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돼지 여섯 마리 / 박기영
넓고, 넓은 세상
돼지 가족 세 마리가 소풍을 갑니다.
차가운 북쪽에 가족 두고
피난 온 아빠 돼지 한 마리와
엄마 잃은 아기 돼지 두 마리가
세상 속으로 아장거리며 나들이합니다.
피난 와서 새로 얻은 마누라 잃은
홀아비 돼지는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새로 생긴 아기 돼지 위해
엄마 돼지 한 마리 구해
거친 피난살이 파도 헤치며
소풍 같은 세상살이 이어갑니다.
원대 시장터 구루마로 호박 실어
살아갈 때는
홀아비 애처로워 국밥 팔던 돼지가
엄마 돼지 되어 날마다 뚝배기 국밥 담아주다
자동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가고,
그 다음에는 주일마다 찾아가던
예배당에서 밀가루 나눠주던 돼지가
코 흘리며 돌아다니는 아기 돼지 불쌍하여
엄마 돼지 되어 옷 소맷단 매어주다
피난 갔던 남편 나타나자 훌쩍 떠나가고,
양철지붕 살던 홀아비가
시장 난전 천막 식당 차려 장사 시작하자
부엌일 하던 돼지
눈 맞아 엄마 돼지 되더니
아기 돼지 두 마리 훌쩍 커버리자
혼삿길 찾다 사라지고
홀아비 돼지 늙어 한곳에 눌러붙자
울긋불긋 색동옷에
입술 빨간 과부 돼지 들어와서
앞산 뒷산 과수원 치마폭에 감싸더니
소문 없이 떠나가고, 갈 곳 없는
돼지 가족 세 마리가 하염없이 하늘 쳐다보다
세상살이 험난한 길
제자리 찾지 못하고 떠나가버린
엄마 돼지 여섯 마리
지금은 모두 어디에서 길 잃고 헤매이나
걱정하다 한날 한자리에 무덤 자리 모아 놓고
제사를 모십니다.
엄마 돼지 여섯 마리, 한꺼번에 모십니다.
- 『무향민의 노래』, 한티재, 2018.
*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신은 잠시, 이곳에 소풍 다녀가는 것으로 표현한 바 있다. 박기영 시인 역시, 한 편의 동화를 구연하면서, “거친 피난살이 파도”에 휘청이고 얻어터지는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날들을 “소풍 같은 세상살이”로 노래한다. 두 시인의 동화엔 고통을 깊이 안고 인생의 파고를 지나온 자의 눈물자국도 얼핏 보인다.
엄마 돼지 여섯 마리의 사연은 실제, 박기영 시인 개인의 이야기도 일정 부분 반영되었을 줄 안다. 시인은 자신의 원적지를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남도 맹산군 수정리 300번지”로 여러 번 소개한다. 북에 아내와 아들(시인에겐 이복형)을 두고 남으로 피난 온 아버지는 새 여인에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 역할을 오래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여자와의 인연이 있거나 없거나에 따라 아이들에겐 어머니가 생기거나 떠나거나 한다. 인연 따라 마음도 널을 뛰었을 것이다. 정을 주지 못해 힘든 시간을 지나면 정을 떼지 못해 괴로운 날이 있었을 것이다.
개중에는 “입술 빨간” 어머니처럼 몹쓸 인연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여섯 명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두 아이는 두 아이대로 남다른 회한의 시간을 지나온 것이다. 전쟁이 한 가족의 운명을 비틀리게 한 것이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그 시간과 인연도 지나고 나면 다 고마운 일이던가. 시인은 한 분도 빼지 않고 제사에 밥을 올린단다.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엄마 돼지 구하는 동화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에 깔려 있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동화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그리던 원적지 맹산을 향해 지금껏 고개 하나 넘지 못했다는 것일 테다.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쓴웃음 짓는 이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