 강한 연방정부 건물에서 여러 기둥에 정밀하게 대형 폭탄을 설치하려면 내부의 공모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범인으로 잡힌 티모시 멕베이도 원래는 군인 출신으로 케네디 암살범으로 몰린 오스왈드처럼 세뇌된 희생양에 불과합니다.
미국 정부가 이러한 자작 테러를 일으키는 이유는 테러를 명목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CIA나 NSA의 예산을 증액하고 국민에 대한 감시를 강화할 수 있는 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 쪽으로 화살을 돌려 사람들이 기독교를 혐오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개인 화기를 금지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테러 사건은 국민에게 공포심을 줘 정부 정책에 순응하게 함으로써 세계정부 수립을 정당화 할 것입니다.
다음 동영상은 http://www.apfn.org/old/apfncont.htm 에 있는 자료로 한글자막을 삽입했습니다. 아마추어가 제작해 동영상이 슬라이드처럼 끊어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막을 보시려면 아드레날린 플레이어를 다운 받아 설치하시고, 동영상 코덱을 다운 받아 설치하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링크를 클릭해 보시거나 다운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의 의문점
3) 자작 테러극의 역사
미국의 비밀공작을 파헤쳐 유명해진 언론인 제임스 뱀포드(James Bamford)1)에 따르면,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1962년에 이른바 '노스우드 작전(Operation Northwoods)'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이 작전은 1961년 4월 17일 미 중앙정보국(CIA)의 배후조종과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집단이 쿠바를을 기습공격한 '피그만(Bay of Pigs) 침공사건'이 실패하자, 미국 군부가 직접 쿠바를 침략하기 위해 꾸며낸 침략전쟁 시나리오입니다.
노스우드 작전은 쿠바의 반미테러리스트로 위장한 미군이 미국의 대도시에서 미국 여객기를 공중납치하여 쿠바의 따나모에 있는 미 해군기지를 자폭공격으로 파괴하고 나서, 그 테러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쿠바 정부라고 조작하여 보복공격이라는 명분으로 쿠바를 침공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당시 대통령 케네디가 채택하지 않아 지금까지 40년 동안 비밀문서고에 파묻혀 있다가 2001년 말에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전쟁사를 돌이켜보면, 적대세력을 공격하기 위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자해테러극을 조작하고, 그것을 빌미로 하여 침략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언제나 제국주의자들의 관행이었음이 드러납니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북경의 노구교(Marco Polo Bridge)에서 자해공격사건을 조작한 것이 그러했고,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기 위하여 자해공격사건을 조작한 것이 그러했으며, 1964년 8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하여 날조했던 '통킹만 사건'이 그러했습니다.
미국이 자해 테러극을 조작함으로써 도발했던 최초의 침략전쟁은 19세기말의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입니다. 미국은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아바나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호를 스스로 폭파하는 자해테러극을 벌렸습니다. 그 다음날 미국은 스페인에게 식민지 쿠바를 포기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고, 미국 언론들은 스페인의 테러공격에 보복하라고 선동했습니다.
4월 10일 스페인은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굴복하였지만, 그 다음날 미국은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대기시켜두었던 병력 23만 명을 동원하여 쿠바를 봉쇄했습니다. 미국은 자해테러극을 조작하고 침략전쟁을 자행하여 쿠바에서 스페인을 몰아내고 쿠바를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쿠바의 사탕수수산업을 강탈하려는 미국 자본가계급의 음모가 배후에 숨어 있었습니다.
2. 911 테러, 음모의 증거들
1.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의 돈독한 관계
테러혐의 자금을 색출하기 위해, 오사마의 본가이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인 '사우디 빈라딘' 그룹의 거래처를 추적한 FBI 수사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역대 미국 행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관련자로 줄줄이 등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였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이 만난 부시 전 대통령의 대변인 진 베커 여사는 “부시가 1998년 11월 오사마의 가족들과 한 번 만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시 전 대통령과 라덴 일가가 여러 차례 만났으리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던 기자들이 그가 쓴 감사장을 제시하자 그녀는 말을 바꿨습니다. “부시는 라덴 일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두 번밖에 안 만났어요.” 지난 2000년 1월, 미국 대통령의 부친과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의 가족이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지난 9월 29일자 『월스트리트 저널』 오스트레일리아 주말판의 기사입니다.
부시는 세계 최대의 상업은행으로 방위산업과 항공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칼라일 그룹의 아시아·중동 담당 상담고문직을 맡고 있습니다. 라덴 일가는 칼라일 그룹을 통해 미국의 국방산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오사마의 테러활동을 막기 위해 혹은 이번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방비를 늘리면 부시 일가와 라덴 일가는 사이좋게 엄청난 수익을 누리게 되는 셈입니다.
빈라덴 가문은 사우디에서 성전 건축으로 돈을 번 회사로 1500억 달러에 이르는 사우디 미군기지 건설을 도맡아 한 바 있습니다.
2, 미국정부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이용해 왔습니다.
얼마전 MBC 다큐 스페셜에서 미국이 중미의 반군들을 지원하고 독재정부를 지원한다고 방송하였습니다. 미국이 부패한 독재 정부를 지원하는 것은 친미 정권을 유지시키고 후진국이 선진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역시 이런 더러운 일을 하는 곳은 CIA입니다.
미국은 199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와 유고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을 추진하였습니다. 중앙아시아는 주요 석유산지이고 유고는 아프칸 등지에서 재배한 마약을 수송하는 주요 루트이기 때문입니다. CIA는 이 지역의 테러조직들이 마약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세탁해 주거나 무기로 바꿔주는 방식의 불법적인 지원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지의 이슬람 테러조직 젊은이들을 분쟁지역으로 날라 반미 성향의 정부와 싸우게 했습니다.
이 같은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직은 파키스탄의 정보국이었습니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CIA의 지령하에 1990년대 초·중반 중앙아시아 및 중동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무기를 발칸반도로 수송해 당시 보스니아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영국의 정치경제 정보지인 '국제 미디어 코퍼레이션'은 1994년 10월 미국이 보스니아의 이슬람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발칸 반도로 잠입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1994년 9, 10월 아프간의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들이 보스니아로 들어가기 위해 크로아티아 플로체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미국 특수부대와 함께 왔는데, 미군들의 임무는 지휘체계 확립과 병력통제, 보스니아 내 이슬람 반군과의 정보망 설립 등이었습니다.”
미국 공화당은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불법적인 군사공작을 벌여온 사실을 알아낸 뒤 의회 보고서를 작성 대여 투쟁에 나섰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996년 9월 22일자 기사에서 이 의회보고서를 인용, 보도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4월 이란에서 사라예보로 무기를 공수하겠다는 CIA 건의를 승인했다. CIA는 시민단체로 위장한 제3세계구호청(TWRA)이라는 조직에 보스니아로의 무기 공수를 위탁했는데 TWRA는 오마르 압둘과 오사마 빈 라덴의 이슬람 테러조직과 연관된 단체로 보인다.”
보고서는 클린턴 행정부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수천 명을 끌어들임으로써 보스니아를 이슬람 세력의 기지처럼 만들었다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보고서는 클린턴 행정부가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비롯한 6, 7개에 달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조직과 공범관계를 형성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화당에게 이 사건은 민주당의 도덕성에 결정적 흠집을 낼 수 있는 엄청난 호재였습니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이 전의를 다지고 있던 1998년 중반 클린턴이 인턴 여사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르윈스키 스캔들’이 미국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공화당은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테러조직과의 결탁보다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민주당을 공격하기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워싱턴에서 이 같은 정치놀음이 벌어지고 있을 동안 보스니아의 불길은 코소보로 옮겨갔습니다. 이슬람 무장조직들이 알바니아계 KLA(코소보해방군)의 반유고연방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코소보로 몰려간 것입니다. 미국은 보스니아에서의 경험을 코소보에서 다시 활용했습니다.
이에 앞서 1998년 11월 『선데이 타임즈』는 오사마 빈 라덴이 코소보 내전에 개입했다고 전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부가 오사마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과 유고 연방을 해체하기 위해 공동 작전을 벌였습니다. 더욱이 이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KLA는 마약거래로 조직 운영 자금을 조달하는 테러리스트들이었습니다. ‘지구적 범죄조직 퇴치프로그램’의 프랭크 클리포 수사관은 2000년 12월 미국 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KLA는 마약거래를 통해 일부 자금을 조달한다. 알바니아와 코소보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약재배 지대인 ‘금 초승달 지역’을 유럽의 마약시장으로 연결하는 이른바 발칸 루트의 중심부에 있다. 유럽에 밀수되는 헤로인의 80%가 통과하는 이 루트에서는 매년 4천억 달러에 상당하는 마약이 거래되고 있다.”
문제는 의회가 정부와 국제 테러리즘의 연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역사)' 단원을 보시면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기 전 마약장사로 돈을 번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 국제적인 마약거래에 관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3. 빈 라덴은 CIA 요원이거나 프리메이슨일 확률이 높습니다.
빈 라덴은 1979년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때부터 CIA의 도움을 받아 아프칸 반군을 지휘했습니다. 30년 동안 빈 라덴은 CIA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마약거래, 반군활동, 테러 등의 활동을 했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빈 라덴 가문도 부시 가문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무기사업에 투자했습니다. 그런 빈 라덴이 하루 아침에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핍박 받는다는 이유로 미국을 상대로 테러 행위를 할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CIA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암살할 수 있고, 인공위성으로 얼굴까지 식별해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 무서운 조직이란 것을 아는 빈 라덴이 CIA를 배반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빈 라덴은 CIA의 지령을 받는 요원으로 이중 간첩과 같이 활동하며 공작을 벌이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911 테러로 빈 라덴과 이슬람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회교 원리주의 국가인 아프칸의 멸망과 회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알카에다의 와해밖에 없습니다. 빈 라덴이 돌머리가 아닌 이상 아무 실익이 없는 일을 할 리가 없고, 돌머리라면 그런 정교한 테러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ISI(파키스탄 정보국)은 CIA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모집해 중앙 아시아나 유고로 송출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2001년 여름 ISI 부장인 아마드가 자기 심복을 시켜 아타(911 사태의 실질적 지도자)에게 10만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들어났고 FBI도 이를 시인했습니다. (2001.10.11 타임즈 오브 인디아) 이 일로 아미드는 사임했습니다.
그렇다면 빈 라덴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는 회교인들도 속고 있는 것입니다. 회교인들에 대한 경멸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압박을 무마시켜 줄 것이고, 이는 미국을 지배하는 유대 재벌들이 바라는 바 입니다. 어떻게 빈 라덴이 회교인들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까 의문이 든다면 빈 라덴이 프리메이슨일 확률을 따져 봐야 합니다. 프리메이슨들은 이념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애국주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4. 테러에 대한 경고와 보고가 무시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911 테러와 같은 고도의 동시 다발적인 테러를 일으키기 위해선 4년의 준비기간과 100명의 준비요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매년 300억 달러의 예산을 쓰면서 통신과 e-mail을 감청하고, 암호를 해독하고,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번호판까지 식별해 내는 미국 정보 기관이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에서 활개를 치고, 자금을 조달하고, 수 없이 많은 지령을 받았는데도 몰랐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만약 진짜 몰랐다면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로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나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002년 3월 미국 맥키니 의원은 행정부와 정보기관에 대한 의회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2001년 2월에 미국 국가 안보국(NSA)는 테러리스트들의 비밀암호를 해독했다고 발표했습니다.(UPI) 그러므로 미국 정보기관이 빈라덴의 테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2001년 6월에 독일 정보부 BND는 미국 정보부에 '중동의 테러분자들이 민간 항공기를 납치하여 그 비행기를 미국 상징물을 격파하는 무기로 사용할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2001.9.14. 프랑크푸르트 알케마이네 자이퉁)
2001년 7월 애리조나 주재 FBI 요원은 애라조나 비행학교에서 많은 중동사람들이 조종훈련을 받는데, 빈라덴이나 테러리스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하였습니다.
2001년 8월 부시는 빈 라덴이 민간 여객기를 납치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2001.5.15. CBS, CNN) 2001년 8월 FBI가 보스턴에서 빈 라덴과 관련된 무장 단원을 체포했는데, 그는 비행훈련을 받은 적이 있고, 체포될 당시 보잉 항공기 정비교본과 비행요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1.9.13 로이터 통신)
미 해군 정보장교였던 브리랜드는 러시아에서 정보원(나중에 암살당함)으로부터 911 테러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지만 미국으로가 봤자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브리랜드는 케나다 정부에게 이를 폭로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차린 미국 정부는 그를 신용카드 사기범으로 몰아 케나다 경찰에 체포를 요청했고, 그는 2000년 12월 6일 체포되 구금당합니다. 2001년 8월 11일 그는 911 테러에 대한 내용을 종이에 적어 봉투에 넣어 간수에게 전해 주었는데, 2001년 9월 14일 에서야 열람되었지만 비밀로 묻혀버립니다. (2001.10.23 토론토 스타)
2001년 9월 초 미네소타의 FBI 요원이 테러 용의자 무샤우이를 체포해, 그가 비행교습을 받았고, 비행기로 세계 무역센터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의 노트북의 검사 허가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2002.5.20. 뉴스위크)
진주만 기습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채널에서 보고와 첩보가 접수 되었지만 일부러 무시하거나 방해했습니다.
5. 부시 대통령 측근이 테러공격이 있기 며칠 전에 항공사 주식을 전량 매각했습니다.
2001년 9월 17일 일요일 "60분(60 Minutes)"이라는 CBS 텔레비젼 프로그램은 부시 대통령의 가까운 동료들이 갑자기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테러리스트" 공격들이 있기 단 며칠전에 그들의 모든 항공사 주식들을 팔았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곧 이어 CFR(프리메이슨 조직)에 의해 조종받는 언론에 의해 묻혀버렸습니다
또한 항공기 충돌 테러가 벌어지기 직전 무역센터 내부에 입주한 금융회사와 민간 항공사 사이에는 주식을 팔고 사는 대량거래가 있었습니다. 수 많은 거래 회사 중에 유독 항공사 주식으로는 테러로 피해를 당한 2개의 항공사 뿐이었습니다. 이는 테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안 세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블룸버그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9.11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아메리칸 항공사의 주식거래량은 통상 거래량의 5배 정도로 폭증했고,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주식거래량도 9.11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에 폭증했습니다. 또한 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해 있었던 금융회사 모건 스탠리와 사건 현장 부근에 있는 금융회사 메릴린치의 주식거래량도 통상 거래량보다 최저 12배에서 최고 25배나 폭등했습니다.
미국 증시감독위원회의 조사를 인용한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 2001년 10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9.11 사건으로 폭락할 주식들, 예를 들면 항공사의 주식, 보험사의 주식, 여행사의 주식을 미리 내다 팔고, 그 대신 불경기에 가장 잘 나가는 5년 만기 국채를 사들여서 50억 달러의 이익을 챙겨간 세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6. 아마추어 경비행기 조종사가 대형 여객기를 조종할 수 있나요?
미국 비행학교에서 경비행기를 몰아본 경험밖에 없는 초보 조종사가 첨단 장치로 가득찬 대형 여객기를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테러범들이 항공교육을 받았던 플로리다의 비행학교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테러범들이 경비행기 조차 서투르게 조종할 정도의 아마추어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먼 곳에서도 잘 보이는 매우 커다란 목표물이라고 해도, 매우 빠른 속도로 저공비행을 하면서 목표물에 돌진하여 오차 없이 충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착륙 유도 장치도 없는 건물에 대형 여객기를 순전히 육감으로 정확하게 들이 받는 것은 항공모함에 전투기 착륙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예술입니다.
비행기 조종은 항로를 정확히 유지해야 하는데 관제탑의 도움없이 육안으로 목표물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층건물로 둘러싸인 맨해튼 상공에서 여객기를 저공으로 조종하여 단 한번에 목표물에 충돌한 것은 매우 숙련된 조종술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것은 여객기를 완만한 횡경사의 각도를 유지하는 고도의 조종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한 비행기에 4명에서 5명씩 탑승해 수십명의 승객들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순간에 이렇게 정확히 목표물과 충돌한다는 것은 베테랑 조종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 지적입니다. 직선 비행으로도 힘든데 보스턴에서 내려오던 아메리칸항공 소송 항공기는 뉴욕만 북쪽에서 방향을 바꿔 크게 선회를 한 뒤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부딪쳤습니다.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충돌한 여객기의 속도는 시속 586마일(943km)이었으며, 북쪽 건물에 충돌한 여객기의 속도는 시속 486마일(782km)이었습니다. 시속 586마일의 속도는 당시 그 여객기의 고도를 감안할 때 그 여객기의 최고비행속도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고 보잉사는 밝히면서, 그러한 속도로 계속 저공비행을 하는 경우 공중에서 폭발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당시 저공에서 고속으로 돌진하는 여객기의 속도와 바람 등을 감안한다면 목표물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이 장애물이 없는 태평양 상공에서 미군 항공모함이나 순양함을 대상으로 자살공격을 자행했지만 그 성공률이 50%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납치범들은 비행기를 납치해 조정실을 장악한 후 비행기 조정은 하지 않고, 자동비행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현재 여객기 기술은 조종사가 없어도 이륙, 착륙, 비행이 모두 가능할 만큼 발전했습니다. 또한 무인 조정 기술도 발전해 얼마전 무인 비행기인 프레데터가 알카에다 조직원에게 정확히 미사일을 날린 적도 있습니다.
실상은 자동비행으로 전환된 비행기를 지상에서 조종해 세계무역센타 주변해 착륙 유도 시스템을 갖춘 후 충돌시킨 것입니다. 여객기를 원격조종하여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기술을 이미 오래 전에 개발하여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공작은 CIA가 첨단 항공 기술자들과 함께 합니다.
7. 공개하지 않는 블랙박스
9.11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 2대, 미 국방부 건물에 충돌한 항공기 1대, 워싱턴으로 향하다 공중에서 미 공군의 요격을 받아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항공기 1대 등 4대의 항공기에는 총 8개의 블랙박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들 블랙박스 중에서 회수된 것은 2개 뿐이며 이것마저도 현재 내용이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피랍 여객기의 원격조종장치를 가동할 경우, 블랙박스는 자동적으로 작동을 중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블랙박스를 찾아내어 그 기록 내용을 분석하면 원격조종장치의 가동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블랙박스의 음성기록장치(CVR)는 마지막 30분 동안의 조종실 대화를 녹음하며, 비행정보기록장치(FDR)는 비행속도와 고도 및 사고 당시 비행기 작동체계의 작동상태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블랙박스는 9.11 사건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블랙박스는 항공기가 충돌할 때 충격을 가장 적게 받는 항공기의 꼬리부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블랙박스는 충돌하는 순간 자기 무게의 3,400배의 충격에도 견딜 수 있고, 섭씨 1,100도의 고열 속에서 30분 동안 견딜 수 있도록 특수제작되어 있습니다.
블랙박스에는 주파수 발신장치가 들어있는데, 발신장치의 건전지 수명은 6년입니다. 펜실베니아주 서부지역에 추락했다고 발표된 여객기(유나이티드 항공 제93편)에 설치되어 있던 블랙박스는 다음날인 9월 12일에 발견되었습니다. 국방부 청사에 충돌했다고 발표된 여객기(유나이티드 제77편)에 설치되어 있던 블랙박스는 9월 13일에 발견됬습니다.
미국 정부는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두 여객기에 설치되었던 블랙박스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는데,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항공유가 한꺼번에 타면서 생기는 온도는 섭씨 800도에서 1,000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블랙박스는 섭씨 1,100도의 고열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되었는데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미심쩍으며, 미국 교통안전국(NTSB)은 미국에서 비행기가 추락한 뒤에 블랙박스를 발견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블랙박스는 심한 충격과 외부 압력 등에 견디게끔 대단히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어 항공기가 폭발, 추락해도 사라지지 않고 회수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블랙박스 2개만이 회수되고 또 이것 마저 공개되지 않고 있는 것은 테러에 사용된 항공기가 누군가에 의해 원격 조정장치로 움직여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블랙박스를 공개하면 원격 조정 한 것이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블랙박스의 기록내용을 완전히 해독하려면 통상 3개월이 걸리며, 만일 블랙박스가 손상되었을 경우에는 그 기록내용을 완전히 해독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뿐 아니라 세계무역센타 붕괴현장은 어느 각도에서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8. 항공기 탑승자 명단에 없는 테러범들
9.11테러가 일어난 직후 미국 정부는 테러가 일어날 상황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고 발표했습니다. FBI도 이들 테러범들의 테러 기도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NSA(도청을 주임무로하는 감청 정보기관)를 통해 전세계 통신을 감청하는 CIA도 테러범들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정보기관은 테러가 일어난지 단 이틀만에 테러범 19명의 명단을 내놨습니다.
특히 이들 19명은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엘리트 유학생들로서 대부분이 그동안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신상명세까지 공개됐습니다. 그러나 CNN이 항공사가 보관하고 있던 탑승자 명단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들 납치범들의 이름은 탑승자 명단에 없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은 이들 중 5명은 비행기에 탑승한 적도 없고, 죽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스튜어디스 스위니가 핸드폰으로 알려준 납치범의 좌석번호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9.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도착한 재난 구호팀
부시 대통령은 연방 비상 관리국(FEMA)을 관리하는데 공격이 실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뉴욕으로 도시 검사 및 구호 팀을 보냈습니다. FEMA 관리, 톰 케네디 언론에서 2001년 9월 11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 재앙에 있어서 뉴욕 시를 지원하고자 배치되었던 최초의 팀중 하나이다. 우리는 월요일 밤 늦게 도착하였고[그날은 9월 10일로 바로 전날 밤] 화요일 아침에 작업에 바로 착수했다."
10. 테러 두 달 전에 빈라덴은 CIA와 접촉했습니다.
2001년 10월 31일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는 오사마 빈 라덴이 2000년 7월에 고위 CIA 직원을 만났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때 빈 라덴은 이미 두 건의 미국 대사관 폭파와 콜 군함 공격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재판을 위해 체포영장이 발급되어 수배중이였습니다. (현상금 500만 달러)
빈 라덴은 2001년 7월 4일부터 14까지 아랍에메레이트 두바이의 미국 병원에 신장병 치료차 입원했습니다. 그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가족, 고위 인사, CIA 요원 등이 방문했습니다. 7월 14일 그는 자신의 개인 제트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11. 비행기 충돌 이후 저층에서 또 다른 폭발이 있었습니다.
ABC 뉴스는 2001년 9월 11일에 "폭파지점"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인터뷰했습니다. 자신을 밝이지 않은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잠시동안 계단에 갖혔다. 나는 85층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우리가 막 그 빌딩을 떠나려 할 때, (내부에서) 폭발이 한 번 더 있었다." 한 여자의 증언이 뒤따랐습니다. "나는 계단에 갖혔다. 우리가 로비에 도착했을 때 폭발이 있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워낙 튼튼하게 설계된 세계무역센터가 혹시 안 무너질까봐 저층 부위에서 기초를 흔드는 폭발을 시도한 것입니다. CIA는 정말 악날하고 철두철미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 세계무역센터 피격 후에도 워싱턴을 방어하지 않는 전투기
8:20 AA11 레이더 접촉 끊어지고 항로를 벗어남. 8:30 AA11 승무원이 납치 당하고 있다고 보고함. 8:45 AA11 세계무역센터에 북쪽 타워에 충돌함. 8:55 AA77 관제탑과 교신이 끊어짐. 9:05 UA175 세계무역센터 남측 타워에 충돌. 9:06 뉴욕 경찰은 테러행위라 단정하고, "테러단의 공격이다. 펜타곤에 알려라"라고 하는 것이 방송됨. 9:25 AA77기에 탑승한 법무장관 올슨의 부인 바바라 올슨이 남편에게 핸드폰으로 비행기 납치 사실을 알림. 9:30 부시가 TV를 통해 틀림 없는 테러단의 행위라고 단정함. 9:38 AA77을 통제하기 위해 랭리 공군 기지에서 F-16 두 대가 출격함. 9:40 AA77 펜타곤 앞에 추락. 9:50 엔드류스 공군기지에서 전투기 처음 출격 10:00 UA93 탑승객이 911에 전화를 걸어 납치 사실을 알림. 10:10 UA93 펜실바니아주 생크스빌에 추락.
북미 대공방위사령부인 NORAD는 AA21이 납치당한 지 18분 후에 관제탑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가 항로를 벗어나면 전투기가 출동해 제어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격추시킬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공군기지가 있었는데도 200마일이나 떨어진 오티스 공군기지에 출격을 지시해 건물 충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상징물인 세계무역센터가 첫 번째 피격되 비상상황에 처하고, 두 번째 피격되 테러가 확실해져 뉴욕경찰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워싱턴을 보호할 전투기는 출격하지 않습니다. AA77기는 8시 55분에 비콘 발신이 끊어졌고 9시 25분에 핸드폰으로도 납치 사실이 알려졌지만, 9시 38분에서야 워싱턴에서 130 마일 떨어진 랭리 공군기지에서 전투기가 출격합니다.
때문에 9시 40분 펜타곤 피격을 막을 수 없었고, 9시 50분에 워싱턴에서 15 마일 떨어진 엔드류스 공군기지에서 전투기가 출격합니다. 엔드류스 공군기지에서 즉각 전투기가 이륙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마이어스 합참 본부장은 9월 14일 엔드류스 공군기지에 전투기가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 (CBS 저녁뉴스)
엔드류스 공군 기지는 수도를 방위하는 주요 공군 기지로 2개 편대(121, 113 전투편대)가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말이 되지 않음을 깨닭은 행정부는 엔드류스 공군기지에 전투기는 있지만 비상 대기 상태가 아니었다고 정정했습니다. (2001.9.17. USA Today)
하지만 엔드류스 공군기지는 수도 방위를 책임지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전투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음모를 자행해 놓고도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점이 많은데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습니다. 스포츠 연예 오락 등에 정신이 팔리게 한 우민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아무도 깊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3. 총기와 흉기를 가지고 검색대를 통과한 테러범
20명의 테러범들은 3개의 다른 비행장 검색대를 총기와 흉기를 가지고 통과하였습니다. 첨단 X ray 검색대를 한 명도 걸리지 않고 통과한 것은 내부에 공모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 비행장들은 이스라엘계 회사가 관리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과 정보조직 모사드는 프리메이슨이자 세계적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의 사조직처럼 움직인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14. 비무장으로 발진한 전투기
미 공군의 크레그 맥킨리 소장은 2003년 5월 23일 9.11 테러사건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 2대의 민간항공기가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충돌한 직후 백악관경호팀의 요청에 따라 백악관 경비를 위해 긴급발진한 2대의 F-16기는 모두 비무장상태였다고 밝혔습니다.
이들 전투기들은 훈련비행을 마치고 갓 귀환한 전투기였으며 백악관을 향해 비행하고 있던 것으로 당시 추정됐던 아메리칸항공 93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무기를 탑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 전투기들은 앤드류공군기지에 있던 제113 영공수비대에 소속돼 있었습니다.
또 긴급상황에 따라 버지니아공군기지에 있던 공군 북부방위사령부 소속 F-16기들이 즉각 발진했었으나 여전히 아메리칸항공 77기가 국방부 건물에 충돌한지 12분이 흐른 후였습니다. 더구나 무장을 했다 하더라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맥킨리 소장은 F-16기들이 무장을 하거나 제 때 발진을 했다 하더라도 전투기가 민간기를 격추시킬 권한은 공군에 부여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9.11 테러사건 발생 때 북미영공방위사령부의 미국방위사령관이었던 래리 아놀드 예비역소장은 아메리칸항공 93기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시골지역에 떨어진지 5분 후에야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살테러를 시도하려는 민간항공기를 격추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됐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영공을 비행중인 민간항공기를 공군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적 목표물'로 지정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오직 대통령만이 그같은 조치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연합뉴스] 2003년 05월 24일
수도를 방어하는 전투기가 비무장 상태로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이는 혹시 무장한 전투기가 일을 그르칠까봐 미리 대비시켜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 부시 행정부가 결정적인 증거물로 제시한 영상녹화물(videotape)은 조작된 것이 아닐까?
2001년 12월 13일 미국은 9.11 사건이 오사마 빈 라덴의 지령에 의해 일어났음을 입증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물을 공개했습니다. 미 국방부가 11월말에 입수했다고 하는 그 영상녹화물에는 11월 중순 파키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찾아간 방문객을 맞이한 오사마 빈 라덴이 자기 부관들과 함께 9.11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촬영되어 있습니다.
그 영상녹화물에 나타난 오사마 빈 라덴은 오른손잡이입니다. 그러나 1999년 6월에 미 연방수사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현상수배하면서 그가 왼손잡이라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영상녹화물에 나타난 오사마 빈 라덴은 귀고리를 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사진 가운데 손목시계 이외의 다른 장신구를 단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 영상녹화물은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잡음이 심하고, 화면도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습니다. 그런데 카불에서 찾아간 방문객은 오사마 빈 라덴에 비하면 음성도 분명하고 얼굴도 번번이 화면 정면에 나타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음성은 더듬거리는 소리로 되어 있고 얼굴은 옆모습만 보입니다.
영국 언론 『가디언(Guardian)』 2001년 12월 15일자 기사는 영상녹화물을 제작하는 전문가의 견해를 전하면서, 그러한 영상녹화물은 디지털 화상합성과 음향삽입기술로 쉽게 조작할 수 있으며, 잡음은 마지막 조작단계에서 집어넣을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영상녹화물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 9월 11일에 "우리 시간으로" 5시 30분에 라디오를 틀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영상녹화물의 시청자를 의식한 듯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시차까지 계산하여 현지 시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영상녹화물이 촬영된 시점은 오사마 빈 라덴을 겨눈 미군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목숨이 위급한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 공습을 피하여 피신해야 하였던 때인데도, 그는 여유만만하게 자신의 극비정보를 외래방문객이 촬영하는 영상녹화물에 남겨주고, 그것이 미 국방부에 넘어가도록 방치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 영상녹화물이 공개되고 1주일이 지난 12월 30일 독일 공영텔레비전(WDR)의 시사프로그램은 그 영상녹화물에 자막으로 나오는 영어번역문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우리는 (9.11 사건의) 사망자를 사전에 계산했다"고 말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사전에 (in advance)'라는 말은 원래 그의 말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 화요일부터 이날 테러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말도 대화내용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미국에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테러작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는 말도, "그들이 미국으로 가기를 바랐다"고 번역해야 하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나쁘다고 합니다.
공인번역가 2명과 함께 영상녹화물 내용을 분석한 독일의 아랍학 교수는 "미국인 번역자들이 미국 정부가 듣고 싶어하는 문장을 여러 곳에 삽입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부분을 확인하려고 몇 번이나 들었지만 헛수고였다"고 말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나중에 영상녹화물의 영어번역에 일부 실수가 있었다고 시인했습니다. 과연 부분적인 실수였을까?
오사마 빈 라덴은 9.11 사건 직후 서방 언론에 보도된 첫 발언에서 자기는 9.11 사건과 무관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9.11 사건이 이스라엘, 러시아, 인도, 세르비아의 테러조직이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9.11 사건이 악마가 저지른 범죄이며, 자기의 조직 알 카에다는 미국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뒤에 촬영된 영상녹화물에서 그는 알라신은 미국의 가장 취약한 곳을 타격했으며, 이 공격을 완수한 이슬람 전사들은 하늘의 복락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왜 불과 몇 주 사이에 자신에게 불리한 양극단을 오가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6. 비행기 잔해가 없고, 조금밖에 파괴되지 않은 미 국방성 피해 현장
미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국방부 청사 사건현장에서 미군 56명, 민간인 직원 69명, 여객기 탑승자 64명 등 모두 189명이 사망했으며 111명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미 국방부 청사에 대한 테러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프랑스의 언론인 티에리 메쌍이 펴낸 화제의 책 『2001년 9월 11일, 믿을 수 없는 협잡극: 펜타곤에 충돌한 여객기는 없었다』입니다.
이 책은 테러리스트들이 피랍 여객기를 조종하여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했다는 미 국방부의 발표를 뒤집는 충격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응용물리학 교수 스티븐 블록의 분석에 따르면,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여객기 보잉 757기는 무게가 145t이나 되고 항공유 6만2천리터를 싣고 있었으며, 시속 850km로 충돌하였다고 합니다.
보잉 757기의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파괴력은 무게 20t짜리 초대형 재래식 폭탄 25개(TNT 500kg)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엄청난 파괴력(히로시마 원자폭탄 파괴력의 1/25)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 국방부가 공개한 9.11 사건 당시의 현장사진에 나타난 파괴현장은 그러한 엄청난 폭발에 의해 파괴된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국방부 청사는 지상 다섯 층으로 된 건물이 다섯 겹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오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 국방부가 공개한 현장사진에 촬영된 파괴현장은 다섯 층 건물에서 맨아래층이며, 그것도 제일 겉에 있는 건물의 맨아래층입니다. 공중에서 지상을 향해 비스듬한 각도로 돌진했던 여객기가 어떻게 맨아래층, 맨겉의 건물에 충돌할 수 있었을까?
파괴현장 사진에 촬영된 파괴부분의 너비도 19m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잉 757기는 길이가 47.32m, 날개를 포함한 너비가 38m인데, 어떻게 파괴부분이 19m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미 국방부는 피랍 여객기의 기체 전체가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것이 아니라 청사 앞 잔디밭에 추락하면서 국방부 청사에 충돌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만약 국방부의 주장대로 피랍 여객기가 잔디밭에 추락하면서 청사에 충돌하였다면, 여객기의 항공유 6만2천리터가 한꺼번에 불타면서 엄청난 화재가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국방부 청사는 화재로 불탄 것이 아니라 폭발에 의하여 파괴되었습니다. 사건 이튿날 미 국방부는 피랍 여객기가 충돌했다는 사건현장의 잔디밭에 서둘러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덮어 버렸는데 그것은 사건현장을 은폐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살만한 행동입니다.
보잉기라고 발표된 그것의 100t을 넘는 무게와 시속 400~700㎞에 달하는 속도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겉표면만을 파괴했고, 건물 정면으로 충돌했다는데 근접한 가로등은 물론 주차장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또, 비행기 잔해라 할 물체를 본 사람은 없으며, 감시카메라 역시 어떤 순간, 어떤 각도에서도 보잉기를 보지 못했으며, 비행기 승객들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파괴현장 사진에는 국방부 청사에 지름 2.3m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그 구멍은 건물이 다섯 겹으로 되어 있는 청사건물 가운데서 건물을 세 겹이나 뚫고 들어간 것으로 나타나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멍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피랍 여객기의 기체가 지상충돌 순간 깨져나가면서 약간 뾰족한 모양으로 생긴 머리부분이 기체에서 떨어져나가 건물을 뚫고 들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객기의 머리부분에는 전자항법장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기수표면은 금속이 아니라 비금속물질인 카본(carbon)으로 덮여있습니다. 따라서 약한 비금속물질로 된 머리부분이 견고한 석재(인디애나산 석회암)로 되어 있는 세 겹의 건물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견고한 건물을 뚫고 들어간 물체는 무엇이었을까? 티에리 메쌍은 그 미확인 관통물체가 미사일 파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현장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것은 보잉 757기가 아니라 8-12명 정도가 탈만한 소형비행기로 보였으며 전투기가 비행할 때 내는 고음의 쇳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또 다른 증언자는 사건현장에서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건발생 직후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의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터(Mike Walter)는 『워싱턴 포스트』와 CNN 방송에서 사건현장을 설명하면서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것은 여객기가 아니라 날개가 달린 순항미사일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건발생 당시 워싱턴 근교에 있는 덜레스 공항의 지상관제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관제사 대니얼 오브라이언 (Danielle O'Brian)은 시속 800km의 고속으로 날아가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레이더에서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그처럼 고속으로 비행하는 것은 여객기가 아니라 군용기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 국방부의 주장에 따르면, 피랍 여객기가 국방부 청사 앞 잔디밭에 추락하면서 청사에 충돌하여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랍 여객기인 보잉 757기는 무게 145t, 길이 47.32m, 폭 38m의 대형물체입니다. 그만한 대형물체는 지상충돌로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도 거대한 잔해를 남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국방부 청사의 파괴현장에서는 여객기의 잔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 국방부는 사건발생 이틀 뒤에 여객기의 등부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을 뿐입니다. 사건발생 직후 미 연방수사국이 수사에 들어갔지만, 미 국방부의 요구에 따라 연방수사국 수사진은 사건현장에서 철수해 국방부 청사에 대한 테러사건은 수사 자체가 진행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련사진>
1.사건현장에 대한 첫 번째 보도는, 펜타곤이 헬리콥터의 폭발로 피해를 입었다는 로이터 통신의 보도였다. 그 뉴스는 AP통신과 민주당의 고문인 폴 베갈라(Paul Begala)의 전화인터뷰에 의해 확인되었다.
2. 몇 분 후에 국방부는 그 정보를 정정한다. 헬리콥터가 아니라 항공기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증언들이 첫 번째 보도를 반박하기에 이르렀고, 당국의 설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밥 네이(Bob Ney) 상원의원의 의정보좌관인 프레드 헤이(Fred Hey)는 펜타곤 근처의 고속도로에서 차를 타고 가다 보잉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3. 알링턴(Arlington) 시의 소방관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대재앙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방재해대책본부 (FEMA: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의 4개의 구조반들과 레이건 공항의 전문 소방관들이 결합된 팀원들이었다.
4. 소방차가 도착했지만, 소방관들은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건물의 위층들이 아직 붕괴되지 않고 있었다.
5. 위성사진에서 가상으로 비행기의 형태를 집어넣어 본다면, 우리는 단지 비행기의 앞부분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음을 증명해낼 수 있다. 비행기의 기체와 날개는 건물의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
6.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그들의 영토를 보호하지 못하고 엄청나게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뜻밖에도 미국은 자국의 영토 내에서 허약했다.
7. 그 비행기가 우연히도 펜타곤의 수리 중이었던 부분에 충돌하였다. 해군의 새로운 사령부가 펜타곤에 사무실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많은 사무실이 비워져 있었고, 몇몇 사무실에는 이사 업무를 담당하는 민간인들만이 있었다. 이것이 희생자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것과 군인 희생자들 중에서 한 명의 장군만이 발견된 것을 설명한다.
8. 비행기는 착륙하는 것처럼 갑자기 지면 가까이로 접근했다. 수평상태를 유지하면서 그것은 거의 수직으로 하강했다. 그것은 펜타곤의 주차장에 인접한 가로등들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것들과 충돌하지도 않았고, 비행기의 이동에 따른 배기가스도 그것들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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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보잉기는 단지 1층과 2층의 높이에서 건물 정면과 충돌했다. 비행기가 펜타곤의 밑 부분에 닿기 이전에 그 착륙장치는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전면에 위치한 훌륭한 잔디밭, 벽, 주차장, 헬리콥터 착륙장 등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보잉기의 (100톤에 달하는) 무게와 (시속 400에서 700킬로에 달하는)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 비행기는 그 건물의 겉 표면만을 파괴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사진에서 분명하게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10. 펜타곤에 따르면, 그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관청이다. 2만 3천 명의 직원들이 매일 거기에서 일한다. 그것은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다섯 개의 원을 이루는 테두리와 각각 다섯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백악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포토맥(Potomac) 강의 다른 연안 가까이에 지어졌다. 그래서 펜타곤은 워싱턴 시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고, 버지니아 주의 알링톤에 속해 있다.
11. 우리는 보잉기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12. 프랑스 판 무시무시한 사기극
3. 911 테러로 엘리트들이 얻은 수확 (결과이자 목적)
1. 아프카니스탄 침공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
911 테러 이 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 행정부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알 카에다의 본거지인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합니다. 전쟁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고 탈레반 정권은 붕괴됩니다.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한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 아시아 유전지대와의 중요한 석유 수송로입니다. 1997년 12월 4일 텍사스에서 이루어진 유노칼 정유회사와 탈레반 정권의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협상은 탈레반이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해 결렬됩니다. (1997.12.4 BBC) 유노칼 정유회사는 CFR(외교안보위원회, 프리메이슨 조직) 회원인 죠지 슐츠와 헨리 키신저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래 전부터 노력했고, 911 테러로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할 명분을 얻은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진주만 기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자 아프카니스탄의 수상으로 임명된 카르자이는 유노칼 정유회사의 컨설턴트로 재직했던 사람입니다. (르 몽) 2002년 5월 아프카니스탄 정부는 기존의 파이프라인 공사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계획(유노칼 정유회사와 파이프라인 건설)을 세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2002.5.13. BBC)
2. 애국자법 제정
부시 행정부는 테러 이 후 애국자법을 제정해 시행에 들어 갔는데 애국자법은 세계 최고의 인권 민주 국가인 미국을 군사 독재 감시 국가로 만드는 매국노법 내지는 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군사정권에서나 가능한 비밀영장, 비밀체포, 비밀재판, 비밀사형, 비밀추방이 가능해 중동 사람들이나 불법체류자, 이민자들이 마구잡이로 연행되고 있으며, 현재 1200명이 장기간 구치소에 있고 일부는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군사 재판소가 설치되 비밀 사형도 가능하며, 사형이 언도되어도 항소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가족면회도 거의 허락되지 않고, 비밀유지가 보장된 변호사 접견이 감청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생활 침해도 심해서 도청이나 감청이 가능하고 e-mail이나 웹 사이트도 검열됩니다. 현재 e-mail 내의 단어까지 검색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반정부적인 표현이나 bomb 같은 단어를 쓰면 즉시 검열 대상에 오릅니다.
애국자법으로 미국 비자 발금이 엄격해져서 미국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 처럼 어렵게 됬습니다. 사업상 이유로 요청해도 거부되며, 유학생 비자도 거부되기 일수입니다. 유학생 부부가 생이별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미국이 이렇게 외국인이나 이민자를 박해하는 이유는 프리메이슨집단이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명 높은 KKK단도 역시 프리메이슨 계열입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있는 세포 감시 조직을 가동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부시 정부는 작전 TIPS(테러 정보·예방 시스템)라는 프로젝트로 시행하기로 하고, 인터넷 사이트 (www.citizencorps.gov)를 통해 자원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TIPS가 트럭 운전사, 우편 집배원, 열차 차장, 선장, 가정용 설비업자 등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에게 테러리스트의 수상한 활동을 당국에 보고할 수 있는 공식 통로를 제공하는 전국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법무부는 시험단계로 10개 대도시에서 100만명이 참여할 것이라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스티커를 받게 되고, 수신자 부담 전화번호를 이용해 해당 정부기관과 관련조직에 보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호주 일간지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15일 TIPS가 미국 국민의 4%를 동원해 ‘수상한 행동’을 당국에 보고 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로, 4% 비율은 구(舊)동독이 악명높은 비밀경찰 슈타지를 통해 실시했던 것보다 높은 주민 동원 비율이라고 전하고, 민권단체들의 우려를 낳을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도 14일 사설에서, 공공 감시가 테러 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고발 을 장려하는 등 좋은 점이 있긴 하지만, 법 집행과 무관한 이유로 가정집을 드나드는 우편 집배원이나 설비 업자 중에서 정보원을 충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이 신문은, 경찰은 통상 허가 또는 영장없이 일반 가정에 들어갈 수 없다고 지적하고, 경찰이 감시를 위해 이들 집배원이나 설비 업자들을 이용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집을 방문한 우편 배달부나 수리공이 집안을 힐끗 힐끗 쳐다보면서 감시한다면 소름이 돋을 것입니다. 이는 악용될 수도 있느데 예를 들어 돈을 내 놓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로 고발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애국자법은 프리메이슨이 세계정부(공산주의적 독재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입니다.
3. 군비를 증강시켜 군수업체의 배를 불려 주었습니다.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전폭기들은 1만 7천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월 평균 18억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로써 군수 업체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주가는 연일 상승했습니다. MBC 스페셜에도 보도된 바 있듯이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들이 군수업체의 이사나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돈을 쏟아 부우며 막강한 로비를 하고 있습니다.
서너개로 통폐합된 대형 군수 업체들은 냉전이 끝나면서 굶어 죽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평화는 이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이들은 일부러 전쟁을 만듭니다. 911 테러로 국방비가 대폭 증대되고, 아프칸 전쟁으로 폭탄을 쏟아 부어 돈을 벌었습니다. 무기산업에 투자한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도 짭짤한 재미를 보았습니다.
이들이 전쟁을 만든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차대전때 떼돈을 번 미국 군수업체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당시에 소련은 미국의 적이 아니라 동맹국이었습니다. 유럽과 일본은 망했고 세상에 미국을 대적할 적이 없는데 의회에서 국방예산을 예전처럼 배정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츠담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한반도에 새로운 긴장지대를 만들기로 하고 사이 좋게 나눠 먹었습니다. 이들의 의도를 간파한 김 구 선생님은 주권 국가를 외쳤고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했지만 프리메이슨이 늘 하던대로 암살당하고 맙니다.
대신에 미국에서 잘 훈련된 충성스런 이승만씨를 대통령으로 내세워 어용정부를 세우고 부패하게 합니다. 소련은 북한에 탱크 비행기 등으로 중무장하게 하고 미국은 아무 지원도 하지 않은 채 군대마저 철수해 김일성에게 자신감을 심어 줬고, 소련의 허락을 받은 김일성은 남침을 지시합니다.
아무 대비가 없었던 국군이 파죽지세로 밀리는 건 당연하고,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파병결의를 표결에 붙혔는데 1명만 반대해도 성사가 안되는 시점에서 소련은 퇴장해 기권함으로써 파병이 결정됩니다. 소련이 반대의사만 표시해도 미국이 참전을 못하고 남한을 먹을 수 있었는데, 기권한 건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미군이 함흥에까지 이르자 중국군이 100만 대군으로 참전합니다. 위기에 처한 맥아더는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고 만주를 폭격해 통신망을 파괴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트루만 대통령은 뜯어 말립니다.
트루만은 장개석 대만 정부가 중국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7함대를 대만해엽으로 보내 중국을 보호해 준 바 있습니다. 결국 미군은 100만 대군에게 포위되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일부가 흥남에서 처절한 철수로 살아남습니다. 미국 정부는 또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미국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상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맥아더 장군은 해임됩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음모에 의한 연극이었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잿더미가 되고 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되었고, 군수업체들은 예전처럼 호왕을 누리고, 사용할 수도 없는 핵무기를 지구를 50번 파괴할만큼 만들어 내게 됩니다.
한국전쟁 직전의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털은 주위 사람에게 머지 않아 미국의 병사들이 한국에서 죽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트루만 대통령의 요구로 1949년 공직에서 물러난 포레스털은 강제로 해군병원에 입원되었고, 지하 외딴 방에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통보되었습니다.
4.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을 무마시켜 주었습니다.(인종 혐오주의 확산)
그동안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어 아랍국가들의 원성을 사 왔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권 침해가 심해져 세계인권대회에서 시정을 요구하자 미국 대표는 이스라엘 대표와 함께 퇴장해 버리는 사이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미국이 이렇게 중립적 입장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을 비롯한 대형 금융사들이 유대인의 손에 있고 이들에게 엄청난 빚을 진 정부는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이들의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대로라면 몇 년 이내에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이자도 못 갚을 지경입니다. 경제와 주식시장도 유대인 소유의 민간기업이며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을 운영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눈치만 보고 있으며 그의 한마디에 주가가 춤을 춥니다.
연방준비은행은 정부의 간섭 없이 통화정책의 자율권을 100% 갖고 있기 때문에 금리와 통화량에 예민한 경제는 그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1930년대 급격한 통화량 수축으로 대공황이란 매운 맛을 보여준 바 있는 유대인들을 정치인들까지 돈으로 매수하여 미국정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계적으로도 국제 투기 자본을 움직여 동남아와 남미에서 경제 위기를 일으켰고, 이들 소유인 IMF의 정책을 받아드린 나라들은 더 경제가 어려워져 공기업을 헐값에 외국인에게 넘기고, 시장을 개방하며, 부동산과 기업도 헐값에 넘어가 준 식민지 상태가 된다는 것을 볼 때 돈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솜씨에는 감탄이 나올 뿐입니다.
우리나라만 국민들이 똘똘 뭉쳐 IMF 위기에서 벗어나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지만, 시중은행이 모두 외국인에게 넘어갔고, 국가채무가 아직도 150조~400조(여당과 야당의 주장이 다름)에 이르는 것을 볼 때 안심할 수 없습니다.
아프카니스탄 침공 전에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 샤론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전쟁 전까지 되도록 회교인을 자극하는 행동을 삼가해 달라고 부탁하고, 팔레스타인에게는 주권 국가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샤론은 팔레스타인을 대대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씻었습니다.
회교인들에 대한 분노가 인종 혐오 수준에까지 이른 미국인들은 이러한 행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인종혐오주의는 이민자와 소수민족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 시켜 인권을 유린시킵니다. 유대인들의 최종 목표 중 하나는 유대인과 회교도의 성지인 예수살렘에서 회교사원인 오말사원을 때려 부수고 그들의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중동 지역의 반 이스리엘, 반미 정권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5. 이라크 침공으로 원유 개발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테러 사건 이 후 미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라크를 테러 배후로 지목하고 악의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의 적이라는 일방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이라크 침공의 이유로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지만, 이라크가 UN 사찰을 성실히 받는 상황에도 전쟁준비를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수년간 경제봉쇄 조치로 피폐해진 이라크는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해 남의 나라를 침공할 힘도 없습니다. 국민들은 굶어 죽고 있고, 병원에는 약이 없어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분유까지 생산하지 못하게 해 어린이들이 죽고 있습니다.
이는 히틀러가 유대인에게 게토지구에서 자행했던 일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국이 이러고도 인권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의 목을 조이고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이유는 이라크가 세계 2위의 산유국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라크는 원유 개발권을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넘겨 주었고, 유대인 소유의 석유회사는 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후세인도 알고 보면 이용만 당하다가 찬 밥 신세가 된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시 가문은 석유회사의 대 주주이기도 해 아버지 죠지 부시는 대통령 시절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석유값도 올라가고 무기도 팔아 먹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아랍국가들이 뭉치지 못하고 싸움질을 해야 조정하기 편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후세인은 CIA의 공작으로 이라크의 정권을 잡고 독재정권을 수립해 CIA를 은인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CIA가 후세인에게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혼란한 틈에 이란을 침공하라고 충동질 하니 그는 미국의 지원을 믿고 이란을 침공합니다. 그런나 이라크는 이란을 이기지 못했고, 8년 동안의 전쟁으로 두나라는 피폐해지고 빚더미에 올라 앉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라크는 예전에 자신의 속국이었던 쿠웨이트를 노리게 됬고, 미국은 쿠웨이트 침공을 눈 감아 주겠다고 암시합니다. 또한 당시 쿠웨이트는 땅 속에서 굴을 파 이라크의 원유를 빼내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상태였습니다. 쿠웨이트 국경에 10만명의 이라크 군을 집결시켜도 미국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라크는 안심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그러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마자 미국은 이라크의 침공을 규탄하며 사우디에 군대를 파견했고, 조지 부시는 후세인을 히틀러에 비유하며 사우디, 독일, 일본에게 전쟁비용을 대라고 윽박지릅니다. UN의 승인을 받은 미군은 첨단 무기로 순식간에 이라크군을 격퇴하고, 쿠웨이트를 탈환하며, 아울러 쿠웨이트 유전을 미국 회사들이 독점하게 합니다.
당시 신나게 이라크 군을 격퇴시키고 바그다드까지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던 야전 사령관들은 국방부의 공격 중지 명령에 의아해 합니다. 왜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할 절호의 찬스를 버렸을까요? 그건 미국은 적이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쁜 놈으로 낙인 찍힌 후세인을 살려 놔야 사우디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팔아 먹을 수 있으며 아랍국가를 미국 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엘리트들의 잔머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4. 결론
사회에서도 머리 좋은 사람이 선량한 사람 상대로 사기를 치듯이, 유대인들은 미국과 전 세계를 상대로 스케일이 큰 사기(음모) 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유대인 빌딩이 무너지고, 국방부 건물이 파괴되고, 수 천명이 죽었는데 자작극이라고 의심하겠습니까? 미국 정부와 언론까지 장악한 음모세력은 엄청난 일을 저질러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911 테러는 찰과상 정도의 상처를 입고, 일석 오조의 효과를 거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짭짤한 장사입니다. 사실 911 테러로 음모세력과 유대인들이 |
첫댓글 휴~~길다....일본놈보다 더 무섭다.............
무서운세상입니다"
정말끔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