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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자(1)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본문은 복 있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하여 8가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8가지의 특징은 예수님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서 누리는 삶의 복입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1-6)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 10:24-25). 그들 중 대부분은 육신의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인 무리들을 가르치십니다. 이제 영이 치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팔복을 가르치십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이란 영육간의 가난함을 모두 포함합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은 여인이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영적인 가난함이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필요로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절대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온 지난 날에 대해 슬퍼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37편 11절을 보면,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마 6:33).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7-12) 팔복의 두 번째 부분은 긍휼히 여기는 자로 시작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결핍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내면의 인격과 신앙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신도 거룩해 지기를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모든 관계에서 다툼과 분쟁을 멀리하는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화평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화평의 관계를 이루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란 이 세상과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감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살지만 천국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하늘에서 주어질 큰 상을 바라보며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적용: “나는 예수님이 절대로 필요한 존재이며 예수님이 내 중심에 없으면 나의 삶은 엉망이 되는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 봅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오히려 인생에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진정한 복을 깨달아 그 복을 추구함으로 바른 생활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마 5:1 / 이동원 목사
오늘 종려주일의 주제는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소위‘적극적인 사고방식’(Power of positive thinking)의 화두를 우리 시대에 던져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한번은 기차 여행을 가면서 식당에 있는 열차 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건너편에 한 초로의 부부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을 향해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소리가 건너편에 앉아있는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거 야채가 왜 이래? 고기는 너무 질긴 것 같고, 포도도 너무 신 것 아니야? 이 열차의 온도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 날씨도 안 좋고 여보 우리 괜히 여행 나온 것 아니야? ”이렇게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 부인의 소리가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필 박사를 의식한 듯 부인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얘기를 건네 왔다고 합니다.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제 아내가 본래 직업이 그렇습니다.” 필 박사의 호기심이 발동을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죄송합니다만 부인의 직업이 무슨 직업이신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다시 “예, 제 아내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죠.” 그러자 다시 필 박사가 물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제조하시는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필 박사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 제 아내는 불행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 불행을 만들면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 이 단어가 어떤 느낌을 주십니까? 만약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본문이 마태복음 5장입니다. 5장 1-12절 까지를 우리는 흔히 팔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팔복 가운데 ‘화평케하는 자의 복’이 들어있습니다. 이 ‘화평케 하는 자’를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하지 않습니까? 피스메이커가 존재한다면 행복 메이커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을 만들어 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불행 메이커이십니까? 아니면 행복 메이커이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짤막한 시간에 소위 이 산상수훈의 첫 부분인 팔복을 상세하게 공부하고자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시간도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괄적인 살펴봄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여러분과 제가 행복을 만드는 사람으로 우리의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느냐를 함께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팔복이 가르치는 첫 번째 행복한 인생의 열쇠가 있습니다.
1. 행복한 인생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 이 팔복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혹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이것을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자면 사실은 ‘복이 있도다’ 라는 낱말이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그 다음도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로 ‘마카리오스’ 혹은 ‘마카리오이’ 라는 단어가 먼저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blessed 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 하면 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있죠? happiness 혹은 형용사로 happy 라는 단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하는 단어는 happiness 가 아니라 여기서 blessing 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것은 소위 happiness 와 어떻게 다를까요? happiness 란 단어는 happen 이라는 동사에서부터 유래한 단어이죠. 이 happen 이라는 것은 우연히 어떤 일이 발생하다는 의미이고, 만약 행복이 그런 것이라면 행복은 어떤 우연의 선물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happiness 가 아니라 blessing 인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때 God Bless you ! 하지 않습니까? 이 blessing 이라는 단어는 본래 앵글로 색슨 단어에서 blood 라는 단어에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피란 말이죠. 이 단어는 본래 피의 제사를 뜻하는 말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바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희생 동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 받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구약의 피 제사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blessing 이라는 단어의 배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는 중요한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 왜 그랬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팔복을 살펴보면 이 팔복의 모든 내용은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를 느끼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표준, 혹은 하나님의 가치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혹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목적 앞에 자신을 드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복음을 삶으로 그리고 자기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인생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사는 사람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르켜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열쇠는 단순한 행복의 처세를 익히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2. 행복은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인생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좀 더 권력을 소유하고 좀 더 명예를 소유하고 좀 더 큰 집과 좀 더 큰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팔복에서는 행복을 철저하게 소유가 아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흥미로운 얘기가 있습니다. 아주 게으르게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가 어느날 자기 아들에게 교훈을 시작했습니다. “아들아! 너 열심히 일해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아들은 묻습니다. “왜 열심히 일해야 해요?” “야 ! 그래야 돈을 좀 벌지.” 아들은 다시 묻습니다. “돈은 벌어서 무엇하게요?”“ 야! 그래야 너도 편히 좀 쉴 수 있고 편히 놀 수가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잖아?” 그러자 아들은 빙그레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이나 마찬가지네.” 이 아들을 향한 관심 속에서 아버지의 타이름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하는가 라는 목적을 아들에게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수님 만나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격의 변화와 성숙이 이 땅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게 하려함인 것입니다.이 팔복을 다시 묵상해 보시면 팔복은 철저하게 인격지향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기 위해서는 교만한 자신의 인격이 깨어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온유한 자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완벽하게 갖춘 모델 인격이 있다면 누구를 생각해 낼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시죠. 우리 예수님은 친히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교훈을 따라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롤 모델이 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좋은 역할 모델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이래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역할 모본이 되었던 어떤 분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어렸을 때, 혹은 초등학교 시절에 혹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스승, 혹은 어떤 형님이나 누님, 내 주변에 교회에서 만났던 어떤 장로님등의 좋은 롤 모델이 되었던 누군가를 연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음이 어찌 그리 축복인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완벽한 모델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주님 앞에 아버지 앞에 섰을 때 나를 인해 기뻐하시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기대야 말로 우리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라고 이 팔복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 행복은 이웃을 향해서 열린 삶을 살아갈 때 실현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인격의 연단이라든지 성숙은 나 혼자서 성취할 수 없는 목표인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깨어지고 다듬어지고 연단되어지고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주님이 기대하는 인격의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에 등장하는 모든 인격적인 요소들은 나 혼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인격의 모습인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 곧 겸손한 인격을 위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교만을 깨는 작업을 해야 되고 나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이 겸손의 인격을 빚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긍휼의 인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이웃의 약점과 허물을 품어줄 수 있는 긍휼히 여김 이것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빚어질 수 있는 인격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금세기 한 유대인 철학자를 통해서 전 세계의 진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 하나가 출간되었습니다. 유태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책 가운데 ‘나와 너’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관계속에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도 나와 영원자 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그는 말합니다. 관계하에서만 우리의 인격은 빚어지고 만들어집니다. 내가 이웃을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만나느냐 에 따라서 나의 인격의 연단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그냥 이용하고 차버릴 때, 이웃은 나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략한다고 말합니다. 탈무드는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여행을 하라.”고. 여행 떠나서 일주일이 지나면 집에 오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달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새 집으로 이사를 가라.”고. 새 집의 감격은 한 달을 넘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해동안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결혼을 하라.”고. 허니문의 감동은 일년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탈무드의 절정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생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이웃을 섬기라”고. 그렇습니다.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비밀 이것은 내가 이웃을 품고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하와이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거기 계신 목사님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와이를 우리는 지금 지상 낙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본래 하와이 섬은 낙원이 아니라 부족과 부족 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던 그런 섬이었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하와이의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구교와 신교의 선교사님들이 당도하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와이의 섬은 변화된 것입니다. 이 변화의 와중에 신화적 전설을 남긴 카톨릭 사제 한분이 있습니다. 다미엔 이라는 신부입니다. 본래 하와이 섬 중에 하나인 몰로카이 섬은 이 나환자들을 수용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미엔 신부는 그들과 함께 살며 나중에 그들과 연대화 되기 위해서 심지어 자기 자신이 나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다미엔이 마지막 자기 일생을 마무리 짓기 이전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을 아십니까? “내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다.”고. 평생 이웃들을 섬기다가 자기 자신 일그러진 나환자의 얼굴을 가졌던 다미엔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이런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행복의 고백을 낳았을까요? 그것은 섬김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이웃들을 품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그는 놀라운 성경이 약속한 행복의 비밀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목장교회가 왜 필요할까요? 목장교회에 오시면 섬길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함께 목장을 넘어서서 이웃들을 품고 사랑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목장이 바로 우리의 행복의 하와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일생이 끝나는 어느날 이 고백을 나누고 싶습니까? “내 인생은 정말 행복한 삶이었어.”라고. 그렇다면 이 팔복의 레슨을 붙들고 행복을 만드는 여행을 한번 시작해 보십시오.
행복 선언 (2)
마 5:1-6 / 이정익 목사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송구영신 예배 때 제출한 새해 기도제목을 보니까 첫 번째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복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여러분들은 지금 아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복의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오는 복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주지 않으시나 보라고 말씀하셨고, 떡 반죽 그릇에도, 우양의 새끼에게도, 실과에도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뿐만 아니고 저주도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땅이 갈라져서 저주가 임하고, 나병이 발병하는 등 모두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오해의 소지도 많습니다. 실제로 보수신앙에서 그리고 권위적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은 이를 율법적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신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오해의 소지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대부분 영생, 구원, 자녀됨, 구속, 천국 등의 영적인 복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이 진정한 복이고 복중의 복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이 이 영적인 복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한 후 마태복음을 읽습니다. 그리고 주석을 썼습니다. 그때 마태복음 5-7장까지의 말씀의 제목을 산상수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상은 갈릴리 해변의 언덕을 말합니다. 또한 수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핵심을 제시하셨다 해서 이를 수훈 또는 보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의 말씀속서 우리에게 한 가지 당부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천국 시민정신을 압축하고 집약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상수훈에서 먼저 팔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서신서는 먼저 앞부분에서 교리를 말씀하고 그 뒤에 실천부분을 언급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런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산상수훈에서 먼저 제시된 팔복은 교리이고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내오는 내용들은 모두 실천내용들 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복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정한 복은 “여덟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을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이 팔복을 누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팔복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천국
첫째는 천국입니다.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복 중의 복은 “천국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헬라어로 “바실레이야”라고 하는데 그 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즉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 나라가 세 곳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천국은 에덴동산입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계셨던 곳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천국은 내 마음입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면 내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안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가정과 삶의 터전이 주님이 함께 계시는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천국은 앞으로 주어질 내세적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복은 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이 천국화 되어야 합니다. 내 집이, 마음이, 환경이, 교회가, 나라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적으로 세상에서도 이 천국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주어지는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천국 때문에 순교하였고 고난도 달게 받았습니다. 사도바울도 수고하고 고난 받고 온갖 위험을 다 감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대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이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값없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조사해 보니 그 사람에게는 선한 기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어떻게 왔냐고 물었더니 방금 전에 선한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길을 가는데 어느 여성이 불량배들에게 에워싸여 시달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가서 막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실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보시다시피 그 때문에 5분전에 여기 오게 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스갯소리입니다. 천국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설명해야 할 부분이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복중에 첫 번째 복은 바로 천국입니다.
위로 받음
두 번째는 위로받음의 복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곁으로”라는 뜻과 “부른다”는 뜻의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위로라는 말은 “내 곁에 오셔서 나를 부르심”이라는 뜻이 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브엘세바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일어나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위로받음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하는 중에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그 밤은 두려운 밤이었습니다. 들짐승이나 강도떼의 위협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낙심하며 살던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불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서 고통 받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모두 위로받음 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기 위함이라고(눅 2:25) 하셨고 성령님이 오신 목적도 위로 때문(요 14:16)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이 위로가 참 중요합니다. 아이들도 위로가 필요하고 어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회가 불화하고 갈등과 파벌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금식기도원에 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갈등이 심했으면 사도바울 같은 능력 있는 사도가 그랬겠습니까? 바울은 기도원에 가서 의기소침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고린도교회에서 청년회장인 디도를 위로자로 파견했습니다. 디도는 사도바울이 전도한 사람으로 오늘로 말하자면 청년회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이 디도가 옴으로 인해 화평을 얻었다고 좋아합니다.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일개 청년회장이 와서 위로하는 위로 한마디에 그렇게 좋아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위로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말씀하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위로는 공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고 소통을 일으킵니다. 그 공감은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안개를 걷히게 합니다. 또한 무거운 현실을 걷고 일어나 치유 받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위로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위로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위에서 자살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 하나가 난간 위로 올라가 시위를 했습니다. 누구든 올라오면 뛰어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여경이 상대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머리를 풀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도 여자다. 당신에게 말해줄 것 있다”라며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날 두고 시집을 가셨다. 그래서 나는 고아원에서, 남의 집에서 일하며 자랐다. 나도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실패했다.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것이 ‘죽느니 그 힘으로 차라리 살아보자’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오늘 여경이 되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여경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여인은 여경을 따라 순순히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공감이고 위로입니다. 이런 공감과 위로가 있을 때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같은 처지, 같은 입장의 사람을 만나면 금방 가까워지고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시험에 떨어져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려면 삼수생이 가야 제격입니다. 콩나물 장수를 전도하려면 생선가게 주인이 가야 합니다. 밍크코트 입고 가서 전도하면 눈도 안 마주칩니다. 암환자에게는 암을 고침 받은 사람이 가야 합니다. 교도소는 전과자로 개과천선한 사람이 가서 전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다미엔 신부가 하와이 몰로카 섬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상대로 선교를 하는데 어떤 일을 해도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미엔 신부는 자신의 몸에 스스로 병균을 넣어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서야 나병환자들 모두가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복은 위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그것은 큰 선물이고 큰 복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3일 주야를 더 달려갔습니다. 야곱은 환상 중에 위로를 받고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다시 그곳에 돌아와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십시오. 예수님은 그 위로받음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업 받음
다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땅이라는 말이 45회나 등장합니다. 여기서 땅은 헬라어로 “게”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에서의 땅입니다. 이는 가나안과 같은 땅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천상의 땅으로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말씀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땅은 변치 않는 영원한 유산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3대 복이 있었는데 넓은 땅과 많은 자손과 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땅이 꼭 포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이 복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430년 동안 익숙하게 애굽에서 살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때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소망하며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땅은 사람들에게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강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게 마련인데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역설을 많이 말씀합니다. 이 땅은 세상의 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계시록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합니다. 이는 종말 때 주어질 땅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그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팔복에서 첫 번째, 세 번째, 여덟 번째 복을 천국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배부름
네 번째 복은 배부름의 복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부름이 복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이나 배가 부르면 다 너그러워집니다. 여기에서 배부름은 목동이 양을 몰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먹여서 양들이 배부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목자 되신 예수께서 성도들을 생명수와 하늘의 양식으로 채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영혼의 만족함과 평안함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완벽한 영혼의 만족함이고 배부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배부름은 의의 배부름입니다. 이 의에 배부름은 많이 먹어서, 횡재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뜻대로 살면 수지도 칭찬도 횡재도 없습니다. 오히려 핍박과 조롱과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면 핍박이 주어지지만 내 안에는 감사와 기쁨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의의 배부름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예수님 일행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찬미하며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찬미하실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찬미가 나온 것이나 행전 13:52절의 바울 일행이 버가에서 전도하다 온갖 방해를 받고 동네를 떠날 때 기쁨이 충만하였다는 것 모두 의의 배부름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가다가 돈뭉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파출소에 가서 주인을 찾아 주라고 맡겼습니다. 한편으로 마음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돈을 주인에게 찾아주었을 때의 마음의 기쁨은 더 큽니다. 내 손에서 돈뭉치가 빠져 나갔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한 기쁨과 행복감 그리고 만족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한 일을, 선한 삶을 살아가고 때로 희생도 순교도 발생하고 의사도 열사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역무원이 기차가 오는 줄도 모르고 철길을 건너가던 아이들을 긴급히 구조하고 자신은 두 다리가 절단되었습니다. 그는 의족을 끼운 채 다시 역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다리를 가지고 일할 때보다 오늘 의족을 가지고 일할 때가 훨씬 더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내 마음에는 행복감이, 의를 이루었다는 보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로 배부름입니다. 노인학교에서 뱃놀이를 갔습니다. 할머니 한분이 배에서 중심을 잃고 바닷물에 빠졌습니다. 그때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할머니를 구해 올라왔습니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배에 올라오시더니 크게 소리쳤습니다. “누가 내 등을 떼밀었어?” 비록 타의에 의해서 바다로 뛰어 들었다 해도 그 할아버지는 어깨가 으쓱해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의의 배부름입니다. 예수님은 이 복을 네 번째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
마 5:1-10 / 김서년 목사(벧엘교회)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참으로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할 간증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기회에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았는데, 아이들의 유희가운데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하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제멋대로 까불면서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하는 순간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석고상처럼 그대로 멈추는 유희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다 죽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아니 지금 당장이라도―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관 속에 내 이 시신이 눕혀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지난날에 내가 어떤 모양으로 살아왔던지 간에, ‘바로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곧바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러면 ‘바로 지금 현재의 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꼼짝 않고 멈추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매 순간 마다 행동과 표정들까지 조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무슨 일로 화가 나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데, 이 순간 내가 부르심을 받는다면 나는 ‘화나 있는 모습 지금 그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전엔 사업이 조금만 부진해도 염려하고 얼굴을 찡그렸고, 조금만 속상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곤 하였는데, 이제는 매사에 있어서 웃으려고 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매 순간마다 가지려고 노력하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모습’을 늘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서 꼭 나타나게 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 ―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란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예수를 닮으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힘쓰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크리스찬인데,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닮아야 할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 것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며, 이 점을 내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겸손한 그 온유함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요,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찬이란 바로 온유한 사람을 말하며, 우리 크리스찬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성이 바로 온유함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중, 이제 세 번째로 바로 이 ‘온유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십니다. 그러니까 ‘먼 훗날—그 어떤 때’에 가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모습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온유한 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 스스로에게 적용하며 다시금 마음속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온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온유함”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온유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쉽게 “연약하다”는 이미지로 느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온유”라고 하는 단어는 양과 같이 양순한 것, 아주 마음씨가 곱고 순한 것을 생각하며, 나아가서는 허약한 것, 무기력한 것, 줏대 없는 것, 등등의 이미지를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하다는 참 의미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이 온유란 말은, 성경 원어로는 ‘praus’란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strength under controll” (통제되는 힘)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한번은 신생아실에서 미식축구 선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TV를 통하여 미식축구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만, 선수들을 보면 그 체격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미식축구 선수가 아기 아빠가 되어서, 아기를 자기의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여기 이 조그만 아기! ―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런데 이 아기를 풋볼 선수인 이 덩치 큰 아빠가 조심조심 두 손에 받들고는, 기뻐 죽겠다는 듯이 들여다보며, 살며시 쓰다듬으며 웃고 있습니다.
그 큰 손! ― 조금도 연약한 손이 아니지요. 공을 움켜쥐고 돌진하며 태클을 하던 그 손입니다. 얼마나 강한 손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손으로, 아주 조심조심 부드럽게 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Strength under Control!! ― 통제되는 힘!! ― 이것이 바로 ‘온유’라고 하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가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애굽에 팔려 와서 노예로 지냈지만, 그런 대로 살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이 때 못이기는 척 그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그 여자를 배경으로 하여서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보디발은 애굽왕 바로의 시위대장이었으니까요. 요즈음 말로하면 경호실장인 것이지요. 한때 우리나라에서 “청와대 경호실장!” 하면, 그 권세가 그야말로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의 경우, 당시 경호실장의 부인과 끈이 닿게 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절호의 찬스를 맞은 것이지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나 요셉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욕망을, 죄의 유혹을, 통제합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진정한 힘입니다. 연약한 자가 아니지요. 힘이 있기에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통제되는 힘! ―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런 다음에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로 하여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셉은 당시의 애굽왕 바로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자리인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요셉은 이제 문자 그대로 세상의 권력을 가진 강자가 되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때 요셉이 그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또 보세요.
그는 자기를 옥에 가두고 못살게 군 보디발의 아내를 보복하거나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때쯤 보디발의 아내는 ‘이제 내가 죽었구나’, 혹은 ‘요셉이 이제 자기의 남편에게 사실대로 다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아마도 밤잠 못 자고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요셉은 이 일에 대하여 끝까지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또 자기를 배신하고 죽음의 함정에 몰아넣었던 형들이, 이제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었다면 이 때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이 애굽의 총리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강자로 서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복수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그들을 죽일 수도, 혼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복수하지도,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원망하지도 욕하지도 아니합니다.
통제하는 힘! ―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현대의 세계는 ― 심지어는 크리스찬들 중에서까지도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온유와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가고만 있는 것을 봅니다.
모두들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 행적을 알리고, 칭찬 받기를 원하고, 신문에 이름이 나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들어내며, 큰 목소리를 외쳐댑니다. 내가 더 큰 소리를 내면 더 잘 들려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를 않았어요. 서로 자기가 높은 자라고 다투고 있는 제자들 앞에서, 조용히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2절과 3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공의를 시행할 것이며…”
오늘날 신문에, 라디오에, TV에, 온갖 교회들의 PR과 자랑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리치지를 않았습니다. 화려한 프로그램을 내어놓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대는 팔레스타인에 아주 흔하게 있는 것입니다. 또 갈대란 아주 연약한 것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조그만 아이라도 쉽게 꺾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강한 손이 있어요.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붙들고, 아주 소중히 보살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란 말입니다.
또 꺼져가는 등불은 조금만 흔들려도 꺼져버리고 맙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 대구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에는 석유 등잔을 켜고 있었습니다. 석유 등잔을 사용해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만, 어떤 땐 심지가 다 타서 불이 깜빡거릴 때가 있지요. 그런 땐, 공부하기도 싫던 차에 아예 확 불어서 꺼버리곤, 핑계 김에 일찍 자버리곤 하였습니다.
깜빡거리면 오히려 더 불어서 꺼버리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훅 불어버리는 것을 힘이 있는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소중히 보살피고, 두 손으로 바람을 막아서 꺼지지 않게 조심조심 보호하며, 심지를 매만져서 잘 타오르도록 도와주십니다. ― 이것이 메시아요, 이것이 그의 온유란 말씀입니다.
또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이기에 경쟁들입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를 않았어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한 마디의 변명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외쳐대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그리도 잠잠한가? 왜 당신의 무죄를 변명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묵묵히, 아무런 소리도 내시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습니까? 연약하여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것이었습니까?
아니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일만 군단도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여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침 뱉는 그 사람들을 혼내어주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내하시며 묵묵히 받아들이십니다!!
통제하는 힘 ― Strength under Control ― 이것이 바로 온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온유란 무조건 모든 일에 참고 인내하며, 그저 잠자코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온유’—이 ‘praus’란 단어의 뜻에 대하여,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온유한 사람—praus한 사람은, 올바른 근거로 분노를 느끼며, 정당한 대상을 향하여 바른 방법으로, 적절한 시간에 정당한 목적으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침 뱉고, 욕하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어도, 결코 화를 내시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된 신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신앙까지도 그릇되게 인도하는 자들을 향하여는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진노하셨고,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 12:34, 23:33).
또 교회를 욕되게 하며, 주의 몸인 교회를 존중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자기의 뜻대로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들어서 내리 치셨습니다.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 그의 두 눈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섬광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또 모세의 경우를 보세요.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도 더 온유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온유한 모세였지만,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애굽왕 바로 앞에 담대히 서서 열 가지 재앙을 베풀며, “너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라!” 이렇게 외치며 진노함을 내보였던 사람입니다.
온유! — Strength under Control! — 통제되는 힘!
이것은 “바른 시기에는 항상 의분을 내며, 적절하지 아니한 시기에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아니하는 것!” ―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유하신 자입니까?
여러분은 주로 어떠한 때에 화를 내십니까?
내가 내지 않아도 좋을 그런 것에서 나는 나의 힘을 과시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와 공의를 위해, 마땅히 화를 내어야 할 그런 곳에서 나는 오히려 잠잠하지는 않았습니까?!!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는 데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온유한 태도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발언과 태도와 인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개인과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하나 됨이 깨뜨려지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남편이 아내의, 또는 아내가 남편의 관심과 존경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하여 난폭하게 굴며 불친절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을 간혹 보게 됩니다.
때로는 거친 말과 폭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도 됩니다. 그래서 관심을 끌겠다고, 자기를 과시하겠다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Strength’—‘힘’이 아닙니다. 폭력일 뿐입니다.
진정한 힘이란, 바른 때와 바른 목적을 구별하게 하는 ‘통제를 받음’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분들이 가끔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놓고는 “나는 뒤끝이 없어요.” 하고 말하곤 하지요.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성질은 그래도 뒤끝만은 아주 싹싹하다”고 그러곤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게 맞는 말입니까?
어떤 목사님에게 어느 부인이 찾아 와서 상담하든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나는 성질을 잘 내는 것이 큰 흠입니다만, 그래도 오래가지는 아니합니다. 뒤끝만은 아주 깨끗하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목사님이 이렇게 조용히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오래 가지 않는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의 성질로 인하여 누군가의 마음속에 만들어 두었을 그 상처는 ‘아주 오래, 오래 간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되어야 가정이 바로 서고,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서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바른 공동체로 서게 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온유한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떤 분들은 좀 의아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소위 이 생존경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볼 때, 그들은 대부분 거칠고 거만한 자들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밀려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과 세력과 능력과 자신감과 공격성이란 관점에서 성공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혈안인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기업으로 받는다”라고 하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 것입니까?
시편 37편 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 바로 이것이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말은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는 것!” ― 결국 땅의 ‘소유주’가 되며, 그 땅의 ‘임자 된 권리를 즐길 줄 안다’고 하는 뜻인 것입니다.
셋방살이 해보신 분들은 그 집 없는 서러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단칸방이라도, 오두막이라도, 내 집이 소중한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나의 것—바로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즐거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하고도 불만스럽다면, 그는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한 자’인 것이지요!
가령 15평 정도의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집은 자기의 소유이지만, 집을 볼 때마다 불평을 합니다. ― “남들은 모두 큰집에서 사는데, 무슨 팔자로 이런 오두막에서 사느냐?” ― 이렇게 불만투성이면,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지요. 정신적으로는 남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이 집에서 살게 된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즐거워서 “집 없는 사람도 많은데,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하면, 그는 정말로 자기 집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편, 아무리 큰 집에서 산다고 해도 이를 즐기지를 못한다고 하면, 사실상 그 집도 더 이상 내 집이 아닌 결과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하여 다니던 학교의 근처에는 Huntington Library라고 하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다. 미국의 동서횡단 철도를 건설하였던 재벌인 Huntington씨가 그의 모든 재산을 쏟아서 대 저택과 넓디넓은 정원도 가꾸고, 아주 예쁜 골동품과 그림들과 고서적들을 아주 많이 모아놓은 곳입니다.
그런데 안내문을 보면, 정작 Huntington씨는 그곳을 그렇게 잘 가꾸어 놓고도, 그곳에서는 단 얼마도 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죽기도 동부에서 죽었고요. 그저 시체로 그곳에 실려 와서 뒤뜰에 묻혀있을 뿐입니다.
또 살아생전에도 그저 수집하고 모아들이기에 바빠서, 또 어디에 무엇이 없나, 어디 더 뜯어고칠 데가 없나 하고 늘 골몰하는 나머지, 이미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만족해하지 못하며, 그래서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곳을 서른 번도 넘게 방문하였고,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그림들과 정원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정작 당사자인 Huntington씨는 그 많은 돈을 들였지만, 저만큼도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지도, 즐겨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상 그 집의 주인은 누구인 것입니까?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저는 제가 구경시켜주기 위해 모시고 간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게 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요. Huntington씨가 그저 나를 위하여 그 많은 돈을 들여서 미리 준비해준 것뿐이라고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음’에 소유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건을 구입할 때도 누구나 경험하지 않습니까? 비록 물건을 샀어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 물건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가령 새 옷을 샀을 경우에도, 사고 난 후에 그 옷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가서 바꾸거나, 바꾸지 못할 경우에는 입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옷장에만 걸어두게 될 것이니, 어디 내 옷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좀 죄송한 얘기입니다만,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식들에게 감사하며 살지를 못하고, “어쩌다가 저런 사람과 살게 되었을까? 자식들은 왜 저 모양인가?” 하고 ‘불만’만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됩니까? 함께 살아도 내 남편, 내 자식이 아닙니다.
스스로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은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온유’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약함이나 연약함이 아니라 ‘통제 아래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절할 때에 이 힘을 사용하며, 적절하지 않을 때에는 절대로 이 힘을 자제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온갖 지난 경험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결단코 다스리지 못합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작심삼일”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이런 점들로 인해 ‘나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낙심하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사람들 중에는 생래적으로 좀 부드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온유’란 이런 생래적인 기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유’란 우리 죄 많은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없는 성품입니다. 죄와 함께 사라진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성품을 우리 인간 안에 창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창조해 주심’으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래적으로 좀 거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에 의해 다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기도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전적인 신뢰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주님을 더욱 닮아가기에 힘쓰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사람인줄 믿습니다.
주님을 닮아가며, 그래서 더욱 온유해져 가는 사람!! ― 이런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그를 더욱 축복하여 주십니다.
축복인 선언-(4)
마 5:1-6 / 이정익 목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람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초만 되면 온 집안에 부적을 붙이고 아주 진지하게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고사를 지낼 때도 돼지머리 앞에서 진지하게 절을 하면서 복을 기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세 가지 놀라운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기를 희망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아이로 되돌아가기를 열망한다는 것과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고 다시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다가 갑자기 어느 날 무의미하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여덟 가지 복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여덟 가지 복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된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살면서 내 삶이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고 소명을 이루어 자녀로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다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두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뒤의 연은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고 있고 앞의 연은 여덟 가지 복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사람이 여덟 가지 복을 누리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난은 말 그대로 가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가난 앞에 심령이라는 명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심령은 헬라어 “프뉴마”(pneuma)라는 단어로 속사람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내 안의 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 안의 내가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가난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나임”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겸허한 심령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이런 마음의 가난한 상태, 즉 겸손과 겸허함이 요구됩니다. 이 겸손과 겸허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내적 상태는 겸손과 겸허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의 가난을 팔복에서 첫 번째 덕목으로 삼으셨습니다. 때로는 이 가난이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목회자는 한결같이 가난한 출신들입니다. 때로 목회자 중에 부잣집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하나같이 실패합니다. 목회과정에서 겪는 고된 일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이런 대우를 받는가 하고 그만둬 버리기도 합니다. 믿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그만 두어도 살길이 있고 의지할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난한 목회자는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지할만한 물질도 다른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겸손합니다. 시편은 대부분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시입니다. 시편 69편 29절에는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편 70편 5절에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시편 74편 21절에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시편 51편 17절에는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영적 배고픔입니다. 이 영적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간절한 것이 없어집니다. 한때 미국 이민자들이 미국생활을 천국생활이라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미국에 가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부흥회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한 신자가 찾아와 말하기를 “목사님 미국에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설교는 하지 마십시오, 여기가 천국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밥맛이 좋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플 때는 조금만 주어져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조금만 실수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상대를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빕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하여 내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아픈지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
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애통”은 “영적인 애통”을 말합니다. 이는 죄를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에 대하여서 슬퍼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죄에 대하여서도 탄식하게 됩니다. 특히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으로 애통해하고 눈물로 중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애통을 헬라어로 “펜둔테스(penthuntes)”라고 하는데 이는 비통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야는 자꾸만 늦어져서 백성들은 매일 탄식했습니다. 그 사이 로마는 더 강해져서 구원이 점점 막막해 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뜻있는 신앙인들은 모든 환란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고 이 억압이 자기 조상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고 비통해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이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죄, 나의 무능에 대해 애통해 하고 나의 교만, 자만, 욕망의 깊어감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의 위로는 하늘로부터의 위로입니다. 하늘로부터의 위로가 주어진다는 말은 그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최대의 위로는 그 기도가 응답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엄밀히 말하면 매일 평안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세상을 보며 슬퍼해야 하고 시험당하는 이웃을 보고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고난당하는 친구와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하늘로부터 위로의 복, 기도응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은 메시야의 도래를 고대하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당시 메시야의 도래가 늦어져서 모두 낙심하고 소망 없이 살아가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압제는 날로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므온은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므온은 정결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만납니다. 시므온은 그 예수를 품에 안고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보며 애통해야 하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모인 것이 얼마 전 1000회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할머니들도 연세 때문에 한분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어가기 전에 한마디라도 사과의 말을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타까워집니다. 그런데 일본은 반응도 없습니다. 그런 일본을 생각하면 마음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옵니다. 그래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세상의 죄와 불의를 보면서, 세상의 선한 자가 고난 받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사용합니다. 요즘 학교에서 폭력문제가 화제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나쁜 모습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려서부터 저렇게 악하면 앞으로 얼마나 악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중보기도실로 들어가 눈물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작게는 나의 영적 무지와 빈약함을 위해서 애통해야 하고 크게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기를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고 살아가기를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 위로는 기도 응답의 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시하신 두 번째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
5절을 보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역설입니다.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법입니다.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로마라는 너무나 강대한 나라에 살면서도 온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강한 로마를 몰아내고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그런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에도 온유하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니체는 이 말을 약자의 변명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에 대항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그 말밖에 더 할 말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자라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푸라우스(praus)”라는 단어로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이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온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고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는 “너희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으라.”고 하셨으며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서는 “너희는 믿음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온유가 가장 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강한 힘이 온유라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하셨고 사도바울이 강조한 것입니다. 정복자는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뺏고 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온유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처음에는 밀리는 것 같았고 지는 것 같았고 실패자 같이 보였지만 예수님은 온유로 모든 것을 다 이기셨습니다. 마치 햇빛이 세상을 다 녹이듯 말입니다. 햇빛은 소리도 없고 요란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햇빛은 소리도 없이 이 세상을 다 녹입니다.
이삭이 이방 땅인 그랄에 거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또 메웠습니다. 이삭은 또 도망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멀리 도망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삭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 26:22)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정복자들은 물의 근원을 찾아 헤맸지만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 그곳에서 우물을 파면 물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그것이 온유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이론은 뺏어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정반대로 온유해야 땅을 얻고 승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이론은 모두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복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온유한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하심 즉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또한 자비하심은 긍휼이고 온유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의가 이 세상에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의를 세우는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의를 이루기에 능력이 크게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불의가 판을 쳐도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감각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 즉 인간의 내적 자아를 채워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내적공간은 영적 요소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은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빈 공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기꺼이 헌신하는 헌신자들이 있고 막대한 헌금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오늘의 평안을 반납하고 전도자의 삶을 사는 전도자가 나오며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순교자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의 빈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의사 게리 헤멀린은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라는 책에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사십 평생을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서 바보 같은 일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첫째, 사재를 털어 방황하는 십대를 위한 센터를 건립하자. 둘째, 가난한 여인과 아이를 위해 무료진료소를 짓자. 셋째, 더 많은 시간을 선교사역에 동참하자.”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운영하던 병원의 문을 닫고 하와이로 건너가 평생 선교에 몸 바쳤다고 합니다. 이 마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마음입니다. 1939년 젊은 목사 본회퍼는 뉴욕 항을 떠나 고국 독일로 향했습니다. 그 당시는 히틀러가 사람을 마구 죽이고 전쟁이 확산되던 때입니다. 그 가운데 독일교회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압력을 받아 히틀러 만세를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본회퍼는 고국과 독일 교회를 깨워야 한다며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독일에 도착하여 교회를 향해 회개를 외쳤습니다. 또한 히틀러의 죄상을 공개하였고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죽인 것도 고발했습니다. 마침내 본회퍼는 히틀러 제거운동에 가담하였고 결국에는 투옥되어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에 와서 본회퍼는 목사가 과격한 반정부운동을 했다고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뒤틀린 역사가 종료되려면 누군가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그 어려운 시대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야 말로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단지 많이 먹고 배부른 것입니까? 좋은 집에서 편안히 살고 잠 잘 자는 것일까요? 진정한 복은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온유한 것입니다. 애통하며 의에 주린 자가 되는 것입니다.
팔복(I)
마태복음 5:1-12 / 이한배 목사(부천광림교회)
ㅇ 질 문 - 여러분의 삶의 법은 무엇입니까 ?
I. 서 론
오늘날의 특징은
① 여러 종류의 교회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잘못된 교회들도 많이 있읍니다.
교회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교회들도 있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첫번째로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읍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교회)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
② 교회도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읍니다.
교회들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읍니다.
색이 오래 되면 변합니다.
그와같이 교회도 시간이 가면서 그 본래의 모습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상적인가 늘 시험해봐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하셨읍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서 확실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신앙과 우리 교회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하여 산상수훈을 앞으로 강해설교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구원한 자들과 교회들이 지켜야할 법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과 교회의 법은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으로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시험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II. 본 문
우리는 (마5-7)을 일반적으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가면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팔복산에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곳에 “팔복교회”가 세워져 있읍니다.
우리는 수훈(垂訓)이란 말을 씁니다.
이 수훈(垂訓)은 뒷세상에 전하는 교훈이란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교인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지만,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하시는 교훈이란 말씀입니다.
아니 영원히 교회의 법은 산상수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우리의 신앙의 기준과 법으로 삼아야 하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둘 다 예수님의 치료에 대한 종합 후에(마4:24-25; 눅6:17-19) 나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과 불치의 병들을 고치셨읍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수리아,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강 건너편에까지 퍼졌읍니다.
그러자 모든 앓는 자 즉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왔읍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셨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자들의 신앙이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인의 모습, 즉 천국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의 신앙이 여기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어 교인이 된 자들은 천국 백성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을 천국백성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교인이 된 자들은 이제는 산상수훈의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천국가는 자들을 양육하는 곳이라면 이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교회는 천국백성을 양육하는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는 것은 새로운 법이 생기면 바뀝니다.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은 법이 바뀌면 됩니다.
내가 변화되기 원하면 나의 법이 바뀌면 됩니다.
이세상 사람이 천국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백성의 법을 주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세상 사람들을 천국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법을 주셨읍니다.
그것이 바로 산상수훈 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이 법을 주셨읍니다.(v.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이 새로운 법을 주시는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벡성들을 위하여 십계명을 받는 것과 같읍니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울 나라의 법을 하나님께 받아서 전달해 주었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의 법을 시내산에 올라가서 받은 것과 같이, 예수님도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교인들을 위한 법을 주셨읍니다.
이렇게 산에 올라가서 이 법을 주신 것은 이 법은 사람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법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아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전달했읍니다.
예수님은 교인들을 팔복산에 불려올려서 직접 그들이 지켜야 할 법을 선포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법은 바로 이 예수님이 주신 법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머리에 팔복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첫번째는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이 헌법과 같이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주시는 법의 처음도 팔복입니다.
이 팔복은 율법의 십계명과 같이 산상수훈의 헌법과 같은 근간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근간 입니다.
우리는 오복을 이야기 합니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며, 덕을 행하는 것.), 고종명(考終命)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팔 복입니다.
원래는 이 복은 구 복입니다.
그런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팔 복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는 구 복을 같은 것으로 봐서 즉 구 복은 팔 복의 설명으로 봐서 팔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팔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고, 구 복은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다른 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신 복, 즉 천국 백성의 법의 원칙은 무엇일까요 ?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읍니다.
즉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 천국과 이세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읍니다.
1. 세상의 복은 고난 없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복은 고난을 통하여 얻는 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천국의 원리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오복과 팔복의 차이 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요.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고난을 당하셨읍니다.
그리고 그 고난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읍니다.
이렇게 천국의 원리는 복은 고난을 통하여 얻는 것입니다.
곧 말씀 드리겠읍니다만 그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에도 잘 나타나 있읍니다.
2. 세상의 복은 현재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복은 미래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시제는 다 미래로 되어 있읍니다.
첫 번째 복과 팔 복만 현재로 되어 있고 나머지 여섯 개의 복은 다 미래로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미래에 이렇게 얻게 되는 복은 다 현재의 고난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에 천국을 위하여 오늘을 고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잘 나와 있읍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부자는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간 이유는 다른 것이 없고, 부자는 이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고,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은 이세상에서 고난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복은 미래에 얻는 것인데, 이땅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읍니다.(롬8:1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
미래에 천국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에 고난도 함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의 법은 지금 여기에서는 고난을 통하여 미래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부흥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 친구 중에 경제 불황 때 직장을 잃고, 꽤 많은 재산을 잃고, 아름다운 집을 잃은 친구가 있다. 불행하게도 그는 귀한 아내까지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였다.
어느날 직장을 찾기 위하여 걸어가고 있을 때 큰 교회에서 석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멈춰서서 지켜봤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삼각형의 바위 덩어리에 끌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어디에 얹으려고 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 석수는 “저 첨탑 옆에 있는 작은 빈공간이 보입니까 ? 나는 이 돌을 저 위에 있는 곳에 맞게 하기 위하여 여기 아래에서 그 모양을 만들고 있읍니다”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를 떠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석수가 하는 말을 통하여 그의 고난의 상황에 새로운 의미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지금 이땅에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장차 천국 백성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3. 이 복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 됩니다.
이 복들은 이땅에서 성취되는 복들이 아니라, 천국에서 성취되는 복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면
① 천국이 저의 것이 된다.
② 위로를 받는다.
③ 땅(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④ 만족을 얻는다.
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⑥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장 복있는 성도와 교회와 가정은 천국이 이루어진 교회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과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라하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을 이땅에서도 받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나 자신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세운 교회와 교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왕으로 주님으로 오시는 자들입니다.
4. 천국백성의 특징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
예수님이 원하는 천국백성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
① 이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붙쫓는다.
즉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②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③ 세상이 박해를 해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들이다.
④ 어디를 가든지 화평케 하는 자들이다.
천국백성은 모든 자들과 화평해야 합니다.
문제를 이르키고 싸움을 이르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귀 사단의 백성들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천국 백성의 법을 여러분의 법으로 삼으셔서, 천국백성으로 날마다 성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팔복(II)
마 5:1-12 / 이한배 목사(부천광림교회)
ㅇ 질 문 -
I. 서 론
지난 시간에 이어서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겠읍니다.
지난 시간에는 산상수훈의 서론적인 것을 말씀을 드렸읍니다.
오늘은 팔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읍니다.
II. 본 론
제1복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v. 3)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누가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눅6:20)고 했읍니다.
이 말씀들은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 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부자가 복이 있읍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부요한 자가 복이 있읍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떻게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희랍어로 프토코이(πτωχοι)라는 말인인데, 이것은 원래 가난한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변호해 주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① 자기 자신에도 의지할 것이 없으면 ② 세상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의지할 곳이 하나님 한분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Goodspeed는 이것을 이렇게 주석을 했읍니다.
이들은 ① 육적으로 비참할 뿐더러
②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사61:1)
③ 그리고 영적으로 궁핍함을 느끼고 있다.
즉 이 가난한 자는 영과 혼과 육의 모든 면에 있어서 궁핍함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즉 영과 혼과 육이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 즉 영과 혼과 육을 다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한 분 밖에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영과 혼과 육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어떻게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실까요 ?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요한 자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탕자가 돈이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가난하게 되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읍니다.
이렇게 가난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오고, 하나님의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읍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천국의 소유자가 된다고 하셨읍니다.
“천국의 저희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나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하나님 없으면 못산다고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품을 떠나가지 말고 하나님 품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을 받아 부요하게 되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제2복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v. 4)
이 복도 세상의 상식하고는 반대가 됩니다.
세상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데 하나님은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읍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는 불쌍한 자인데, 어떻게 그런 자가 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자를 불상하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이 있다고 하실까요 ?
이 말씀의 핵심은 “애통한다”는 말에 있읍니다.
“왜 이들은 애통하는가 ?”에 핵심이 있읍니다.
이들이 애통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① 자기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죄를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회개하는 것입니다.
② 세상의 악이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악이 있읍니다.
세상의 악한 모습을 볼 때 마음이 괴롭읍니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읍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
이들은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위로를 받기 때문일까요 ?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왜 복일까요 ?
(사61:2; 눅2:25)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는 최고의 복(bliss)의 해가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우리에게 최고의 복의 해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베데스다 연못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읍니다.(요 5:1-9)
그는 그곳에 38년을 있었으나 고침을 받지 못했읍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고침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화가 났으나 시간이 가면서 자기 처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환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읍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을 했읍니다.
그럴 때 위로의 예수님이 찾아오셨읍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고침을 받았읍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읍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일생에 최고의 복된 해가 왔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자기의 죄와 세상의 죄를 보고 회개하는 자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십니다.
또한 세상의 악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자를 찾아가서 위로하십니다.
제3복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① 어떤 사본에서는 제2복의 (v. 4)과 제3복의 (v. 5)이 바뀌어 있읍니다.
그렇게 되면 첫 번째 복인 가난한 자와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가 나란히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를 같은 자로 만들려고 한 것 같읍니다.
② 제3복인 (v. 5)을 (시37:11)에 기초한 제1복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자들도 있읍니다.
(시37: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이 (시37:11)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석한 것이 제3복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자들은 결국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8복이 7복이 되거나 아니면 (vs. 11-12)에 나오는 것을 하나의 복으로 해서 8복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 제3복으로 되어 있읍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는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
온유하다는 말은 프라에이스(Πραεις)라는 말인데, 이것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온유라는 말은 부드럽다 혹은 신사적이라는 말과 연관을 짖는데, 원래는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러한 온유한 자의 대표는 모세 입니다.(민12:3)
하나님은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어떤 면을 보고 최고로 온유한 자라고 하셨을까요 ?
모세가 구스(오늘날 에디오피아)여인을 아내로 취했읍니다.
그러자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을 했읍니다.
성경에는 모세를 비방했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대적한 이유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① 구스 여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니다.
② 모세만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보자냐는 것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첫번째는 그냥 삽입된 것으로 보고 두번째가 진짜 문제인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통치권과 주권에 도전을 했읍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에 대하여 대항을 하지 않았읍니다.
분명히 자기가 지도자이고, 하나님이 자기와는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셔도 그것을 갖고 그들과 싸우지 않았읍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변호해 주셨읍니다.
그리고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셨읍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그 미리암 누님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어떻게 자기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
모세는 형님과 누님 위에서 교만한 눈으로 누님과 형님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자기를 나일 강에 버렸을 때에 자기를 지켜보았던 누님, 바로 왕의 공주에게 엄마를 소개해줘서 자기로 엄마 품에서 젖을 먹게해준 누님으로 지금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고 누님과 형님을 높이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 때문에 모세는 자기를 욕하고 도전하는 형님과 누님에게 대항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읍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자세가 온유한 자세 입니다.
온유한 자는 이렇게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갖고 삽니다.
시각도 겸손한 시각을 갖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됩니다.”
이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즉 메시야가 오심으로 회복되는 땅입니다.
이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이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주십니다.
제4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의에”라는 말은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눅6:21)에서는 그냥 “이에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읍니다.
그럼 의에 주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어서 그들의 결백함을 증명해 줄 의를 갈망하고 있다.(눅18:7; 사62:2)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읍니다.
그는 너무 속상해서 매일 재판관에게 가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했읍니다.
즉 자기의 의가 인정되고 증명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의에 주린 자들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② 올바르게 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잠21:21)
의롭게 되기 위하여 애쓰는 자들이 있읍니다.
세상이 의롭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쓰는 자들이 있읍니다.
③ 의를 성취하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 하려고 하고 있다.
즉 자기들의 힘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의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들은 겸손해 집니다.
이것과 가장 가까운 공관복음의 말씀은 (눅18:9-1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읍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바로 이 세리와 같은 자 입니다.
이런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읍니다.
여기에서 배부르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배부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만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즉 기도에 응답을 받고 만족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힘과 공로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이세상의 삶이 만족이 있는 천국의 삶이 될 것입니다.
팔복(Ⅲ)
마 5:1-12 / 이한배 목사
ㅇ 질 문 - 예수님 때움에 욕을 먹어봤읍니까 ?
I. 서 론
계속해서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겠읍니다.
오늘은 제5복부터 제8복까지 살펴보겠읍니다.
II. 본 론
제5복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긍휼히 여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행한 것과 같은 것 입니다.(눅 10:37)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을까요 ?
선한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 것은 남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의 불행을 남의 불행으로 생각을 했읍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갔읍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불행으로 생각을 했읍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남의 아픔을 내 아픔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② 아버지가 간질하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17:15)
아들이 간질하는 것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은 아팠읍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간질하는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더 마음 아프게 생각을 했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천국백성의 마음의 자세를 알 수 있읍니다.
천국 백성의 마음의 자세는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 자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건 안믿건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형제자매의 아픔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자들이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받는 복은 무엇일까요 ?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긴다는 긍휼, 엘레오스(ἔλεος)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뜻은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그 정도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과 같이 여기고 긍휼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여기고 긍휼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들을 남으로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남으로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같이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제6복 :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였읍니다.
이것은 당시에 랍비 문학에서는 없었던 말입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셈족의 언어에서 마음은 감정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셈족의 언어에서는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감정까지도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복인 것 같읍니다.
우리의 감정을 우리가 마음대로 못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순결한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는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자들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합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을 했읍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②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입니다.(골 3:22; 약 4:8)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깨끗한 마음이 아닙니다.
더러운 마음은 두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가룟 유다는 두 마음을 품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읍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읍니다.
그러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어떤 복을 받게 될까요 ?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읍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신비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이 보인다 보인다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①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뵙게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입니다.(시 42:2)
이것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표현을 했읍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족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2)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살아서 성전에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② 이것은 종말에 그들이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계22:4)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
제7복 :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어떤 자를 말할까요 ?
①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할려고 하는 자입니다.(시34:14)
어떤 사황에 있던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던지 평화하려고 하는 자를 말합니다.
②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사람들과 평화하는 자는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자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③ 원수하고도 평화하는 자입니다.(마5:44-45)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읍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과 같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원수하고도 평화할 수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적극적인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싸움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적극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화평케 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이나 신적인 존재들을 이야기 합니다.(욥38:7)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런 신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
하나님이 창조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읍니다.(신32:6)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의 대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곳이 또한 천국입니다.
제8복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임이요.
① 이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라 했고, ② 이어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셨읍니다.
③ 그런데 (눅 6:22)에서는 “인자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했읍니다.
④ 칼빈의 제자인 베자(Bezae)가 게임브리지대학에 기증한 5c~6c의 사본이 있는데, 그것을 베자 사본(Codex Bezae)라고 하는데, 그 사본과 옛 라틴어(O.L.) 사본들 중에 어떤 사본에는 (v. 11)에도 “나를 인하여”를 “의를 위하여”라고 했읍니다.
이렇게 보면 제8복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맞읍니다.
그러면 왜 “나를 인하여”라는 말을 넣었을까요 ?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들이 많이 있었읍니다.
사람들 중에는 저들이 저렇게 핍박을 받는 것은 혹시 저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잘못된 예수에게 속아서 저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었읍니다.
신앙생활하는 자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읍니다.
이들에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라는 말과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라는 말을 같이 함으로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이 잘못해서 그렇거나, 예수님이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의로운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것은 우리가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
① (마 10:32-33)에 나오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욕을 먹는 경우가 있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욕을 먹는 것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있읍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②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다가 보면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의로운 말씀대로 살다가 보면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읍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풀무불 속에 던져넣겠다고 하고, 사자굴에 던져넣겠다고 해도 그들의 신앙을 굳게 지킨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떤 박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젊은 지도자를 양육하는 Lieghton Ford Ministries의 총재이며, 미국 World Vision 이사인 리톤 포드(Lieghton Ford)가 그의 책 Good News is for Sharing이란 책에 이런 글을 썼다.
로마에 있는 황실 급사들을 양성하는 학교의 유적지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3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발견했다. 그림에는 한 소년이 서서 그의 손을 들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쓴 사람 같이 보이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경배하고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휘갈겨 쓰여져 있다. “알렉사메노스(Alexamenos)는 그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두번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Alexamenos는 신실하다.” 분명히 기독교인인 한 젊은이가 그의 열심있는 전도 때문에 그의 급우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앗다. 그는 신실했다.
이것이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받는 상급은 무엇일까요 ?
(v. 10)에서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읍니다.
그런데 (v. 12)에서는 “하늘에서 저희 상이 큼이라”고 했읍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은 제1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도 받는 복입니다.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읍니다.
심령이 가난하게만 살아도 천국을 상급으로 받는데, 굳이 힘들고 어렵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복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그것이 가장 큰 상이 있는 삶인 것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그런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1-3 / 김영규 목사(정윤교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1-3)
마태복음, 산상 수훈, 팔복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 독자를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구약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우실 왕국, 즉 천국을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은 지상에 이루어질 유대인 왕국을 메시아 왕국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천국은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하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단 4회 사용한 반면, “천국”이란 단어는 33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왕국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지상 왕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늘나라(천국 : hJ basileiva tw'n oujranw'n., kingdom of heaven)입니다. 팔복은 바로 그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다섯 가지 교훈집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산상수훈(5장-7장)입니다. 둘째는 제자 파송의 교훈(10장)입니다. 셋째는 천국 비유(13장)입니다. 넷째는 용서의 교훈(18장)입니다. 다섯째는 종말론적 교훈(23장-25장)입니다. 앞으로 여러 주간에 걸쳐서 이러한 특별한 주제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부터는 그 첫 번째인 산상수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말은 산인데 실제는 가버나움 근처의 언덕입니다. 갈릴리 호수 부근은 해수면 아래로 400미터나 되는 낮은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호수 주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청중들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산상수훈 내용이 한 번에 하신 설교인지, 여러 차례 하신 설교를 모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후 공생애 초기에 하신 설교로 봅니다.
산상수훈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인간 윤리의 최고봉”, “천국의 대헌장”과 같은 수사(修辭)를 붙입니다. 내용을 보면 천국 시민의 복, 천국 시민의 계명 실행, 기도, 구제, 물질생활, 관용, 진실, 분별력, 실천과 같은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핵심은 결코 윤리적 내용이 아닙니다. 신앙과 복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대인관계가 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합니다. 팔복이란 여덟 가지 복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목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 자녀, 천국 백성이라면 당연히 누릴 가장 큰 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이 복을 충만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듣는 사람들에게 별 반응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어! 이게 무슨 복이야? 복이라고 하면 五福 아닙니까? 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수 부 강령 유호덕 고종명)이 아닌가? 장수하고, 부자 되고, 평안하고, 도덕을 낙으로 삼고, 명대로 살고 죽는 것! 제법 그럴싸하지만 오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오복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오복과 팔복은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오복은 육체 위주인데, 팔복은 영혼이 위주입니다. 오복은 물질이 위주인데, 팔복은 영적 은사가 위주입니다. 오복은 현세 위주인데, 팔복은 내세가 위주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오복은 구원 없는 복인데, 팔복은 구원을 필수로 하는 복입니다. 오복은 세상 사람들이 간혹 누리는 복인데,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 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복입니다. 오복 좋아하지 마시고, 팔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팔복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
팔복은 산상수훈의 핵심이요 으뜸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해석하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요, 행위적인 규범입니다. 즉, 대인 관계를 맺는 규칙입니다. 산상수훈은 결코 대인관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신앙이 근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의 핵심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에는 구원의 복음이 없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 팔복 자체가 벌써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팔복은 하나님 자녀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 자녀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주석가 박윤선 박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석합니다. 팔복의 전반부 네 가지를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도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이것은 구원을 갈망하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 가난이란,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드릴 것이 없는 빈곤 상태를 말합니다. 빈 깡통 같은 내 자신입니다. 애통하는 것은 억울해서 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감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사람 앞에 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정의란 무엇이냐고 묻는 마이클 샌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어디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팔복의 후반부 네 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받은 것에 감격하여,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예수님을 믿고 속죄를 받아, 깨끗하게 된 사람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으로, 타인을 그 화목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주를 위해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팔복은 인간적인 윤리로 얻는 복이 아닙니다. 복음에 기초한 구원 받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복 된 사람도 구원 받은 사람의 복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잠깐의 복과 영원한 복, 사라질 복과 지속되는 복, 육체적 감각적인 복과 영혼 내면의 복, 마약과 같은 마취성의 복과 끝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복, 임시적 가치의 복와 영원 가치의 복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윤리의 실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고 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내게 진노하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채로, 잘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윤리가 과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팔복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해결하세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으세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로움을 얻으려고 애통하고 목말라 하세요.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찾으세요. 그래서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첫 번째 복은 심령 가난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Makavrioi oiJ ptwcoi; tw'/ pneuvmati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첫 번째로 강조할 것은 심령입니다. 심령(tw'/ pneuvmati)! 마음, 영혼! 복을 누리는 주체는 심령입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복을 느끼고, 깨닫고,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장본인은 육체가 아니라 심령입니다.
현대인들은 심령은 약하고 육체는 강합니다. 요즘 강력 범죄가 빈번합니다. 살인, 강도, 강간. 이런 범죄자들을 보면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입니다. 겉보기에는 강한 것 같지만, 유혹에 약하고, 결심이 약하고, 의지가 약합니다. 오래 전 일인데, 개를 좋아하는 집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개를 잘 길러서 전국투견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집사님 집을 방문했을 때, 개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진돗개이고, 한 마리는 똥개라고 합니다. 한 놈은 내가 집에 들어갈 때부터 숨이 넘어갈 듯이 짖어댑니다. 한 놈은 힐끗 쳐다보고 잠잠합니다. 아하, 저 짖어대는 놈이 진돗개구나! 나중에 보니 잠잠한 놈이 진돗개입니다. 겁이 많은 개일수록 짖는다고 합니다. 강한 놈은 짖지 않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영혼이 강한 사람은 겉으로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치장하지 않고, 가진 것 자랑하지 않고, 힘 자랑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심령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오늘 정말 복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고, 우선 심령부터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 심령은 어떻습니까? 심령이 건강하십니까? 심령에서 행복을 느낍니까? 만족합니까? 내 심령이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갖춘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복은 심령 가난에서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 가난이란 게 도대체 뭡니까? 어떤 사람들은 심령 가난을 겸손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무소유자, 낮추는 자, 겸허한 자 등등. 그러나 심령 가난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심령 가난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말 거지 신세임을 통렬히 깨닫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지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 없는 의의 빈곤자, 의의 거지입니다. 선행과 의로움보다 죄와 불의와 악행이 더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의 극빈자입니다. 사랑하고 관용하기보다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정죄에 빠져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거지입니다. 생명의 희열보다는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죽음, 영혼의 죽음이 나를 지배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거지입니다. 신뢰와 확신보다는 의심과 불신앙이 지배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지혜의 거지입니다. 아는 것은 극히 작고 모르는 것은 지천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능력의 빈곤자입니다. 마귀에게 약하고, 죄에 약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영적 지식의 거지입니다. 도대체 영적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심령 가난을 통렬하게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신앙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의의 갈망, 사랑의 갈망, 생명의 갈망, 믿음의 갈망, 지혜의 갈망, 능력의 갈망, 영적 지식의 갈망. 도대체 이 갈망을 무엇으로 채운단 말인가?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채울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찾습니다. 죄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됩니다. 구원을 갈망합니다. 마침내 속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심령 가난 자체가 천국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심령 가난으로 인해 구원을 갈망하고, 구원을 갈망하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에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결국 심령 가난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 자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 가난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심령 부자가 아닌 심령 거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침내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복,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똑같은 천국이지만, 그 천국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본래 천국이란 크게 둘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미래적 천국이고 둘째는 현세적 천국입니다. 미래적 천국이란 장차 이 세상을 떠나서 들어갈 천국입니다. 그 실상은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죄가 없는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곳,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기쁨과 생명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미래형 천국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줍니다. 현재 형편이 어려워도 견디게 합니다. 죄와 싸우게 합니다. 본향에 대한 소망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현재를 강하게 만듭니다.
현세적 천국이란, 미래적 천국과 달리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누리는 천국의 축복입니다. 물론 이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래도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성도들은 이 땅에서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현세적 축복입니다.
앞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천국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받는 천국을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천국이지만 그 뉘앙스가 다릅니다. 박해를 받는 자들이 받을 천국은 그들이 얻게 될 미래적이고 종말적인 천국에 방점이 있습니다. 현세에서는 박해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축복은 현세적입니다. 그것은 주로 가난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어떤 종류의 풍성함과 풍족함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그들은 심령이 가난합니다. 영혼 속에 빈곤이 가득합니다. 사랑의 빈곤, 기쁨의 빈곤, 소망의 빈곤, 의로움의 빈곤, 선함의 빈곤, 평안의 빈곤, 생명력의 빈곤 등등. 그러므로 그들이 받을 천국은 바로 그런 영적 빈곤함을 채워주는 영적인 풍족함 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외모가 그대로입니다. 가정 형편이 그대로입니다. 세상 지위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심령에는 뭔가 채워져 있습니다. 전에 없던 것들!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삶의 의욕이 있습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에 천국의 선물들이 가득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얻은 심령 천국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0) 한 마디로 “뭔가 있는 사람!” 입니다. 보배를 가진 사람, 절대로 포위당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넘어지거나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 절대로 망하지 않는 사람, 생명이 넘치는 사람!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에 정말 심령에 천국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애용어(愛用語) 가운데 하나는 “충만”입니다. 무엇이든지 차고 넘칩니다. 사랑이 충만합니다. 지혜가 충만합니다. 능력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위로가 충만합니다. 평강이 충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것만 구합니다. 돈이 충만하고, 재산이 충만하고, 지위가 충만하고, 명성이 충만해야만 뭔가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심령의 충만한 것들을 누립니다. 제아무리 물질이 풍요로워도, 심령에 천국 선물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그것을 얻는 길이 뭡니까? 바로 심령 가난입니다. 오늘 내 영혼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철저히 깨닫고, 주님이 주시는 천국의 것들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 사람
마태복음 5:1-10 / 박병은 목사(둘로스 교회)
지난 2011년 5월 21일에는 미국의 어느 한 복음 방송국의 사장이 심판의 날이라고 전 세계를 향하여 예언을 하였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는 날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 지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언제 완성되는 것일까요?
이 시간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전파하신 산상보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에 대하여 살펴보게 됩니다. 오늘부터 산상보훈의 8복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먼저 이 팔복에 대한 서론적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역시 Martin Lloyd-Jones 목사님의 지적과 같이,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복이 8 가지인지 아니면 9가지인지에 대한 흥미는 없습니다. 문제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 천국백성의 복은 어떤 것인가 입니다. 사실, 그 복의 종류에 대한 설명은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과연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1. 행복한 사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참 복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행할까요? 이유는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불행한 방법을 사용하여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 이유는 돈이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하여 학위를 얻고, 좋은 직업을 얻고, 높은 지위를 얻고, 권력을 얻고, 엄청난 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돈을 많이 모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죄를 짓게 되고 그러한 방법은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에 있어서 참된 행복은 무엇일까요? 인생이 추구하는 참된 행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여기 그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산상수훈의 8복”입니다. 한 번 더 읽어 보도록 합니다.
* 마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 사람은 복이 있나니 ―” 라는 형식은 “복이 있을찌어다! ----사람은” 이라는 기원(祈願)적인 방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시편 1편의 표현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면 어떤 성격과 특징을 갖고 살아가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일까요?
2. 하나님 나라 백성의 근본적 특징
이 8복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건강과 부귀와 아름다움과 장수와 같은 차원의 복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국백성이 추구하는 복과 세상이 추구하는 복과 그 차원이 달리함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8복의 첫 복과 마지막 복에서 동일하게 “천국의 소유”를 말씀하심으로써 철저하게 이 8복은 천국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복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이 아니라 천국백성 즉 구원받은 성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진정한 성도라면 이러한 성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8복의 특징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성도들이 추구할 성품: 이 8가지 성품은 어느 특권층을 향하여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천주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소위 “성인(聖人)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봉사하는 목사와 장로, 권사와 같은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성품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8 가지 복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어느 직분이나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성품들인 것입니다.
둘째, 8복이 말씀하고 있는 바 그 특징들은 어느 한두 가지만 나타낼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이 모두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참된 성도라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자이며, 의에 목말라 하는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품들은 논리적인 흐름을 갖고 있으며 서로 의존적, 상호관계적이라 할 수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이며, 애통하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려면, 애통해야만 가능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화평하며, 화평한 사람이 온유한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각 각의 성품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복들은 어느 한 가지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는 이 복들을 모두 그의 삶속에서 나타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이 성품들은 성령의 역사로만 형성될 수 있는 성품들입니다. 이 성품들은 인간의 노력과 학습에 의하여 형성되는 성품들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심으로 형성되는 성품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산출되는 생산품들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기 전에 형성된 성품과 예수를 믿은 이후에 갖게 되는 성품에는 진정한 차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형성되는 이러한 성품들이 생산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변화되어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갈 5:22-23의 열매들이 없다면, 비록 교회에 출석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아직 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를 믿었습니까? 이는 성령의 역사로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고 나타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역사가 덜 일어나는 것은 말씀 중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갖가지 행사를 통하여 교인을 끌어 모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극장과 같이 좋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사람을 모을 수는 있지만, 그들이 진리의 말씀에 변화되어 참된 성도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를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절대적으로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음을 알려줄 때, 세상은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하겠지만, 결국 소망 없는 세상 속에서 구원의 등대요 방주인 교회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참된 부흥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도들의 착한 행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차별성과 독특성, 그리고 그 나라의 영광과 아름다움과 권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비행으로 세상은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질투합니다. 어느 덧 세상 적으로 그 세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견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볼 때, 기독교라는 집단이 자기들과 동일한 세상적인 집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분명 기독교는 세상과 다른 존재요, 가치요, 추구하는 바가 다른 집단으로 알았는데, 자기들과 다르지 않는 세속적이고, 권력 지향적이고, 물질만능적인 집단으로 비쳐진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집단이라고 판단할 만큼 세상 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 개의 Pizza를 여러 집단이 나누어 가지려고 하니 당대를 의식하게 되고, 비난하게 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세상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오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대어주며,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동행하며,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는(마 5:39-41)” 그런 종교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종교”인 것입니다(마 5:43-44). 이렇게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원리와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될 때 자연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즉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독교인의 행사를 할 수 있고,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가, 성도가 세상 보다고 더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의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교회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정(自淨)할 수 있는 능력이 오직 교회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존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헤매고 있습니다. 가정이, 교육이, 사회와 국가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고 허물어졌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양심을 버리고,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식하려는 욕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더 빠져 들어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혼돈의 시대에 교회가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은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교회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참된 소망을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3.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원칙들
본문 마태복음 5장 첫 두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 마 5: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이 말씀은 산상보훈이 자기에게 나온 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윤리적 강연이 아니라,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원리요, 그 천국백성이 누리게 될 참된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 주님께서는 8복의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을 모두 천국소유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차별성: 교회는 이러한 차별적인 성품의 소유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성도의 신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벧전 2:10-12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즉 성도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거듭난 사람으로 이 세상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경주를 경주하며 진리로 무장하여 싸워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것입니다. 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함께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는 받아가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나라 백성임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서 세상을 그러한 가치관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완성을 향한 임재성: 그러면 천국이란 무엇일까요?
*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이란 세상 적이고 지역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임을 의미합니다. 즉 영적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가는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렇게만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불완전한 세상에서 구원받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신자다움이 있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형성되는 교회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망에 가득한 권면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빌 3:20-21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귀한 말씀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도리를 믿어 그 말씀의 가르침을 믿는 성도들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 심령에 가난함으로 주시고 의에 대한 사모함을 주시어 온유와 겸손과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 땅에 임하시도록 헌신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진정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결 론
산상보훈의 8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변화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되는 그러한 덕목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변화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성품으로 만들어져서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여러분의 인생 속에 이 영광된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여러분의 인생 속에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죄로 인하여 풍파 많은 세상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고 그 나라의 완성을 간절히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복받은 사람들, 행복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10 / 박병은 목사
저자 마태는 마 5-7장에서 주님의 교훈을 한곳에 모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입을 열어 가르치시는 예수님”이란 표현은 우리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권위를 가지시고 가르치신 말씀임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권위 있게 공개하신 것임을 의미합니다.
1. 천국백성의 기본 특징: 심령의 가난함
산상 보훈의 8복 중에 첫 번째는 “심령의 가난함”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8복의 순서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왜 이 복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어떤 조건보다도 “심령의 가난함”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일까요?
천국이란 어떤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이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의 조건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조건입니다. 천국입성 자격을 논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것이며, 천국은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궁극적인 구원은 심령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심령의 가난함이 기독교의 구원의 핵심적인 조건이며 이 요소는 천국 백성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2. 심령의 가난함의 의미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구원은 철저하게 영적인 문제임을 먼저 깨닫습니다. 즉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 즉 심령(心靈)의 문제(spiritual matter)라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심령의 가난함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혹자는 누가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바 산상보훈의 말씀을 인용하여 심령의 문제가 아닌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의 가난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그들은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저 “가난한” 것을 말씀하셨음을 강조하면서 영적인 문제가 아닌, 육적인 문제 즉 생활이 가난한 사람, 물질적으로 없는 가난한 사람(貧者)들은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극빈자(極貧者)들 속에 주어지게 된다고 가르치고, 첫 번째 복은 그러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짐을 말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러한 교훈을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소위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ism)”이라고 합니다. 20C 중남미에서 유행한 사상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식은 공산주의 사상에서도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로 볼 때 어느 곳에서도 가난 자체가 복이라고 가르치신 곳이 없습니다. 사실, 가난이 미덕이거나, 가난이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빈궁한 삶이 오히려 신앙생활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재물에 대한 교훈을 하시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라! 고 직접적으로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물론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신 것도 없지만). 이로써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핵심적인 교훈은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문제는 우리 주님께서 철저하게 영적인 가난함을 가르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외적 조건이 아닌, 내적 조건 즉 영적 조건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문제를 철저하게 영적인 문제로 접근하셨습니다. 재산이 많고 적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선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논하신 것입니다. 결코 재산의 유무에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개성”을 중요시 하는 시대입니다. 남보다 차별성 있는 그 무엇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대접받고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교만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차별화된 전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시대! 이러한 시대상황은 성경이 말씀하며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도리와 완전히 배치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성을 중요시 하는 이 시대, 즉 교만을 부추기는 풍토 속에서 참다운 구원을 이해하고 추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함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부정적인 이해를 살펴봅시다.
1) 부정적인 이해
a. 심령이 가난함이란 소심한 상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의 가난함을 소심함, 자신감의 결여로 이해하려 합니다. 용기가 부족하고, 남 앞에서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심령의 가난함이 아닙니다.
b. 다른 사람의 모습을 따라하는 모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겸손하라고 하는 의미를 자신의 것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모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노아, 모세, 다윗 등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교훈을 하는 가르침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날 Leadership의 가르침 가운데 그러한 교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다윗을 닮자, 느헤미야를 닮자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배워 그들을 모방함이 곧 심령의 가난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c.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postmodernism 시대에는 말씀드린 대로 각자의 개성을 극도로 존중하는 시대입니다. 즉 개성 있게, 소위 edge있게 살아가는 것을 장점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시대에서 오히려 개성을 죽이고 억압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믿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도 심령의 가난함이 아닙니다.
d. 마지막으로 무지와 무식을 미덕으로 알고 이것이 겸손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2) 긍정적 이해
그러면, 과연 심령이 가난함이란 어떤 상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사모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상태를 성경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a. 기드온의 경우:
* 삿 6: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b. 이사야의 경우:
*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c. 베드로의 경우:
*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벧전 3:15-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무식하고 성격 급한 베드로에게서 이러한 교훈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d. 바울의 경우:
* 빌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였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부터 변화하여 심령이 가난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성격이 살아있고 그의 학식이 살아있으나, 그의 삶의 전체적인 방향과 의식과 삶의 질이 달라진 것입니다. 회심하여 주님의 종이 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 빌 3:7-13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리는 이 변화된 바울에게서 그 어떤 유약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한 가치관과 인생관과 삶의 목표 즉 요즘 많이 말하고 있는 Vision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바울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철저하게 그 주님의 구원의 진리 가운데서 생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법과 목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e. 주님의 경우: 참된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 주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들 말씀에서 심령의 가난함이 그 어떤 인위적인 겸손과 양보와 자신감의 결여를 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진지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며 그 뜻대로 살아가도록 자신을 비워 나가가는 삶의 과정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발견하였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들 믿음의 선배로부터 우리는 그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 확실한 지식과 가치와 인생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속에는 그 어떤 자괴심이나 자신감의 결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의욕이 넘치고,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자신이 순간순간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을 꾸준히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러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실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심령의 가난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령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을 고백하며 오직 그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결단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과 가치와 삶의 목적을 철저하게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의지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성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존전(尊前)에서 죽은 자 같이 된 영적 상태를 유지하고 추구하는 심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심령이 가난한 상태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죄성, 불결함을 철저하게 점검하여 회개하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여 그 분의 통치 속에 거하기로 작정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러한 영적 상태는 세상적인 물질적, 육적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즉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직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그 어떤 대상을 막론하고 영적으로 어떤 가난함을 추구하고 그 속에 성령께서 채워가시기를 사모하여 자신을 비워가는 과정에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곧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적용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상태라면, 나는 과연 어떠할까요? 과장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러한 영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적용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1) 자신의 종교적 과정을 살펴보라 :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떻게 성경을 보며 어떤 생각 속에서 예배를 드리는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고행과 절제가 심령의 가난함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학하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진리의 말씀 속에서 다시금 자신의 영적생활의 pattern을 고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2)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점검하라: 현재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바 삶의 목표점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하게 세상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 속에서 그 무엇인가 내세우고자, 자랑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그러한 심령은 진정 가난한 상태는 아닐 것입니다.
3) 심령의 가난함을 추구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파악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즉 그 분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그 깨달음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결 론
오늘날은 자기 PR시대이며 개성시대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심령의 가난함을 신앙생활에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신실한 성도들 모두는 심령의 가난함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주의 성령으로 충만히 채우기 위하여 겸손하게 주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을 벌거벗을 상태로 비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기를 주여 은혜를!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주님을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 시 39:3-7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자신의 심령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속을 비우고, 주님께서 나의 심령 속에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 그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충만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로 빈 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채우시고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아멘
애통하는 자
마 5:1-10 / 박병은 목사 / 둘로스교회
현대인들 특히 미국사람들은 “Don’t Worry, Be Happy“를 좋아합니다. 사실, 항상 우울하고 슬픔에 잠겨있는 인상을 가진 사람보다는 즐겁고 명랑하고 사교적인 사람이 좋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문화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래 전 암살당한 John F. Kennedy 대통령의 장례식(1963)에서 그의 아내 Jacqueline Kennedy가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그녀의 절제된 행위를 칭찬하는 언론 기사가 생각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애통한다(mourn)”라고 하실 때는 어떤 의미를 담아 말씀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명랑하고 즐겁게 살아가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웃는 모습일 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낙천적인 인생을 주셨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처럼 즐거운 인생을 살아갈 사람들이 이 땅에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애통의 의미
산상보훈의 말씀은 세상적 기준과 가치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교훈이요, 우스꽝스러운 교훈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들은 육적이고 세상적인 가치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국 백성으로써 살아가는 참된 기독교인이 견지해야할 행동강령입니다.
이 “애통(pentheo)”란 단어의 의미는 영어로 to lament로 이 말은 슬픔에 빠지다, 애도하다, 애석해 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는 특별히 죽음을 맞아 사자(死者)를 애도하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슬픔에 잠겨 애통하는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물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이면, 심지가 약한 사람으로, 소심한 사람으로, 경쟁에서 진 실패자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평생 짧은 인생을 즐겁고 기쁘게 살아야지 왜 애통하며 살아? 오늘날과 같이 눈물을 흘리면 우스갯거리가 되는 세상에서 왜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라고 하시는 것일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 눈물을 흘리는 자란 어떤 차원에서 하신 말씀일까요?
애통함은 죽음을 경험하는 자가 슬퍼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항상 우울하고 슬픔에 잠겨있어서 눈물을 흘리기 잘 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이란 앞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가 겪으며 살아가는 애통함을 의미합니다. 비단 이 애통함만이 아니라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8복 전체가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성도들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 영적 자세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죄 문제를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2. 애통의 내용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무엇을 애통하며 무슨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통하여 그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죄 문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 사 53:2-4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 예언과 같이 주님의 세상살이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슬픔과 질고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보다 더 늙게 보이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삶의 배경에는 인간의 깊은 죄로 인한 죽음과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깊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안타까움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재미있는 기록은 요한복음 8장에 있습니다.
* 요 8: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 당시 30대입니다. 그런데 그를 50세로 보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이 늙게 보인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눈물을 보이신 기록은 몇 군데서 발견됩니다.
* 요 11:33-35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사신 일생은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하여 받는 슬픔과 고통의 삶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생노병사의 치열한 고난의 삶을 몸소 겪으시며 애통의 삶을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기록들을 살펴 볼 때, 성도의 진정한 영적 삶의 모습은 애통 그 자체라고 할 것입니다.
* 롬 7:21-24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자신을 옥조이고 있는 영적 심각성입니다. 그는 그 실체를 보았고 또한 절망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로 인하여 인생에게 주어진 끈질긴, 운명적 상태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보고 느끼며 절규하였고 또한 애통하였습니다. 돈이 없는 가난함 때문이 아닙니다. 병들어 고통 받는 육체적 아픔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애통함은 죄로 인한 아픔이요, 슬픔이요, 고통입니다. 바로 이것이 애통하는 성도의 모습니다. 즉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죄의 본질을 본 것입니다. 자신의 무력감, 무능력, 빈약함 등등을 보게 될 때 그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애통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또한 바울은 다음과 같은 탄식과 고민을 하며 믿음을 지켜 나갔습니다.
* 고후 5:1-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즉 그는 영혼의 구원의 문제로 고통을 겪으며 탄식하였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결코 이런 애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기분이 좋고, 편안하고, 즐거움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항상 좋기만 하여 항상 즐거운 삶만을 살아가게 되지 않습니다. 왜요? 바로 우리는 옥조이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란, 자신의 영적 상태를 항상 주의하는 성도입니다. 그는 밝은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분의 빛 앞에 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며 치유를 바라는 자입니다. 성경의 성도들은 이러한 영적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두려움과 슬픔 가운데 빠졌던 것입니다.
*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로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셔서 그들의 두려움과 슬픔, 탄식을 위로하시고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심령의 애통함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애통함입니다. 그러나 이 애통함은 세상 적으로 당하는 소외감과 빈약함과 슬픔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깊은 고민과 안타까움과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탄식의 애통입니다.
2. 심판의 문제
성도의 애통함은 단지 자신의 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었던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애통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실 죄의 심판으로 야기될 결과를 애통해 하셨습니다.
* 눅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사도 바울도 동족의 구원 문제로 인하여 항상 고민하여 슬퍼했습니다.
*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러한 고민과 고통 그리고 애통함들은 죄를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식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죄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식한 성도의 모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고 괴로워하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하는 성도, 그는 복이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위로자 성령 하나님께서 근본적인 위로를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애통함이 없는 성도와 교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어떻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을 오늘날 교회에는 철저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현대교회는 철저하게 현세적인 삶의 문제에 집착합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할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 못합니다. 당장 급한 상황에 집착하여 사람들에게 그 육적인 문제 세상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가벼운 교훈만을 늘어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마땅히 이 문제에 집착해야 합니다. 단순히 진통제만을 먹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오직 사람들 끌어 오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화란 이름하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외적 교회 부흥에만 집착합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강해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Rev. Martin Lloyd Jone)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이 점에 대하여 신랄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교회 자체가 모두 옳고 교회가 해야 될 일은 온통 바깥세상을 복음화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보다 더 비극적이고 근시안 적이고 통찰력이 부족한 생각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된 부흥은 외적 증가가 아니라, 내적 부흥 즉 영적 부흥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상적인 부흥만을 꾀하다 보니 현대교회는 전혀 세상에 튼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참된 로이드 목사는 이어서 두 가지의 요소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위선적 신앙의 무기력성 때문입니다. 이 지적은 참으로 아픕니다. 신앙의 위선적인 면은 하나님 앞에 솔직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형식만을 취하는 현상입니다.
둘째는 죄의 심각성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위선적입니다. 그 결과 세속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무력한 기독교, 무능력한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 론
오늘날 세상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시 그러한 경향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김의 삶이 이 세상의 삶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습니까? 인간의 죄성, 그로 인하여 주어지는 고통과 죽음을 바르게 직시하는 자라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자신은 물론이요, 가족과 주변의 이웃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인한 좌절을 겪으며 슬퍼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뿌리 깊은 죄의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애통할 때 그에게 위로자(comforter) 되시는 성령께서 임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기쁨으로 참된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문답서 Heidelberg Catechism 의 제 1 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답을 합니다.
제 1 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슬픔과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된 위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대속적 구원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절대로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William Penn “No pain, no palm; no thorns, no throne; no gall, no glory; no cross, no crown. 아픔이 없이는 승리도 없고, 가시의 고통이 없으면 왕좌도 없다. 쓴 고통이 없이는 영광도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왕관도 없다.
그러기에 참된 성도는 항상 애통과 기쁨, 슬픔과 행복을 교차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김명혁 교수님은 성도를 가리켜 비관적 낙관론자(pessimistic optimist) 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소망이 있고 위로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의지할 때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궁극적인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성도는 결코 슬픔 속에 갇혀 살아가는 유약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비참한 죄로 인하여 좌절하고 절망가운데 살아가는 패배자, 실패자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까닭 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위선하지 않고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며, 신중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균형 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 안에서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가운데 하루하루 성령의 위로하심과 구원하심을 즐기며 살아가는 주의 나라 백성입니다.
*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이러한 참된 복을 누리는 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온유한 자
마 5:1-10 / 박병은 목사
흔히 현대는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은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여 잘난 척 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자기 잘 난 맛에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하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하는 의식 가운데 말이나 행동을 하는 처세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세 번째 복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을 받을 찌어다! 온유한 자여,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얼른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사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어떤 힘과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영역을 확보하는 것은 그 영역을 확보하려는 다른 세력들을 물리쳐야만 그 영역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의 일반적 원리이기도 합니다. 특히 동물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진리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복사가 바로 권력과 군사력과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 온유의 의미
온유란 말은, Greek어로 “praus”로, 그 뜻은 부드러운(gentle) 겸손한(humble) 사려 깊은(considerate), 예의바른(courteous)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즉 온유하다는 말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통제하기에 어려워 보이는 상황을 맞이할 때),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감정의 변화가 많아서 성질을 잘 내고 그 성질을 통제하기 못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성격이 급하여 즉각 반응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소위 “빨리 빨리 문화”를 만들어 내어 IT 시대에 걸맞은 위상을 나타내며 세상에서 선진국이라는 말을 듣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야기 되는지요.
이렇게 온유라는 개념은 자연적인 인간의 성품과는 거리가 먼 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성품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이 덕목을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성품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溫柔, meekness)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진정한 온유라는 덕목은 인간이 드러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덕목이라는 뜻입니다. 그 예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모세를 통하여 얼마나 온유함이 어려운 덕목인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 신 32:50-52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께 인정받은 온유한 모세였지만, 그 역시 인간인지라, 한 번의 성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신 32:50-52)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외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라고 하는 성품은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듭난 성품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2. 온유함의 기원과 특징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팔복은 온유라는 성품이 어떻게 형성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8복의 논리적인 흐름을 살펴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여 영적으로 가난함을 느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 가장 선결조건임을 말씀하시고, 그러한 자는 당연히 자신의 죄로 인하여 도저히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죄의 문제로 애통하는 자는 당연히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함께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스스로의 영적 무능력을 인식할 것을 요구하시고, 이어서 자기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애통해하며 사죄의 은총을 간구하는 자는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 약 4:6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이러한 온유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선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소극적인 이해입니다.
1) 온유는 생래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함은 죄 가운데 출생하는 육신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덕목이 아닙니다.
2) 온유는 삶속에서 태만하게 행동하는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3) 온유는 싹싹하고 친절한 모습의 행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4) 온유는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협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법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적극적인 이해입니다.
1) 온유는 참된 가치와 진리에 열정적입니다.
2) 온유는 참된 진리와 가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세상의 권력과 세력과 대립될 수 있습니다.
3) 온유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 즉 영적인 문제로 내적 정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Martin Lloyd Jones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온유를 정의하셨습니다.
“온유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된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드러내는 성품이다.”
즉 이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한 사람이 스스로 애통하여 이웃에 대한 관대한 마음으로 접근하여 다가갈 때 나타나게 되는 영적 정신적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는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드러낼 수 있는 고상하고 소중한 덕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는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존재, 외모, 이익에 민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오늘날 자기를 사랑하라는 교훈은 분명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온유한 사람이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온유한 자가 차지할 땅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이루어준 사실들을 깊이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며 겸손하게 누리며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품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본질인 것입니다.
* 벧전 2:21-24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우리들을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너희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고 베드로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에게서 배울 온유란 무엇이며 그러한 온유를 통하여 얻을 복은 무엇일까요?
그 복은 어떻게 주어지게 될까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이 복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온유하신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온유함의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이 길로 행할 때 영적으로 참된 평안과 능력을 누리게 됨을 배우게 됩니다.
St. Helela 섬에 유배되어 비참한 시간을 보내던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B. Napoleon, “아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저 나사렛 예수는 사랑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였다.”
이 말에는 우리는 그렇게 권력과 능력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것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가질 것, 누릴 것을 가리고 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의 가난함과, 정상인보다 더 연약한 체력을 갖고 사역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30대의 청년을 당시 세상 사람들은 50대의 노인의 외모로 취급했으니까요(참고 요 8: 57).
그러나 나폴레옹의 말 대로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하였을 뿐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시오 통치하시는 왕으로 군림하셨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겸손과 온유하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 진리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러한 주님을 만나고 고백하여 주님의 종이 되었던 바울 역시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리고 철저하게 이 원리로 일평생을 사역하며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적인 일꾼이 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와 관련된 유명한 말씀을 남겨주었습니다.
* 고후 6:1-10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 주고 섬기고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온유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경험과 확신 가운데 는 항상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합니다. 다윗을 항상 그러한 인생관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 시 37:9-11, 22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결 론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한 온유한 성품은 성령의 역사로 자신을 알고 죄를 애통해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입니다.
* Rudolf Stier, “자신을 부인(否認,renunciation)하는 자는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 존 번연,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 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유언하였습니다.
* 딤후 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인애와 겸손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비록 이 길이 힘들고,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는 고난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구원의 영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우리 가운데 통치의 영역을 확보해 가시며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구원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하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시며, 항상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시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를 따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아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1-10 / 박병은 목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의 네 번째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복이 있을지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여, 그대는 배부를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 말씀일까요? 갈증이나 목마름의 의미는 잘 아는 개념입니다. 이 표현은 여름날씨에 목이 말라 물을 간절히 구하는 상태, 사막에서 물이 없어 목마른 상태에 이른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의”를 이루기 위한 갈증,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1. 의를 추구하는 성도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다음에 유명한 “magnificat”라는 찬양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눅 1:49-53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리고 이 당시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러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만나 기도하며 축복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많아 힘없는 노인이었으나 한평생 “하나님의 의”를 구하였던 성도였습니다. 누가는 이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보훈 마태복음 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는 물질적,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갈증을 의미합니다. 성도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세 가지 면(aspects)이 있습니다. 즉 법적 의(legal righteousness)), 도덕적 의(moral righteousness), 그리고 사회적의(social righteousness)입니다.
1) 법적 의란 정의(justification)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선행조건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절차를 잘 준수하면, 이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 절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 롬 9:31-32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2) 도덕적 의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는 의라고 할 것입니다.
도덕이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이 도덕적 의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도덕적인 행위가 위선적이 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바리새인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 행위를 신랄하게 비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의란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절차의 준수여부만 가지고 의와 불의를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외적 의만을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평가 기준은 마음과 정신 그리고 동기(motive 動機)적이고 의도(intention, 意圖)적인 것이었습니다.
3) 사회적 의란 사회적으로 의로운 상태가 유지되도록 힘써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이 두 면, 즉 법적, 도덕적인 면에서만 의를 다룬다고 하면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면에서만 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한 개념에서 이 의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사회적인 의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이 점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어 온전히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모순과 병폐를 강한 어조로 지적,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순결성, 대 사회적인 책임 강조, 권력의 압제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시민의 자유로운 권리 주장, 그리고 개인과 가정 그리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구현 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이러한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이룰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당시 타락한 지도자와 정권 그리고 종교적인 타락상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인, 구약 아모스와 미가 선지자를 들 수 있습니다.
*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과연 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까? 과연 의에 목말라하는 사회입니까?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데 과연 이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가 물 흐르듯이 편만하게 흘러가는 평화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또한 듣습니다. 쉽게 분류를 하여 볼 때, 법을 잘 지키는 사람과 법을 어기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많은 공무원들이 법을 어기고 법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이 자기들에게 맡겨준 소임을 외면하고 다른 짓을 하다가 법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의로움”이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관행이니, 관습이니,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이라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이러한 고위공무원들의 비리가 적발되면 3대에 걸쳐 더 이상 관료가될 수없게 하고 그들이 자리에 있으면서 취득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환수 조치하는 강력한 심판을 가해야 한다!”고 방송에서 분개하면서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또한 얼마 전 이만열 교수를 비롯한 양심 있는 성도들이 일인 시위를 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건물 앞에서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는 시위였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의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의를 위한 사회참여인 것입니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의미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름” 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갈증을 생각해 보세요. 물은 충분히 마실 정도의 끈질긴 요구, 해갈될 때 까지 간절히 물을 찾는 행위를 의미할 것입니다. 즉 의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자신의 궁핍함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신이 의에 대하여 가난하고, 빈약하고, 의식이 빈곤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의에 대한 무의식적인 상태를 부끄럽게 여기고, 고통스러울 정도의 아픔을 갖고 있는 의식을 해야합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자신 속에 고갈된 의에 대한 빈곤감을 치열하게 살피며 참된 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내적, 영적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이 주림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지속적인 추구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고통이 따르겠지요. 배고픔, 굶주림, 갈증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들입니까! 이와 같이 의에 대한 영적 주림은 아픔과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러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이 영적 주림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통이 있습니까? 이러한 상태로 계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까? 만약 그러한 인식과 아픔을 하고 있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상태란 그것을 얻을 때까지 지속적인 노력이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필요한 사람이 그 필요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게 마련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것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게 마련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의에 대한 갈증은 반드시 그 의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갈증입니다. 이것이 영적 목마른 자의 해결방법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경학자인 J. N. Darby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 나는 주리는 것(hungry)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마음속에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지 알고 싶어 정말 주려 죽을(starving) 지경이 되어야 한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의”는 아침의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나라가 오래가지 못하여 부패하고 그 이후의 왕정국가는 이 지상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미국을 보세요. 초창기 미국 정착자들은 유럽의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부패상을 보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세우기 위하여 이 곳에 와서 온갖 고통을 겪으며 공의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공의와 정의 그리고 평화의 나라가 되어 전 세계에 최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세속적인 이론과 정신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때, 이 나라는 부패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보다 자본주의를 더 숭상하므로 이젠 더 이상 윤리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고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이 땅에서 공의가 물처럼, 바다같이 편만하게 시행되는 날이 있을까요? 온갖 부정과 부패가 하루가 멀다고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이 부정과 부패가, 불의와 타락이 근절될까요?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이 바르게 변하지 않고는 그 어떤 사람이 나서고 정권이 들어선다고 하더라도 근절되지 못할 것입니다.
의로움이 무엇인 지 본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으니 어떻게 의로움을 알 수 있고 또 그 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 공의와 공평의 통치자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해결책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우리의 의에 대한 갈증은 즉각 해소될 것입니다. 마치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새벽빛이 나타나듯이, 와디와 같은 건천(乾川)이 많은 비가 오면 금방 시냇물이 되어 흐르듯이, 자신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응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의 영적 갈증은 해소되어 더 이상 목이 마르기 않고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빈곤함과 갈증을 느끼는 자는 자연히 하나님 여호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이 땅에서 실천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자신의 영적 빈곤함과 갈증을 해소하게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와 그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영적 갈증이 해갈되고 영적 빈곤이 해소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신의 의에 대한 빈곤함과 갈증이 있는 지를 살펴보십시오. 자신의 추악한 죄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는 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방법을 취하고 있는 지 점검해 보십시오. 이것이 신실한 성도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시금석입니다. 의에 대한 갈증과 궁핍함을 알아 그 문제는 해결하기 위하여 힘써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찌어다!
참다운 의가 무엇입니까?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의(義)란 말은 한문 풀이를 할 때 자연스럽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즉 양(羊) 아래 나(我)를 둘 때 그것이 의(義)가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에게는 즉각적인 구원이 주어지게 되고(중생, regeneration, justification) 그에게는 한 평생 생수의 강물이 속에서부터 흘러나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참된 평안과 행복으로 배불림(성화, sanctification)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마 5:1-12 / 이윤재 목사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옛날 스페인의 어떤 왕이 사치와 연락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럴수록 왕은 행복하기는 커녕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전국을 다니며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찾아 데려 오시오“. 신하들이 전국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딱 한 사람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막대기 들고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동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중에 오직 가난한 목동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행복한 사람을 찾기 힘들까요? 실제 행복이 없어서 그럴까요?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는 이유는 행복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복을 멀리서 찾고 미래에서 찾고 자기 밖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명언중에 중요한 명언이 있습니다. 짧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넷째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과 남을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다.
여러분도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산상수훈이 그 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 너머의 천국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의 헌장같은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과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행복이 특히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세 종류의 복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은 유명한 “8복”입니다. 이 여덟가지 복을 갈릴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팔복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말씀이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로 시작됩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복이요 다음은 축복이고 마지막이 행복입니다. 먼저 기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인데 주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말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에 수해가 났는 데 우연히 기독교 방송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남해안에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우리를 한 주동안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해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데 나만 혼자 무사하다고 감사하다니. 누가 그런 기도를 드리는가? 이런 복은 무당종교에서 많이 비는 복입니다. 무당들이 “굿”을 하지 않습니까? “굿”이란 본래 “행운”이란 뜻을 가진 퉁구스 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굿”을 하는 이유는 행운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들 말로 “제재초복”(除災招福),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불러드리는 의식입니다. 굿에는 병낫기를 구하는 “구병제”, 복받기를 비는 “기복제”, 그리고 죽은 영혼을 위한 “사령제”가 있고 이것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열두거리”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주로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와 장수입니다. 누가 주는지도 모르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복은 성경적인 복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축복”이 있고 세 번째로 “행복”이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우리 말로는 비슷합니다. 보통은 “축복받으세요” 하는 말과 “행복하세요”라는 말은 같이 쓰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단어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축복”은 “브라카”라고 하고 “행복”은 “아스레이”라고 합니다. “브라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복입니다. 창1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12: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브라카”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아브라함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쟁취한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복이 있습니다. “아스레이”라는 복입니다. 이 복을 성경은 “행복”이라고 번역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중 “아셀”지파가 있습니다. 이 “아셀”이 곧 “아스레이”에서 왔습니다. 창49:20절입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지파는 지금의 갈멜산에서 레바논 해안평야를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을 아코평야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아주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셀 지파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평안과 부, 안정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누리는 복을 “아스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다릅니다. “브라카”(축복)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복입니다. “아스레이”(행복)은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실 때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고 우리가 그것을 평강으로 누릴 때 “행복”이라 한다. 축복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축복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행복은 땅에서 누려집니다. 축복없이 행복없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으면 축복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은 “축복”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5:3절부터 11절까지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9번 나오는 데 이 말들은 모두 헬라어로 “마카리오리”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아스레이”에 해당하고 번역하면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은 “행복”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는 “복”을 모두 “행복”으로 번역했습니다. “행복하여라. 맘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복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았는 데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축복은 받았는 데도 여전히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건강축복을 받았는데도 얼굴에 웃음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축복을 받지 않았으면 원망이나 할텐데 받았으면서 누리지 못한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이야기와 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두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 딸은 얼굴이 못생겼고 둘째는 입이 거칠었습니다. 나이는 과년했는 데 아버지가 고민입니다. 그러다가 한 중매장이가 나타나 좋은 신랑감을 소개해주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중매장이가 말합니다. “하나는 앞 못 보는 장님이요 다른 하는 귀머거리입니다” 그러면서 “큰 딸은 앞못보는 장님에게 보내시고 둘째 딸은 귀머거리에게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했는 데 이들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큰 사위는 아내가 못생긴 것이 안보였고 둘째 사위는 아내 불평하는 소리가 안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을에 영한 의사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을 더 행복하게 하려고 사위들을 의사에게 데려갔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 큰 사위는 눈을 뜨고 둘째 사위는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두 가정이 깨졌습니다. 더 큰 축복 때문에 행복이 깨진 것입니다. 축복은 좋은 것을 받는 것입니다. 행복은 좋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두 딸 부부가 건강하게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장님 사위가 박색 아내와 살고 귀머거리 사위가 말많은 아내와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산상수훈은 누리는 복, 행복을 말합니다. 그것도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제자는 행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누리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 누리는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눈으로 8복을 보십시오. 무엇이 행복이라고 말합니까? 8가지를 봅시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 4절, 애통하는 자, 5절, 온유한 자,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7절, 긍휼이 여기는 자, 8절, 마음이 청결한 자, 9절, 화평케 하는 자, 10절,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 여기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시나요? 공통점은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많고 적고는 환경입니다. 물질이 많든 적든 마음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핍박이 있고 없고는 밖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핍박이 있든 없든 내가 견디고 참으면 행복합니다. 다툼과 전쟁은 밖에서 옵니다. 그러나 다툼중에도 내가 평화하면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화를 돗구고 미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내가 온유하면 행복합니다. 8복은 모두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밖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밖의 형편에 따라 내 행복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환경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와 관련됩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행복을 나 밖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유전과 성격과 태도입니다. 유전은 부모로부터 타고난 선천적인 요소입니다. 성격도 타고납니다. 이 두 가지는 고칠 수 없습니다. 딱 하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있는 데 태도입니다.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태도를 바꾸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환경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상사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씩씩거리며 “나 못해 먹겠어”하고 사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그때 잠간 생각하십시오. 상사가 뭔데 내가 그만 둡니까? 상사가 뭔가 내 운명을 그에게 맡깁니까?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면 화가 가라앉습니다. 나중에 자기도 상사가 되면 곧 이해하게 될 한 인간의 실수 때문에 한 가족의 생계를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윗 사람을 밟지 않고 어떻게 윗 사람이 됩니까? 나를 버리고 떠난 남자친구, 여자 친구 때문에 그만 죽고 싶습니다. 나를 버리고 간 남자, 정말 밉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깐, 아파트에 뛰어내리기 전에 생각해 보십시오. “개가 뭔데 내 행복을 그가 좌지우지합니까? 그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그를 더 믿었던 것 아닙니까? 잘안되면 ”갈 놈아, 가라. 나는 나다“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났는 데 며칠 전 시어머니가 한 마디 한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에미야, 네 남편 좀 잘 챙겨라”. “아니, 어머니는 내가 남편을 잘 챙기는 것도 모르나? 왜 어머니는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나? 그냥 집을 나가버려?“ 그러나 보따리 싸기 전에 한번 물어 봅시다. ”왜 당신의 행복을 어머니에게 맡깁니까? 어머니가 애기 봐주고 선물할 때는 “고마워요. 어머니. 헤헤” 하다가 어머니가 모처럼 한 마디 하니까 화가 나서 집을 나갑니까? 당신도 나중에 시어머니 되면
그렇게 안할 자신있습니까? 그렇게 내 남편을 사랑하주는 어머니가 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기라고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 당신의 행복과 불행을 어머니 말 한 마디에 의존합니까? 왜 당신이 먼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어머니 말할마디 때문에 불행하게 삽니까?“.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은 행복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옵니다. 행복은 작은 연습의 총합(總合)이라고 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마틴 셀리그먼 교수팀이 연구했답니다. 500명을 대상으로 행복감 증진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이 노력한 사람에게 행복감이 증진되었다고 합니다.
1. 매일 밤 그날의 좋은 일 세 가지 생각하기
2. 자신의 장점 다섯 가지를 찾아 매일 새롭게 적용하기
3. 일상의 즐거운 일을 적극적으로 즐기기
4. 남에게 기억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 적어보기
5. 한 가지 일을 반복하지 않고 다양한 일 하기
6.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 생각하기
7. 10년 뒤 가장 잘된 자신의 모습 떠올리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생각을 바꿀 때 이스라엘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 잘 쓰는 두 마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잘 톱”입니다. 이 말은 “축하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한 번 해 봅시다. “마잘 톱”, “축하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은 언제 씁니까?
가령 예를 들어 집에서 아이가 놀다가 화분을 깨뜨렸습니다. 엄마가 평소에 물주고 좋아하는 화분을 깨뜨렸으니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너 정신이 있니? 없니? 너 촐랑거릴 때 알아봤다. 너는 항상 그 모양이니? ”. 별 이야기를 다 했을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엄마들이 하는 말이 “마잘 톱”입니다. 아니 아이가 화분을 깼는 데 축하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엄마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깨진 화분, 나무란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화분깬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아이는 그 일을 통해 뭔가 배웠을 것입니다. “아, 잘못했구나. 엄마가 걱정하시겠구나.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뭔가 배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잘 톱”입니다. 화분깬 것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뭔가 배운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일생에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연당한 것, 축하할 일입니다.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한 것, 축하할 일입니다. 잠시 아파 병원에 입원한 것, 축하할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수하고 실패한 것 자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분명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파웰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실수란 그것을 통해 무엇도 배울 수 없는 실수를 말한다”. 그렇습니다. 실수하고 배운 것이 없을 때 실패한 것입니다. 실수했지만 뭔가 배운 것이 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잘 톱”, 축하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사블라누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내, 인내심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가정, 학교, 회사, 시장, 길거리에서 “샬롬”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엄마에게 우유를 달라고 칭얼댑니다. 이때 엄마가 “사불라누트”합니다. “인내해”하는 뜻입니다. 가게에서 손님이 물건 빨리 팔라고 합니다. 이때 주인이 “사블라 누트”합니다. 그런데 “인내하라”는 이 말을 표현하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자기를 가리키며 “사브라누트” 합니다. “인내해, 인내하세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데 손모양은 자기를 가리킵니다. 왜 그럴까요? 인내의 이유는 다른 사람이 제공했지만 인내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만 인내하면 됩니다. 가령 자동차를 몰고 가는 데 옆 차가 끼어 들어 위험할 뻔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차를 세우고 “너 나와바” 라고 죽기 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은 차를 옆에 세우고 손가락을 오므려 자기를 가리키며 “사브라누트”합니다. 어차피 잘못은 상대방이 했으니 나는 참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에 있지만 문제 해결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 손가락을 오므려 자기를 보고 말합시다. “사브라누트”.
이것이 생각의 차이, 발상의 전환, 관점의 차이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다 나에게서 나옵니다. 사건은 외부에서 오지만 그것을 대하는 나의 반응이 행복과 불행을 만들어 냅니다. 미국의 스티븐 맥도널드란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행복을 가져오는지 알았습니다. 스티브 맥도널드라는 사람은 1986년 뉴욕 경찰이었습니다. 그가 도시를 순찰하던 중 거리에서 십대 청소년들에게 최근 자전거 절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15살된 소년이 총을 꺼내 맥도널드 경관의 머리와 목을 향해 쏘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맥더널드는 목아래가 모두 마비되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18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평생 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고 당시 그는 결혼 8개월이었고 아내는 임신 6개월이었습니다. 신혼의 단꿈이 한 순간 악몽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맥도널드는 그 소년을 용서했습니다. 소년은 감옥에 갔고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전국을 돌면서 용서의 이야기를 전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출소한 후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바람에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책을 써서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그 책에 이렇게 썻습니다. “내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 가슴에 피어나는 복수심이었다.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소년을 평생 원망하며 불행하게 살든지 내가 그를 용서하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든지. 나는 용서를 선택했고 그 순간 행복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상처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우리는 상처받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를 불행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불행해집니다.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사람은 수면과 식욕, 혈압, 건강, 행복을 좌우할 모든 힘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데일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분노심이란 독약은 자신이 마셔놓고 적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선택하며 살겠습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지 않도록 나를 지키겠습니까?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 닮은 성품에서 옵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행복이 나에게 달려 있지만 나에게서 행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8가지 행복의 공통점은 성품입니다. 마음의 가난, 온유, 애통, 평화, 청결, 의, 모두 성품입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웹스터 사전에 보면 “행복은 기분 좋은 만족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감정, 특히 쾌락에 가까운 감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불행이 여기서 옵니다. 행복을 기분좋은 만족감에서 찾다보니 만족하지 많으면, 느낌이 오지 않으면, 감정에 뭔가 오는 것이 없으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개그맨이 말했습니다. ”느낌 아니까“. 느낌 안다고 행복합니까? 느낌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자주 변합니다. 성경은 행복이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성품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자, 3절,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합니다. 가난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가난이 행복입니다. 가난하면 갈급합니다. 가난은 결핍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은 가난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속상합니다. 아타깝습니다. 그래서 갈급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가난이 행복입니다. 돌아가신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에게 어느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집사라고 밝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장로님 뵙기를 30년이나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보기를 원했습니까?” 했더니 자기에게 외아들 하나가 있는데 간절히 기도해서 장로가 되었노라고 하면서 그 장로 아들에게 아들 일곱이 있는데 다 예수 잘 믿고 복을 받았는 데 다만 한 가지를 못받아서 찾아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조금 가난해요. 다른 것은 다 받았는 데 물질 축복을 못 받았어요. 우리 아들과 손자들이 물질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때 김용기 장로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제가 전국을 다 다녀봐도 밥 굶은 장로는 없습디다. 하나님믿는 것이 복이고 장로된 것자체가 이미 복인데 무슨 복을 더 바랍니까? 장로가 할 일은 하나님 잘 섬기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거기서 나와요” 했답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슬픔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는 것 자체가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울기만 해서 행복하다면 초상집이 가장 행복합니까? 육신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 울어야 행복합니다. 약 600년 전에 영국에 줄리안이라는 성녀가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세 가지 상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첫째, “주여, 나에게 회개의 상처를 주옵소서”. 자기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 “주여, 나에게 긍휼의 상처를 주옵소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주여,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주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사모의 눈물이었습니다. 쥴리안은 이것을 불치의 향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영혼의 고향인 하늘 나라를 위한 그 일에 간절한 열망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단순히 우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울 수 있디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설교시간마다 욾었답니다. 너무 많이 울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발 제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하옵소서”. 그래서 눈물이 그때부터 교회 부흥이 멈췄답니다. 하나님 마음으로 우는 것이 행복입니다.
10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합니다. 어떻게 목마른 것이 행복입니까? 물 때문에 목마름이 아니라 영혼의 생수 때문에 목마른 것입니다. 이 목마름을 성경은 “주린 마음, 영혼의 갈망”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허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갈망해 본 사람만 진정으로 만족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갈망하지 않으면 무엇에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7절, 긍휼이 여기는 자는 행복합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기 연민이라고 합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 사랑의 하나로 타략한 인간 본성중 하나입니다. 자기 사랑은 행복이 아니라 남을 사랑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결국 행복은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님을 닮는 성품에서 옵니다.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임을 믿습니까? 행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자신이 행복입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자체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야 행복입니다. 영국의 C.S.루이스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사물안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주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나이다”. 그안에 행복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 자체가 행복이 아닙니다. 아내를 통해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물질 자체가 행복이 아닙니다. 물질을 통해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나이다“. 주여, 주님만이 나의 행복, 나의 기쁨. 나의 자랑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 가난한 마음, 거룩한 애통의 마음, 온유한 마음, 평화의 마음, ,청결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주옵소서. 행복의 근원되신 주님과 함께 평생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1-10 / 박병은 목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의 8 복의 말씀 가운데 다섯 번째인,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복받은 받은 자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여, 그대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사실, 8복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의 이해 정도에 따라 구원의 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있는 지에 대한 판가름을 할 수 있다는 데서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서론적으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주님께서는 8복의 말씀을 철저하게 논리적인 연결을 유지하시면서 이 교훈을 하셨다고 이해됩니다. 즉 심령의 가난함->애통함->온유함->의에 주리고 목마름-> 그리고 긍휼히 여김입니다. 이 논리적 흐름에 따라 긍휼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즉 개인적인 중생의 과정 즉 내면의 변화 속에서 그 구체적인 흐름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의 은혜를 알게 되면 당연히 남에 대한 긍휼의 갖게 된다는 차원에서의 말씀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합니다. 주님은 어떤 차원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1. 긍휼에 대한 이해
먼저 긍휼(eleeo) 이란 단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Dr. Martin Lloyd는 이 긍휼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땅에 어느 사람도 진정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긍휼하신 분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은혜(ka-lis)라는 단어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다루시는 행위라고 한다면, 긍휼은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의 죄인을 다루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명한 신약언어학자인 Richard Lenski라는 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Grace(ka-lis)는 죄와 죄책에 대하여 다루지만, Mercy(eleeo)는 죄의 결과인 고통과 불행의 상태를 다루는 것으로 은혜는 죄를 용서하고(pardon) 깨끗하게 하고(clean) 다시 새롭게 해주는(revival) 호의(好意, favor)라고 한다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야기된 상황을 치료(cure), 도와주며(help), 고쳐주어(heal) 구제해 주는(relief) 행위입니다. 즉 긍휼은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황에 봉착한 자에 대한 구체적인 도움의 행위를 의미한다. 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행위입니다. “비참함을 해결해 주려는 구체적인 행위”가 긍휼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하여 잘 배울 수 있습니다.
* 눅 10:29-34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우리는 이 유명한 비유말씀에서 참된 긍휼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의 행위에 까지 이른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행위가 긍휼입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베푸신 구속사건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이신 예수를 보내셔서 그를 십자가에 죽여 죄의 결과로 죽은 우리를 대속하여 영원한 영생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
*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문제는 이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한 복을 오해하기 쉽다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그렇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내가 긍휼을 받을 수 있고 남을 용서를 해주어야만 나도 용서 받을 수 있기에 하신 말씀이다”라고 이해합니다. 이런 이해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에서 그러한 교훈을 유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의 이 말씀들을 우리의 긍휼의 선행조건에 따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고 이해한다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적 교훈과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사실이라면 굳이 기독교를 믿을 까닭이 없게 된다!),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원리와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약 선행적 긍휼을 조건으로 하여 긍휼을 받을 것이라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용서받고 긍휼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째, 이러한 이해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게 됩니다.
말씀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고후 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 긍휼의 참된 의미
조건적 말씀이 아니라면,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이 여기는 자란 어떤 차원에서 하시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어떤 차원에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 교훈일까요?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긍휼이란 먼저 진실한 회개를 전제로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그에 따른 진실된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가 남을 향하여 베풀게 되는 사랑의 행위라 하겠습니다.
참된 회개란 어떤 차원의 회개일까요? 이는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그 지은 죄를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법적 심판을 통하여 처벌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파악한 죄인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잘못을 고백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임을 믿어 그 죄의 대가로부터 방면된 자신임을 알고 그 놀라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긍휼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주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얻게 됩니다.
* 마 18:23-35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즉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시는 주님의 교훈은 바로 먼저 긍휼을 받은 사실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복이 있는 자라는 진리를 깨닫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로 죄의 문제가 해결 받아 구원받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위선적 교인일 뿐입니다.
3. 긍휼을 실천하는 성도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긍휼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요일 4:7-1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 존재의 본질과 과거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받은 자신의 실체를 의식하는 참된 성도라면, 타인에 대한 인식 역시 동일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어 가시면서도 자신을 향하여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도를 하셨습니다.
*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와 같이 초대 교회 스데반 집사도 돌에 받아 죽어가면서도 이 긍휼의 마음을 실천하여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 행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긍휼이요, 스데반 집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긍휼의 실천입니다. 이 놀라운 성경의 기록은 바로 우리가 같고 있는 복음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성도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는 분명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음을 알고 그 역시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베풀 수 있는 사랑의 헌신적 행위을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나타내게 되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결국 주님의 이 산상보훈의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이미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가 부리게 되는 복으로, 그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구체적으로 그의 삶 속에서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 그러한 사람은 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교만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부정(self-denial)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비참한 처지로부터 구원받은 그 하나님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비참한 처지와 그들의 슬픔을 온 봄으로 함께 나누려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갖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다음은, 적극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이 먼저 되고 그 다음 그 받은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세상 가운데 적극적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 거저 받은바 은혜를 거저 주는 일”에 힘쓸 것을 명하셨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 복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천국백성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 시 103: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결 론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줄 아는 자 만이 참된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내가 긍휼을 받은 줄 알지 못한다면,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드리지 못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doing)의 문제 이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 지(being)를 인식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먼저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 사람들 역시 이전의 나의 죄의 문제로 고통 받으며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긍휼히 여기고 있는지, 자신을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 후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 딤후 1:16-18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에서 확인하듯이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었고 한 평생 주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인생의 가는 길목에서 신실한 성도의 도움을 감옥에서 까지 받았음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준 그 오네시보로 가정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풍성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이렇게 항상 자신을 살펴 삶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긍휼의 사역을 풍성하게 펼쳐 일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자가 진정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자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