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2. 화요일.
오후에 14 : 55에 아내와 함께 잠실새내역으로 향해서 걸어갔다.
지하철 2호선을 탄 뒤 잠실역에서 내렸고, 천호동 가는 전철을 바꿔 탔다.
천호동 다음 역인 암사역.
암사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온 뒤 1.2km에 있는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향해서 걸었다.
20분이 소요. 도심 속을 천천히 걷자니 무척이나 주변이 어수선하다. 채소를 가꾼 텃밭이 있는가 하면 도로 위에 넓은 철판을 덮고, 그 철판 밑으로는 땅을 파서 지하철도를 연결할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도심 속에서 걷는 게 무척이나 힘이 들며 짜증이 나는 것일까? 아내는 가는 도중 내내 투덜거렸다.
'전에 두어 번 와 봤잖아요?'
나는 선사유적지를 방문한 뒤에 한강변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고 싶었다.
선사유적지에서는 입장요금을 받는다.
65세 이상은 무료. 체온기로 검색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예방일 터.
선사유적지 안에 들어서니 멀리서도 움집이 잔뜩 보였다. 갈대/억새로 지붕을 얹었을 것 같다.
역사박물관은 코로나 때문에 잠정 폐쇄를 했기에 '움집'을 구경했다. 움집 속으로 들어갔다. 갈대, 억대 등 야생초 줄기로 두툼하게 엮어 지붕을 덮은 탓인지 움집 안에서는 고약한 냄새,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다. 아내는 기겁을 하면서 이내 바깥으로 나갔고, 나는 냄새를 참으면서 선사시대 사람, 한강변에 살았던 옛사람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상상하고 싶었다.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를 얽기 설기 얽어서 지었을 움집. 움집 안에는 불을 피운 화덕이 있고, 가장인 사내는 작대기 끝에 돌로 된창을 들고, 가죽 옷을 입은 아낙은 물고기를 굽는 형태의 모습을 재현했다. 모닥불 모형도 있고.
여기저기 더 둘러보았으면 싶은데도 아내는 다리가 아프다며 쫑알거렸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지만 달리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래 전, 십여 년 전에도 아내와 함께 수도권 인근에서 등산을 하려면 아내는 왜그리 다리가 아프다면 종종거렸던지. 오늘도 또 그랬다.
나는 퇴직한 뒤에 그참 시골로 내려가서 살기 시작했기에 수도권 등산/도보여행을 끊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서울로 올랐는데도 등산/도보여행은 자연스럽게 포기한 채 여러 해를 보냈다. 올 여름에 들어와서야 나는 다시 도보여행을 시도했는데 아쉽게도 무릎연골의 통증이 또 도져서... 멀리는 나가지 못한다.
선사유적지를 조금만 걸었다.
경내에는 참나무가 무척이나 많았다. 아름드리 참나무 밑에서 상수리를 줍는 할머니 두 분을 보았다.
할머니는 상수리를 제법 많이 주워서, 망사 자루를 어깨에 둘러맸다. 도토리와 상수리로 묵을 쑨다고 한다.
나는 상수리를 이십여 개 주웠다. 상수리나무도 여러 종류라서 열매가 크고, 작고, 모양새가 각각이다.
땅 바닥에는 상수리가 별로 없었다. 이미 다 주워갔다는 뜻. 그런데도 내가 상수리 열매를 주운 이유는 있다. 상수리 나무의 키가 무척 크다는 사실에 욕심을 냈다. 내 시골 산에 상수리를 묻어서 싹을 틔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충남 보령시 무창포나들목 인근에 있는 야산에 상수리 종자를 퍼뜨리고 싶다.
한국의 기후가 변하고 있다. 침엽수인 소나무, 잣나무 계열이 자꾸만 죽고 사라지고, 대신에 참나무 계열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 사실이다. 내 시골 산에도 활엽수가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식물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상수리 스무 개 쯤을 줍고는 내가 시골 산에 종자하겠다는 뜻으로 이 글 쓰니 산림녹화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웃긴다' 하고 비웃을 것 같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내 나이 집나이는 일흔세 살이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를 전혀 짐작도 못한다. 어쩌면 오늘 내일일 수도 있고, 십 년 뒤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얼마 뒤에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죽어서 흙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열매 한 톨이라도 심어서 종자로 키우고 싶다. 그 나무가 훗날 울창하게 번창했으면 싶다. 먼 훗날 누군가가 대자연의 혜택을 보았으면 싶다.
나는 그저 '먼 미래보다는 오늘 하루이라도 충실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루 하루를 충실하면 그뿐이다. 미래는 후세 사람들이나 논하면 되고...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사람들.
서기 3,000 ~ 4,000년 전의 신석기 사람들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000 ~ 6,000년 전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현대인은 우리와 똑같이 닮았을 게다.
인류의 문화는 그 당시보다 지금은 엄청난 속도와 규모, 기술과 능력의 차이로 진화발전을 하고 있을 게다.
나는 선사유적지 영내를 천천히 돌면서 앞으로의 세상을 상상하고 싶다. 아쉽게도 앞으로 100년 뒤의 세상, 300년 뒤의 세상, 500년 뒤의 세상, 1,000년 뒤의 세상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만약에 내가 먼 훗날 새로 환생해서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산다면... 어떤 감회 느낌을 가질까?
문화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상상이라도 하고 싶다. 아쉽게도 죽은 뒤에는 전혀 알 수 없을 게다.
나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에 비하면 2020년인 지금은 상상이 안 됄 만큼 세상은 크게 변했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때에는 전기, 라디오, 텔레비젼 이런 것들은 상상도 못했다.
석유등잔으로 불을 밝혔고, 석유기름도 아까워서.. 왕솔 뿌리를 캐서 그 뿌리에 불을 켜서 어둠을 이겨냈다. 등잔 대신에 호야등이 장에 나왔고, 전기는 1974년 여름에서야 처음으로 산골 마을에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던 날, 마을사람들은 '만세'를 불렀다. 얼마 뒤에는 흑백TV도 들어왔고, 냉장고도 들어왔고, 신작로에는 작은 버스가 운행하기 시작했고...
그 당시에는 기차는 석탄을 때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달렸다.
2018년에서야 상수도가 설치되었다(보령호의 담수물)
세상은 정말로 많이도 변했고, 변하고 있다.
오늘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재방문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아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바람에 잠깐만 에둘러 보았고, 한강변에는 나가지도 못했지만서도 많은 것을 생각한다.
미래의 세상은 어떨까 하고..
훗날 나 혼자서라도 재방문해야겠다.
코로나-19 때문에 잠정 폐쇄한 박물관에도 방문해서 선사시대의 유물 등을 보면서 역사공부를 더 해야겠다.
2020. 9. 22. 화요일.
첫댓글 암사유적지를 아이들이 어릴때 한번 다녀온 기억이 있는데
글로 읽으니 새롭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십여 년 뒤에 재방문하니... 유적지가 무척이나 좁아졌대요.
개발한다며 건물이나 지었을 터.
개발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겁니다.
역사를 훼손하고, 아예 없애버리기에... 다시는 영원히 복구가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