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대열이 구축되다! ①~65p
이케다 회장은 은사와 '사제의 약속'을 나눴다.
은사의 7회기를 맞이하는 1964년.
회장은 이 해를 '단결의 해'로 명명했다.
회장을 중심으로 한 대열이 은사와 맺은 약속을 완수한다!
신심의 힘은 절대적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은 어느 회합에서 공덕 넘치는 체험담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조금 전 체험담에 있는 공덕은 아직 공덕의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내가 받은
공덕이 이 강당 크기만 하다면 그것은 손가락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1953년)
온갖 대난을 승리한 은사의 확신이다. 신심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량무변한 힘이
있다. 대공덕이 있다. 법화경에서는 이 '부처의 힘' '법의 힘'을 '여래비밀(如來秘密)
신통지력(神通之力)'이라고 설한다. 제자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秘)'라고 한다.
그러나 스승은 안다. 부처는 엄연히 갖췄다. 따라서 '밀(密)'이라고 한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숨긴다는 뜻이 아니다. '때'를 기다려 아직 밝히지 않았으므로
'비밀'이다. 그러면 그 '때'는 언제인가. 결론지어 말하면 진정한 주체인
'본문의 제자가 일어서는 때'다. 진정한 주체와 그 권속(眷屬)이 용감하게 대지에서
춤추며 나온 때다. 그때가 바로 진짜 공력이 증명되고, 인류는 그 대공덕에 감싸인다.
이케다 회장은 1964년을 '본문의 투쟁' 이라고 선언했다.
1964년은 용<辰>의 해였다. '진(辰)'은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 8시'에 해당한다.
또 '진'에는 '새벽녘'이나 '쑥쑥 자란다'는 뜻도 있다. 이 해 4월에는 밀로의 비너스
특별공개가 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 지보(至寶)가 루브르박물관에서 해외 반출은
이때가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또 10월에는 도쿄 올림픽이 개막한다. 이케다 회장은
세계가 일본을 주목하는 해인 1964년을 '단결의 해'로 명명했다. 이 해 4월 2일에는
은사의 7회기(回忌)를 맞이한다. 애제자는 오로지 7회기를 목표로 지휘를 잡았다.
은사의 3회기 법요(1960년)를 진두지휘 하던 날 밤, 애제자는 이렇게 썼다.
"직제자로서 선사(先師)의 대법요를 성대하게 거행해서 마음이 흡족했다.
7회기를 목표로 새롭게 결의했다." (《젊은 날의 일기》)
"7회기ㅡ37세ㅡ만으로는 36세. 닛코상인님께서 상전(相傳)을 받으셨던 나이."
(《젊은 날의 일기》) 은사가 제2대 회장에 취임한 것도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7회기를 지난 뒤였다. 거듭되는 이사실(理事室)의 요청을 받아 마침내 제3대 회장 취임을
수락한 이케다 회장은 그 직후에 이렇게 썼다. "은사의 7회기를 목표로 본문의 출발
이다. 앞으로 4년 동안 연속 승리하고 싶다. 1964년. 이 해에 거행할 4월 2일과
5월 3일 대총회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다." (《젊은 날의 일기》)
그리고 힘차게 이렇게 썼다. "보은할 때가 왔다." (《젊은 날의 일기》)
제3대 회장 취임을 수락한 직후부터 목표로 삼은 '1964년.
이 해에 거행할 4월 2일'이 바로 은사의 7회기였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1960년 5월 3일.
제3대 회장에 취임할 때 이렇게 인사했다. "(도다)회장 선생님이 미래를 위해 주신
수많은 지침과 유훈이 있습니다만 그중 하나로 1958년 2월 10일 아침에 '앞으로 7년
동안 300만 세대를 절복하자' 라고 하신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제3대 회장은 은사의 7회기까지 '300만 세대'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은사에게 맹세한 서원이었다. 나중에 이케다 회장은 은사의 7회기를 술회하며 말했다.
"은사의 유지를 실현한다. 제자로서 그것은 나의 전부였다. 또 그대로 실행했다."
학회를 실질적으로 짊어진 총무 시절부터 일관되게 지향한 목표가 바로 7회기였다.
도다 선생님의 유훈을 실현하고자 진지하게 투쟁한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 단 한분
이었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나는 도다 문하다." "나는 도다 선생님 측근이었다."라고
말하던 자들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3회기, 7회기 등 마디를
맞이할 때마다 체에 걸러지듯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광선유포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만
남았습니다. 닛코상인은 "이 법문은 사제자(師弟子)를 곧바로 부처가 되게 하느니라."
라고 훈계했습니다. 불법의 근간은 '사제(師弟)'입니다.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에
따라 일체는 결정되어 버립니다. 저는 도다 선생님의 7회기가 그 커다란 전환점이
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토록 7회기가 중요했는가. 이유 중 하나는 '사제의 약속'이었다.
그것은, 수호회 제1회 야외연수가 도쿄 히카와 계곡에서 열릴 때였다(1954년 9월).
수호회는 제3대 회장을 지키고 광포를 추진하는 인재로, 은사가 훈련한 청년그룹
이었다. "도다 선생님의 열렬한 목소리가 히카와 계곡에 울렸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겠지만, 오늘 밤은 분명히 말해두겠다. 오늘부터 10년 후에 모두 함께
다시 한번 이곳에 모이지 않겠는가. 내가 그때 여러분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사제의 약속이다. 감동이 전류가 되어 흘렀다." (수필 '신 인간혁명')
10년 뒤에 은사가 애제자에게 할 '부탁'은 무엇이었을까.
"'10년 후에 모이자!'고 하신 진의를 나는 명백히 알았다. (도다) 선생님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본격적인 정치개혁, 교육개혁을 위한 원대한 구상을, 나를 비롯한
청년에게 맡기려고 하셨다." (수필 '신 인간혁명')
애제자는 이미 이때부터 '10년 후'를 목표로 투쟁하기 시작했다.
은사와 '10년 후' 라고 약속한 해가 바로 1964년, 7회기를 맞이하는 해였다.
의의 깊은 1964년의 태양이 떠올랐다.
연초에 학회는 이미 거의 400만 세대에 육박했다. 300만 세대를 돌파(1962년 11월)하고
나서 불과 1년 남짓 동안 100만 세대를 확대했다. 실로 민중의 대지에서 춤추며 나온
듯한 기세로 지용(地湧)의 벗이 출현했다. "니치렌과 동의(同意)란다면 지용의 보살이
아니겠느뇨." (어서 1360쪽) 스승과 마음을 함께하는 사람이 바로 지용보살이다.
그것을 자각하느냐 아니냐. 그것을 깊이 자각할 수 있을 때 단결은 생긴다.
1964년 세이쿄신문 신년호에는 8면과 9면에 "이케다 회장에게 듣는다, 앞으로 청년부"
라는 제목의 좌담이 실렸다. 당시 청년부가 눈을 부릅뜨고 읽은 지면이었다.
첫머리에 청년부 간부가 회장에게 솔직하게 질문했다. "한 사람도 인재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보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케다 회장은 답했다. "우선 대전제는 '모든 사람이 인재다.'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올바릅니다. … 후배가 자각하기 이전에 지도자의 자각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정불이(依正不二)가 되고 본말구경(本末究竟)하여 목적대로 인재의 체계가
달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창가가 새롭게 승리하려면 리더를 육성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인재를 육성하는가. 중요한 '지도자의 자각'은 무엇인가.
"언뜻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이 스스로 '홀로 서는' 자세입니다."
내 지역의 전 책임을 짊어진다. 한결같이 기원한다. 거기에 지용의 벗이 일어선다.
1964년 1월 1일 오전, 도쿄 시나노마치에 있는 위풍당당한 기세의 학회본부에 도쿄,
가나가와, 간토의 간부가 상쾌하게 모였다. 이케다 회장을 중심으로 첫 근행을 했다.
새해 첫날, 햇살이 드리운 2층 회합실에서 회장은 그 자리에 모인 간부에게 역설했다.
"'단결의 해'입니다. 단결이 슬로건입니다."
"올해는 특히 인재를 육성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튿날인 1월 2일. 이케다 회장의 서른여섯살 생일이었다. 이날 오후 회장은 본산에서
이사장, 부이사장 등과 함께 은사의 묘를 참배하러 갔다. 동행한 당시 부인부 간부가
이렇게 썼다. "생각해보면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이케다 선생님이 희망의 빛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학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7회기 전에 도다 선생님의
유명(遺命)을 모두 실현하신 분도 이케다 선생님입니다. 국사 10만 결집, 300만 세대 달성,
세계광포의 기반 조성……. 몇십년, 몇백년 앞까지 광선유포의 토대를 구축하신 분은
이케다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 따라갔을 뿐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몇 번이고 '3대 회장을 지킨다면 반드시 광선유포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훈이고 우리가 보답하는 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이케다 회장을 중심으로 단결하자.'
저는 은사의 묘 앞에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1월 2일, 도다 선생님의 묘에 참배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독경과 창제를 한 뒤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참배하러 간 사람들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도다 선생님의 7회기군요. 도다 선생님께 보답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도다 선생님께 보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 빼고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보답할 수 있었다.'고
모두를 따뜻하게 격려해주셨습니다.
1월 9일. 1월 남자부간부회를 오후 6시 20분부터 도쿄 다이토체육관에서 개최했다.
'단결의 해'의 개막을 알리는 성대한 회합이었다. 그러나 이케다 회장은 이 간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장은 그에 앞서 신임 부장, 부부장, 부대장을 학회본부로 불러서
임명식을 했다. 신임 간부는 약 100명. 심금을 울리는 대화의 광장이었다.
가슴속에 깊은 결의를 품고 회장을 똑바로 응시하는 신임 간부들. 우선 회장은
학회정신이 무엇인가를 지도했다. "예전에 가와구치 호수에서 도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수호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ㅡ 한 청년이 도다 회장에게 질문했다.
"저희는 무엇을 가지고 고향에 금의환향하면 좋을까요?" 도다 회장은 그 자리에서
답했다. "창가학회의 간부로서 고향땅을 밟는 것이 최고의 금의환향 아니겠는가!"
라고 숙연하고 엄하게 지도했다. 질문한 청년의 마음에 깃든 '허영'을 날카롭게 간파한
질타였다. 사회에서 유명해지는 일이 위대한가. 지위를 얻는 일이 위대한가. 그렇지
않다. ㅡ 이케다 회장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일본의 지도자가 구하지 못하는
청년을, 근본적으로 보살피고 모두 구하는 그 숭고한 활동! 그리고 또 이 오탁악세
(五濁惡世)의 사회에서 일본(전 세계)의 민중을 근본적으로 구하고자 투쟁하는 그 영예!
한 푼도 받지 않고 후배나 이웃을 구하고자 온갖 비판을 받으면서 끝까지 투쟁하는
그 지용보살의 기수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남을 구하는 사람이다.
남자부 부대장으로 투쟁하던 가고시마의 사쓰마지부가 규슈에서 3년 연속으로 최고의
홍교확대를 달성하고 참석한 임명식이었습니다. 광포를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 더한
영예는 없다는 지도에, 얼마나 자긍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1961년 11월
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심코 라디오를 듣는데 오사카사건 재판을 받는 이케다 선생님에
대한 논고 구형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왜, 무고한 선생님이 구형을 선고받아야 하는가!'
하고 분한 눈물이 솟구치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규슈본부로
전화해서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이 투쟁하시는 때 달려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제자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때는 잠시만 기다려보자고 저를 다독였지만 아마 그 전화내용이 선생님께
전달되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뒤 놀랍게도 선생님이 색지를 보내셨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재빨리 / 소식 듣고 눈물 흘리는 / 그대 있기에 /
나 더욱 나아가리라 / 광포에" 지방의 한 남자부원에 지나지 않는 제 마음에
선생님은 진심으로 답해주셨습니다. 고마움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런 스승이
계시다는 것보다 더한 영예가 또 있을까요.
선생님과 함께 투쟁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금의환향'입니다.
계속해서 이케다 회장은 진정한 단결을 지도했다.
"'이체동심(異體同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체동심'의 '심'은 단결이라는 의미
입니다. 다시 말해 단결은 광선유포라는 목적에 선 단결입니다.
신심의 마음이 하나가 된 단결입니다. 이체동심의 마음이란 신심입니다."
물론 단결은 서로 달라붙어 상호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홀로 선 사자(師子)와 사자가, 함께 투쟁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단결이다.
신심의 단결은 어디에 나타나는가. 그것을 실감한 때가 임명식 이듬해인 1965년,
5·18 '아키타의 날'의 연원이 된 아키타회관(당시) 개관식이었습니다. 아키타를 방문한
이케다 선생님이 그 자리에 있던 간부들과 근행을 하셨는데 좀처럼 제목의 리듬이 맞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백마가 달리는 것처럼 생기있게"라고 하며 "창제의 리듬은
생명의 리듬입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단순히 소리의 음정이나 제목을 부르는
속도에 대한 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광포를 확대하는 선생님의 호흡과, 선생님의 기원에
마음을 맞추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야 신심의 단결이 생긴다, 그것을 가르쳐주셨지요.
이케다 회장은 계속 지도했다.
"'이체동심'의 '이체(異體)'는, 모든 분야에서 모든 개성을 살려 자기답게 모든 사회에서
훌륭히 활약하기 바라며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이체입니다." 그리고 만감을 담아
말했다. "아무쪼록 사회에서 마음껏 성장하기를 부탁합니다."
계속해서 이케다 회장은 한 청년부원이 보냈다는 연하장을 소개했다.
"서투른 글씨로 발신자가 '학력이 없는 한 청년부원으로부터'라고 씌어 있는 봉투 안을
보니까 감동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ㅡ 자신은 이름도 없는 한 사람의 청년부원으로
학문도 없고 힘도 없지만 뒤에서라도 회장을 지키고 싶습니다. 학회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 길 외에 일본(전 세계)의 행복은 없다, 자신들의 행복도 없다.ㅡ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뒷받침하려는 청년부가 있다면 학회는 반석과 같다!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감동받고, 더더욱 마음을 다졌습니다."
한 청년부원이 보낸 연하장 이야기를 듣고 얼핏 이런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59년 1월, 이케다 선생님이 홋카이도 아사히카와를 방문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어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에 철저하게 기대를 보내며 따뜻하게 감싸안듯이 지도해
주셨습니다. 감동한 나머지 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선생님께 결의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바로 엽서 한장이 도착했습니다. 엽서에는 "도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함께 분투
합시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아사히카와의 한 청년에게 진심을 쏟아주신
선생님께, 생애 함께 투쟁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임명식에서 선생님은 우리 후배 중에도
그러한 한 청년부원이 있다, 그러한 청년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포용력을 갖고 끈질기게
끝까지 지도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해주신 것처럼 후배를 따뜻하게
소중하게 여기자, 그것이 보은하는 길이다, 하고 결심했습니다.
남자부 신임간부 임명식이 열린 다음 날인 1월 10일.
이어서 여자부가 1월 여자부간부회(도쿄 다이토체육관)를 개최.
'단결의 해'를 새 출발 했다. 이케다 회장은 이 간부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남자부와 마찬가지로 여자부 부부장, 부대장 등과 학회본부에서 임명식을 했다.
80여명의 신임간부와 함께하는 회합이었다. 이케다 회장은 제일 처음에
"발전하는 인생과 쇠망하는 인생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전하는 인생은 "새로운 사상, 강한 사상, 그리고 또 확신 있는, 희망을 불태우는 원천을
지닌 사람이 발전하는 인생입니다." 반대로 쇠망하는 인생은 "철학도 없고 확신도 없고
희망도 없다. 즉 신심과 신념이 없는 사람은 쇠망하는 인생입니다."
저는 두가지 잊지 못할 만남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는 1958년 4월, 도다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아버지가 갔을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장례식 준비에 분주하던 이케다 선생님을 처음으로 뵜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본인을 소개하시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께 아버지가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참으로
큰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였지요. 선생님은 의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도다 선생님을 섬기고 또 섬겨왔습니다.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
창가학회는 괜찮습니다. 안심하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우리의 슬픔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듯한 기백 넘치는 목소리, 진지한 눈빛은 제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두번째는 여자부 부대장이 된 직후입니다. 선생님과 간담할 기회가 생겨 저는
"부원을 1000명으로 만들겠습니다."라고 결의했습니다. 당시 부원은 400명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은 자상한 눈빛으로 "당신 자신이 1000명의 멤버를 이끌 수 있는 경애가 되면
사람은 자연히 모입니다. 저절로 말이지요."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저의 발전이 곧
조직을 확대하는 원동력이라는 마음으로 기원하고 또 기원했고, 투쟁하고 또 투쟁했습니다.
그 결과, 3년 만에 부원이 2배로 늘어 그 직후 조직이 발전적으로 분할했습니다.
'발전하는 인생'은, 선생님과 함께 투쟁하는 인생입니다.
'희망에 불타는 인생의 원천'은 선생님이고 또 선생님의 지도입니다.
임명식에서 특히 이케다 회장이 강하게 역설한 점이 있다.
'모두 사이좋게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광포의 조직에서 "사이가 좋은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회장이 지닌 조직론이다.
나중에 회장은 "'사이좋게 하자'고 마음을 쓰고 행동하는 사람은 훌륭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풍부한 사람입니다."라고도 지도했다. 반대로 회장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 즐거운 단결을 깨뜨리는 사람의 근간에 있는 마음을 이렇게 꼬집었다.
"원질이 있으면 어떤 조직이라도 공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질은 공덕을 가로막습니다."라고도 지도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원질의 시커먼 불길을 끌 수 있을까. 회장은 명쾌했다.
"약한 자신을 채찍질하고 제목을 많이 불러 신심의 강함이 이렇게 굉장하구나,
제목의 공덕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또 제목을 부르면 증거가 이렇게 확실히 나오는 구나
하고, 그러한 실증을 보이는 사람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창제를 근본으로 실증을 보이는 사람은 원질하지 않는다.
이케다 선생님이 저녁 회합에 출발하기 직전에 학회본부에서 간담할 시간을 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 있던 멤버들에게 "질문 있나요?"라고 툭 터놓고 말씀
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신심을 하면 성격이 바뀝니까?"라고 여쭤본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를테면 어떤 점이 말이지요?"라고 물으셔서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 못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유머를 섞어 "말이 너무 많아서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며 "강폭이나 흐름은 변하지 않아도 수질이 깨끗해지는
식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마음속 의문이
풀렸습니다. 자신의 성격이나 단점으로 끙끙대지 말고, 제목을 부르고 학회활동에 힘써
마음을 풍부하게 만들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명식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어본존을 꼭 붙들고 행복을 향해, 승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토대를 구축하기 바랍니다!" 철저한 창제가 근본.
선생님은 여자부의 새 출발에 기본 중의 기본을 가르쳐주셨지요.
1월 13일. 대학부도 또한 1월 대학부간부회(도쿄 도시마공회당)를 개최했다.
이케다 회장은 이 간부회에 앞서 열린 대학부 상임간사와 부장 임명식(학회본부)에 참석
했다.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도다 선생님은 나에게 종종 '다이난코'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다이난코'는 후계의 젊은 무사(구스노키 마사쓰라)가 끝까지 살아남아 하루빨리 성장해서
대업을 이루기를 염원해 마지않는 엄부(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심정이 짙게 배어나는
곡이다. 회장은 '다이난코'를 부르게 한 은사의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하루빨리 인재로 성장해서 일본(전 세계)의 민중을 구하고 광선유포를 실현하기 바란다는
자애 넘치는 일념으로 도다 선생님께서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고 기억합니다."
회장은 일동을 돌아보고 지도했다.
"나도 대학부 여러분, 또 청년부 여러분에게 같은 심정입니다!"
임명식 때나 그 뒤에도 이케다 선생님이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세이쿄신문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는 해외지도에
처음으로 동행했습니다. 페루에서 기념촬영회 때, 어떤 할머니가 스페인어로 선생님께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무언가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현지 간부가 제재했지만 선생님은
"뭐라고 하는 건가요? 그대로 통역해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케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없네요. 그래서 악수를 청합
니다. 또 얼굴을 한번 만져보고 싶군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그런 일을 하려고 제가 있습니다." 라며 할머니 쪽으로 걸어가 안아주셨습니다.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양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회원에게 기쁨을 주려고 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젊은 시절부터 일관된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이케다 회장은 철저하게 '면학 제일'을 강조했다. 진짜 실력을 쌓으라고 거듭 지도했다.
"젊을 때에는 실컷 공부하는 길뿐입니다."
"20대 전후와 30대 정도까지는 '공부를 이렇게까지 하나!'라고 할 정도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심을 근간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이를 악물고 5년 뒤, 10년 뒤를 고대하며
희망에 불타 전진하기 바랍니다." 실력을 쌓은 학생이 창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임명식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우리 대학부에게 "면학 제일"을 외치셨습니다.
"내가 오로지 단 하나,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라고 당부도 하셨습니다.
당시도 대학부원은 활동과 공부의 병행이 큰 고민이었습니다. 당시 대학부 상황은,
활동에만 전념하고는 '그걸로 족해' 라고 간주해버리는 멤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지도는 웅대했습니다. '신앙을 지닌 대과학자여, 대사상가여,
혁명아여, 음악가여, 법률가여, 교육자여 나와라!' 그리고 '인류에게 공헌하라!'
'그 선구자인 대학부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확고한
신심을 확립하여 성장하기 바랍니다." 라고 우리의 미래에 기대를 보내셨습니다.
병행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을 지향하라고 강조하셨지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의 지도는 대학부의 영원한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명식에서 선생님은 의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창가학회가 시대를 결정짓는다. 그렇게 확언할 수 있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임명식 끝머리에 이렇게 지도했다.
"나는 여러분의 성장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이 구스노키 마사쓰라다, 라는 심정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아무쪼록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나를 지키고, 나를 뛰어 넘어
광선유포의 길에 맥진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그 기초를 만들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 염원입니다."
임명식 때도 그랬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계신 것만으로 그곳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일찍이 키신저 박사(전 미국무장관)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그와 한 방에 있으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중력의 중심이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라고 논평했습니다. 외람되지만 선생님의 존재감을 표현한다면 그런 말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지구의 중력이라고 할까요. 선생님이
어떤 방이나 행사장 안을 다닌다기보다 그 방이나 행사장이 선생님과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었습니다. 걸출한 인격만이 풍길 수 있는 '포스(기운, 분위기)'라고 할까요
……. 한번은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회는 이를테면 도다 선생님과
나의 인간적 매력으로 끌어왔습니다!" 1964년은 이케다 선생님의 인간적 매력이라는
중력이 한층 더 빛을 발한 때였습니다. 우리는 강렬한 중력에 이끌리듯 스승을
구도하는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학회에서 스승을 구도하는 마음은 '구심력'입니다.
구심력이 강할수록 종교의 사명인 사회공헌이라는 '원심력'이 크게 작용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결'이라 이름 붙인 해에 얼마나 큰 의미가 담겼는지 모릅니다.
화의(化儀)의 광선유포를 지휘하겠다고 선언하신 선생님을 중심으로, 학회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본격적으로 지역과 사회를 변혁하는데 나섰습니다.
드디어 은사가 의탁한 '10년 후'가 다가왔다.
수호회에서 나눈 '사제의 약속'을 완수한다, 그러기 위해서 애제자는 단지 사람을
계속 만날 뿐이었다. 남모르게 한사람 한사람과 연대를 계속 맺었다. 그 만남이
'각성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것은 '구원받기 바라는 사람'에서 '구원하는 사람'
으로 변화하는 드라마다. '스승과 같은 마음'에 눈뜨는 인간혁명의 드라마다.
스승과 같은 마음은 무엇인가.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어선다. 동정도 필요없다.
감상도 필요없다. 아무도 격려해주지 않아도 좋다. 자신이 결연히 그리고 명랑하게
일어서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위를 바꾸고 사회를 바꿔 국토까지 변혁해야 합니다."
(《법화경의 지혜》) 이러한 마음으로 구축된 대열이 광선유포를 추진한다.
청년이 무량무변한 힘을 발휘하는 '본문의 투쟁'의 막이 올랐다.
"젊고 발랄한 광포의 리더가 마음껏 지휘하는 때가 온다. 또 나는 그렇게 되기 위한
훈련과 육성을 거듭했다."