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재탄생되는 두려움과 고통
어른이 돼서 입교하는 사람 중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처럼 살려고 세례를 받는 이들이 있을까? 대부분 마음의 평화를 바랄 것이다. 그런 바람은 세례를 받는 그날뿐이고 그 이후는 그 전과 다르지 않거니와 교우들과 어울리면서 실망하곤 한다. 세상 어디나 다 사람 사는 게 다르지 않은 줄 알아 이해한다고 해도 예수님 말씀과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실제로 따르려고 하면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 안에는 내버린 기대와 실망이 담겨 있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될 때는 실망 정도가 아니라 좌절과 저주에 가까운 마음이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루카 5,32). 착하고 좋은 사람을 불러 모으셨다면 그분은 또 다른 바리사이였을 거다. 예수님은 내가 죄인이란 걸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죄인이라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멀리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 나는 나를 싫어해도 주님은 그러려니 하실 거다. 이 순례는 하루 이틀 길이 아니라 아주 먼 여행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참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과 내 죄를 사해주시려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는다. 그 믿음은 세상이 아니라 나를 바꾸겠다는 결심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맞고 틀린다.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와 말투는 변하지 않고 몸 이곳저곳에 있는 상처처럼 수십 년 전에 형성되고 굳어진 성격은 뜨거운 결심과 한두 번 하느님 체험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 대신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소망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이 아니라 나의 내적 인간을 변화시켜 나간다. 변화보다는 성장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거 같다.
죽음은 정말 강하다. 모든 걸 멈추게 한다. 우선 본인을 그리고 지인들의 일상을 멈추고 그 죽음 앞에 모이게 한다. 죽은 이가 부모와 가족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죽음이 급작스러운 것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그랬다. 당신에게는 오기로 되어 있는 일이 온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고 스승이 여러 번 예고했어도 들리지 않았던 일이다. 내가 좋아하고 수십 년 몸에 밴 습관을 버리는 것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렇지 않다고 인정해야 하는 시간도 그와 비슷할 거다. 나의 죽음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다. 출산의 고통은 태아도 겪는다고 한다. 분리되고 좁은 통로로 빠져나오는 고통이다.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고 영적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익숙하고 좋아하는 것과 이별하고, 예수님이라는 단 하나의 인격을 선택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분은 죽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하셨다. 그분에게 하느님은 참 좋은 아버지요 어머니시고, 내 일을 자기 일처럼 해주는 정말 좋은 친구다.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분이지만 여기서는 그것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믿는다. 그분을 믿고 신뢰하며 두렵고 떨리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버리고 익숙한 삶에서 떠난다.
예수님, 금욕의 기쁨과 유쾌한 금욕생활을 배웁니다. 내가 아니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러셨던 거처럼 저도 주님을 따라 하는 겁니다. 주님이 앞장서 가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시니 늘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뉘우침은 그 즉시, 이웃 사랑은 미루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